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7)

11. 은기

늘 주차하는 곳에 차를 댄 지서는 빠르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3시에 출발할 걸 그랬다. 출근 시간이 애매해질 것 같아서 중간에 움직이기로 한 건데.

이제 확실히 가을인 건지 건물 안의 공기가 평소보다 서늘했다. 지서는 트렌치코트를 여미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경기 시작 안 했겠지. 괜히 조급해 뛰듯 걷는 바람에 로퍼의 굽 소리가 요란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선 지서는 곧장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보통 경기 사이 하프 타임이 15분 정도라고 했으니 후반전은 아직일 것이다.

“어? 지서 리더 빨리 오셨네요.”

14층, 포털 사이트 스퀘어의 미디어 본부로 들어가자 스포츠 팀의 편집자가 지서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네, 일이 있어서요.”

“저희는 오늘 해외 축구 경기 있어서요. 좀 시끄러워도 양해 부탁드려요.”

안다. 그거 때문에 이 시간에 출근한 거다.

은기의 경기는 운 좋으면 오후 10시나 자정, 보통은 새벽 4시나 5시에 있다. 섬머타임 적용 기간에는 중계 시간도 조금씩 바뀐다나. 그동안은 신경도 안 썼던 다른 대륙, 다른 도시의 시차까지 계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4시에 경기가 있으면 3시에 일어난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구단 SNS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명단이 뜬다. 리그 개막 후 처음 몇 경기 동안 벤치 멤버였던 은기는 주전 센터백이 부상을 당하면서 교체 선수로 뛰다가 10월부터는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젠 명단에 없는 게 이상할 정도라 처음 이적 발표가 났을 때 주전 기회도 잡기 힘들 것 같은 아시안 수비수가 상위권 팀이라니 너무 욕심낸 것 아니냐던 팬들까지 혹사를 걱정해 줄 정도였다.

스포츠 팀 쪽에 놓아둔 커다란 TV 화면엔 전반전 하이라이트가 재생되고 있었다. 상단엔 ‘고은기 출전’이라는 텍스트가 떠 있었고, 스코어는 2 대 1. 은기의 팀이 한 점 차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핫하기로 유명한 경기라 시작 전부터 팬들끼리의 신경전도, 프레스 컨퍼런스에 참석한 감독끼리의 설전도 대단했다. 더군다나 리그 순위도 나란히 3, 4위여서 이 경기는 승점 6점짜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와 업무에 복귀한 지서는 리그가 개막할 때까지 내내 ‘그깟 공놀이’에 대해 공부했다. 열한 명이 하는, 공을 발로 차 골대에 넣는 스포츠. 지서가 아는 지식은 일반적인 상식에 불과해 경기를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았다. 지서가 물어볼 때마다 은기는 그런 거 몰라도 된다며 웃었지만 그냥 알아 두고 싶었다. 경기 안 봐도 된다고 하면서도 그는 시작 전후로 꼬박꼬박 메시지를 보내고 지서의 질문에 충실히 답을 해 주었다.

지서는 PC를 부팅하고 슬쩍 스포츠 팀 쪽 TV로 의자의 방향을 틀었다. 어차피 연예 기사는 아침 7시는 되어야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적당히 커피 한 잔 하며 남은 후반전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고 바로 오전에 있을 회의 준비를 하면 시간 배분이 딱 맞았다.

“고은기 쟤 여자 친구 생긴 거 같지 않아?”

그때 TV 앞에 모여 경기를 보던 편집자 중 한 명이 불쑥 말했다.

“어, 그래요?”

“쟤 경기 시작 전마다 하는 루틴이 있단 말야. 입장할 때 선 절대 안 밟고 오른발부터 경기장 들어오고 에스코트 키즈 볼 한 번 만져 주고.”

“박성조는 오른발 깽깽이걸음으로 들어오잖아요.”

루틴routine. 사전적인 의미는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이란 뜻이다. 스포츠에서의 루틴은 선수들이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한 습관을 말한다. 누군가는 징크스라고도 하지만 이 징크스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게 루틴이기도 했다.

“고은기 하나 추가됐어. 킥오프 전에 꼭 왼쪽 손목에 키스해.”

그 말에 사내 보안망 AD 비밀번호를 입력하던 지서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오……?”

“여자 친구 당연히 있겠죠. 한창 좋을 나이인 데다 돈도 잘 벌겠다, 게다가 저 얼굴에 없는 게 말이 되나.”

