소설리스트

7화 (8/17)

07. 여름의 무엇

“국수 소면은 없어요?”

아침부터 시작된 섹스가 해 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밥 먹을 생각도 못 한 채 뒹굴다 정신을 차리니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거기 왼쪽. 뭐 해 먹게?”

현숙의 물음에 지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냥 간단하게 비빔국수요.”

외관은 허름했지만 슈퍼 내부는 제법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시장까지 버스로 30분은 족히 걸리는 시골이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슈퍼를 이용하는 까닭에 물건도 꽤 괜찮았다.

“은기는.”

“저희 집 유리창이 깨져서 그거 봐 주고 있어요.”

지서를 씻겨 주고 머리까지 말려 준 은기는 파편을 치운 뒤 유리를 갈아 주겠다며 분주히 움직였다. 지서는 괜히 할 일 없이 누워 있다가 국수라도 만들어 둬야겠다며 나온 차였다. 젊어서인지, 처음이라 은기가 지나치게 흥분한 탓인지 정사는 꽤 거칠었고 그 덕에 지서는 아직 걷는 게 어색하고 아래의 감각이 둔했다. 조금만 정신을 놔 버리면 무릎이 꺾여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골반부터 허리까지 얼얼하다.

“아까 그 으리으리한 외제 차, 너 보러 온 거지?”

마을 어디를 가건 슈퍼 앞을 지나야 하니 당연히 봤을 것이다. 더군다나 태하가 그렇게 요란하게 들이닥쳤는데 슈퍼에 앉아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게 일과인 그녀가 몰랐을 리 없었다.

“네.”

지서의 대답에 현숙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가 쯔쯔, 혀를 찼다.

“은기 착한 애야.”

“착하죠.”

“잘생겼지, 어리지, 그리고 능력도 있지.”

잘생기고 어린 건 맞는데 능력이라니.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지서는 묻지 않고 매대의 물건을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그만한 애 없다? 유럽 가는 게 어디 쉽냐고.”

못 들은 척, 지서는 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또다시 잔소리가 쏟아졌다.

“똥개도 아니고 네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데…… 걔가 어디서 그런 대접 받을 애야?”

현숙은 대충 지서와 은기의 관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착한 애라는 말이 괜히 꼬아 듣게 만든다. 이지서는 나쁜 애니까 착한 애 물들이지 말라는 건가. 오늘 둘이 내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그 착한 애가 나쁜 누나 꼬임에 넘어갔다며 한탄을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지서 입장에선 억울했다. 아직도 은기가 주무르고 깨물어 댄 가슴이 욱신거리고 걸을 때마다 허리가 시큰거리는데.

지서는 골라 둔 재료를 내밀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산을 하자 할 말이 많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지서를 보던 현숙이 비닐 봉투에 물건을 담아 주었다.

“있어 봐.”

바로 슈퍼를 나서려는데 현숙이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같이 넣어 주었다. 지서가 슬쩍 보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고추전이랑 깻잎전 한 거야. 프라이팬에 한번 지져 먹어.”

지서는 대꾸하지 않고 봉투에 담긴 통을 바라보았다.

“뭐 해. 얼른 챙기지 않고.”

“……감사해요.”

“처음 왔을 때보단 낯빛이 좀 낫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애처럼 하얗게 질려 있더니. 그래도 고향이 좋지? 집에 먹을 거 없으면 와. 반찬 챙겨 줄게.”

“네.”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지서는 허름한 문을 밀었다.

슈퍼에서 나오자 여름 바람이 그녀를 반겼다. 슈퍼 앞, 마을을 상징하는 커다란 느티나무까지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제법 강했다. 바닥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그 박자를 따라 흔들렸다. 잎과 가지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청명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짙은 초록, 곡식이 익는 들판. 시야를 가로막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하늘이 이렇게나 넓게 보인다는 게 신기하다. 빌딩 숲 틈으로 간신히 올려다본 서울의 하늘은 늘 좁았고 그래서 답답했다. 그마저도 새벽같이 출근해서 해 진 후에 퇴근하는 생활을 5년 이상 반복한 지서는 하늘을, 햇빛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지서를 봤는지 저 먼 곳에서 은기가 그녀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키가 큰데 팔까지 뻗으니까 정말 길었다.

