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안의 질식사
“오지 마. 괜찮아.”
아니, 왔으면 좋겠어. 보고 싶어.
― 지서 씨가 부르면 나는 가요. 말해 봐요.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응…… 아니, 오지 마. 아, 음.”
이게 아닌데.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 지서 씨, 나 보고 싶죠.
그 물음에 지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당장 얼굴을 보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보고 싶어. 기다릴게.”
빨리 와 줘.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괜찮지 않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빨리 보고 싶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어리광을 부려 보는 게 난생처음이라 걱정이 앞섰다. 또 경기가 있을 텐데. 장거리 비행을 하면 무릎에 좋지 않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 번쯤 무모하게 굴고 싶기도 해 오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서는 지금 당장 은기가 보고 싶었다.
급하게 항공편을 끊는 바람에 경유해 온다고 했다. 중간에 한 번 연락이 왔지만 경유편으로 갈아타느라 급한지 길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텐데 은기는 질문을 피하는 눈치였다.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안다. 지서가 불편해할까 봐 참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도. 타인으로부터 이런 세심한 배려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은기를 어린애 취급 했으면서 정작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것은 지서 자신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지서는 모니터 한쪽에 세계 지도를 띄워 두었다. 은기가 탄 비행기의 편명을 입력하고 일하다 틈날 때마다 어디쯤 오는지 멍하니, 하릴없이 바라봤다. 작은 비행기 표시가 조금씩 한국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아침에 그렇게 부딪친 후 프로젝트 미팅에 들어갔지만 태하와의 충돌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회의에서 나오자마자 그동안 몇 번 이직 제안을 했던 헤드헌터에게 메일을 보냈다. 미디어 분야에서 업계 1위인 스퀘어보다 더 나은 대우와 인프라를 갖춘 곳은 없을 테지만 이제 모든 선택의 최우선 고려 사항은 은기였다. 그가 불안해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관성처럼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른 어떤 방향이 있을까 생각하다 갑자기 내 꿈은 뭐였는지를 떠올린다. 내가 꿈을 가졌던 적은 있었나. 평생 타인을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에만 몰두하여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잊고 산 것 같은데. 방치되었던 꿈을 이제야 들여다보다가 스스로가 볼품없어 조금 슬펐다.
그동안 가진 게 없다 생각했는데 곰곰이 따져 보니 자신은 버려야 할 게 더 많은 사람이었다. 버리고 나니 이제껏 전부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 괴리감에 방황하느라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박 여사를 보내고 은기를 만났다.
다시 모니터 화면의 지도를 본다. 커다란 세계 지도 위 비행기가 손가락 한 마디쯤 더 한국과 가까워졌다.
은기가 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안나는 따뜻한 차를 내리며 꽃을 고르는 여자를 몰래 훔쳐보았다. 처음엔 원데이 클래스 수업만 듣다가 언젠가부터 정규 과정을 듣기 시작한 회원이었다. 보통은 친구들끼리 취미 삼아 플라워 클래스를 듣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는 늘 혼자였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지 필요한 말 외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꽃을 만질 때 미소 짓는 게 보기 좋아 기억에 남는 회원이기도 했다.
길쭉하면서도 가느다란 체구, 한 줌 허리와 매끈한 손. 진주 귀걸이가 참 잘 어울린다. 편한 차림으로 주말 클래스에 왔을 땐 마냥 청순한 타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느낌이 좀 다르다. 바지 정장 때문인가. 뭔가 포스 있는 전문직 느낌이 나기도 하고.
“고르셨어요?”
안나가 국화차를 건네며 묻자 여자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좀 더 따뜻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이거 국화 맞죠?”
노란색과 흰색의 방울 모양 폼폰 국화를 한 송이씩 고른 여자가 안나에게 물었다.
“네, 귀엽죠? 여기에 오렌지색 메리골드랑, 색감 다양하게 풀 많이 해서 목화를 추가하면 어떨까요? 목화가 따뜻한 느낌이 있거든요.”