“인스타그램에서도 티 완전 나.”

“난 잘 모르겠던데. 그냥 자기 사진이잖아요. 브랜드 협찬이나 일상 사진, 셀카 그런 거.”

“그러니까 네가 눈치 없단 소릴 듣는 거야. 누가 봐도 여친 보라고 올린 거잖아. 그 꽃다발 사진도 딱 보니까 여친이 만들어 준 삘 나더구만.”

맞다. 지서가 플라워 클래스에서 만든 꽃다발 사진을 보내 줬더니 은기가 떡하니 자신의 SNS에 올려 버렸다.

“저렇게 대놓고 티 내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는 거 아냐? 지서 리더, 고은기 아이돌이나 배우랑 열애 터지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내에서도 열혈 축구팬으로 유명한 편집자의 말에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지서에게로 쏠렸다.

“……글쎄요.”

지난여름, 대선 후보의 사생아이자 연예계에서도 꽤 알아주는 포토그래퍼와 펜싱 스포츠 스타의 열애 파파라치 사진이 터졌다. 남자 쪽은 이미 배우 뺨치는 외모로 유명했고 여자 쪽도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CF나 화보를 많이 찍을 정도로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라 어느 섹션에서 열애설을 다뤄야 하는지를 두고 미디어 본부의 시사, 연예, 스포츠 각 팀이 열변을 토하며 싸웠다. 평소에는 이런 이슈에 참전하지 않는 시사까지 나설 정도였다.

시사는 남자 쪽이 대선 후보의 사생아이니 자신의 기사라고 우겼고 스포츠에선 여자 쪽이 한국 최초의 펜싱 그랜드슬래머에 올림픽 메달리스트이니 자신의 기사라 주장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지서의 연예 팀이었다.

“에이, 김해준 최우현 가져가셨잖아요. 고은기 열애는 저희 스포츠 주세요.”

시사 섹션에서 셀럽의 열애와 같은 가십을 다루면 포털 뉴스의 신뢰도가 낮아질 것이고 스포츠 섹션은 선수의 사생활이 아니라 경기 위주의 편집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둘 다 셀럽으로 봐야 하니 연예 섹션에서 기사를 다루겠다는 지서의 주장에 본부장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지서의 연예 팀은 평소보다 30% 트래픽이 상승했다.

“지서 리더가 기사 우리 주겠냐. 요즘 고은기는 아무 기사나 가져다 걸어도 클릭 폭발하는데.”

일 욕심 많은 이지서가 그럴 리 있겠냐는 듯 편집자 하나가 농담처럼 빈정거렸다.

“최우현 다음 스포츠 치트 키가 고은기여서요. 저희보다 트래픽 두 배나 먹는 연예 팀 리더님은 체감하지 못하시겠지만 올해 스포츠 국제 대회도 전멸이라 많이 궁합니다. 솔직히 저희 고은기로 간신히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말끝을 길게 끌다가 덧붙였다.

“요즘 쟤 털려고 다들 눈에 불을 켠다는 말이 있어요. 어디 매체는 국장이 사진 팀에 고은기 스캔들 현상금도 걸었대요. 완전 먹잇감.”

“연예인이랑 스캔들 나면 당연히 연예로 가야죠.”

지서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차분하게 대답하며 TV를 응시했다. 후반전을 뛰기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오던 은기는 또다시 자신의 루틴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커다란 화면으로 루틴의 마지막인 손목 키스를 하는 은기를 보자 갑자기 심박이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대신 연예인 쪽이 듣보 신인이면 저희 주세요!”

스포츠 팀의 막내가 지서를 향해 발랄하게 외쳤다. 신인 연예인이 은기와 스캔들 날 일 자체가 없는데, 모르고 하는 악의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조금 짜증이 난다.

“일반인일 때도 스포츠에서 가요?”

지서가 묻자 막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뭐, 저런 애가 그냥 그런 일반인을 사귈까요? 내가 고은기면 예쁜 연예인, 배우에 아이돌 다 만나면서 방탕하게 살 것 같은데.”

“……그러네요.”

적당히 대꾸한 지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알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냥 가십처럼 말 보태는 건데. 이래서 연예인들의 일반인 연인이 SNS에 은근슬쩍 티를 내고 다니나 보다. 일로 접할 땐 그걸 못 참냐고, 철없다 비웃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한 2%쯤 이해가 된다.

