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의 계절
꿈을 꿨다.
지난겨울, 설 명절 다음 주로 기억한다. 급작스럽게 박 여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첫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고, 지금 터미널이라고. 철야 후 퇴근하려던 지서는 그 전화를 받고 그대로 터미널로 향했다.
오전의 터미널은 제법 북적였다. 주말의 여유와 설렘이 느껴지는 사람들 틈에서 지서만이 업무에 찌들어 피곤 속을 허우적거렸다. 홀로 다른 세상 사람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짧은 설 연휴 동안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 오늘까지, 집에는 옷만 갈아입으러 잠시 들른 수준이었다. 운전하는 것도 귀찮아 몇 주째 택시로 출퇴근을 할 정도로 피로했다.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하게 샤워한 뒤 자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실 귀찮았다.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왜 연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쳤나 짜증이 치밀었다.
박 여사는 터미널 벤치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한 지서를 보고는 혀를 차며 그러게 왜 고된 서울살이를 하냐고, 지금이라도 집어치우고 무연으로 내려와 농사일이나 도우라며 힐난했다. 지서는 못 들은 척, 왜 왔냐 물었고 그녀는 시장하니 밥부터 먹자며 설렁탕집으로 앞장섰다. 그렇게 마주 앉아 대화 한마디 없이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박 여사는 어디론가 전화해 누군가에게 주소를 물었다. 약속을 확인하는 전화 같았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 반수면 상태로 국물만 떠먹던 지서는 그녀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박 여사는 언제 한번 여행을 가자 했다. 어디에 가고 싶냐 묻자 제주도, 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 되면. 이렇게 답했지만 여행을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박 여사가 명함 한 장 달라기에 꺼내 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수첩의 클립에 꽂아 두었다.
지서가 수저를 내려놓자 곧장 식당을 나선 박 여사는 바삐 택시를 잡아타 어디론가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그녀는 만나는 남자는 없냐고 물었고 지서는 대답하기 싫어 눈을 감았다. 무어라 푸념하던 박 여사가 기사에게 수첩에 적은 주소를 보여 주며 종로 어딘가를 설명하는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꽤 큰 한방 병원이었다. 사람이 제법 많았지만 미리 연락이 갔는지 박 여사와 지서는 곧장 진료실로 안내되었다. 박 여사는 이 병원 한의사가 과수원 집 손녀라고 설명했고 지서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먼저 진맥을 본 박 여사가 지서를 끌어다 한의사 앞에 앉혔다. 됐다고 했지만 손목 한번 내미는 게 무에 그리 대수냐는 잔소리가 이어지자 별수 없이 맥을 짚고 몇 가지 진찰을 받았다. 기가 허하고 울혈이 치밀었으며 피로도가 극심하다. 지서도 아는 문제였다.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서 쉬지 못하게 괴롭히는 게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걸 모르는 건지, 박 여사가 원망스러웠다.
한약을 지은 박 여사는 어찌 사는지 보자며 집으로 향하길 재촉했다. 며칠째 청소도, 설거지도 제대로 못 했다.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해 거절하고 싶었지만 달리 핑계가 없어 체념했다.
그리고 어땠더라.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집 안 꼴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퍼부었고 지서는 적당히 대꾸한 뒤 샤워를 했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며 등을 몇 대 후려 맞았지만 이내 수마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드라이기 소리를 들었다. 젖은 머리를 말려 준 뒤 딱딱하게 경직된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늦은 밤이었다.
싱크대에 쌓여 있던 컵은 말끔하게 치워졌고 빨래는 칼같이 줄을 맞춰 건조대에 널어 둔 상태였다. 내 집이 이랬었나. 낯설 정도로 깨끗했다.
주방 레인지에 못 보던 냄비가 놓여 있어 열어 보자 노란 호박죽이 쑤어져 있었다. 수저로 한 입 떠먹어 봤다. 간이 딱 그녀의 솜씨였다. 어린 시절, 지서가 배앓이를 할 때면 박 여사는 늙은 호박을 삶아 죽을 쑤어 주곤 했었다.
식탁엔 딱딱한 그녀의 글씨체로 쓴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며칠 후 한약이 배달될 테니 설명 따라 잘 챙겨 먹으라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허옇게 떠서 시집가 애나 낳겠냐는 내용이었다. 흥, 조소하며 박 여사의 메모를 그대로 구겨 휴지통에 던졌다. 꿈속이지만 그 메모를 보관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그 늦은 밤, 지서는 호박죽을 데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지서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창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 맞는 걸까.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희뿌옇게 흐리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흰 모기장과 그 너머 천장 벽지의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이…… 땀을 뚝뚝 흘리며 사정하는 은기였던가. 온몸이 흠뻑 젖었는데 다시 말끔해져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정사에 지서가 지쳐 잠들자 은기가 씻겨 준 모양이었다.