지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꾸며 은기를 향해 걸었다. 거리가 멀어 실루엣만 보였지만 은기의 표정을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웃고 있겠지.

보조개가 깊게 우물질 만큼 예쁘게.

은기는 상대 공격수의 스루패스를 걷어 낸 뒤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란하게 뛰어 댔다. 한낮, 가장 더운 시간. 악명 높은 대구의 여름 날씨 덕분에 정수리가 따가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공을 차니 괜히 기분이 붕 뜨고 설레었다. 이유 없이 그냥 모든 게 다 좋았다.

전후반 30분씩 진행하기로 한 구단의 연습 게임에 은기는 객원 멤버로 참여했다. 전반은 A팀 멤버로, 후반은 B팀 멤버로. 공격수들은 K리그에서 언제 챔피언스 리그 4강 멤버의 수비를 경험해 보겠냐며 눈을 반짝였고, 수비수들은 제대로 비결을 배우겠다며 열의를 보였다. 경기를 구경하겠다고 유소년 선수들까지 다 몰려오는 바람에 연습 구장이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무엇보다도 괜히 들떴다. 분명 어제와 같은 오늘인데 어제의 고은기와 오늘의 고은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고은기 이 새끼. 이 지독한 새끼.”

몰려온 유소년 선수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그늘에 앉아 쉬는데 정훈이 스포츠 음료를 던져 주며 말을 붙여 왔다. 경기는 3 대 3 무승부로 끝났다. 전반, 은기의 A팀이 3골을 넣었고 후반, 은기의 B팀이 3골을 넣었다. 골은 꽤 터졌지만 수비수인 은기는 무실점 경기를 이끌어 냈다.

“얼굴 꼴은 그 모양인데 공은 또 존나 잘 차. 이 빌어먹을 새끼, 완전 벽이야 벽.”

정훈의 말에 은기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쯤이야. 그런 제스처였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쥐어 터져서는. 안 아파?”

정훈이 그에게 바짝 붙어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은기의 얼굴엔 태하에게 맞아 생긴 멍이 선명했다. 보는 사람마다 왜 그러냐며 묻기에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괜찮아. 보기만 그렇지 별로 안 아파. 멍 빼는 약도 발랐고.”

“유명인은 피곤하다. 시비 털어도 맞아 줘야 하고. 그나저나 너 빌드 업 더 좋아졌더라. 유럽 물 먹으면 다 그렇게 되냐.”

정훈이 축구화를 벗고는 은기의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번 연습 경기에서 은기의 롱패스를 받아 두 골을 넣었다.

“형은 시야 넓어졌더라.”

“또? 또?”

“패스도 좋고.”

“그렇지? 좋아졌지? 또 뭐 없어?”

은기의 칭찬에 정훈이 더 해 보라는 듯 신나서 떠들었다.

“음…….”

정훈을 보면서 말을 길게 끌던 은기가 웃으며 덧붙였다.

“골 결정력을 좀 키우는 게.”

“야.”

“여전히 개발 심하고.”

그래서 팀 서포터즈들은 정훈을 욕할 때 홈런왕이라고 부르곤 했다. 골대 위로 공을 날려 댄다는 걸 조롱하는 별명이었다.

“나도 알거든.”

입을 삐죽 내민 정훈이 은기가 마시던 음료수를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근데 너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인다?”

“아, 응.”

좋지. 좋고말고.

“뭔데. 왜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개.”

정훈이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지만 은기는 신경 쓰지 않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래,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다 이 때문이었다.

“형, 나.”

은기가 주변을 한 번 살펴보고는 가까이 오라는 듯 정훈에게 손짓을 했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정식으로 사귀자고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서도 마음이 있으니까 섹스를…… 했겠지?

“그 연상?”

“응.”

어제, 아니, 오늘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자 은기는 괜히 등줄기가 찌릿하고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종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인 것은 잠에서 깨 눈 뜨자마자 지서의 얼굴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끌어안고 몸을 만지고, 입을 맞추고, 그리고 또 하고.

