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짙어진
박 여사의 집에 들어온 주애는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하나, 하나, 곱씹듯 시선을 옮기던 주애가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다 그대로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주애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처음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이내 흐느껴 울며 주저앉았다.
조용한 실내에는 여자의 울음소리만이 맴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서는 피곤한 얼굴로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타이레놀을 꺼내 먹었다. 벌써부터 목뒤가 뻐근하고 두통이 느껴졌다.
“제발, 지서야.”
주애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 내며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제발 태하 좀 어떻게 해 줘.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응?”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지서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여자가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최태하가 뭐 대단한 짓이라도 했나 싶었다. 다만, 벌써 몇 번을 경험한 레퍼토리의 연장선이라 그런지 거짓말처럼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대단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이주애는 지서의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주애가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 지서의 발치에서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낮게 숨을 고르며 울음을 삼키는 소리. 지서는 여자를 뿌리쳤다. 닿는 것도 싫었다. 언제든 눈물을 무기로 자신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의지 같아 불쾌했다.
“사모님.”
“태하가 파혼하겠대. 너랑 결혼하겠다고.”
그 말에 지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그 최태하가 잠잠하다 했다.
“최명주 아들 연말에 임원으로 승진할지도 몰라. 그다음엔 반도체랑 스퀘어 노리겠지. 자기 아들한테 회사 물려줄 생각일 테니까.”
ST그룹 직계인 텔레콤 최명주와 방계인 태하의 아버지, 최명훈의 싸움. 간간이 뉴스나 증권가 지라시에서 흥미롭게 다뤄지는 이야기였다.
고리타분한 가족사가 이어졌다. 태하의 일로 주애와 몇 번 얼굴을 마주할 때면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ST그룹은 최태하 거다. 정씨인 최명주 아들에겐 절대 빼앗길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이 정략결혼이 필요하니 제발 태하를 놔줘라.
주애의 말에 지서는 실소했다. 핏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정작 자기 자식은 버린 여자가 최씨니 정씨니 운운하는 게 어이가 없다.
“재미있네요. 내가 그룹 후계 구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니.”
지서의 말에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하던 주애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봤다. 눈물 자국이 조금 있었지만 주애의 화장은 여전히 정갈하고 단정했다.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가엔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잡티 없는 피부, 풍성하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ST그룹에 들어가 이젠 그 안주인 자리까지 노리는 여자답다. 지서는 주애의 얼굴을 볼 때면 소름이 끼쳤다.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네. 배우 하지 그랬어요.”
지서가 차가운 어조로 말하며 주애의 앞에 몸을 굽혔다. 가늘게 떨리는 주애의 어깨에 지서의 손이 내려왔다. 주애가 몸을 틀며 뿌리쳤지만 지서는 손에 힘을 주어 끈질기게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한테도 기회가 주어져야 공평하지. 당신한테 상처 줄 수 있는 기회.”
지서가 조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회장이 되든 내가 알 게 뭐라고. 이주애 씨, 난 월급만 제때 나오면 돼요. 최씨가 주건, 정씨가 주건 나랑은 상관없잖아.”
지서가 주애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그녀의 어깨를 밀 듯 놔 주었다. 주애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기뻐야 하는데 일순, 지서의 피가 차게 식는다. 시야가 뿌옇게 번지고 사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삐이, 길게 이명이 들린다. 혼탁한 소음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지서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텔레콤이랑 협업하면 나야 좋죠. 뉴스 미디어랑 A.I 접목하면 사업성 좋으니까. 나 돈에 환장하는 거 알죠. 나한텐 연봉 더 올릴 기회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최명주 아들…… 이름이 뭐랬더라. 이주애 씨가 나한테 무릎까지 꿇는 거 보니까 그 사람이 최태하보다 대단한가 보네.”
입을 뗄수록 예기치 못한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오려 했지만 지서는 간신히 삼키며 마음의 둑을 더 높고 견고하게 쌓았다.
“이지서.”
“……그러니까.”
지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니까 씨알도 안 먹힐 쇼 그만하라고. 역겨우니까.”
지서의 말에 주애가 천천히 일어났다.
