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한여름의 겨울
“피곤하면 자도 돼.”
“……그래도 지서 씨는 운전하는데.”
은기의 목소리는 이미 반쯤 수마에 빠졌다. 지서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쿨다운 회복 훈련도, 치료실 마사지도 받지 않고 그냥 뛰쳐나온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차에 타자 잠이 쏟아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혈액의 젖산 농도가 높아지는 기분. 근육은 펌핑되고 몸에선 아직도 열이 났다.
“오늘 오랜만에 연습 게임 했거든요.”
은기는 이거라도 마시라면서 정훈이 챙겨 준 스포츠 드링크의 병을 따며 말했다. 따라가서 몰래 지서의 얼굴을 보겠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던 정훈은 훈련이 끝나자 지금 상태로 운전했다간 졸다가 교통사고 내고 저세상 갈 거 같다며 클럽하우스에서 한숨 자야겠다고 했다.
“실내 훈련 지겨웠는데…… 재미있었어요.”
문제라면 한국의 더위는 지나치게 습하다는 점. 그 유명한 대구의 여름에 적응하지 못한 은기로서는 풀타임을 소화하는 게 버겁긴 했다. 거기다 그 고은기 한번 뚫어 보겠다고 어찌나 다들 열심인지. 상대 팀 수비수까지 골 욕심을 내는 통에 연습 경기 내내 바빴다.
은기는 순식간에 드링크 한 병을 다 마셨다. 벌써부터 다리에선 가벼운 지연성 근육통이 느껴졌다. 치료실에 들르기 귀찮아서 찬물로 샤워하고 말았는데 무연리로 돌아가면 스트레칭하고 얼음물에 몸이라도 담가 열을 빼야 할 것 같다.
“일정 있니?”
지서의 물음에 은기는 간신히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아뇨……. 금 토 일 다 쉬어요.”
은기는 능숙하게 차선을 바꾸는 지서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운전 연수를 받아야겠다. 팀 트레이닝 센터가 암스테르담시 외곽에 있어 차가 많지도 않은 데다가 좌회전 한 번, 우회전 두 번이면 출퇴근이 해결되는 바람에 은기의 운전 실력은 통 늘 기미가 없었다.
“그럼 나랑 놀아.”
“……좋아요.”
나랑 놀자니. 괜히 가슴이 간지럽다.
“도착하면 깨울게. 자.”
지서의 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꿈결 같다. 자면 안 되는데 계속 졸음이 몰려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래 봤자 연습 게임인데 적당히 뛸걸. 괜히 승부욕이 발동해서는.
잠과의 싸움에서 진 은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무어라 중얼거린 거 같은데 그 말이 지서에게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던, 그 감각만은 명확하다.
조용한 차 안, 적당한 실내 온도, 그리고 내 옆의 그녀.
은기는 안심하고 잠에 빠져든다.
주차를 한 지서는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차의 앞 유리로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오히려 눈이 시릴 정도였다. 창을 조금 열자 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 소금기가 느껴졌다. 습기를 머금은 후끈한 바람이었지만 오랜만에 맡아 보는 바다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지서는 몸을 옆으로 돌려 잠시 은기를 응시했다. 누군가가 이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광경이 어색했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서는 벽이 높은 사람인데, 고은기는 그 높은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 재주가 있다.
지서는 다 마신 드링크병을 소중한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고 있는 은기를 보며 엷게 웃었다. 병을 빼앗자 긴 팔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진다. 그가 가지고 있었을 땐 병이 작아 보였는데, 그녀에겐 한 손에 다 쥐기도 힘들 정도로 컸다.
지서는 은기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가 겹쳤다.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가락도 한 마디 이상 차이가 났다. 뭐든 다 크고 길고 넓다. 운동선수라니까 그제야 은기의 생활 패턴이 납득이 간다. 차가 큰 편인데도 그가 앉아 있는 조수석이 꽉 찼다.