처음엔 자신이 생각해도 서툴렀던 것 같다. 콘돔도 지서가 끼워 주고 하나하나 다 가르쳐 주고. 상상 속 자신처럼 현실의 고은기도 능숙하게 리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상과 현실의 괴리는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할수록 더 늘지 않았나. 그랬던 거 같은데. 은기는 불과 몇 시간 전 아침, 지서의 표정과 신음 소리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원래 몸으로 하는 건 금방 배우는 편이었다.

“사귀자고 한 거야?”

정훈의 물음에 은기가 눈을 크게 떴다.

“어? ……그건 아닌데.”

“뭐야, 그러면서 무슨 여자 친구야.”

정훈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손으로 툭, 은기의 머리를 쳤다. 너무 좋게만 생각한 걸까. 자신은 세상이 뒤집히고 난리가 났는데 정훈이 별것 아니라는 듯 반응하자 은기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장거리 연애는 괜찮은지 물어는 봤고?”

“……안 물어봤는데.”

사실 지서는 은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축구 선수인 것도 모르고 왜 아침마다 대구에 가는지도 모른다.

“나 유럽에 있는 건 알아.”

묻질 않아서, 은기도 애써 말하지 않았다. 말할 타이밍을 계속 놓치기도 했고.

“뭐 하시는 분이야?”

“대기업 팀장. ST그룹.”

“능력자네.”

“응, 서울대 나왔다 그랬어.”

우리 지서 어느 대학 나왔는 줄 아냐고, 박화순 여사가 은기를 볼 때마다 자랑을 했었다.

정훈이 은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초 치려는 게 아니라 한번 진지하게 그분이랑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가볍게 연애만 하는 건지,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지 그런 거.”

“난 완전 무거워.”

은기가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정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분도 그러냐가 중요한 거지.”

그래, 그렇지. 은기는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정훈의 말을 듣자 들떠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쭈욱 미묘했던 지서의 태도까지. 확실히 전보다 곁을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선 안에 들여놓은 것은 아닌 느낌이었다.

무슨 벽이 그렇게 단단하고 높담. 은기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하나에 꽂히면 다른 생각은 못 하는 게 은기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적당히를 모르는 극단적인 성격. 운동도 그렇게 해 왔다. 그 때문에 코칭스태프에게 아직 시야가 좁고 노련미가 부족하다고 지적당했는데 지금 보니 실생활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이지서 하나에만 꽂혀서 다른 것들은 보지 못했다.

들떴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걸까. 은기는 지서를 볼 때면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결국엔 자고 싶었다. 플라토닉한 것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인간적인 도움과 배려를 위장해 접근했으면서도 밤이면 그녀를 떠올리며 자위했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지만 결국엔 그마저도 받아들였다. 좋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지서와 하나가 되던 순간의 모든 것들이 생생했다. 하늘의 색, 햇빛의 각도, 바람의 냄새, 계절의 온도, 그런 것들까지도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

은기는 그 모든 것들을 문신처럼 자신의 안에 새기다 문득 스스로가 각인당한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그녀에게 ‘사랑’을 각인당한 짐승.

고은기에게 이지서라는 이름은 사랑의 동의어다.

그래, 이건 분명 사랑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완전무결한.

이지서.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바스라지는 기분이다.

“저야 잘 있죠. 네, 메일 확인했어요. 상반기 본부 KPI가 좀 높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지서는 전화 속 상대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컬러링 북을 살펴봤다. 빨간 머리 앤 같은 동화, 파리나 영국 어디쯤으로 보이는 풍경화, 해바라기 표지의 보타니컬 아트. 너무 쉬운 건 곤란하다. 적당히 어려워야 색칠하는 데 집중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해 줄 테니까. 지금 지서에겐 잡념을 없애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최 전무가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말에 지서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 네, 지랄병 환자 같아요. 우리 상반기 KPI 달성 못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주 미디어 본부 전체를 다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인간처럼 달려들어요. 이 팀장 휴가 중이길 다행이지 특히 우리 쪽에 시비 엄청 거는데…… 본부장님이 불쌍할 정도예요. 출장 갔던 거 잘됐다고 들었는데 왜 지랄인지 모르겠네요.