안나가 솜뭉치 같은 목화를 꺼내 보여 주자 여자가 유심히 보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스 없는 날인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직접 만들어 주고 싶어서요.”
“마침 주문도 없었는데요, 뭘. ……혹시 남자 친구?”
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여자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많지 않아 차갑고 쌀쌀맞은 타입인 줄 알았더니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면 목하 열애 중인 게 확실하다.
“외국에 나가 있어서 매번 사진으로만 보여 줬거든요. 그런데 오늘 갑자기 들어온다고 해서요.”
차분하게 말하지만 여자의 뺨은 조금 붉었다.
꽃과 어울리는 풀을 조합하고 포장지까지 이리저리 대어 보는 모습이 신중하고 진지했다. 클래스에 참여할 때마다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느낌이긴 했는데 그게 남자 친구일 줄은 또 몰랐다.
오늘은 주문도 없고 일도 빨리 끝나 얼른 가게 문 닫고 치킨에 맥주나 들이켜려 했는데 불쑥 오후에 일정이 되냐는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안나는 왠지 그녀라면 문을 더 열어 둬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이래서 내가 꽃을 시작했지. 안나는 몰래 웃으며 사랑에 빠진 회원님이 남자 친구에게 선물할 꽃을 만들 테이블을 정리했다.
“지서 님, 이쪽이요.”
안나는 괜히 신나 이것저것 다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시간 급하세요? 공항으로 가시는 거죠?”
“네, 밤늦게 도착해서 여유 있어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들어가 봐야 하지 않냐고 묻는 뉘앙스였다.
“아, 저 시간 많아요. 전 남자 친구 없거든요!”
안나가 발랄하게 대꾸하자 회원님이 풉 미소를 지었다.
“자, 회원님. 일단 풀 다발부터 세팅할게요. 이게 유칼립투스 벨, 이게 유칼립투스 폴리안, 그 옆에 있는 잎이 기다란 게 골든 와틀이에요. 느낌이 다 다르죠?”
안나가 설명을 이어 가자 회원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가 잡은 줄기를 보았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잎의 각도를 조절해 가며 잡는 게 역시 안나의 회원님은 감각이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 안나는 풀의 종류를 이것저것 추가했다. 회원님이 이렇게 다 써 버려도 되냐 묻기에 내일 또 주문하면 된다고, 가격은 신경 쓰지 마시라고, 대신 예쁜 사랑 하시면 된다니까 부끄러운지 손에 들고 있던 풀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풀 종류에 따라 질감이나 형태도 다 달라서 이렇게 높낮이를 달리해서 섞으면 더 풍성하고 볼륨감이 살아요. 자, 보세요. 어디 들판으로 나온 거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닮았어요.”
성숙한 이미지인 회원님의 풀 다발을 닮은 남자 친구라. 연하네. 연하 같다.
오렌지와 옐로우에 크림색 꽃을 더하고 목화를 추가하자 따뜻하고 섬세한 느낌의 커다란 다발이 완성되었다. 꽃다발이 주는 계절감이 마음에 드는지 안나의 회원님은 꽃을 엮고 다듬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 때 조금 경직되어 있었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안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서비스로 머리핀을 꺼내 솜씨를 부려 보았다. 순식간에 남은 꽃을 엮어 핀에 고정하고 괜찮다며 수줍어하는 회원님의 머리를 올려 꽂아 주었다. 웨이브 진 풍성한 머리카락이 핀 아래로 살짝 흘러내려 떨어지는 곡선을 보니 가을인데도 봄이 온 것 같았다. 여리여리한 어깨와 흰 피부 덕분에 꽃의 색감이 더 살아났다. 화관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 너어무 예뻐요. 저 사진 찍어도 돼요? 얼굴은 안 나오게요. 저희 샵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요.”
“어…….”
“그럼 안 올리고 사진만 찍을게요. 저 혼자 볼게요. 네? 아까워서 그래요.”
안나가 애원하며 말하자 회원님은 조금 생각하더니 흔쾌히 SNS 업로드를 허락했다.