“네가 그렇게 버틴다고 ……너, 네가 진짜 태하랑 결혼할 수 있을 거 같아?”
주애가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아까 걔 누구야. 그 잠깐을 못 참고 남자나 꼬여 낸 주제에 네가 감히 누굴 넘봐, 넘보길!”
지서는 무감한 눈으로 여자를 아래위로 훑었다. 이제는 익숙한 가식과 위선이다. 주애는 늘 화려한 겉모습으로 최대한 자신을 위장하려 들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본모습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다.
“유부남이랑 불륜으로 낳은 자식 버리고 도망가서 사모님 소리 듣는 여자한테 들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자신의 치부인 지서가 직접 약점을 건드리자 주애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여자가 이내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평생을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사는 여자. 앞으로도 그러겠지. 지겹고 지긋지긋하다.
“왜 말이 없어요.”
한편으론 지서를 키운 사람이 박 여사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부딪쳤을지언정 그녀는 지서를 위선자로 키우진 않았다.
“……다 너 때문이야. 이게 다…… 흐윽.”
주애가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울음이 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서는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이주애 씨는 꼭 불리하면 울더라. 그거 안 좋은 버릇이에요, 사모님.”
남 탓을 하는 건 그녀의 오래된 재능이었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지서보다 주애의 심리 상태가 더 기복 없이 안정적일지도 모른다. 뭐든, 스스로 느끼기에 부조리한 것은 전부 이지서 탓을 하면 될 테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불쾌감이 상승했다.
“전부, 이게 전부 다…….”
“내 탓이겠지.”
지서는 성의 없이 대꾸하며 테이블을 뒤적거렸다.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좋았던 기분이 저 여자의 등장과 동시에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담뱃갑을 찾은 지서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켜려다 퍼뜩 멈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이런 순간, 몸에 안 좋으니 담배 피우지 말라던 은기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여기 붙어 있는 거 꼴 보기 싫으면 해고하세요. 가장 간단한 방법이잖아요. 사실 나 하나 묻어 버리는 거 사모님한테는 일도 아닐 텐데 왜 못 자를까.”
말을 길게 끌던 지서가 주애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 그냥 잘라 버리기엔 내가 너무 잘났지. 내 실적 죄다 최태하 공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작년 이맘때 위태로운 관계와 상황이 지긋지긋해 지서는 충동적으로 사직서를 냈었고 그때, 본부장은 그녀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제시하며 만류했다.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제안도 받았지만 처음 일을 시작한 ST에 대한 애정 때문에 결국 그녀는 잔류를 택했다.
하지만 이젠 다 짜증 난다.
“널, 흐윽, 널 낳는 게 아니었어.”
그 말에 지서는 신경질적으로 담뱃갑을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
“그 부분은 저도 유감스럽네요. 차라리 그냥 지우지. 그럼 서로 좋았을 텐데.”
“엄마만 아니었으면…… 너 낳지도 않았어. 엄마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주애의 흐느낌에 지서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의외였다. 여태껏 박 여사가 가장 먼저 지우라고 강권했을 거라 생각해 왔다.
엄마 때문이야.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주애는 연거푸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지서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를 노려봤다. 엄마.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우리 박 여사한테 엄마라고 부르지 마요. 장례식에 오지도 않은 딸이 무슨 자격으로 엄마라고 불러.”
지서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애가 그녀를 ‘엄마’라고 지칭할 때마다 명치가 뻐근하고 답답하다. 평생을 미워한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박 여사가 불쌍하고 안타깝다.
“정말 박 여사를 엄마라고 생각했으면 부고 전했을 때 왔어야지. 아니, 오자마자 낳지도 않은 아들 찾아 대며 나한테 무릎 꿇을 게 아니라 노인네 납골당이 어디인지부터 물어봤어야지!”
여태 나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친모가 날 버렸다고.
“당신이 감히 누구더러 엄마래.”
지서는 터져 나오려는 화를 간신히 목 아래로 삼켰다.
문득 사소한 깨달음이 지서의 뇌리를 스친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버림받은 건 박 여사 또한 마찬가지라는 걸.
주애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났다. 지서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자와의 대화는 겨우 30분 남짓일 뿐이었지만 진이 다 빠졌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하고 두통도 심했다.