“후반 시작하네. 준비하자.”

심판이 휘슬을 입에 물자 TV 앞에 모여 노닥거리던 편집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은기의 팀은 한 점 실점했다. 은기와 함께 센터백을 보는 데모스의 실책성 플레이를 상대는 놓치지 않았고 그게 바로 골로 이어졌다. 그다음엔 단독 돌파를 허용하며 실점 위기를 맞이했지만 은기가 옐로카드까지 받아 가며 막아 냈다.

지서는 회의 자료를 보는 척하며 슬쩍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걸 뭐라고 했더라. ……그래, 오프사이드. 상대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린 거다. 지서는 괜히 앞에 놓인 종이에 또박또박 ‘오프사이드’를 메모하고 복기하듯 별표까지 쳤다. 축구 룰을 머리에 집어넣긴 했는데 경기를 보면서 바로 적용하는 건 아직 어려웠다.

“너무 거친데.”

“그게 바로 더비매치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이제 시간도 다 되어 가는데, 무승부는 재미없으니까 한 골 나왔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지서의 펜 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더비매치. 라이벌 팀 간의 경기. 무슨 세계사 공부하는 기분이다.

후반은 전반전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가열되었다. 한눈에 봐도 속도가 빠르고 거칠었으며 치열했다. 그래서인지 위기 상황도 잦았다. 빠른 발을 이용해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드리블을 하는 상대 공격수를 최종 수비수인 은기가 태클로 저지했다. 상대가 발에 걸려 넘어지며 뒹굴자 심판이 휘슬을 불어 경기를 중단시켰고 그와 동시에 관중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야유를 퍼부었다.

“와, 영국 놈들 욕하는 거 봐. 페널티킥 줄 것 같지 않아요?”

“이거 주면 고은기 역적 되지. 오…… VAR. 비디오 판독 가나요.”

무슨 소리인지는 하나도 모르겠고 은기에게 안 좋은 상황이라는 것만 알겠다. 지서는 온라인 중계 채팅창에 올라오는 팬들의 댓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 선수니까 잘하라는 응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야유와 조롱이 더 눈에 들어왔다.

중계 화면에는 은기가 태클했던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문제없는 태클이라는 한국 해설자들의 코멘트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서는 불안했다.

잠시 후 커다란 TV 화면 가득 물을 마시는 은기가 클로즈업됐다. 소매로 땀을 닦아 낸 은기가 웃으며 동료와 무언가 상의를 했다. 경기장에서 대화할 때 선수들은 꼭 저렇게 손으로 입을 가린다. 입 모양만 보고 내용을 추측해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내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저런 사소한 것들까지 조심해야 하다니, 축구 선수 고은기의 위치가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스퀘어 미디어 본부 사무실에서 은기가 출전한 스포츠 중계를 보고 있다는 게 가장 기분이 이상하다.

“태클 깔끔하게 들어간 거 같은데요.”

“그러게, 공부터 터치했네. 메인 기사 교체하고 방금 태클 상황 영상 클립 걸자. 실시간 검색어 올라오지?”

“네, 고은기 태클로 실검 걸렸어요.”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풀리자 스포츠 편집자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서의 연예 팀에선 주로 영화제나 연말 시상식 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페널티킥이 아니라는 수신호를 보낸 심판이 경기를 재개시켰다. 은기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판정에 크게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팀 동료와 하이 파이브를 한 뒤 다시 자신의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지서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TV 속 은기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봤다. 누군 애가 타 미칠 거 같은데 혼자만 여유로워 원망스럽다. 하고많은 포지션 중 왜 하필 수비수인지. 공격수에 비해 주목도 못 받고 경기 볼 때마다 심장 떨려야 하고. 집에서 혼자 볼 때는 마음껏 리액션이라도 했지, 회사에서 이러고 있으니 손끝이 저리고 어깨가 욱신거렸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난타전이나 다름없었지만 선수들의 몸을 던지는 수비와 골키퍼들의 환상적인 선방에 막혀 스코어는 계속해서 2 대 2, 균형을 이루었다. 그렇게 추가 시간도 흐른 경기 종료 직전, 은기의 팀에 마지막 찬스가 왔다.