지서는 몸을 덮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얇은 이불의 건조한 감촉이 기분 좋게 피부에 감겼다. 가벼운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생각보다 컨디션은 괜찮았다. 아마도 은기가 이를 악물고 참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서에겐 프로 스포츠 선수의 왕성한 에너지를 감당할 체력이 없다. 지금 이렇게 몸을 움직일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는 것은 은기의 어마어마한 자제력 덕분이었다.
지서는 반대로 돌아누우며 시계를 봤다. 새벽 5시, 10분 전. 벌써 창밖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 그래요?”
은기의 목소리가 조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수고하셨어요.”
앞마당 평상에 앉아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듯했다.
“아뇨, 좋죠. 가고 싶었던 팀인데요. 그냥 좀, 실감이 안 되기도 하고…… 얼떨떨하네요. 더 걸릴 줄 알았거든요.”
지서도 뉴스에서 봤던 프리미어 리그 팀과의 이적 협상이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네, 메디컬 테스트. ……가야죠.”
‘가야죠’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풀이 죽은 듯했다.
“아뇨. 오늘은 무리예요. 저 지금 서울 아니어서요. 지금 공항 가면 비행기 놓칠 거 같아요. 여기서 정리할 것도 있고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해요. 내일 갈게요.”
은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렇게 말할 줄도 아는구나 싶어 새로웠다.
“네, 차 보내 주세요. 내일 새벽 5시쯤? 그때까지 사람 보내 주시면 돼요. 주소 문자로 찍어 드릴게요. 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말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곧 긴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게 오래된 꿈이라고 했었는데 무엇이 그를 한숨짓게 만든 걸까.
가야죠. 공항. 하루의 시간. 내일.
그의 목소리가 지서의 귓가를 맴돌았다.
잠시 후 은기의 걸음 소리,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서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지서에게 다가온 은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하고 따뜻했다. 꿈속에서 젖은 머리를 말려 주던 박 여사의 손길이 떠올라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은기가 그녀의 옆에 몸을 누였다. 그러곤 등 뒤에서 지서를 안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꼼꼼하게 얽어 잡고 그녀의 뒤통수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이 사소한 행동에서 그녀는 사랑한다는 고백의 무게를 실감한다. 부유하는 감정의 파편들이 그의 온도에 녹아내리는 냄새를 맡는다. 창으로 들어오는 비의 잔향이, 청량한 그의 체취와 섞여 코끝을 찌른다.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은기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 지서의 피부에 톡톡 바르기 시작했다. 멘톨 특유의 화한 향. 모기 물린 곳에 약을 발라 주는 모양이다. 이리저리 만지며 주물러 주고 약을 발라 주는 손길이 편안하다.
격렬한 정사가 분노를 모조리 휘발해 버렸는지 지서의 마음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이주애와 만난 날은 늘 증오와 분노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는데 지금은 잔잔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조각배에 누워 있는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내일이면 은기가 떠난다는 걸 알았는데도, 그런데도.
“지서 씨.”
은기가 그녀의 목덜미에 도장 찍듯 입술을 꾸욱 찍었다.
“꿈을 이뤘는데 다 꿈같아요.”
“……뭐가?”
“지서 씨도, 축구도.”
내가 꿈이었다니. 앳된 애정 표현에 심장이 간지럽다.
“들었죠?”
“응, 축하해.”
지서는 은기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최소 일주일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내일 영국 가야 해요. 메디컬 테스트 하고 계약서에 도장도 찍고 프리시즌 투어 합류도 해야 하고.”
그때 갑자기 지서가 헛웃음을 지었다.
“왜요?”
“너 중졸 백수인 줄 알고 돈 준 거 창피해서.”
“아아.”
지서의 말에 은기가 푸흐흐 웃으며 그녀의 손바닥에 꾹 입술을 눌렀다.
“잘생겼는데 기획사 소개해 줄 테니까 한국 오라고 할까. 모델을 시킬까, 배우를 시킬까. 그런 생각을 했어.”
“나 잘생겼어요?”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킨 은기가 그녀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옅은 새벽빛 아래 더 싱그럽다. 그의 눈을 보면 젊음, 청춘, 그런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응, 잘생겼어.”
“선크림 더 열심히 발라야겠다. 예쁨받아야지.”
은기의 말에 지서의 시선이 식탁 위 화병에 꽂아 둔 해바라기 풀 다발로 향했다. 그는 지서에게 꽃을 주고 싶었다며 내밀었지만…… 사실 저 꽃과 잘 어울리는 건 은기였다. 은기가 꽃을 들고 다가오던 순간, 있지도 않은 20대 초반의 풋풋했던 첫사랑을 만난 기분이었다.
“내일 낮 12시 비행기예요. 새벽 5시까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은기가 나지막이 말하며 희미하게 웃자 뺨에 불우물이 진다.
시계는 어느덧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스물네 시간뿐이다.