잠시 숨을 고른 지서는 다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평상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은기가 보였다. 품에 모기약, 모기향, 에프킬라 같은 걸 한 아름 안은 채 넋을 놓고 있던 그가 지서를 보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안 들어오고 뭐 해?”
“혼자 있고 싶을 거 같아서요.”
“아니야. 들어와.”
지서의 말에 은기는 고개를 끄덕이곤 집 안으로 들어왔다.
“들었어?”
“네.”
그녀의 물음에 은기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담뱃갑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유심히 한 번 보고는 휴지통으로 던져 넣을 뿐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를 향해 등을 보인 채 잠시 멈춰 있었다. 지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충동적으로 다가가 허리를 안았다.
그녀는 그의 등허리, 정가운데 옴폭 들어간 곳에 얼굴을 묻으며 가볍게 키스했다. 머리를 기대자 뺨으로 단단하고 뜨거운 남자의 몸이 느껴졌다. 허리에 두른 손을 넓게 펼쳐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손이 점점 아래로 향하자 은기가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무얼 어떻게 해야 저 아래까지 가라앉아 버린 이 기분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은기 너한테 창피한 꼴 많이 보이네.”
그 말에 은기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싸며 가볍게 다독였다.
“나 안아 줘.”
지서가 나지막이 말하며 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끝에 닿는 익숙한 온기. 지금 그녀에겐 이게 필요하다. 절실하게, 그리고 다 잊을 수 있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마어마하고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때, 지서를 향해 몸을 돌린 은기가 단번에 그녀를 안아 들고 자신의 허리에 다리를 감게 했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 당황스러웠지만 은기가 허리를 꽉 잡아 지탱해 준 덕에 안정적이었다.
“저도 안아 주고 싶어요.”
은기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흔연히 웃는 그의 입술에 지서는 자신의 것을 가져다 댔다. 이마로 그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커다란 남자의 몸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은기를 놓치면 또 거대한 상념의 파도에 무기력하게 쓸려 갈 것이다. 비집고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로 인해 앓아야 했던 수많은 밤처럼 오늘도 아플 게 분명했다.
“섹스하자는 뜻인데.”
지서는 소년처럼 웃는 그에게 일부러 노골적인 단어를 골라 말했다.
“알아요.”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섹스해요, 우리.”
은기가 지서를 똑바로 응시하며 ‘우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서는 그의 투명하고 새까만 눈을 보며 은기의 세계가 온통 자신뿐이길 욕망했다. 이유 없는 사랑은 얄팍할 거라 의심했으면서 그가 자신에게 미쳤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살짝 열어 둔 창으로 축축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 바람에, 반쯤 쳐 둔 커튼이 날렸다.
“비 올 거 같아.”
지서의 말에도 은기는 대답 없이 그녀의 가슴을 깊게 베어 물었다. 복숭아를 먹는 것처럼 살덩이를 크게 입에 담아 물고 오물거릴 때마다 은밀한 쾌감이 발뒤꿈치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을 감싸며 넘실거렸다. 다음엔 더 잘할 거라는 은기의 다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서툴게, 게걸스럽게 빨아 대기만 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애무가 세심했다. 혀로 젖꼭지를 건드리다가 이로 아프지 않게 깨물고 다시 유륜을 동그랗게 배회하는 혀의 움직임이 야릇하다.
“사실, 아까 카페에서, 그 옆의 모텔…… 모텔, 들어가고 싶었어요.”
은기가 지서의 가슴에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카페 화장실에서 뭐 했어?”
지서의 손가락이 은기의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한 머리카락에선 샴푸 향이 진동했다.
“자위했어?”
“……자위는 아니고, 그냥, 식히려고. 운전하면 거기에 집중해서 섹스 생각 안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한다고 했어요.”
계속 부담스러워하더니 선뜻 운전대를 잡겠다고 나선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보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날리는 게 거슬렸는지 몸을 일으킨 은기가 모기장 밖으로 나가 커튼을 양옆으로 완전히 걷어 버렸다. 주방에 켜 둔 조명 탓에 역광이 져 빠르게, 바삐 움직이는 은기의 실루엣만 간신히 보였다. 날렵하게 잘빠진 신체가 아름답다. 어서 빨리 그가 자신의 몸 안에서 흥분하고 욕정을 느끼며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고 싶다.