은기의 동료가 코너킥을 차기 위해 이동하자 상대 팀 팬들이 벌떡 일어나 선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몇백, 아니, 몇만이나 되는 관중들이 단체로 야유를 퍼붓고 삿대질을 하며 신경전을 걸어왔지만 선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굉장히 침착했다. 경기장과 좌석까지의 거리가 저렇게 가까운데 안 들릴 리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고은기 박스 안으로 들어오네요.”

지서는 내가 왜 축구를 그깟 공놀이라고 하는 망언을 한 것인지 후회됐다. 그동안 쌓은 업보가 있어 최대한 관심 없는 척해야 할 것 같은데 들려오는 이름에 시선이 어쩔 수 없이 TV로 향하고 말았다.

“키 크고 몸싸움 잘하니까 세트피스 노리겠지. 쟤 헤더 괜찮잖아.”

자기 아랫사람 부르듯 쟤, 쟤 하는 것도 거슬리고.

골키퍼와 수비수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상대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 골을 노렸다. 밀치고, 뿌리치고, 선수들끼리 서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몸싸움이 치열했다. 은기도 집중 견제의 대상인지 상대 수비수가 팔꿈치로 툭툭 치며 기 싸움을 하려 하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밀치며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늘 밝게 웃는 얼굴에만 익숙한 지서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저러다 한판 싸우겠다.”

아니나 다를까, 휘슬을 불며 다가간 심판이 두 선수에게 구두 경고를 주었다. 상대가 무어라 항의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은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일부러 화를 더 돋우려는 제스처였다.

코너킥을 차기 전, 키커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손으로 사인을 했다. 이내 공이 길게 뜨면서 화면이 전환됐다. 중계 카메라는 골대 앞에 넓게 모여 있는 선수들을 비췄고 지서의 시선은 그 많은 선수 중 정확히 은기를 찾아낸다.

계속 신경전을 하던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이긴 은기가 용수철을 단 것처럼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공은 절묘한 타이밍에 그의 머리에 맞았다. 따지고 보면 몇 초 안 되는 굉장히 짧은 시간인데 지서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슬로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게 재생된다. 은기의 머리에 맞은 공이 그대로 상대 팀의 골문으로 향한다. 골키퍼의 손을 스치고 구석, 골대 상단에 꽂히며 그물이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와 씹, 골!”

누군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서는 동요하지 않기 위해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꽉 움켜쥐었다.

“미쳤다, 미쳤어. 완전 깔끔하게 들어갔어요!”

스포츠 팀 막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골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은기는 원정 응원을 와 준 서포터 좌석 쪽으로 달려가 무릎 슬라이딩 셀레브레이션을 선보였다. 팀 동료들이 데뷔 골을 축하하기 위해 다가와 포옹했고 몇은 거칠게 그의 등을 손으로 퍽퍽 치기도 했다.

“데뷔 골이다. 고은기 실검 올라오니까 골 장면 영상 바로 링크 걸어서 올려놔. 오늘 트래픽 좀 땡겨 보자.”

“네, 네. 하고 있죠. 애플리케이션 알림 쏠 준비 할게요.”

편집자들이 실시간 대응을 하기 위해 상의하는 소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지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원샷을 잡자 손목에 키스한 은기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윙크했고 그 광경에 지서의 심장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려 댔다. 목덜미에선 열이 오르고 뺨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어떡하지. 죽을 거 같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 팀 실적 별로라고 개무시한 연예 팀 리더 이지서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경기를 보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흥분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지서는 몸을 웅크려 파티션 아래로 숨었다. 다행히 스포츠 편집자들은 기사를 셀렉하고 영상 링크를 메인에 노출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 TV에서 반복되는 셀레브레이션 장면을 보며 혀를 쯔쯔 찼다.

“저거 봐, 저거. 손목에 키스하는 거. 저 새끼 여친 생긴 거 맞다니까?”

책상에 엎드린 와중에도 지서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슬쩍 흘겨봤다. 누가 누구한테 이 새끼 저 새끼래. 거슬려 따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저, 지서 리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선임 편집자가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게 저희 스포츠에선 큰 이슈여서요. 메인 상단에 배너 열려고 하는데요.”

스포츠 배너를 열면 연예 쪽 기사가 뒤로 밀리게 돼서 메인 화면에서의 노출도가 떨어진다. 그동안 지서가 가장 빡빡하게 구는 부분이었다.