안나는 가게의 포토 존에서 회원님을 열정적으로 찍었다. 이렇게 찍어도 예쁘고, 저렇게 찍어도 예쁘고. 꽃도 예쁘고 회원님도 예쁘다.
안나는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행복하게 가게를 나서는 회원님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지서 님 부케는 꼭 제가 만들게 해 주세요.”
회원님이 꽃을 만질 때마다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면 안나는 회원님을 위한 부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색감은 은은한 파스텔 톤의 핑크빛. 우리 회원님에게 딱이었다.
밤의 공항은 낮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특히 그곳이 출국장이 아니라 입국장이라면 더 그렇다. 조도가 낮아진 조명과 고여 있는 공기. 소리는 동그랗게 퍼지며 어떤 파동을 만들어 낸다.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든다. 불투명하게 코팅된 유리문 아래, 누군가의 발이 보일 때마다 혹시 너일까 싶어 모든 걸음을 유심히 살핀다.
지금, 지서는 입국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벤치에 앉아 은기를 기다린다.
오전에 있었던 태하와의 충돌 때문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은기를 기다리며 꽃다발을 만들고 그 꽃과 함께 공항에 오는 동안 많이 무뎌졌다.
하지만 뭐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서의 오래된 버릇이었고 그를 만나며 많이 다듬어졌지만 모조리 다 없애지는 못했다. 과거의 남자 문제가 이렇게 반복되다간 언젠가는 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과도한 걱정에 빠졌다가,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로 온다는 것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가, 커다랗게 부푼 마음을 애써 누르며 우울해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감정이 요동칠 때면 꽃을 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은기를 닮은 꽃다발의 은은한 향이 불안을 달래 주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커다란 보름달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늦은 밤 세상은 잠들어 어둡게 침잠하고 곧게 뻗은 길 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늘 가득한 달과 별. 옆자리 조수석엔 그를 닮은 꽃. 그리고 은기는 하늘을 날아 그녀에게로 오고 있었다. 그 한적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지서에게 기묘한 용기를 심어 주었다. 그와 함께하는 나라면 행복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입국장 위 전광판, 은기가 탄 비행기 옆에 착륙 표시가 떴다. 급하게 공항으로 갔다고 했으니 짐도 없을 거고 그 보폭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으면 금방 그녀에게 올 것이다. 저 문으로, 황홀하게 웃으면서.
[도착.]
아니나 다를까. 진동 소리와 함께 조바심 가득한 메시지가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은기에게서 오는 메시지와 전화는 진동도 다르게 들렸다. 진동의 강도도, 간격도 다른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항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고 답하려다 지서는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 그만두었다.
[지서 씨, 나 한국 도착했어요.]
응, 난 너 기다리고 있어.
답하는 대신 팝업창을 보며 웃었다.
[혹시 자요?]
힘들게 경기 뛰고 바로 비행기를 탔으면 많이 고단할 텐데. 미리 장이라도 봐 둘 걸 그랬나 생각하며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떠올렸다. 늘 텅 비었던 지서의 냉장고는 지난여름 이후로 늘 가득 차 있었다. 매번 끝인사로 잘 먹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은기의 잔소리 덕분이었다.
[전에 지서 씨가 알려 준 그 주소로 갈게요.]
시무룩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러다 엇갈리면 어쩌지 고민하는데 잠시 열린 입국장 문 저 너머로 큰 키의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남자. 거리가 꽤 되지만 지서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분명 은기였다.
잠시 후 또 문이 열리고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은기가 보였다. 하지만 다시 자동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벤치에 올라서면 잘 보일까.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데 또다시 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났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닫히려던 자동문이 다시 활짝 열리며 은기가 나왔다.
“뭐야, 왜 메시지 답 안 했어요.”
지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펜스를 돌아 나온 은기가 그녀가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그 거리에서 어떻게 알아봤어?”
“나 시력 좋아요. 축구장 맨 끝에서도 다 보는데 이 거리가 안 보일 거 같아?”