지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시사 팀장인 미선이 그녀의 업무까지 서포트해 주기로 했다. 업무 분장이 세분화되어 있고 로테이션으로 움직이는 데다가 휴가 전 지서가 급한 업무는 몰아서 처리해 둔 덕에 공백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태하라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원래 최 전무 좀 그렇잖아요.”

……나 때문이겠지.

― 오전에 연예 뉴스 섹션 메인에 사소한 오타가 있었어요. 막내 편집자가 실수한 건데 그걸 최 전무가 봤나 봐요. 직접 자리까지 내려와서 다 뒤집어엎었어요.

지서가 늘 주의하라고 팀원들에게 상기시키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실수다.

― 잘못한 건 맞는데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너무 인격적으로 모욕을 줘서…….

막내 나이가 몇이더라. 스물넷이었나 다섯이었나. 바로 어제, 지서 자신 앞에서 날뛰던 그대로 퍼부어 댔을 태하를 생각하니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두통이 일었다.

― 위로라도 한마디 해 주세요. 티는 안 내는데 화장실 가서 울고 나왔는지 눈이 벌개요.

“네,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 다른 건 뭐 없어요. 아, 최 전무 출장에서 돌아왔다고 박여진 나대는 거 정도? 쌍으로 꼴 보기 싫어 죽겠네.

박여진이 태하의 약혼녀이다.

통화를 마무리한 지서는 곧장 모바일 메신저로 막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참을 길게 쓰다가 괜히 부담스러울 것 같아 짧게 줄였다. 이야기 들었어요. 크게 마음에 담지 말고 자신감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바로 메시지를 확인한 막내는 한참 후에야 ‘네, 죄송합니다.’ 하고 답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한 눈치였지만 신입 시절의 자신이 떠올라 지서는 굳이 더 캐묻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본인이 억지를 부렸다는 자각은 있는지 지서의 메일함은 깨끗했다. 최태하라면, 질책이 필요한 경우 업무 메일로라도 경고를 했을 사람인데 메일, 휴대폰 메시지, 사내 메신저 모두 조용하다.

지서는 다시 컬러링 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얼 살까 뒤적거려 봤지만 이미 그림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잡념을 없애고 싶어서 컬러링 북을 사려 서점에 들어온 건데 전화 한 통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물리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서울로 돌아가서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태하와는 제대로 끝을 낼 생각이다. 지지부진하지 않게, 아주 깔끔하게.

그동안 태하를 친모와의 연결고리로 여기며 미련하게 붙들었다.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워 누구라도 곁에 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었던 박 여사가 죽은 지금도 시간은 가고 일상은 계속되는데.

이제는 안다. 괜찮을 거다.

그리고…… 고은기, 그 애도.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왜 네덜란드에 가게 됐는지, 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있는지, 매일 무슨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은기가 많이 궁금했지만 지서는 애써 묻지 않았다. 마음 깊이 들이지 않겠다며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많이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생길까 봐 애매하게 웃어넘기고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비겁하게.

지서가 선을 긋고 한발 물러설 때면 은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섭섭한 얼굴로 입을 다물곤 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모르는 체하며 그냥 넘겼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래갈 리 없는 환경이고 차이였다.

실수로 쳐도 될까. 늘 이성으로 중무장을 하고 살아서 한 번쯤은 그냥 불쑥 저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그와의 충동적인 일탈이 되어 버린 거라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 서로 담담하게 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추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애가 있었지, 참 잘생기고 멋있었는데. 그렇게 떠올리며 웃을 정도의 기억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름마다 떠올리면서 추억하고, 그러다 좀 아쉬워도 하고. 먼 미래의 어느 여름날, 이 계절을 닮은 애가 있었지 떠올리며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고.

차라리 은기가 자신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 줬다면 다 쉬웠을 것 같다. 심심풀이로 적당히 만나 놀고 싶은 상대처럼 대해 줬더라면 나도 기꺼이 널 그런 사람 취급 했을 텐데.