지서가 손을 떼려 하는데 은기의 커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것을 옭아맸다. 깬 건가 싶어 보니 여전히 눈을 고요하게 감고 있었고 숨소리도 고르다. 잠투정인가. 손을 뺄까 하다가 지서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다. 커다란 손을 잠시 매만져 본다. 손난로처럼 뜨끈하다. 분명 축구는 발로 하는 운동일 텐데 그의 손등엔 긁히거나 찍힌 타박상이 꽤 많다.
지서는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터치해 유튜브를 켰다. ‘고은기’라고 검색하자 제일 상단에 지난 시즌 활약상을 모아 둔 편집 영상이 떴다. 370만 뷰. 댓글은 3,000개가 훌쩍 넘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시키자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경기 장면이 흘러나왔다. 수비수랬지. 축구에 관심이 없던 탓에 모르고 지나쳤던 장면들이 흥미롭다. 공격수였으면 골 넣을 때마다 뉴스에서라도 봤을 텐데.
헤더 경합 상황에서 상대와 부딪혀 이마에 피가 철철 나는데도 붕대를 감고 뛰고,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풀타임을 소화하는 경기 장면이 연달아 나오자 지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극적인 상황에서 은기가 몸을 던져 실점을 막을 때면 현지 해설자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드디어 지서도 아는 경기가 나왔다. 챔피언스 리그 4강전. 은기의 상대 팀은 지서도 알고 있는 국가대표 팀 간판 공격수이자 주장인 박성조가 소속된 프리미어 리그 팀이었다. 한국에선 챔피언스 리그가 만든 코리안 더비라며 관심을 받았던 경기로 기억한다. 그 때문에 경기 며칠 전부터 스포츠 팀에선 특별 페이지도 만들고 지서의 연예 팀에 배정된 배너도 할애받아 대대적으로 뉴스와 칼럼, 영상을 노출해 그녀를 화나게 하기도 했다. 그땐 그깟 공놀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스포츠 팀장에게 성질을 부렸었는데.
추가 시간, 경기 종료 직전. 은기를 제친 박성조의 결승골 장면은 지서도 뉴스를 통해 수십 번 봤던 것이었다. 그땐 몰랐다. 화려한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승자의 뒤에서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 선수가, 그래도 남은 30초 동안 어떻게든 해 보겠다며 근육 경련을 참고 뛰던 게 너라는 걸.
경기 종료 직후 은기가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박성조에게 안겨 우는 장면이 나오자 지서는 화면 속 은기와 자신의 곁에서 잠이 든 은기를 번갈아 보았다.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 같았다.
“왜 우는 걸 그렇게 유심히 보고 그래요. 부끄럽게.”
잠에서 깼는지 은기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끔뻑거리는 모습이 지서가 아는 고은기였다.
“다음엔 꼭 우승할 거야.”
은기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투만 봐서는 초딩이 짱이 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 어디예요?”
“포항 호미곶.”
대답하며 지서가 슬쩍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은기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더 깊게 깍지를 꼈다. 매번 부끄러워했으면서 오늘의 은기는 묘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바다 왔으니까 해산물.”
은기의 말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서의 안식 휴가는 이제 일주일 반이 남았다.
경치에 집착하고 맛에 집착하던 은기는 한참 동안 검색을 해 대더니 적당한 맛집을 찾았는지 어딘가로 지서를 이끌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은기가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쓰자 그제야 지서는 ‘고은기’가 누구인지 실감이 됐다.
점심을 먹기엔 늦고 저녁을 먹기엔 이른 4시. 들어간 식당은 한적했다. 손님이 한 팀도 없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로 달라는 은기의 말에 아주머니가 우리 가게 최고 명당이라며 가장 끝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모서리 양쪽이 완전히 통유리로 뚫려 있어 유리창이 액자, 창밖 바다가 그림 같다.
자리를 잡고 앉자 푸짐한 밑반찬이 세팅됐다. 메뉴판을 유심히 보며 고민하던 은기가 퍼뜩, 생각이 났다는 듯 지서에게 물었다.
“혹시 회 안 먹거나 그런 건 아니죠?”
“응?”