은기는 목덜미에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창문을 아예 활짝 열었다. 바람이 불자 시원한지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다.
창이 커 완전히 열자 야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밤에 지서의 집을 찾아올 유일한 사람은 이미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오히려 탁 트인 공간에서 나누는 정사 같은, 선을 밟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그녀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한다.
열린 창으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기향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지서의 벗은 몸을 가볍게 애무했다. 은기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며 습기 찬 바람. 그녀의 몸이 축축하고 노곤하게 젖어 들었다.
은기가 다시 모기장 안으로 들어오자 지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다리를 벌려 은기의 허리에 감고 하반신을 바싹 붙이자 그가 낮게 신음하며 몸을 들썩였다. 은기는 아직 바지를 벗지 않았지만 잔뜩 발기한 페니스가 정확히 지서의 입구에 닿았다. 흥분이 고조된 얼굴로 그가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세차게 움직였다. 은기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또렷하고 맑았던 눈이 짙은 욕망에 잠겨 흐릿했다.
“왜?”
물으며, 지서는 다리에 힘을 주어 더 진득하게 은기의 몸을 옭아맸다. 손으론 넓은 맨가슴을 더듬다가 흥분으로 선 유두를 자극했다. 간질이듯 매만지다 슬쩍 꼬집자 은기가 몸을 들썩였다. 기분이 좋은지 그가 가늘게 떨 때마다 지서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지서는 은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검지 끝을 깨물자 은기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엔 혀로 핥자 그가 검지와 중지를 더 깊이 지서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에 닿는 손가락이 굵고 곧다. 지서는 은기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오므려 손가락을 빨았다. 남자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터질 듯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런 거, 이런 거 이제 나랑만 해요.”
은기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혀를 누르며 말했다. 지서는 대답 대신 혀로 그의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몇 번이고 반복하자 남자의 온몸에 긴장으로 날이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엔 그 새끼한테 안 맞아 줄 거야.”
무언가를 다짐할 때의 은기는 유독 소년 같다.
나약해서 맞은 것도 아니고 순전히 지서가 곤란해질까 봐 참았을 것이다. 은기 몸값이 얼마랬지. 한국의 국보급 센터백이라는데 이런 구닥다리 치정극에 휘말려서는.
미안하다고 말하기 위해 지서가 혀를 움직이려는 찰나 은기가 손가락을 빼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을 보도록 고정했다. 그러곤 곧장 상체를 숙여 깊게 키스를 해 왔다. 단번에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능숙하게 움직였다. 오늘 낮, 카페에서 몰래 나누었던 입맞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 깊고 농밀했으며 원초적이었다.
입천장의 곡선을 둥글게 따라가던 혀가 그녀의 혀를 빨아 먹을 것처럼 흡입했다. 순간적으로 고여 있던 성욕이 흩어져 온몸으로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그녀의 입가로 흐르자 그가 고개를 틀어 그것을 혀로 길게 핥았다. 천천히 핥아 올라와 비로소 아랫입술에 도착했을 때 은기는 지서의 혀끝을 깨물며 몇 번이고 연거푸 빨아 댔다.
깨물리고 빨리기를 반복하자 입술이 퉁퉁 붓고 열감이 느껴지며 뇌에 산소가 부족해 정신이 몽롱해졌다. 능숙해졌다는 말은 취소. 입맞춤이 점점 거칠어졌다. 잔뜩 흥분한 탓인지 은기는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짐승처럼, 다 먹어 치울 듯 달려들었다. 그녀의 달뜬 신음이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호흡이 버겁고 혀가 뽑힐 듯 얼얼했지만 지서는 어설프고 거칠기만 한 은기의 키스가, 자신에게 안달 내는 그 모습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욕심이 많고 성격이 꼬여서, 누구보다 이성적인 척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감정적으로 미숙해서, 여태껏 뒤틀려 있던 이지서라는 사람은 고은기의 애정을 어떤 파편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독차지하길 원했다.