채 썬 당근과 오이에 소금 간을 하다가 지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막연하게 이곳에 남는 사람은 은기이고 지서 자신은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갑작스러운 동행이 끝난다는 게…….
“섭섭해.”
그래, 섭섭하고 서운하다.
마땅히 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은기가 이적하는 팀은 프리미어 리그 상위권 팀이고, 한국인 센터백이 빅리그에 진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연봉과 이적료도 어마어마하게 좋은 조건이고. 축구 팬들이 고은기의 이적에 대해 추측해 놓은 글만 봐도 오피셜 기사가 뜬다면 스포츠 팀에선 뉴스 알림을 쏴 댈 것이 분명했다.
서운해서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철 안 든 어린애 같다. 처음엔 심심풀이 취급 하며 어린애랑 짧게 불장난한다 치려 해 놓고선.
어느 정도의 각오도 필요하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고 은기는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한창인 나이. 사랑도 그럴 거다.
“김이랑 어묵 사 왔어요. 오다가 과수원 집 아줌마 만났는데 복숭아도 주셨어요.”
우당탕 소리와 함께 은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루 동안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은기는 지서가 싸 준 김밥을 들고 박 여사의 납골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왜 하필 김밥인지 궁금했지만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알려 주면 내가 할 수 있는데.”
지서가 다듬어 둔 재료를 보며 은기가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다친 손은 깨끗하게 아물어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다 나았다니까.”
“손가락 부러질 거 같아서요.”
“안 부러져. 가서 집 치우고 짐 챙기고 있어.”
“진짜 도와줄 거 없어요?”
“응, 없어. 얼른 나가. 너 거슬려.”
지서가 매몰차게 말하며 눈을 치켜뜨자 은기의 눈초리가 아래로 추욱 처졌다. 아무래도 저런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은기를 내보내고 나니 실내가 섭섭하리만치 조용했다. 조용한 걸 좋아했으면서 조용하다고 섭섭하다니. 갑자기 정신연령이 덩달아 스물셋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그런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지서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느긋하게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불린 쌀로 밥을 하고 계란을 풀어 지단을 부치고. 어쩐지 박 여사를 만나러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주방 쪽 커다란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제법 거세 뒷마당의 나무가 흔들리며 이파리와 가지가 부딪치는 소음이 났다. 왼쪽이 살구나무, 오른쪽이 매화나무였던가. 저 나무들에 핀 꽃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오래되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 아마도 여섯 살 때였을 것이다. 유치원과 소풍의 존재를 처음 안 지서가 나도 가고 싶다 보채자 박 여사는 친구처럼 함께 자라라며 나무를 심어 주었다. 봄엔 그녀와 함께 꽃을 보았고 여름엔 매실로는 청을 담그고 살구로는 잼을 만들었다. 식빵에 잼을 발라 도시락을 싸고 희석시킨 매실액을 차게 얼려 박 여사와 함께 마을 뒤편으로 소풍을 가고…… 그랬었지. 그랬었다.
냉장고를 열고 허리를 굽히자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유리병이 보였다. 꺼내서 뚜껑을 열자 진한 매실 향이 맡아졌다. 유리잔에 청을 넉넉하게 담고 차가운 물과 얼음을 부었다. 가볍게 흔들자 얼음이 유리잔과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다.
한국에 아예 안 오진 않겠지. 국가대표 팀 경기도 있을 테니까 드문드문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모바일 메신저도 잘되어 있고 영상통화도 하면 되고. 지서가 직접 가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이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매일은 무리여도 한 달, 아니,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러다 서서히 멀어질 수도 있고.
은기가 가야 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그 막연한 이별의 순간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물네 시간. 역시 너무 짧다.
지서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복귀 날짜를 세어 보았다. 오늘까지 포함해 7일이 남았다. 인천에서 런던까지 가는 데 열두 시간. 메디컬 테스트라는 건 얼마나 걸리는 걸까. 그래, 하루라고 치고 자신이 런던에 간다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무모하게 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스케줄이었다. 거기다 은기의 의사도 중요하다. 어쨌든 그에겐 직업이고 커리어니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서는 괜히 양손으로 눈을 꾸욱 눌렀다. 담담하게, 침착하게 보내 주고 싶은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속을 달래려 차가운 매실을 마셨다. 기분 탓인지 눈물의 맛처럼 짰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지 고민하다 깨닫는다. 지서는 늘 떠나는 입장이었지 남는 쪽은 아니었다. 뒷모습을 보여 줘만 봤지 보고만 있던 기억은 없다.
문득 떠나는 지서의 뒷모습을 보며 박화순 여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가서 얼굴 보고 인사해야 하는데 시간이 안 돼서.”
은기의 말에 전화 너머로 서운해하는 정훈의 타박이 이어졌다. 사실, 시간이 안 된다는 건 거짓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구로 내려가 개인 훈련 도와줘서 고맙다고 친정 팀에 인사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감독님께도 따로 전화드릴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지서와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하다. 정훈과 통화하는 지금 이 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 목소리가 왜 그래?