은기가 툴툴거리듯 대꾸하며 지서를 끌어안았다. 키 차이 탓에 몸이 들리며 두 발이 허공에 떴다.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최태하 문제로 그가 화났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좀 섭섭할 뻔했는데.”
그의 어깨에 귀를 대고 있어 그런지 은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깊은 울림이 스민 나긋하고 다정한 말씨. 기계를 거쳐 전파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제대로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나 공항 안 온 줄 알고?”
“네, 어떻게 내가 온다는데 잠이 들 수 있지? 말도 안 돼. 이러면서 나왔는데 지서 씨가 보이잖아.”
은기가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더 꽈악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몸을 감싸는 반가운 온기와 익숙한 체향. 날 사랑에 빠지게 했던 지난여름의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그의 품 안은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편안하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은기가 이마를 맞대고 슬쩍 뽀뽀를 했다. 턱이 닿자 까슬한 감촉이 느껴진다. 면도할 새도 없었겠지. 경기 끝나고 바로 온 탓에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그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은기야, 이제 그만.”
커다란 남자가 진하게 포옹을 하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요.”
“집에 가자. 응?”
지서는 그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불안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다.
은기에게 꽃을 주었다. 차 내부가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운지 그는 휴대폰 플래시까지 켜 열심히 확인했다. 머리핀은 그의 후드에 꽂았다. 이게 뭐냐면서도 은기는 지서가 꽂아 준 대로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눈치를 보다가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서 씨는 자신과 다르게 한 손으로도 운전 잘하지 않냐는 능청스러운 말에 그녀는 오른손을 얌전히 그에게 맡겼다.
지서는 차창을 조금 열었다. 불어온 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쳐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다. 문득, 언젠가 밤이 부드럽다는 생각을 했던 게 떠오른다. ……그래, 그와 처음으로 키스했던 그 밤이었지. 반추하는데 그가 더 깊이 깍지를 낀다. 따스한 온기에 그녀의 밤이 빈틈없이 빼곡히 차오른다.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건 내 시간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다.
언제 가야 되냐 물으니 정오 비행기라고 한다. 이번엔 채 스물네 시간도 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아쉬워 지서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더 깊이 깍지를 꼈다.
달빛이 너와 나를 관통한다.
가을이 깊어 간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덥석 입부터 맞추었다. 쪽쪽쪽. 과장되게 소리를 내며 온 얼굴에, 손에 키스했다. 집도 궁금하고 뽀뽀도 하고 싶고. 그는 바삐 움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말에 대청소라도 할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게 처음이라 신경이 쓰였다.
“잠깐만. 잠깐만, 씻고. 씻고 해.”
지서가 떼어 놓으려 은기의 어깨를 밀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뽀뽀부터 하고요.”
“너, 고은기, 너 배에서 소리 나. 기내식 안 먹었어?”
“아…… 안 먹혀서요.”
“뭐 좀 먹지.”
그가 그녀를 놓아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살인 충동을 느끼며 비행기에 탔는데 음식이 넘어가나.”
의미심장했다. 그제야 은기가 왜 급하게 한국에 왔는지 실감이 되었다.
“……미안.”
“뭐가요?”
“그냥, 전부 다.”
은기는 아무런 말 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를 미뤄 두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머리로는 안다. 확실하게 짚고,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은기야.”
두려웠다.
“아까 우리 통화할 때요.”
“……최태하 맞아.”
지서는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계속 그런 건 아니죠?”
“응. 그냥 갑자기 이성을 잃은 거야.”
원래 그래.
덧붙이자 창밖을 바라보던 은기가 뒤돌아서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파르스름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차갑고 냉정한, 낯선 얼굴. 괜히 긴장이 돼 지서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팔을 들자 소매가 넓은 블라우스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팔 왜 그래요?”
갑자기 빠르게 다가온 은기가 그녀의 왼팔을 잡아챘다. 멍 자국. 지서 자신도 몰랐던 것이었다. 회의실에서 몸싸움을 할 때 생긴 것 같았다. 당황해 숨기려 했지만 은기가 워낙 강하게 붙들고 있어 소용없었다.