“그…… 잘 모르시겠지만, 아니, 관심 없으시겠지만 고은기가 누구냐면 이번에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한 스물세 살 중앙 수비수입니다. 왜 화제냐면 한국 센터백 중엔 처음으로 유럽 4대 리그에 이적을 한 거죠. 그동안 공격수나 미드필더가 진출한 경우는 많았는데 수비수 쪽은 완전 전멸이었거든요. 연예 쪽 이슈로 치면 빌보드나 그래미 어워즈 진출한 거, 혹은 칸 영화제나 아카데미 후보 지명 정도 됐다고 보시면 돼요.”

그는 당연히 지서가 거절할 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어떻게든 이해시키려는 모습이었다.

“아마 박성조 은퇴하면 고은기가 대표 팀 주장 완장도 찰 거예요. 그 정도로 요즘 라이징 스타입니다. 연봉도 거의 100억 가까이 되고…… 수비수가 저 나이에 그 정도면 대단한 거거든요. 아마 오늘 MOM도 고은기일 거예요. MOM이 뭐냐면요 MVP 같은 건데…….”

“하세요.”

지서가 편집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네?”

“하시라구요.”

흔쾌히 대답하자 그의 눈이 커졌다.

“네, 감사합니다! 야, 골 장면 이미지 골랐지? 배너 열자!”

선임 편집자가 흥분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편집자들의 빠른 키보드 소리를 들으며 지서는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히 긴장이 되어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경기는 3 대 2로 끝났다. 비록 2실점을 해 클린시트, 무실점 경기에는 실패했지만 은기는 결승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이라이트 방송 후 중계 화면은 곧장 은기의 믹스트 존(Mixed Zone: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선수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동 취재 구역) 인터뷰로 전환되었다.

수비수로서 클린시트에 실패한 게 아쉽지만 팀 승리에 일조해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독일식 발음이 약간 섞인 영어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랑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은기의 키가 큰 탓에 리포터와 한 화면에 잡히도록 몸을 굽혀 준 게 인상적이다.

[전화해도 돼요?]

인터뷰가 끝나고 몇 분 후에야 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려 입술에 힘을 줬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내가 할게. 잠깐만.]

[영상통화로 해 줘요. 얼굴 보고 싶어요.]

[알았어.]

지서는 답을 보내고 황급히 빈 회의실을 찾아 나섰다.

그녀가 본부 반대편 회의실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선임 편집자가 후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서 리더, 사람이 좀 둥글둥글해진 거 같지 않아?”

그의 말에 편집 작업을 하던 막내가 피식 웃었다.

“배너 양보한 거 의외예요. 예전 같았어 봐.”

“그러니까. 나 또 그깟 공놀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까 봐 심장이 다 떨렸잖아.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통했네.”

지서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긴 했다. 그녀가 리더가 된 후로 스포츠의 전체 실적이 연예의 반도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오죽하면 다른 본부에서 미디어 본부는 이지서가 멱살 잡고 끌고 간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여유 있어졌어요. 편안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일만 잘했지 인간미는 없었잖아요.”

“모친상 당하고 장기 휴가 갔었잖아. 그 후로 사람이 좀 변했어.”

그러자 다른 편집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연애하는 거 아닐까요?”

계속 은기의 루틴에 집착하던 그의 말에 선임이 혀를 차며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넌 어떻게 보는 사람마다 연애 타령이냐. 고은기도 연애한다, 이지서도 연애한다. 왜? 둘이 연애한다 그러지?”

은기가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가자 라커 룸은 난장판이었다. 물이라도 뿌리며 놀았는지 바닥이 흥건했다. 워낙 알아주는 런던 지역 라이벌인 데다가 순위도 바로 앞뒤였다. 그 때문에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의 서포터즈석엔 경찰들이 배치되었고 혹시나 골을 넣더라도 상대 팬들을 도발하는 자극적인 셀레브레이션은 자제하라고 구단 쪽에서 따로 요청을 할 정도였다.

흥분한 선수 하나가 SNS 라이브 방송을 켜고는 휴대폰을 들이대며 인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오늘 경기의 맨 오브 더 매치라는 요란한 소개가 이어지자 누군가가 라커 룸 벽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분위기를 잡았다. 빨리 지서에게 전화하고 싶은데, 골 넣는 거 봤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하지만 팬 서비스도 프로 선수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은기는 최선을 다해 응해 주었다.