“생각해 보니…… 비리니까 안 좋아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은기가 작게 덧붙이며 지서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요?”
지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이자 은기가 살짝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왔다. 까다로운 편인가. 그런 편이긴 하다. 팀장 직급자 점심 회식을 할 때면 늘 급하게, 불편하게 먹어 항상 소화제를 챙기곤 했다.
“우리 물회 맛집으로 유명해요. 오늘 대게도 실하니 괜찮고, 매운탕은 잡내 하나도 없어요.”
양념간장을 얹은 도토리묵을 가져다주며 아주머니가 말을 거들었다.
“응, 나 괜찮아.”
괜찮을 것 같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속도대로 느리게 식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물회 하나랑요, 대게는 지금 철 아니죠?”
“크기가 제철일 때보다야 좀 작긴 한데 먹을 만해요. 하나 쪄 줄게요.”
“네에. 그리고 회 중짜 하나랑 매운탕이랑 돌솥 밥이요. 해물파전 맛있어요?”
“당연하죠. 우리는 재료 안 아껴서 진짜 맛있어요.”
“그럼 파전도 하나 주세요.”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은기의 주문에 지서가 놀라 입을 열었다.
“몇 개 시킨 거야?”
“지서 씨 모자라요? 그러면 문어숙회도……”
모자라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아니. 은기야, 나 그거 다 못 먹어. 먹다가 모자라면 더 시키자.”
그제야 알았다는 듯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실랑이를 한 끝에 물회와 활어 회, 대게, 매운탕 소짜 정도로 합의를 봤다. 뭘 이렇게 많이 먹나 싶다가도 일반적인 남자와는 확연히 다른 피지컬을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은기가 자는 틈에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몸싸움이 꽤 거칠었지. 서로 어깨를 부딪치고, 엉켜 넘어지고. 아시안 수비수들은 백인이나 흑인 선수에 비해 타고난 피지컬이 열세라 유럽에 진출해 살아남기 힘들다던 해설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 편견을 깬 게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은기라고 했다. 애초에 골격부터가 남다르다. 그리고 꾸준한 은기라면 노력도 어마어마하게 했을 것이다. 이런 애가 운동하면 유럽 진출도 하고 연봉도 몇십억 받는구나 싶었다.
“처음에 네덜란드 갔을 때 식성 때문에 고생했어요. 전 한식 엄청 좋아하거든요.”
은기가 도토리묵을 집어 지서의 앞접시에 놓아 주며 말했다. 젓가락질이 깔끔했다.
“잘 먹어야 경기 잘 뛰는데 빵은 안 먹히고, 한식당은 비싸고. 할머니가 해 준 김치찌개, 된장찌개 먹고 싶어서 밤에 막 울고 그랬어요.”
“나도…… 서울 처음 갔을 때 그랬어.”
지서는 은기가 먹기 편하도록 반찬을 옮겨 주며 말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커다란 샌드위치를 3등분해 하루 세끼를 해결하고. 박 여사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지서가 제풀에 지쳐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악착같았던 이지서는 버티고 버텼고 어떻게 알았는지 박 여사는 딱 식비로 쓸 정도의 돈을 그녀에게 말도 없이 보내 주곤 했다.
“그때보단 적응도 했고 가끔 한식도 만들어 먹고 하는데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먹을 게 많아서요. 시즌 중엔 식단 관리도 하거든요.”
“운동선수도 식단 관리를 해?”
“네. 사람마다 다른데 저는 해요. 몸 컨디션이 확실히 다르거든요. 체력 관리도 되고 회복도 빨라져서요. 그리고 체중 관리도 해요. 조금만 쪄도 둔해지고, 조금만 빠져도 후반에 체력 저하가 심해져요.”
의외였다. 운동선수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잘 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단걸 좋아해서…… 시즌 끝나고 한국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인천공항 스타벅스에서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 사 먹는 거예요.”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생겨서는.
때마침 음식이 나오자 은기가 물회를 그릇에 덜어 지서에게 내밀었다. 야채도, 해산물도, 양이 제법 많았다.
“그만 덜고 너 많이 먹어.”