“때렸어요?”
“아니야. 그냥…… 벽에 부딪쳐서 그래.”
지서의 대답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은기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짜증스럽게 모자를 벗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어색한 침묵이 겹겹이 차올랐다. 소음이라곤 시계 초침 소리뿐. 갑자기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지서는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잠시 후 해가 뜨면 그는 돌아가야 하는데.
“당장 회사 그만둬요.”
등을 보인 채 서 있던 은기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불쑥 말을 꺼냈다.
“당장 그만둬요. 당장. 오늘부터 가지 말아요.”
흥분한 얼굴로 격앙돼 말하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놀랐는지 은기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화를 삭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 보여서 지서도 아팠다.
“……아니, 아니야.”
은기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소리인데 그 씹…… 아니, 최태하랑 사이 의심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에요.”
욕설을 내뱉으려던 은기가 황급히 말을 바꾸며 덧붙였다.
“그냥, 싫어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은기가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결국 그는 또 져 주려 한다.
“은기야, 나 봐.”
지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싫어요. 지금 표정 안 좋아요.”
“은기야.”
“회사 그만두라는 말 못 들은 걸로 해요.”
“들은 걸 어떻게 그래.”
꿈은 아닐까. 안으면 사라지는 환상일 것만 같아 지서는 잠시 망설이다 뒤에서 은기의 허리를 안고 등에 얼굴을 묻으며 기대었다. 몸을 맞대자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현실이구나. 안심이 됐다.
“널 신경 안 쓰면 누굴 신경 써.”
“……맞아요. 사실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은기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지서의 손을 포개어 감쌌다.
“내가 어떻게 할까?”
“회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넌 어떻게 하고 싶고.”
“같이 살고 싶어요.”
은기가 지서의 팔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강한 힘이었지만 아프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잠시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단지 눈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실내엔 거실 스탠드 조명만 켜 두었지만 그의 눈빛은 또렷하고 선명했다. 새까맣고 깨끗하며 빈틈없이 가득 찼다. 숨기는 걸 싫어하고 교묘한 것을 피하며 늘 올곧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사람. 약점이 될까 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피하며 모호하게 선을 밟은 채 손해 보지 않도록 계산하고 의심하며 살아온 자신과는 분명 다르다.
“정말 나랑 살고 싶어?”
“네. 나…… 지서 씨 남편 하고 싶어요.”
열어 둔 창으로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흰 커튼이 날리며 베일처럼 넓게 펼쳐져 살랑거렸다. 그 광경이 어떤 버튼을 누른 것처럼 두 사람을 지난여름의 무연으로 데려다 놓는다. 풀 냄새가 밴 바람, 늘 꼼꼼하게 쳐 둔 모기장, 답답할 정도로 꼬옥 안아 주던 은기.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 둘 펼쳐진다.
“나 잘 벌어요. 주급 1억 8천 정도 되는데…… 수당까지 다 합치면 연봉 100억 좀 넘어요.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8강 가면 더 많아져. 옵션 계약도 했거든요.”
“너 나한테 돈 자랑 해?”
“잘 봐 달라고 어필하는 거지.”
그러면서 은기가 은근슬쩍 ‘자기도 돈 자랑 해 놓고.’라며 작게 덧붙였다. 장례식 도와줬다고 봉투 준 걸 말하는 듯했다.
“그 돈 다 줄게요.”
“……뭐래.”
“그러니까 나랑 살아요.”
속삭이며 은기가 깊게 키스했다.
밤이 너무 짧다.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자 지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벽에 걸린 시계를 스쳤다. 누군가 시간을 토막 내 밤만 쏙 빼 간 것은 아닐까. 벌써 하늘이 환하다.
“피곤할 텐데 좀 자.”
지서가 은기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경기 뛸 때는 시야가 방해돼 늘 왁스로 머리를 넘기고 나와 이렇게 앞머리를 내린 건 오랜만에 본다.
“싫어요. 시간 아까워. 잠은 죽어서 잘 거야.”