마음이 조급해 샤워도 하지 않고 전화를 하려다 라커 룸 안쪽의 거울로 시선이 갔다. 온몸이 땀에 절어 머리 모양도 엉망이었다. 뛸 때 방해 안 되게 경기 시작 전에 왁스 칠을 열심히 했는데 워낙 몸싸움이 거칠었던 탓에 누가 보면 머리채 잡고 싸운 줄 알 판이었다. 귀찮아서 삭발하고 싶다가도 지서에게 최대한 예쁘게 보여야 하니 참기로 했다. 재력으로 어필하기엔 그녀도 능력 있는 사람이니 역시 고은기의 가장 큰 무기는 몸이었다.

은기는 단번에 유니폼을 다 벗고 라커 룸과 연결된 샤워실로 들어갔다. 인터뷰를 하느라 늦게 들어온 탓에 샤워실은 한적했다. 쿨다운 스트레칭도 해야 하는데, 빨리 지서의 얼굴부터 보고 싶어 차가운 물로 샤워하는 걸로 퉁치기로 한다.

물이 닿자 살갗이 따끔거린다. 다리를 보니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 까지고 긁힌 상처들이 어마어마하다. 팔의 멍, 가슴팍엔 축구화 스파이크에 긁힌 긴 자국들. 흥분이 가라앉자 그제야 근육이 잘게 경련하며 뻐근한 통증이 이어진다. 냉수를 뒤집어썼는데도 몸에선 여전히 열이 난다.

오늘부터 며칠간 휴가이니 집에서 쉬어야지, 생각하다 갑자기 지서가 보고 싶어졌다. 물론 늘 보고 싶지만 꼭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면 유독 심했다. 예전엔 단순히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거나 할머니 댁 뒷산에 가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었는데 대상이 정해지니 향수병이 더 깊어졌다. 이래서 해외 리그에서 뛰는 선배들이 하나같이 다 만나는 사람 있으면 결혼 빨리하라고 부추기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정훈은 회의적이었다. 여름에 잠깐 만나고 이제 장거리 연애를 한 지 3개월 좀 넘었는데 철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니냐며 신중하라고 한 소리 들었다.

만난 기간이 그렇게 중요한가. 아니, 결혼이 이르다 싶으면 동거부터 할 수도 있는 거고.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이 하니까. 네덜란드에 있을 때 가장 친했던 동료는 어린 시절부터 사귄 여자 친구와 동거하며 최근에 아이까지 낳았다.

무엇보다 솔직한 심정은.

“……회사나 그만뒀으면 좋겠다.”

은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샤워실이 울렸다. 저 끝에서 씻고 있던 선수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알아듣지 못할 한국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지서가 회사를 그만뒀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직이라도. 가장 베스트는 퇴사하고 여기 와서 같이 사는 거지만 그녀에겐 그 회사가 친모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섣부르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불쑥불쑥 최태하라는 존재가 미치도록 거슬렸다. 그녀를 의심하거나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칼같은 성격이고 한번 아닌 건 끝까지 아닌 사람이니까. 그냥, 그냥 내가 싫어.

잘할 자신 있다. 유럽 자취 경력 5년 차, 지서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혼자 가사도 다 할 수 있었다. 공부 잘한다고 박 여사가 어마어마하게 자랑하던 게 떠오르자 다음에 넌지시 대학원을 가는 건 어떻겠냐고 말해 볼까 싶기도 했다. 전공이 경영이었지. 영국에서 아는 대학은 옥스퍼드랑 케임브리지뿐인데 어디가 좋지. 런던에 있는 학교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본인 의사도 묻지 않고 이런 고민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샤워를 마친 뒤, 정리를 하고 나온 은기는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평소 거리가 먼 지역에서의 경기는 구단 전세기나 버스로 움직이는데 이번 경기는 같은 런던이다 보니 에이전시의 현지 직원이 데리러 오기로 약속을 했다.

“은기 선수, 여기요.”

아는 얼굴이 보이자 은기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이제 좌우가 바뀐 영국의 운전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이 차 조수석에 가장 태우고 싶은 사람은 가장 먼 곳, 한국에 있었다.

전화해도 되냐고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기다려 달라는 답이 왔다. 그리고 얼마 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한국은 지금…… 아침 7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회사일 것이다.

“회사예요? 방해한 건 아니죠?”

― 괜찮아. 아직 업무 시작 시간 아니야.