“지서 씨 나 없으면 식사 잘 안 챙기잖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지서가 말없이 보자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먹어야 건강해지죠. 입 짧잖아요.”
“나 건강해. 많이 먹어.”
“그러기엔 너무 가볍던데.”
“네가 힘이 센 거지.”
“박화순 여사님이 맨날 그랬어요. 지서 걔는 톡 치면 부러질 거 같다고.”
“안 부러져. 나 여기 와서 살쪘어.”
“그래야죠. 내가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먹이는데.”
은기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늘 메뉴를 선정하는 것은 지서였고 만드는 것은 은기였다.
곧이어 대게가 나오자 은기는 비닐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게살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가위를 이용해 자르고 도구를 이용해 속살을 끄집어내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손이 커서 섬세한 작업은 못할 줄 알았는데. 큰 손으로 저러고 있으니 대게가 아니라 꽃게처럼 보인다.
“역시 갑각류는 노동력 대비 가성비가 별로야.”
은기가 게살을 건네자 지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은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에이, 대하 좋아하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박화순 여사가 떠올랐다. 지서는 못 들은 척 게살을 집어 은기에게 내밀었다. 잠시 당황하던 그가 웃으며 그것을 받아먹는다. 그의 귀 끝이 조금 붉다.
“다음에 같이 대하 먹으러 가요.”
……우리에게 다음이란 게 있을까.
“내가 새우 껍질 다 까 줄게요.”
지서의 ‘다음’과 은기의 ‘다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지서의 다음은 회피하기 적당한 사회적 언어였다.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 말하면서도 상대로부터 연락이 오길 바란 적은 없다. 특히나 불편한 상대와 식사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지서에게 ‘다음’은 적당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음, 이건 비밀인데 아마 런던에 있는 팀으로 이적할 거 같아요. 암스테르담 안내하는 게 더 자신 있는데…… 뭐, 나중에 기차 타고 잠깐 다녀와도 되고. 언제 한번 런던 놀러 와요.”
은기의 ‘다음’은 구체적인 약속이다. 회피하기 위한 지서의 언어와는 결이 다르다.
은기의 말에 지서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물회 육수를 떠먹었다. 고추냉이를 너무 많이 넣은 탓인지 코끝이 찡했다.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의 2층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마주 보고 앉는 자리였음에도 은기는 불쑥 지서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그녀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 카페 내부의 온도가 낮았다. 지서가 추워하며 몸을 웅크리자 은기는 자신의 저지 재킷을 건넸다. 어깨도, 품도 전부 커 이불을 두른 것만 같았다. 어른 옷을 몰래 훔쳐 입은 어린애처럼 소매가 길게 늘어졌다. 은기는 그런 지서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며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넓은 유리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노을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시간. 지서는 슬쩍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움찔하던 은기는 지서가 편하게 기대도록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가 넓고 몸통이 두꺼워 안정적이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버팀목. 티셔츠 너머까지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너 열나.”
지서의 말에 은기가 팔을 올리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더 깊이, 자신 쪽으로 당겼다.
“훈련 강도가 높으면 평소보다 체온이 좀 올라가요.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져요.”
몸을 겹쳐 기댄 까닭에 은기의 목소리가 그의 몸 안을 울리며 들려왔다.
“그래도 너무 뜨거운데. 감기 걸린 사람처럼.”
“원래 기초 체온이 높은 편이라.”
말하며, 은기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했다.
사람의 평균 체온은 36.5도. 그는 조금 더 높겠지. 40도도 되지 않는 은기의 체온에 화상을 입은 것 같다.
“……사람들 봐.”
“한 테이블밖에 없어요. 그리고 파티션 때문에 저쪽에선 여기 안 보여요.”
“너 유명인이잖아.”
“그래서 모자 썼잖아요.”
모자가 무슨 투명 망토라도 되나.