“응?”
묘하게 가라앉은 은기를 눈치챘는지 정훈이 불쑥 물었다.
―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팀이잖아. 난 너 좋아 죽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좋지. 그냥 뭐, 가서 또 주전 경쟁 해야 하니까 긴장도 되고 환경 바뀌니까 신경 쓸 것도 많고 그래서.”
― 웃기시네. 너 그분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하여튼 이런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응.”
은기는 시무룩한 어조로 말하며 비스듬히 보이는 지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자신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가느다란 체구의 여자가 주방과 거실을 나누는 벽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렸다.
음식을 만들다가 거슬렸는지 지서가 잠시 멈춰 머리를 올려 묶었다. 긴 머리를 능숙한 손길로 동그랗게 만들어 고정하자 감춰져 있던 흰 목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얇은 목의 흰 피부엔 지난밤의 흔적이 붉게 남았다. 거리가 꽤 되지만 시력 1.5인 은기에겐 분명히 보인다.
적어도 일주일은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중한 지서라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느리지만 분명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고,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두드리자고.
그날, 정훈과 함께했던 골대 맞히기는 결국 성공했다. 당연하다. 될 때까지 했으니까. 뭐든 될 때까지 하기 때문에 은기는 실패한 경험이 없다.
“형, 나 영국 가기 싫어.”
― 미친 새끼. 그럼 나랑 바꿔. 내가 프리미어 리거 하고 연봉 50억 받을래.
“50억 아니야. 이번에 올라서 100억이야.”
은기가 정정하자 정훈에게서 재수 없다는 힐난이 쏟아졌다.
전화를 끊고도 은기는 계속 마당을 서성이며 지서를 몰래 훔쳐봤다. 자신이 떠나면 지서는 서울로 갈 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른한 살 직장인의 모습으로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겠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같이 가자고 말이나 꺼내 볼까. 순간적으로 콘돔 쓰지 말까 고민했던 지난밤이 생각나 등줄기를 타고 열이 올랐다. 임신은, 그건 같이하는 게 아니라 발목 잡는 거지. 아닌 건 아닌 거다.
무엇보다도 최태하가 가장 신경 쓰였다. 방계여도 ST그룹 일원이니 재산도 많을 거고 중졸인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대학도 나왔다. 얼굴은……, 생각하다 은기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늘 새벽 지서가 자신을 보며 잘생겼다고 한 게 떠올랐다. 그래, 은기 자신이 낫다. 키도 더 크고 몸도 더 좋고 체력은 한 5억 배쯤 더 좋고. 무엇보다도 고은기는 최태하보다 어리다. 선배들이 그랬다. 뭐든 어린 게 깡패라고.
역시 그때 맞아 주지 말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지서 곁에는 얼씬도 못 하게 두들겨 패서 어디 야산에 파묻어 버리는 건데.
예쁘게 싼 김밥을 고르고 골라 낡은 도시락 통을 채웠다. 동그랗고 매끈하게 잘 말린 것은 박 여사의 몫이었다. 은기는 김밥 꽁다리를 모아 둔 것을 보고는 지서를 향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하나 집어 입에 넣어 주자 맛있게 먹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렇게 김밥 꽁다리는 은기가 전부 먹어 치웠다.
시장에 들러 노란 겹루드베키아와 오렌지빛 미니 장미 두 다발을 샀다. 은기가 고른 꽃이었다. 보송보송한 미니 해바라기 같은 게 그는 이런 느낌의 꽃을 좋아하나 보다.
박 여사의 납골당에 도착하자 지서는 꽃을 동그랗게 엮었다. 플라워 원데이 클래스에서 리스를 만들며 몇 번 해 봤던 건데 아직 어설픈 솜씨지만 모양을 갖추자 제법 그럴듯했다. 남은 꽃은 끝을 다듬어 은기의 귀에 꽂아 주었다. 황급히 빼려던 은기는 지서가 아쉬워하자 꾸욱 참는 눈치였다.
은기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꽃과 은기, 그 자체가 지서에겐 싱그러운 꽃다발이다.
“드시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지서 씨한테 부탁했어요. 저도…… 먹고 싶기도 했고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린 은기가 지서의 도움으로 쌌다며 내민 김밥과 우리 애가 날 닮아 손끝이 야무지다며 자랑스러워하던 박 여사의 미소를.
함께 납골당을 찾아 인사한 후 은기는 지서에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가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우리 박 여사를 챙긴다며, 지서는 그에게 자신이 만든 꽃 리스를 걸어 주라고 당부했다. 나 말고 네가 걸어 줘야 박 여사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은기는 조심스럽게 납골함의 고리에 꽃을 걸었다. 화사했다.