은기가 혀로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손으론 가슴을 크게 주무르기를 반복했다. 손아귀 힘이 강해 그가 젖가슴을 꽉 쥘 때마다 입 안에선 절로 옅은 신음이 흘렀다. 가진 산소를 모조리 그에게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욕망에 갈증이 났다. 여름밤의 축축한 공기가 끈적하게 피부에 엉겨 붙었다. 아랫배가 성욕 때문에 뻐근했다.
애무를 하는 틈틈이 은기는 지서의 표정을 관찰했다. 집중하려 애쓰는 눈이었다. 어떤 자극에 그녀가 반응하는지, 무엇을 더 기분 좋아하는지 모조리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은기가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 번에 벗어 버렸다. 이미 성기는 완전히 발기되어 있었다.
은기는 양팔을 그녀의 무릎 뒤에 넣어 몸을 끌어당겼다. 이제 삽입하겠지. 그런 흐름이었는데.
“은기야, 콘돔.”
“……아, 아직요.”
그가 몽롱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
“지서 씨 거 빨고 싶어요.”
무언가에 홀린 듯.
“뭐?”
놀란 지서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은기에게 다리를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 잠깐만.”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요.”
은기는 평소처럼 발음이 분명하지도 목소리가 또렷하지도 않았다. 완전히 이 행위에 몰입해 버린 듯 눈동자가 불투명하게 빛났다.
그에 의해 다리가 완전히 벌어졌다. 손을 떼어 내려 팔을 뻗어 보았지만 허공에서 잡혀 버렸다. 뾰족한 혀끝이 아래를 핥자 지서는 놀라 숨을 멈추었다. 젖은 살덩이가 속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아, 아으.”
지서의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혀가 내벽에 닿을 때마다 쾌감이 전신을 관통했다. 얕게 핥다가 깊게 파고드는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온 이성을 끌어모아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남자의 강한 힘을 그녀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아요?”
은기가 말을 하자 더운 숨결이 회음부에 닿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야릇해 정신이 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어, 지서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아아…… 좋구나.”
은기는 어쩐지 들떠 보였다.
싫다고 강하게 말하면 그만둘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도저히 ‘싫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야릇한 신음과 교성뿐이다. 내가 이렇게 성욕에 약한 사람이었다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그녀를 지배한다.
혀가 점막에 닿으며 아래를 쑤셔 댈 때마다 몸이 뜨겁게 불타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의지와 다르게 계속 제멋대로 움직이며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그녀는 시선을 천장으로 가져갔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조명에 비친 은기의 그림자가 천장 벽지에 일렁였다. 단지 형태일 뿐인데도 그 움직임이 야하게 느껴져 지서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쾌락이 지나쳤다. 또 과호흡이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심장 소리가 쿵쿵 머리를 울렸다.
은기가 무언가를 찾는 듯 바닥을 더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박스를 여는 소리, 비닐 포장끼리의 마찰음이 뒤를 따랐다.
시간의 공백이 제법 길어지자 지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은기를 보자 그는 뜯지도 않은 콘돔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은기가 포장을 이로 뜯었다. 불과 며칠 전, 콘돔도 제대로 끼지 못해 덜덜 떨던 그가 떠올라 지서는 괜히 약이 올랐다. 단 몇 번 만에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는 게 어쩐지 얄밉기도 했다.
은기가 손을 뻗어 발목을 잡으려 하자 지서가 슬쩍 몸을 움직여 피했다. 처음엔 단순히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은기가 엷게 웃었다.
“왜 그래요.”
하지만 지서는 대답 없이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단지 그냥, 그가 자신에게 안달 내는 것이 보고 싶었다.
연거푸 손길을 거부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던 은기가 순식간에 발목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서의 몸이 그에게로 질질 끌려갔다. 은기는 자신의 몸으로 엎드려 있던 그녀를 내리눌렀다. 몸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하게 해 줘요.”
속삭이며, 은기가 한 팔을 그녀의 몸에 둘러 꽉 붙들었다. 단지 조금만 힘을 주었을 뿐인데 몸이 묶인 것처럼 전신을 압박하는 구속감이 들었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지서는 그 감각에 어떤 안정감을 느꼈다.
“진짜 싫어요?”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유혹의 소리. 색으로 치면 검붉을 것이다.