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해바라기 표지의 컬러링 북을 집어 들었다. 해바라기. 은기를 닮았다.

서점에서 나온 그녀는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은기와의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백화점을 돌아보며 필요한 것들을 쇼핑하고 컬러링 북도 샀으니 카페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차 키를 내어 줬지만 은기는 지서에게 직접 데려다줄 것을 청했다. 외제 차라 부담스럽고, 아직은 한국 고속도로가 무섭고, 기타 등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자신의 눈치를 보던 은기를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났다. 그냥 같이 외출하고 싶다고 하면 되는 걸 뭐 그렇게 이유가 많은지. 딴에는 떠본다고 하는데 속이 투명하게 보인다. 혹시 이것도 수작의 일종이라면 고은기는 진정한 고단수일 것이다.

지서 씨.

꼭 그렇게 부른다.

평소엔 목소리가 낮고 차분한데 ‘지서 씨’ 하고 부를 때는 음성이 조금 높아진다는 걸 너는 알까. 그 목소리에 열심히 혼자 그어 둔 선이 어느새 희미해져 간다는 것도.

그때, 테이블에 놓아둔 지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명을 보자 그녀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은기^^♥]

진지한 얼굴로 번호를 저장하더니 이러고 있었나 보다. 괜히 그 이름이 더 보고 싶어서 지서는 전화를 받지 않고 몇 초쯤 액정 화면을 응시했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면이 있다니까.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것 같다가도 이런 면은 또 그 또래 같다. 그 순간, 전화가 끊어지고 화면이 검게 변했다.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액정 화면에 비쳤다. 지서는 흠칫 놀라 휴대폰을 테이블에 엎어 뒀다.

“……미쳤어.”

단단히 미쳤다.

지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은기야.”

침착해야지.

“빨리 끝났네. 여기 5층…….”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지서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스포츠 브랜드 매장 쪽 카페.”

지서는 카페의 맞은편,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했다. 일반 매장보다 세 배는 넓어 보이는 크기. 그 앞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엔 스포츠 스타의 CF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지서는 그대로 카페에서 나와 천천히 스포츠 매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전광판에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백화점 내부의 천장이 통유리로 돼 있어 실내가 밝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에 따라 전광판 화면에 그림자가 지며 영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은기가 낯익었는지.

화려한 네온사인이 비치는 경기장.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지서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는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지나간다. 음 소거 된 영상이었지만 지서의 귀에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는 느낌이다. TV에 방영된 CF를 본 것도 같은데 그땐 집중해서 보지 않아 누가 나오는지, 어떤 구성인지도 몰랐다.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지서는 반복되는 영상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봤다.

새파란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 화려한 기술을 뽐내는 스타들. 뉴스에서나 본 적 있는 유명 감독들.

그리고…….

고은기.

“개유치해.”

정훈의 말에도 은기는 못 들은 척, 빈 골대 앞에 공을 가지고 섰다.

“야, 남자가 말이야.”

“……닥쳐.”

깐죽거리는 정훈에게 제법 매섭게 대꾸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끈하게 사귀자고 하면 되는 거지, 무슨 꽃잎 따면서 점치냐? 고백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아니까 닥치라고.”

이건 연습이야. 은기가 길게 심호흡을 하고 킥을 하자 공이 아슬아슬하게 골대 크로스바를 스쳐 지나갔다. 인프런트로 차려고 했는데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지 공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떴다.

“상체 낮추고 무게 중심 뜨지 않게 해야지.”

정훈이 놀리는 어조로 훈수를 두며 들고 있던 공을 은기에게 툭 던져 줬다. 소속 팀은 물론 대표 팀에서도 전담 키커인 정훈은 발목 힘이 좋고 킥이 날카롭기로 유명했다. 수비력은 좋지만 빅 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롱패스의 정확도를 키워야 한다는 지적을 종종 받는 은기로서는 휴식기에 연습해 두면 좋을 요소이긴 했다.

“그래서 열 번 중 여덟 번 골대 맞히면 좋아한다고 고백한다고?”

정훈이 물었지만 은기는 시선을 골대에 고정한 채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집중하느라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들리지도 않았다는 쪽이 정확했다.