성장기인데도 키가 크지 않아 축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또래보다 10cm 커도 모자랄 판에 은기는 15cm나 작아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6학년 때까지 해 보고 안 되면 미국의 부모님에게 가기로 약속을 했던 터라 마음이 조급했다.
그럴 때면 장 여사와 박 여사, 두 할머니들은 몸에 좋다는 것은 뭐든 구해다 은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침마다 줄넘기를 하는 은기에게 박 여사가 그랬다. 지서 누나 공부 잘하니 걱정 말라고. 축구하다 안 되겠으면 그만두고 누나한테 공부 배워도 된다고, 그러니 무서워 말고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하라고.
다행히 그해 방학부터 은기의 키는 무섭게 자랐다. 성장통 때문에 밤마다 다리가 아파 잠을 설칠 때면 할머니들은 은기의 다리를 한 쪽씩 주물러 주었다. 네덜란드로 떠나던 날 두 할머니에게 큰절을 하며 꼭 암스테르담 여행을 시켜 드리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됐다.
열아홉 살, 은기가 네덜란드에 간 그다음 해 할머니 장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간신히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며 리그 경기를 뛰기 시작한 은기에겐 중요한 시기였기에 아버지는 뒤늦게 그에게 부고를 전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한국으로 들어간 은기는 발인만 겨우 참여했다. 장례를 마치고 할머니 집 안방에서 엉엉 우는 은기를 안아 주며 박 여사는 가을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라고 그를 다독였다.
은기는 가만히 납골함에 걸려 있는 박 여사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완고한 입매와 형형한 눈빛. 얼핏 보기엔 단단한 느낌이었지만 ‘지서’라는 이름 앞에선 약해지고 마는 걸 안다.
지서는 뒤늦게, 천천히 박 여사의 죽음을 실감하는 듯했다. 장례식장에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사람처럼 단단했던 그녀의 미간에 실금이 가는 순간이 있다. 이따금 가만히 무연리의 먼 곳을 바라보며 아득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툭 다 무너져 내릴 때도 있을 텐데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사람이 다름 아닌 은기 자신이었으면 싶다.
사진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은기는 납골당 모퉁이를 돌아 나가려다 멈춰 서서 다시 박 여사를 바라보았다. 노란 꽃 더미에 감싸인 사진이 어쩐지 우는 듯 웃는 것 같다.
루드베키아의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했던가.
마음에 든다.
비 갠 하늘은 맑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초록이 짙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공기에 실려 오는 나무 냄새와 뒤섞여 후각을 자극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비처럼 흩날려 은기의 티셔츠에 자국을 남겼다. 물이 계속 떨어지자 은기는 지서의 어깨를 당겨 안고 슬쩍 머리를 가려 주었다. 크게 효과는 없었지만 지서는 가만히 그의 곁에 머물렀다.
“잠깐만요.”
우거진 나무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곳에서 은기가 허리를 굽히며 지서의 걸음을 막았다. 낡은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그가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끈을 잡고 동그랗게 말아 리본을 만든다. 그의 손은 커다랗지만 길고 날렵해 둔한 느낌이 전혀 없다.
서울에서 급히 내려온 까닭에 신발이라곤 올 때 신은 로퍼 하나가 전부였다. 무연을 둘러싼 뒷산의 둘레 길을 걷고 싶다는 은기의 제안에 혹시나 싶어 신발장을 뒤졌더니 고등학생 때 신었던 낡은 운동화 한 켤레가 나왔다. 깨끗하게 빨아 둔 운동화에선 옅은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버리지 그냥. 이 운동화는 언젠가 지서에게 자신이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자, 가요.”
양쪽 운동화 끈을 모두 묶어 준 은기가 깍지를 껴 손을 잡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까마득히 높은 나무들이 만들어 낸 터널을 따라 흙길이 길게 이어졌다. 사춘기 시절, 선풍기 바람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더운 여름날이면 차가운 얼음물 한 병을 들고 이 길을 서성였던 기억이 났다. 변한 것은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지서 자신뿐. 서울살이를 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머문 곳이 이 마을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되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땅을 밟을 때마다 느껴지는 폭신한 감촉과 부드러운 흙냄새가 기분 좋았다. 길을 따라 난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이름 모를 산새가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흙에 섞여 있는 돌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들. 먼 곳에선 풀벌레가 운다. 그 사소한 소음들에 둘러싸여 지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맑고 서늘한 공기가 차서 어질어질했다. 잠시 참았다가 몸 안에 있는 숨을 길게 뱉어 냈다. 감정의 찌꺼기, 혼란, 그런 것들까지 모조리 다 토해 내는 것처럼.
찬 공기가 몸에 들어오자 갑자기 체온이 떨어지며 오싹했다. 지서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자 은기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맨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피부가 마찰하며 따뜻한 열감이 돌았다.