휴대폰의 액정 화면에 지서의 얼굴이 보였다. 옅은 메이크업과 무채색의 블라우스. 은기가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럼 경기 못 봤겠네요?”

― 여기서 봤지. 데뷔 골 축하해.

“그렇게 무리 안 해도 되는데. 지서 씨 피곤하잖아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실실 웃음이 났다.

― 요즘에 경기 보려고 칼퇴하고 일찍 자. 괜찮아.

액정 화면 속 지서가 느슨하게 미소를 짓자 은기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좌석에 몸을 완전히 파묻고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서 씨,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는 말은 겨우 네 글자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차마 헤아릴 수 없이 넓고 깊어서,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따라 할 때면 가슴 한쪽이 뻐근해진다.

연인의 대화는 늘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하다. 영국에 도착하고 처음 통화를 했을 땐 지서는 어색한지 별말이 없었고 은기가 일방적으로 두 시간을 떠들어 댔다. 말수가 적지는 않지만 많은 편도 아닌데 어떻게든 통화를 이어 가려고 그녀에게 별의별 말을 다 한 것 같다.

지금은 서로가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다. 훈련 이야기, 팀 동료의 귀여운 딸 이야기를 나누고 지서가 플라워 클래스에서 만든 다발이나 바스켓을 보여 주고. 작은 휴대폰 액정으로만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물리적 거리가 이 연애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빨리 한국 가고 싶어요.”

― 한 달 후랬지?

A매치 데이, 국가대표 팀 경기가 한 달 후였다. 아직 대표 팀 명단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부상이 없는 한 은기의 합류는 확실시되었다.

액정 화면을 통해 지서가 어디선가 가져온 달력을 보며 날짜를 가늠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살짝 내리뜨자 속눈썹이 조명에 반사되어 그림자가 진다. 그녀가 다시 시선을 옮겨 휴대폰 너머 은기를 똑바로 바라본다.

― 미리 휴가 빼놓을게.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지.

은기가 말을 하려던 그때, 느닷없이 화면이 뒤집히며 어두워지고 전화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회의실에 누가 들어온 걸까. 남자 목소리인데 지서가 손으로 휴대폰을 막은 건지 소리가 울려 대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지서 씨?”

답이 없었다. 휴대폰의 통화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으로 봐선 아직 전화를 끊은 건 아닌 거 같은데.

― 미안 은기야. 이따 내가 다시 연락할게.

잠시 후, 경직된 지서의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종료되었다.

휴대폰의 액정 화면이 몇 번 깜빡이다가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은기는 그것을 한참 동안 멍하니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워 어안이 벙벙했다. 이른 시간. 회의실. 업무 시간이 아니라 괜찮을 거 같긴 했지만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걱정되고 신경이 쓰이다가…….

최태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욕지거리가 나왔다.

지서는 전화를 끊고 회의실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달갑지 않은 상대, 태하였다.

잠시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 여름, 지서가 회사에 복귀한 후 이따금 프로젝트 회의 때문에 마주친 것 외에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태하가 파혼을 선언했다는 주애의 말이 사실인지 한동안 그의 약혼녀가 히스테릭하게 굴어 사내에 말이 많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여자는 보란 듯이 프러포즈링을 보여 주고 다녔다. 태하가 파혼을 번복한 듯했다. 이해득실에 예민한 남자이니 결국 그 대단한 후계자 자리를 택했을 것이다. 이 또한 지서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 지서가 스물한 살 때도 안 하던 짓을 하네.”

태하가 자신을 무시하고 회의실을 나가려던 지서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비키시죠.”

하지만 태하는 지서의 말을 무시한 채 회의실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그녀에게로 몇 걸음 다가왔다. 지서는 그를 피해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유지했다. 이른 시간, 가장 구석지고 작은 회의실. 다들 출근 전이고 스포츠 팀 편집자들은 후속 편집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지서는 태하가 다가오면 그만큼 물러섰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신경질적인 위기감이 엄습하자 지서는 등줄기가 시큰하고 손끝이 떨려 왔다.

그때 갑자기 지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국제전화라는 표시가 뜨는 것을 보아 은기였다. 전화를 끊었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모조리 끊어 수신을 거부하자 이젠 메시지가 들어왔다.

[전화받아요.]

[지서 씨.]

[무슨 일 있잖아요. 전화받아요.]