“챔스 8강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쫄아서 빌빌거리는구나.”

다시 인프런트로 킥을 하자 이번엔 너무 낮게 차는 바람에 그대로 골이 들어가고 말았다. 은기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날씨.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고 시야가 어지럽다. 이건 다 햇빛 때문이다. 쉬운 게 하나도 없어 어린애 같은 짜증이 치민다.

“될 때까지 할 거야. 될 때까지 하고 오늘 확실하게 말할 거야.”

은기가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정훈이 공을 그의 앞으로 던져 주었다.

뻥, 킥을 하는데 스텝이 꼬였다. 은기가 뒤로 넘어지자 정훈이 바보냐, 한심해하며 공을 그의 머리에 맞추었다. 이 정도로 못하진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목표치를 세운 탓인지 평소답지 않게 긴장이 됐다. 이지서라는 이름 세 글자는 늘 은기를 긴장하게 만든다.

“은기 넌 키가 커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게 중심을 낮춰야 된다고.”

도전.

“다시 해.”

한 번 더.

“다시.”

또.

“야, 너 이래서 이적하겠냐? 벤치 데우면서 티셔츠나 팔다가 2군으로 쫓겨나고 소리 소문 없이 방출되면 먹튀 소리 듣기 딱 좋겠네.”

그 말에 욱한 은기가 정훈을 흘겨봤다.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존나 못해.”

은기가 괜히 울컥해서 발로 뻥 내지르자 공이 그대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올, 고쏘공.”

고은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원래 이건 정훈의 별명이다. 성질이 난 은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훈을 노려봤다.

“형 그 책 보긴 했어?”

“책? 고쏘공이 책이야?”

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알 리가 없지. 공부하기 싫어서, 수업 빼먹으려고 축구를 시작했다는 정훈이다. 자기 별명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에서 유래한 거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

“야, 너 나 무식하다고 놀리는 거지.”

은기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정훈이 그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했다. 제법 거칠고 소리가 요란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이 새끼가! 지는 찐따같이 구는 게!”

“내가 왜 찐따야!”

“한 번 잘해 줬다고 사귀는 거라고 망상하는 게 찐따 아니면 뭔데!”

지서 씨가 나한테 그냥 잘해 준 게 아니란 말야. 할 거 다 했다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잠도 잤다고.

억울한 마음에 버럭 소리 지를 뻔했지만 은기는 간신히 목 아래로 삼켰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이지서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너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형이 그 사람 못 봐서 그래.”

깨질 것처럼 약해 보여도 단단하고 벽 같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지서는 뭐든 능숙하다. 거리를 두는 것도, 그리고 단숨에 좁히는 것도.

경기를 뛰다 보면 상대의 연륜과 노련함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 순간이 있는데 지서를 볼 때도 그런 기분을 느끼곤 했다. 장례식 후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띠며 돈 봉투를 내밀었을 때. 경차로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건 위험하다며 벤츠 키를 내밀었을 때. 그 남자에게 몇 대 맞은 자신을 보고 변호사를 사 주겠다며 화를 냈을 때. 심지어 섹스할 때조차도.

은기는 몸을 숙여 잔디를 잘 만지고 공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크게 호흡했다.

그래도 결국 그녀는 날 사랑하게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지서는 전광판에 나오는 1분짜리 광고를 연달아 열 번을 봤다.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자 익숙한 검색창이 떴다. ‘고은’까지 입력하자 고은기가 자동 완성 됐다. 아니, ‘고’만 입력해도 고은기가 뜬다.

이름을 터치하자 가장 위에 은기의 프로필과 함께 경기 주요 영상, 인터뷰 영상, 관련 기사들이 나왔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를 검색하면 관련 영상과 기사가 자동으로 추출되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지서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내가 미쳤지.”

심지어 스포츠 팀에서 서비스 개편 홍보 영상 모델로 쓴 게 고은기다. 아무리 지서가 연예 뉴스 팀이라고 해도, 스포츠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프로필 아래 빼곡한 이력이 화려하다. 열여덟 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AFC 아약스 암스테르담 이적, 열아홉 살 U-20 청소년 월드컵 준우승, 스무 살 국가대표 데뷔, 스물두 살 올림픽 대표 팀 은메달, 스물세 살 챔피언스 리그 4강. 궁금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넘겼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 눈에 밟혔다.