지서는 무심결에 은기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 같다. 키가 훤칠하게 커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때면 고개를 한껏 젖혀야 한다. 시선을 위로 하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감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커다란 그늘이 지며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는다. 짙은 숲의 향과 은기의 청량한 체취가 뒤섞여 아찔하다.
30분쯤 더 걷자 지서는 처음 보는 커다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만든 지 좀 되었는지 난간이 반질반질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은기가 어디서 주워 왔는지 커다란 꽃분홍색 보자기를 깔고는 여기 앉으라는 듯 긴 나무 의자를 탁탁 쳤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은 걸 보면 역시 지서는 은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좋다.
“이 정자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지서의 말에 은기가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안 그런 척, 엄청 깔끔하다.
“한 4년 전쯤 만들었다나? 이장 선거 공약이었대요.”
어떻게 된 게 암스테르담에 살던 고은기가 서울 살던 이지서보다 이 시골 마을 사정에 더 훤하다.
정자는 아담하지만 꽤 그럴듯했다. 아래로는 제법 크게 물이 흐르고 위로는 커다란 나무가 길게 가지를 뻗은 자리. 적당히 지친 등산객이 잠시 숨을 고르고 싶어 하는 위치였다. 안 하던 운동을 한 탓에 슬슬 체력이 떨어져 가던 지서 역시 이곳이 반가웠다.
은기가 가져온 생수병을 따 지서에게 건넸다. 몇 모금 마시자 갈증이 가라앉는다. 물이 달다.
“손.”
또다시 물티슈를 뽑으며 은기가 그녀에게 손을 달라는 듯 눈짓을 했다. 지서가 얌전히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것을 포개자 은기가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이런 건 내가 해도 되잖아.”
“그냥 해 보고 싶었어요.”
“내가 무슨 왕이라도 된 것 같네.”
“지서 씨 왕 맞아요.”
씨익 웃으며 반대편 손까지 꼼꼼하게 닦아 준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자신의 손도 열심히 닦은 뒤 가져온 복숭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맨손으로 쪼갰다. 무슨 힘이 저렇게 센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은기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복숭아를 반으로 가른 뒤 가운데 커다란 씨를 빼 지서 앞에 놓아두었다. 분홍빛 복숭아의 단면이 마치 과도로 자른 것처럼 깔끔했다.
“왜요? 아…… 나 힘세죠?”
지서가 멍하니 복숭아만 보고 있자 은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최태하인지 뭔지가 또 그러면 바로 말해요. 이번엔 내가 그 새끼 두개골을 쪼개 줄게.”
기분이 좋은지 은기가 콧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살벌한 말이 상큼하게 들렸다.
도시락 뚜껑을 연 은기가 지서의 입에 김밥을 넣어 주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예전엔 가끔 김밥을 쌌었는데, 오랜만에 한 것치고 꽤 괜찮았다. 내가 쌌지만 맛있네. 스스로 평가하다 여기서 은기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어쩐지 꿈처럼 느껴져 웃음이 났다. 장례식장에서 주애가 보낸 화환에 화풀이를 하다 분에 못 이겨 뒤로 넘어간 지서 자신과 달래 주던 은기. 그 첫 만남이 마치 어제의 일 같았다.
“시간 참 빨라.”
지서가 정자 아래 천천히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말했다.
“연봉 좀 세게 불렀는데 구단 보드진이 그렇게 빨리 오케이 할 줄 몰랐어요. 아 씨, 더 부를 걸 그랬나.”
은기는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렸고…… 그렇게 잠시 대화가 끊겼다.
갑자기 공기가 축 가라앉았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칼로 베어 낸 것처럼 뚝 끊겨 버렸다. 숲속에 가득 차 있던 소음이 일순 사라져 고요했다. 그 적막이 괜히 어색해 지서는 입 안에 열심히 김밥을 집어넣고 씹었다. 다 넘기지 않았는데도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으려 하자 은기의 젓가락이 불쑥 나타나 가로막았다. 눈이 마주치자 은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엷게 웃었다.
“천천히. 체해요.”
지서는 김밥을 다 삼키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은기가 슬쩍 복숭아를 밀어 주었다. 이 다정에 익숙해져서 난 앞으로 어떻게 사나. 지서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복숭아를 집어 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게 잘 익은 과육이 입 안에 들어차자 상큼한 향기가 훅 퍼졌다.
“맛있어요?”
“응.”
“어디, 나도 맛볼래.”
은기는 복숭아 대신 지서를 베어 먹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은기의 수많은 얼굴을 봤다. 돈 봉투를 줬을 때의 속상한 듯 화난 얼굴. 지서가 유혹했을 때 애달파하던 얼굴. 첫 키스 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과 섹스할 때 초점 없는 눈으로 성욕에 달아오른 얼굴까지.
그중에서도 지금 저 얼굴이 가장 좋다. 나를 원하는 얼굴.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한, 미묘한 웃음. 이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비 온 뒤 갠 날이라 더 또렷하게 와닿는 걸까. 은기의 미소에 마음이 베인다.