어린애처럼 괜한 시비를 걸려다가 지서는 그냥 말없이 몸에서 힘을 뺐다. 완전히 은기에게 의지하며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이제야 왜 은기에게 끌리면서도 불현듯 두려워지는지 알겠다. 은기의 온기는 족쇄 같다. 붙들리면 끝도 없이 빠져들 것 같은 수렁, 혹은 늪. 도망칠 수 있을 때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하지만 무턱대고 이 손을 잡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이중적인 감정이 맴돌았다. 차라리 그가 무연리에서 자란, 그저 그런 어린 남자애였다면 편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순간의 충동에 충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이기적인 욕심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어야 할 꿈 같은, 없었던 일로 하려 해 놓고선 점점 욕심을 내는 것도 우습다.
그래서 고은기가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나한테 기대게 할 수 있고 의존하게 할 수 있고 또 내 마음대로 널 휘두를 수도 있을 테니까.
출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삶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지서는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겪어야 했다. 이젠 누군가 곁을 지켜 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지서 또한 사람이라 문득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랑을, 위로를 얻기 위해 노력할 용기도 없으면서 겉으론 괜찮다고 허세를 떨고 홀로 자위했다. 결국 남은 건 공허함뿐이었지만 지서는 이 늪을 빠져나가는 법을 알지 못했다.
돈에 집착했던 이유도 이러한 감정적 빈곤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장 수치화할 수 있는,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명확하게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사실 외로움에 대한 면역력이 강한 게 아니다. 몰랐을 뿐. 인간이 가진 근원적 고독도 견디지 못해 친모의 애정에 집착하며 증오를 원동력으로 평생을 살았으면서 네가 없는 일상을, 이 후폭풍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지서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누구보다 진지하지 않은 감정으로 은기를 대했으면서 고작 이 짧은 시간에 기대고 마는 것은 결국 자신 아닌가.
“자요?”
“아니.”
깊은 애정, 견고한 유대, 서로를 향한 따스한 배려는 시간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보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넌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정체 모를 열병을 앓는 것 같다.
“저쪽에 있던 사람들 갔어요.”
“응.”
눈을 감은 채 대꾸하자 이마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지서도 이미 아는 감촉이었다.
“좋아해요.”
다시 한번. 이번엔 감은 눈에.
“좋아해요, 지서 씨.”
커다란 손이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그녀의 손을 쥐고 당겼다. 손등에 입술이 닿자 그 지점을 시작으로 몸 안 전체에 부드러우면서 간지러운 파동이 퍼졌다.
“대답 좀 해 주지.”
은기가 그녀를 더 자신 쪽으로 당겨 안았다. 지서는 가만히 그의 손길에 의지했다. 커다란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재킷을 여며 주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은 차갑지만 곁에 앉아 이불처럼 자신을 감싸 주는 그의 체온 덕에 아늑했다.
“사랑해요.”
그 말 한마디에,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응.”
작게 대답하는데 소리가 명확하지 않았다. 지서는 어쩐지 목이 멨다. 기쁨인지 설움인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마구 뒤엉켰다.
“은기야, 나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애정을 표하는 말이 주는 안정감을 새삼 깨닫는다.
말의 깊이가 주는 무게감이 두려워 늘 감정을 위장하는 것에 익숙했다. 좋다 대신 나쁘지 않다. 혹은 괜찮다.
넌 정말 포장할 줄을 몰라.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조금 들뜬 듯 은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지서 씨가…….”
그가 말끝을 살짝 흐리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목소리를 한 톤 낮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서 씨가 나 먹고 버릴까 봐.”
“……뭐?”
그 말에 지서가 몸을 일으켜 은기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지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하자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보수적이고 조신한 사람이라 자면 다 사귀는 줄 알았는데 지서 씨는 아닌 거 같아서.”
“저기, 은기야.”
은기가 몸을 살짝 돌려 지서와 마주 봤다.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이 그의 얼굴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웃음기와 여유가 맴도는 눈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입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미묘하게 자신 없어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편안하고 느슨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긴장되어 지서는 잠시 숨을 참았다.
“난 키스에 서투르고 지서 씨는 사랑에 서투르니까.”
지서의 얼굴을 감싼 은기가 고개를 틀어 각도를 맞추고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로 가르쳐 줘요.”