은기가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어 주물렀다. 그러다 만지는 것으론 성에 차지 않는지 고개를 살짝 숙여 가슴을 물었다. 여태 빨리고 깨물려 부어오른 유두가 시큰하고 입에선 저절로 나른한 신음이 나왔다. 전후반 풀타임으로 경기를 뛴 후 열다섯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며 밥 한 끼 안 먹고 잠 한숨 안 잔 것은 은기인데 먼저 지친 쪽은 지서였다.
그가 몸을 틀어 그녀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어깨, 자를 대어 그은 것 같은 쇄골을 타고 새벽빛이 흘러내렸다. 은기의 몸은 지난여름보다 더 깎아 놓은 것처럼 매끈했다. 군살이라곤 없는 날렵한 근육들이 촘촘히 자리 잡아 완벽한 균형을 만들어 낸다. 트레이닝복을 아무렇게나 걸쳐도 도드라질 정도로 키도, 밸런스도, 비율도 절묘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벗었을 때. 움직임이 둔해져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게, 그렇다고 근육이 빠져 체력이 떨어지지도 않게 시즌 중엔 철저하게 식단을 지키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트레이닝 센터를 찾아 몸을 관리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타고난 피지컬도 좋았지만 역시 노력도 어마어마했다.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
지서가 장골 쪽에 난 멍을 보며 말했다. 물결치듯 섬세하게 이어진 근육 위, 불그스름한 자국이 신경 쓰였다.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매만지자 그의 몸이 움찔하며 단단한 흉골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안 아파?”
“경기 중엔 흥분해서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라 아픈 줄도 몰라요. 나 뼈 부러진 거 모르고 뛴 적도 있어요.”
그 말에 지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은기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원래 그래요. 심판 안 볼 때 팔꿈치로 몰래 갈기고, 할퀴고, 잡아당기고. 나도 하고, 걔도 하고.”
유니폼 아래 속살엔 경기 중 생긴 타박상이 숨어 있었다. 딱지가 앉은 쪽은 지난 경기에서 생긴 것, 아직 붉은 것은 바로 전 경기에서 생긴 것이겠지.
“그러다 걸리면?”
“카드 받는 거지 뭐. 골 먹히는 것보단 몸빵이라도 해서 막는 게 더 나으니까. 이제 조심해야 돼요. 나 여기서 카드 더 수집하면 징계받을지도 몰라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은기가 다리 사이에 그녀를 가두어 깊이 옭아맸다. 길고 매끈하며 단단한 다리가 주는 압박감이 기분 좋았다.
“너 왁싱해?”
문득 생각나 지서가 물었다.
“네.”
아아. 작게 소리 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은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 예전에 이상한 생각 했었어.”
“무슨?”
“애가 너무 매끈하게 생겼는데 중졸에 외국 생활 한다 그러지. 그래서 찾아봤더니 네덜란드는 마약이 합법이라 그러지. 게다가 타투는 있는데 체모는 없지. 혹시 얘 뭐 이상한 일 하는 거 아닐까.”
은기가 황당하단 얼굴을 했다.
“거기 애들은 막 타투 온몸에 다 해요. 난 이거 우승 기념으로 하자고 그래서, 아빠한테 안 걸리려고 작게 한 건데.”
다 큰 아들이 아빠라니. 사랑받으면서 자란 티가 난다.
“너무해. 날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말야?”
은기가 과장되게 상처받은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다음에 한국 들어오면 여기에 지서 씨 이니셜 새길 거예요.”
그가 자신의 손목을 보여 주며 웃었다. 경기 전 늘 키스하는 딱 그 자리였다.
“그리고 체모는 그라운드에서 넘어지면 잔디랑 엉키고 마찰돼서 상처도 잘 나고, 스프레이나 아이싱 잘못하면 피부에 염증 생기거든요. 땀도 많이 흘리니까 왁싱하는 게 깔끔하기도 하고 트레이너들 관리하기도 좋고.”
그러면서 은기가 자신의 온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나 속살은 더 부들부들하지 않아요?”