짧게 맺고 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들이 예고도 없이 넘치려 한다. 없었던 일로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를 지나치게 깊이 마음 안에 담아 버렸다. 뒷모습을 보는 건 평생 내 몫이 아닐 줄 알았는데. 지서는 처음 겪는 이 감정들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마무리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영국 가면 보기 힘들겠다. 잘 가. 다치지 말고, 건강하고. 새벽이라 경기 다 챙겨 보지는 못하겠지만 늘 응원할게.”
담담하고 쿨하게. 예쁘지 않은 건 싫으니까.
하지만 지서의 말에 은기는 가라앉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왜 말을…….”
아파 보였다.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다신 안 볼 것처럼.”
부드럽게 휘었던 입술의 곡선이 일순 경직되며 미소가 사라진다. 미간엔 실금이 가고 눈썹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올라갔다.
“은기야.”
“나 속상해요.”
은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서가 손을 뻗어 얼굴을 보려 했지만 그가 팔을 들어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어른스러운 척하는 거 존나 힘드네.”
벌떡 일어난 은기가 몸을 돌려 계곡이 보이는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지서도 뒤따라 일어났지만 뒷모습이 완고해 보여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녀를 향해 등을 보인 채 양 허리를 짚고 선 그가 잠시 호흡을 고른다. 분명 지서가 원했던 방향과는 달랐다.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차분하게, 어른스럽게, 담담하게 인사하려 했는데. 유치하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서 상처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나 허세 떤 거예요.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애새끼인데 어른스러운 척. 초조한데 여유 있는 척.”
은기가 다시 그녀를 향해 마주 서며 말했다. 찡그린 눈이 서러워 보이기도 하고, 화를 주체 못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복잡했다.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떼어 내려고 그러는 거잖아!”
갑자기 은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서가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나긋하게 말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엄청 컸다.
“미안해요. 그…… 버릇이에요. 경기장이 시끄러운데 서로 콜할 일이 많아서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져요.”
답답하다는 듯 은기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폭력적인 사람 아니에요.”
“알아.”
“미안해요.”
“응.”
“지서 씨도 나한테 사과해요.”
“……미안.”
지서가 한숨 쉬며 말하자 은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상처받았잖아요.”
은기가 지서를 당겨 품에 안았다. 아니, 그가 그녀에게 안겼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기도 하다.
“난 헤어져 있기 싫어서 나쁜 생각도 했어요.”
“무슨 생각?”
지서는 가만히 그의 넓은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은기가 의미심장하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 안 해 줄래요.”
“뭔데.”
“나중에.”
은기가 지서의 양 뺨을 감싸 자신을 보도록 고정했다. 얼굴을 꽉 잡은 채 꽤 긴 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바라만 본다. 시선을 맞춘다고 마음까지 읽어 낼 수 있는 게 아닌데도 그가 보는 것만으로도 속마음을 다 들킨 것 같다.
“오히려 불안한 건 내 쪽이에요. 내가 더 불리해.”
은기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떨어져 있는 게 불안해요. 최태하인지 뭔지랑 같은 회사인 것도 불안하고 저번처럼 그 마녀 같은 아줌마가 찾아와서 또 괴롭힐까 봐 불안해요. 난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는, 그런 경험을 못 해 봐서 지서 씨 일상이나 일 힘든 거 이해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신경 쓰여요. 이제 한국에 당신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는데 혼자 아플까 봐 걱정되고 아픈 걸 나한테 숨길 것 같아서 또 걱정되고. 아, 그래…….”
말끝을 길게 흐리던 그가 숨을 골랐다. 그러곤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사귀는 건 맞죠?”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하는 아이처럼.
“……응, 맞아.”
지서가 대답하자 그가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것에 가져다 댔다.
“그럼 됐어요.”
그럼 됐어. 남자 친구. 그럼 됐어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던 은기는 지서와 눈이 마주치자 쪽 소리 나게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살벌하게 올라갔던 눈썹이, 잔뜩 찡그렸던 이마가 언제 그랬냐 싶게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 친구. 그게 뭐라고 이렇게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난 네 여자 친구야?”
괜히 유치하게 묻고 싶어진다. 이미 아는데도 확인하고 싶은 건 또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은기가 장난스럽게 머리를 부딪쳤다.
거짓말처럼 부산스러웠던 마음이 일순 차분해졌다. 그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 후로 가슴속에 둥둥 떠다니던 감정의 불순물들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지서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가 잘해 줄게요. 나한테 와요.”
“……까불고 있어. 나보다 한참은 어린 게.”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은기는 엄지로 지서의 눈물을 훔쳐 내고는 그대로 품에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키스, 섹스, 뭐든 다 좋지만 이렇게 포옹할 때가 가장 좋았다.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 언제나 곁에서 지탱해 줄 거 같은 느낌이다.