“응?”
은기가 조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온몸의 솜털이 일어났다. 허벅지로는 잔뜩 발기한 페니스가 느껴졌다. 불같이 뜨거워 피부에 닿을 때마다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지서 씨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은기가 지서의 뺨을 잡아 자신 쪽을 보게 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됐다. 흥분으로 크게 헐떡이는 소리가 자극적이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는 게 기분 좋다.
은기에게 사슬로 만든 목줄을 채우고 싶다. 그의 주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먹히고 싶기도 하다.
지서가 몸을 움직이자 은기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아쉬운 해방감을 느끼며 지서는 무릎을 세우고 허리를 슬쩍 들었다. 어떤 의도인지 눈치챘는지 그가 떨리는 숨을 쉬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비볐다. 닿는 양감이 또렷했다. 얕게 들락거렸던 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다. 지서는 고개를 틀어 그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혈관이 도드라진 채 솟은 모습이 위압적이었다.
“왜요?”
은기가 상체를 지서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넌 다 큰 거 같아서.”
키부터 손, 발, 그리고…….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은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웃으면 그게 무엇이든 다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은기가 지서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느릿하게 허리를 밀어 넣으며 교접하자 아래에서 상당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엎드린 체위는 처음이라 마주 보며 삽입했을 때와는 또 달랐다. 꽉 조여들며 내벽이 좁아졌지만 은기는 아랑곳 않고 천천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지서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뚝뚝 아래로 낙하했다. 얕게 삽입했을 뿐인데도 몸이 흔들려 그녀는 간신히 팔로 몸을 지탱하며 버텼다.
“……하아.”
느릿하게 뿌리까지 모조리 넣은 후 은기가 숨을 토해 냈다. 바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벅찬 듯 호흡을 고르며 잠시 멈춰 그 감각을 음미했다.
“아, 어떡하지.”
너무 좋아.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그가 허리를 바싹 추켜올렸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었지만 지서는 숨을 삼키며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 도리어 두려웠다.
은기가 감질나는 속도로 느릿하게 성기를 빼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몸 깊은 곳에서 점막이 마찰되는 촉감이 생생했다. 흥분으로 불거진 혈관, 도드라진 귀두. 딱딱하게 선 페니스의 형태가 몸 안에서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것이 느껴졌다.
“지서 씨 허리…… 내 허벅지보다 가느다란 거 같아요.”
지서의 허리를 놔 준 은기가 몸을 굽혀 그녀의 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천천히 안으로 진입했다. 지서는 말없이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무어라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이 주도했던 첫날의 섹스와는 결이 달랐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내벽이 조여들며 페니스에 꽉 들러붙었다. 완전히 빠져나갈 것처럼 물러서다가 길을 내는 것처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차라리 속도가 빠르고 격렬하다면 이렇게까지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을 텐데. 생생한 감각, 몰려오는 쾌감에 괴로웠다. 알 수 없는 수치심으로 지서의 눈가에 열이 몰렸다.
또다시 완전히 빼냈다가 단번에 끝까지 박아 넣었다. 버티지 못하고 지서의 팔이 무너지자 은기가 자신의 힘으로 안아 올려 강하게 찔렀다. 그녀는 숨을 토해 내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어가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양팔이 뒤로 젖혀지며 그에게 붙들렸다. 상체가 허공에 붕 뜨며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까 봐 불안했지만 방심한 틈을 타 밀고 들어온 쾌감이 그녀를 덮쳤다.
은기가 허리 짓의 속도를 높이자 그 박자를 따라 지서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비음이 터져 나왔다. 간혹 그녀가 소리를 삼킬 때마다 그의 움직임이 더 거세졌다. 입술을 깨물려 했지만 단단한 허벅지가 몸을 쳐 댈 때마다 쾌락의 극점이 한계까지 짓눌려 지서의 의지와는 다르게 알 수 없는 교성을 더했다.
“하아, 흐읏.”
“목소리, 좋아…… 더, 더, 들려줘요.”