전광판에선 아직도 은기가 등장하는 CF가 무한 반복 되고 있었다. 영상 속 그가 낯설다. 누가 뒤통수라도 세게 때린 기분이다. 어이가 없어 계속 헛웃음이 난다. 이런 애를 두고 책임을 지기 싫으니, 데뷔시키면 연예인으로 먹고는 살겠느니 뭐니 변덕을 부리며 좌지우지하려 굴었던 게 창피하다.

지서는 액정 화면 속, 추정 연봉 50억이라는 기사를 보며 웃었다. 나보다 연봉이 50배나 높은 애 앞에서 뭐 한 거람.

‘넌 오만한 게 문제야.’

갑자가 박화순 여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창피하게.”

고은기 앞에선 내 밑바닥을 다 내보이는 기분이다. 성공과 돈에 집착하는 속물적인 본성까지.

네가 내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인 건 분명 좋은 일인데 왜 난 실망스러울까.

지서는 인상을 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말을 안 한 거냐며 은기를 원망하려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 또한 자신의 탓이었다. 선을 긋고 말 못 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지서 자신이었으니까.

“응.”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지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힐끗, 스포츠 매장 안에 크게 걸린 은기의 사진을 바라봤다.

맞은편 에스컬레이터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올라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매장 안, 인적이 드물었지만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지서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정면에.”

지서의 간결한 설명에 은기가 두리번거리더니 그녀를 발견하곤 슬쩍 손짓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흰 티에 청바지. 흔한 옷차림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장의 통유리로 쏟아지는 햇빛이 흰 상의에 반사되어 밝게 비추었다.

“어…….”

지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던 은기가 그녀의 뒤에서 재생 중인 광고를 보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지서에게 정신이 팔려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자신이 모델인 스포츠 브랜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들켰네요.”

“일부러 숨겼어?”

“그건 아니지만, 말 안 한 것도 맞으니까.”

은기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샤워를 하고 왔는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선 청량한 수분감이 느껴졌다. 그의 나른한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못 알아봐서 자존심 상했겠다.”

“조금요. 난 내가 되게 유명한 줄 알았거든요.”

아니라고는 안 하네. 눈이 마주치자 은기가 소리 없이 웃으며 등 뒤에 숨겨 두었던 꽃다발을 지서에게 건넸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테디베어 해바라기를 섞은 노란 꽃이 풍성한 초록의 풀 다발과 함께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생각나서 샀어요. 오늘 날씨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요.”

그 말에 지서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옅은 색으로 코팅된 유리가 소용없을 정도로 햇빛이 밝았다.

“또 우리 첫 데이트기도 하니까.”

은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데이트?”

꽃을 보던 지서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은기가 눈을 크게 떴다가 울상을 지었다.

“이거 데이트…… 아니에요?”

속상한지 은기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니라고 하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서는 괜히 씰룩거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꽃을 보았다. 첫 데이트. 꽃 선물. 가슴이 간지럽다.

고개를 들자 은기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입술을 응시하며.

“음…….”

지서가 말을 길게 끌자 그의 눈매가 긴장으로 경직된다.

“맞아, 데이트.”

그와 동시에 은기가 긴 한숨을 내뱉고는 활짝 웃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밝고 청량한 미소였다.

해바라기의 꽃말이 떠오른다. 숭배, 그리고 기다림. 꽃말은 알고 샀을까. 코를 가져다 대자 은은한 해바라기 향기와 함께 풀 다발에 섞인 유칼립투스 향이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여름 특유의 진득하고 습한 기운을 덜어 내 주는 싱그러운 향기.

은기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의 시선은 늘 곧고 길게, 정확히 일직선으로 뻗어 온다. 애써 평온을 가장하지만 그 시선 앞에서 마음은 몇 번이고 흘러내리고 만다.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같다.

도대체 여름의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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