“함께 런던으로 가서 같이 살고 싶어요. 그런데…… 지서 씨가 내 상황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같이 살고 싶다니.
“고은기, 우리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어.”
지서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자 은기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난 하루를 1년처럼 생각했는데.”
은기가 웃는다. 그 미소에 세상이 붉게 물든다. 불어온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따스하고 맑은 향기가 날아와 그녀를 감싼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하다 생각했던 햇빛이, 바람이, 지금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다르게 작용한다.
사랑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주의자인 지서의 모든 감각을 낯설게, 그리고 특별하게 만든다.
그가 떠났다.
나오지 말라기에 나가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지서는 조금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검색해 봤다. 보고 싶으면 말하라고, 언제든 티켓 끊어 주겠다는 은기에게 비즈니스 아니면 안 탈 거라 했다. 그 말에 그는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하곤,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꼬박 열두 시간. 공항까지 왔다 갔다, 넉넉하게 잡아 스무 시간. 갈 만하다. 마음먹으면 하루면 볼 수 있어. 그렇게 물리적 거리를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본다.
난 분명 혼자가 익숙한 사람인데. 지서는 눈물을 닦으며 이제 홀로 견디는 새벽을 못 참게 만들어 버린 은기를 원망한다. 그가 남긴 해바라기 꽃다발은 아직도 싱싱하게 활짝 피어 있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흰 모기장이 커다란 베일처럼 그녀를 감쌌다. 이제 모기에 물리면 누가 약 발라 주지. 모기향은. 남은 흔적을 되짚으며 생각의 생각을 이어 가다가 처음엔 라이터도 제대로 못 켜 모기향 하나를 붙잡고 몇 분이나 걸렸던 은기가 점점 능숙해지던 게 떠올라 울면서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계절의 온도가 영하로 뚝 떨어져 버린 것처럼 추워 턱이 덜덜 떨렸다.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지서는 얇은 이불을 넓게 펼쳐 몸을 감쌌다. 이불에서 은기의 향기가 난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밤새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부족했다.
이 집을 나서기 전 은기는 그녀에게 손목에 키스해 달라고 부탁했다. 손목 안쪽 맥이 뛰는 자리에 입을 맞춘 뒤 가만히 몇 분 동안 그의 손을 잡고 수많은 것을 생각했다.
창틈으로 들어온 새벽빛이 흰 이불 위를 가로질러 안방까지 길게 뻗었다. 그 긴 흔적을 따라가다 지서는 안방을 한참 멍하니 바라봤다. 박화순 여사는 은기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생각 해요?]
그때, 진동 소리와 함께 휴대폰 액정에 메시지 창이 떴다.
[내 생각 말고.]
봤지만, 답을 고르지 못해 지서는 가만히 액정 화면을 바라만 봤다.
[자요?]
그가 묻자 지서는 천천히 답을 입력했다.
[응.]
의연한 척.
[자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지.]
[나는 해.]
[그럼 꿈에서 나랑 놀아 줘요. 방금 찾아봤는데 비행기 와이파이 된대.]
은기의 메시지를 보며 지서는 풀썩 베개에 머리를 묻고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싫어. 나 자고 있다니까.]
심술부리는 스스로가 유치하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발끝이 오그라든다.
[쳇.]
은기가 불량스러운 이모티콘을 툭 던졌다.
대화는 그가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탈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서는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한낮이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300이 되어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뿐이다. 이제 비행기 뜬다. 사실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래서 이륙할 때 무서워서 베개를 꽉 끌어안는다. 나 아무래도 몸이 허약한 거 같으니 다음엔 지서 씨가 비행기 뜰 때 손잡아 줬으면 좋겠다. 기내식이 맛없다. 영화가 재미있는 게 없다. 지금 시베리아를 지나고 있다. 뭐 그런 것들.
길게 기지개를 켠 지서는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자 작은 통에 예쁘게, 먹기 좋게 깎아 둔 복숭아가 담겨 있었다. 은기는 복숭아에 포크까지 꽂아 두고 갔다. 모양을 보니 이번엔 손으로 쪼갠 게 아니라 칼로 자른 것 같다.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진다.
과일 통을 들고 나온 지서는 커다란 창틀에 기대앉아 화창한 무연리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액자, 밖의 풍경은 고흐의 그림 같다. 언제 싹을 틔웠는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짙은 초록이 그녀의 하늘을 가득 채운다. 마음이 꽃밭이 되었다가 금세 혼자라는 게 우울해졌다가를 쉴 새 없이 반복한다.
내일, 아니, 늦은 밤에라도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다. 이 조용한 마을에서 홀로 밤을 보낼 자신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번잡스러운 도시로 가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거짓말이지.
이지서가 혼자를 서운해하다니, 이것이 연애의 신비일까.
이제 우린 어디로 흘러갈까.
나의 계절은 이렇게 계속 따뜻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