작게 읊조리며 은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지서의 입술에서 아쉽게 맴돌았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분명히 보였다. 내려다보는 은기의 시선이 깊고 짙었다. 지서는 잠시 그 눈 안의 바다를 조용히 마주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질 것 같았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요란한 에어컨 소리도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멀어졌다.
……난 서툴지만 넌 아니야. 너와 입 맞출 때면 세상이 흔들리는걸.
지서는 은기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곤 손을 뻗어 가만히 그의 목덜미를 감싸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귀도 잘생겼네. 옴폭 들어간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덧그리곤 귓불을 비비듯 어루만졌다. 벌써 그의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랐다.
“가르쳐 달라며.”
지서는 손에 힘을 주어 은기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커다랗고 단단한 남자의 몸이 힘없이 그녀에게로 끌려왔다.
“배워야지.”
작게 귓속말하며 지서는 살짝 입술을 열었다.
“……네.”
대답하며, 은기의 혀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입맞춤은 짧았지만 충분히 깊었다. 숨 쉬는 게 버거울 때면 지서는 작게 헐떡였고 그럴 때마다 은기는 아주 잠깐의 틈을 주었다. 숨 한 번 간신히 들이마실 만큼 짧은 찰나가 지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입술은, 혀는 성급하게 닿고 얽혔다.
키스가 아슬아슬하고 농밀해질 무렵 먼 곳에서 누군가의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게 울리는 발걸음. 누군가 2층으로 올라오는 듯했다.
먼저 이성을 찾은 것은 지서였다. 그녀는 은기의 목에 팔을 감으려다 퍼뜩 멈추며 그를 밀어 냈다. 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은기야.”
소리가 그의 입 안으로 뭉개져 사라졌다.
“……고은기.”
연거푸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은기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가 이상한 모양으로 머리에 간신히 걸쳐 있었다. 머리카락이 눌리고 헝클어져 우스웠다. 입술엔 그녀의 립스틱이 묻어 붉게 번졌다. 지서가 웃자, 은기가 황급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지서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소파에 앉혔다.
“립스틱 묻었어.”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 자리를 따라 붉은 흔적이 이어졌다. 지서가 손으로 닦아 주려 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낸 뒤 그의 턱을 잡고 자신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그러자 은기가 순순히 얼굴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눈썹은 곧고 짙었고 그 아래 가로로 긴 눈을 따라 속눈썹이 촘촘하다. 눈을 감으니 은기는 평소보다 더 앳되고 소년 같았다. 그을린 피부는 건강하고 생기 넘쳤다. 옅은 비누 향, 그리고 싱그러운 햇빛의 냄새. 그래서 더 붉은 립스틱 자국이 이질적이다. 농밀하고 야하게 느껴진다. 스스로가 낸 붉은 흔적을 지워 주는 행위도, 그리고 얌전히 그녀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긴 은기도.
“……됐어요?”
“응.”
“저,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 내려갈게요.”
모자를 눌러쓴 은기가 티셔츠를 끌어 내려 바지 앞섶을 가리며 말했다. 왜인지 알 법했지만 지서는 애써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이미 형태를 아는 은기의 페니스가 자신의 내부로 삽입되던 순간의 느낌이 불현듯 등줄기에서부터 올라와 몸이 뜨거워졌다.
“그럼 먼저 차에 가 있을게.”
그녀는 여유를 가장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파티션을 돌아 나가자 다행히도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끼익, 끼익 소음이 들렸다. 그 소리가 괜히 짧지만 깊었던 입맞춤을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디뎌 1층에 도착한 지서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가르쳐 달라니.
여기서 더 배우면 어쩌려고.
은기에게 운전대를 넘긴 지서는 편안하게 조수석에 앉아 양손으로 핸들을 꼬옥 쥐고 있는 그를 보았다. 긴장했는지 허리를 곧게 펴고 어깨는 잔뜩 굳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운전했다며.”