어떤 상황인지 눈치챘는지 태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오래간다. 시골 촌구석에서 지내기 무료해서 잠깐 데리고 노는 애인 줄 알았더니, 꽤 마음에 들었나 봐. 고고한 이지서 수준에 운동하는 새끼들 대가리에 든 거 없어서 안 땡겨 할 줄 알았는데.”

태하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지서가 날이 선 눈빛으로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씹질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나?”

지서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이를 악물었다. 화를 돋우려 일부러 자극적인 어휘를 골랐다는 걸 안다. 상대해 주면 더 악다구니를 쓸 거라는 것도.

“그 새끼 정리해. 지금껏 논 거 봐준 걸로도 충분해.”

“약지에 반지 낀 사람이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지서야.”

“결혼 앞둔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한테 관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약혼자분 속상하시겠어요.”

태하가 이름을 불렀지만 지서는 냉정하게 대꾸하며 회의실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이혼할 거야.”

장관 딸인 약혼녀,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 먹으면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지서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태하의 경직된 눈매 끝이 기묘한 각도로 일그러졌다.

“최 전무님. ST텔레콤 정윤건이 진행하는 모빌리티 사업 BMW랑 MOU 맺은 거 아시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덕분에 어머님…… 이주애 여사님이 모임 여기저기 다니면서 최 전무 뒷바라지하느라 바빠지셨다고 증권가 지라시가 시끄러워요.”

그룹 내에서 태하와 후계 구도를 두고 경쟁하는 육촌을 언급하자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어머니 고생하시는데 아들이 기대에 부응해야죠.”

지서가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 하자 태하가 다시 거칠게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놨다. 몸이 흔들리고 벽에 등이 부딪치며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벽처럼, 태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팔을 뻗어 남자를 밀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양어깨를 잡아 찍어 눌렀다. 지서는 떨리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긴장과 두려움, 혐오와 당황. 갖가지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쓰레기.”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냐는 듯, 태하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맞아, 쓰레기니까 조카가 이모한테 발정 났지.”

태하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손이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비틀고 어깨를 움직여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 자신을 보도록 고정했다. 손의 감촉, 크기, 온도. 모든 것이 은기와는 완벽하게 달랐다.

또다시 지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끌어 올려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은기^^♥]

저장된 이름을 확인한 태하의 미간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전화받지 그래. 지금 쓰레기한테 당할 거 같다고 어린 애인한테 울고불고. 볼만하겠다. 그렇지?”

태하가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지서는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놔.”

“아침 먹자 지서야. 나 배고파.”

“이거 놓으라고!”

밀치려 했지만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어차피 고은기 못 와. 영국에 있잖아.”

“……개새끼.”

“그러게 숨어서 놀았어야지. 나 발작하게 회사에서 보란 듯 뭐 하는 짓이야.”

얼굴을 잡은 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제로 입술을 벌리려는 듯 뺨을 누르는 악력이 강했지만 지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한 손아귀 힘에 그녀의 뒷머리가 잡히고 고개가 비틀렸다. 입술에 뱀 같은 혀가 닿았다. 그가 한 번 더 턱을 움켜쥐자 강제로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더 깊게 파고드는 순간 지서는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밀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회의실 의자가 넘어졌다. 지서 자신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리, 태하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 내리며 내뱉는 욕설이 공간을 채웠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뒤로 넘긴 그가 의자를 걷어찼다. 회의실 한쪽에 세워진 화이트보드가 쓰러지고 책상이 벽에 부딪치는 요란한 소음이 사방을 울렸다.

지서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경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손등으로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방금 전, 입술에 닿았던 혀의 감촉이 소름 끼치고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거겠지. 지서는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반성하고 앞으로는 신경 쓰겠습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크게 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예상대로 소리를 듣고 왔는지 스포츠 팀 편집자가 회의실 문 앞에서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서 리더.”

“별일 아니에요. 제가 전무님께 실수해서 질책받았어요.”

적당히 대꾸하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화장실로 향한 지서는 눈에 보이는 아무 칸이나 들어가 무너지듯 앉았다. 겁먹고 긴장해 몸에 힘을 준 탓에 어깨가 뻐근하고 아프다. 은기…… 은기에게 전화해 안심시켜야지. 휴대폰을 보려는데 갑자기 진동이 울리며 팝업창이 떴다.

[나 공항이에요. 지금 한국 들어가요.]

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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