그와 동시에 퍽, 강하게 압박하는 움직임에 헛숨을 삼켰다. 커다란 성기로 인한 압박감이, 쾌감과 뒤섞여 미묘한 통증을 만들어 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가 과민하게 반응하며 부피를 불렸다. 차라리 쓰러지고 싶은데 그에게 양 손목이 붙들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불쑥 무릎이 들리며 몸이 완전히 허공에 떴다. 손목을 놔 준 은기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지서는 눈앞에 보이는 창틀을 잡고 엎드려 섰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모기장이 크게 갸우뚱했다.
키 차이 때문에 간신히 발끝으로 버티고 선 지서의 몸이 은기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조금씩 공중에 떴다. 긴장 탓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뒤꿈치가 간지럽다. 발끝이 뜰 때마다 아킬레스건이 잘게 경련한다.
강하게 안을 찌르는 힘에 그녀의 고개가 위로 꺾이며 얇은 모기장 너머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고즈넉한 시골의 밤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습기 찬 바람이 불자 담벼락의 장미가 파스스 흔들린다. 어스름한 달빛이 구름에 완전히 잠기자 일정한 박자에 맞춰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진다.
지서는 자신의 몸 위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등을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감각이 생생하다. 비를 맞은 것 같았다.
“얼굴…… 얼굴 보여 줘.”
지서가 속삭이자 은기가 삽입한 채로 몸을 잡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은기의 얼굴을 적신 것은 땀일까 빗물일까.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반짝인다. 지서는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며 키스한다. 입술만 스칠 정도의 가벼운 입맞춤이었을 뿐인데도 몸 안의 페니스가 팽창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키스하는 거, 좋아요.”
그의 숨결이 아주 가깝다.
은기가 지서의 등을 받치며 바닥에 눕혔다. 곧바로 벌어진 다리가 가슴에 닿도록 접히며 그의 페니스가 더 깊게, 빈틈도 없이 밀려왔다. 몸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허공에 떠 있는 지서의 발끝이 잘게 떨렸다.
은기는 페니스에 달라붙는 탄성과 끈적함을 음미하며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더 격렬하게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 반,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가 부러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반. 뇌가 뜨거운 열에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오로지 본능만이 제대로 작동한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서다 단번에 뜨거운 내벽 안으로 끝까지 내리꽂기를 반복했다. 그 박자를 따라 그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여자의 가슴을 적셨다. 흰 젖가슴은 이미 은기 자신이 주무르고 빨아 댄 덕에 울긋불긋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여자의 가슴을 핥았다. 유두를 이로 잘근 깨물자 흐느끼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듦과 동시에 그녀의 허리가 뒤틀리며 성기를 조이는 압박감이 강해졌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지.”
……어떻게.
홀린 듯 은기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몸속에 번져 나가는 감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눈가가 뜨겁고 시야가 희뿌옇게 번졌다. 창으로 쳐들어오는 빗물이 제법 거셌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서가 양팔을 뻗자 은기는 그녀에게로 몸을 굽혀 안겼다. 좋아요. 좋아서 죽을 거 같아요. 너무 좋아요. 거칠고 빠르게 삽입하며 은기가 두서없이 말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지만 지서는 차마 그에게 그만하라거나 천천히 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간절하게 애원하며 어린애처럼 조르는 남자.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듯 은기가 고개를 틀어 얼굴을 감추려 하자 지서는 그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안 돼. 숨기지 마. 넌 다 보여 줘.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지서 씨, 난 지는 게 싫어요.”
은기가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비록 내가…… 승리를 결정짓는 포지션은 아니지만 적어도 패배하지 않게 막을 수는 있다는 게 좋아.”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잖아. 난 지서 씨를 이길 생각이 없어. 그냥 내가 지고 말게요.”
잠시 은기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사랑해요.”
무수히 많은 단어 중 은기는 또 하필이면 ‘사랑’이란 말을 골라낸다.
지서 씨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가 가득 차서 시간이 모자라요. 스물네 시간은 너무 짧아. 두서없는 그의 속삭임이 귓가에 스민다.
가벼운 장난이라 치부했다. 이곳을 떠나면, 이 계절이 지나면 잊힐 마음이라고. 더 깊어질까 봐 두려워 사소한 척했다.
지서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의 다정에 숨이 막힌다.
깊어 가는 마음에 여름이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