지서가 입을 열자 은기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하긴 했는데…… 집에서 트레이닝 센터가 엄청 가까워요. 한 5분? 외곽이라 차도 별로 없고 좌회전 한 번, 우회전 두 번 하면 도착하는데, 도로도 2차선이에요.”
지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던 은기는 뒤차가 없음에도 충실하게 깜빡이를 켜 차선을 바꿨다. 속도 제한도 칼같이 지키고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20대 초반, 저 또래 특유의 안 좋은 운전 버릇 같은 게 없는 듯했다.
“운전 잘하는데.”
며칠 동안 대구로 출퇴근도 잘했고.
“한국은 차가 좀 많아서…… 한국에서 운전 이번에 처음 해 봤거든요. 첫날은 대구까지 가는 데 세 시간 걸렸어요. 원래 클럽하우스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운전하는 데 정신이 팔렸는지 은기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점점 해가 져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그녀가 직접 운전하는 게 속은 편했겠지만 어쩐지 나른하기도 하고, 기분이 그랬다. 그에게 의존하고 싶은 기분.
그러고 보니 밤길 운전은 안 해 봤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자리를 바꿀까, 고민하며 지서는 마을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예 해가 다 진 것도 아니고 IC만 빠져나가면 바로 무연리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이래서야 어떻게 대구까지 출퇴근을 한 건지.
“그럼 왜 여기서 다녔어? 클럽하우스에서 지내도 된다면서.”
지서의 물음에 은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그건…….”
잠시 머뭇거리더니.
“지서 씨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
은기가 솔직하게 시인했다. 지서가 헛웃음을 짓자 그는 괜히 핸들을 톡톡 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차는 어느덧 마을 초입에 다다랐다. 문득 주홍빛 가로등 아래 세워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박 여사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연無緣이라는 뜻을 곱씹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지서는 은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지금은 인연이라는 말이 연달아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운전에 자신 없어 했던 은기는 의외로 주차엔 능숙했다. 도로 경험은 없어도 주차 경험은 많다나. 늘 지서가 차를 대 두는 공간에 주차를 하고 완전히 시동을 끈 후에야 은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
차에서 내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지서가 말했다.
“너무 집중해서 그런지 배고파요. 아, 지서 씨 모기 물렸어요?”
지서가 무의식중에 팔을 긁자 은기가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바르는 모기약 다 썼는데. 저 슈퍼 다녀올게요. 또 필요한 거 있어요?”
“음, 과자?”
“네에.”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발음을 동그랗게 굴려 대답한 은기가 슈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뛰지 않고 좀 빠르게 걸을 뿐인데도 보폭이 커서인지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별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쏟아질 듯 빛났다. 바람이 제법 불어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음영이 꽤 또렷하게 보였다. 불과 몇 주 전, 모든 것과 전쟁하듯 살았던 게 전생의 기억인 것처럼 아득했다. 알람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뜨고,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출근해서 커피를 생명수처럼 들이부으며 일하고, 밤하늘을 보며 퇴근하던 생활들이 전부 꿈인 것 같다. 일에 미쳤다는 미디어 본부 이지서 팀장도 사실은 백수가 체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 않았을 때, 어떤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로등의 조도가 낮아 실루엣만 보일 뿐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여자다.
“급했나 봐요.”
지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여자에게 이야기할 때면 얼음을 뱉는 기분이었다. 날카롭게 잘 벼린 칼날 같은 얼음을.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는지 모르겠네요. 자기 엄마 장례식도 외면해 놓고, 염치없게.”
지서의 힐난에도 여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뭐든 다 견디겠다는 태도였다. 돌을 던져도 맞겠다는 듯, 어떠한 희생도 감내하겠다는 듯.
지서는 여자의 태도가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모르는 이라면 일방적으로 지서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자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여자를 존중하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부정한 여자다.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싶다.
“사모님께서 이 시골까지 왜 왔을까.”
피가 차갑게 식는다.
“아, 최태하 또 사고 쳤나?”
덩달아 지서를 감싸고 있던 뜨거운 여름의 공기도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다.
“이주애 씨.”
이곳은 한여름의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