속삭이듯 말하며 그가 슬쩍 자신의 하반신을 그녀의 다리에 가져다 댔다. 단단한 허벅지로 은근하게 누르니 지서가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발기한 성기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 예민한 곳을 자극했다.
“또?”
“응, 한 번 더 해요.”
은기가 협탁에 아무렇게나 쏟아 둔 콘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섹스로 채우고 있었다.
“콘돔 불편하다면서.”
무연에서 처음 했을 때 썼던 콘돔은 네덜란드의 팀 동료가 선물로 준 거라고 했다. 그래서 불편한 걸 크게 몰랐다고. 은기는 경기 끝나고 바로 왔으니 가진 콘돔이 없었고 그건 지서 역시 마찬가지라 그가 급하게 편의점에 다녀왔다. 눈에 보이는 걸 아무거나 사 와서 억지로 끼우기는 했지만 꽤 불편해해 놓고 또 하고 싶어 한다.
“그 정도는 참아야지. 괜찮죠?”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아래로 향했다. 가느다란 발목을 움켜쥐어 자신의 허리에 다리를 감게 하고는 삽입하기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서는 가만히 팔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머리카락이 서늘하다.
“힘들면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귀에, 목에, 어깨에, 차례대로 은기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접촉할 때마다 간지럽고 찌릿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잔디에 베여 길게 상처가 난 손이 그녀의 연한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만졌을 때보다 더 은기가 힘을 주자 지서는 작게 신음하며 숨을 들이켰다.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체온이 올라갔다. 뒤꿈치가 간질거리며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이어졌다.
“으음.”
손등으로 입을 막았는데도 계속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자극은 아무리 반복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은기가 손을 넓게 펼쳐 양 가슴을 가득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고 주무르는 동시에 비틀어 자극한다.
그래도 부족해. 괜히 안달이 나 지서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의 허리를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둥글게 원을 그리며 유륜 주변을 맴돌던 손가락이 젖꼭지를 잡아 거칠게 비틀었다. 가라앉았던 여운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인지 지서는 약간의 자극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식었던 몸이 그의 품 안에서 다시 뜨거워졌다.
“하읏.”
쾌감이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찌릿한 전율에 지서가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려 했지만 커다란 은기의 몸에 가로막혀 도망칠 곳은 없었다. 다리 사이에선 뜨거운 뭔가가 울컥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더 예민한 거 같아.”
은기가 콘돔을 뜯어 페니스에 끼우며 말했다.
“그야…… 오랜만이니까.”
지서는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틀고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그와의 섹스가 처음도 아닌데 왠지 오늘은 낯설고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같이 살고 싶다던 은기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도는 탓인 것 같았다. 남편이 되고 싶다니. 장래 희망 이야기하는 어린애처럼 그게 뭐야. 타박하고 싶은데,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반복되자 지서의 뺨이 붉어졌다. 정작 당사자는 그게 프러포즈라는 인식도 못 하고 있었다.
은기가 그녀의 왼손을 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웃음이 나려 했다. 이로 약지 끝을 살짝 깨물었다가 새가 부리로 쪼듯 손가락 마디마디에 꼼꼼하게 입을 맞추며 올라온다. 은기는 지서의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꽤 오래 약지에 입을 맞추고는 슬쩍 그녀를 보며 웃었다. 보조개가 보기 좋게 파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냈다. 곧이어 은기가 느릿하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온다.
“너 너무…… 너무 커.”
그에게 몸을 열어 줄 때마다 감탄하듯 내뱉는 말이었다. 살살, 적당히 하라고 그녀가 가슴팍을 툭툭 쳤지만 은기는 더 깊이, 뿌리 끝까지 자신을 박아 넣었다.
감당하기 힘든 크기가 몸 안 가득 들이찼다. 그가 왕복으로 움직일 때마다 서로의 점막이 마찰하며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반복되었다. 이미 한 번의 정사로 과민해진 지서의 내벽이 끈적하게 수축하며 그를 옭아맸다. 성기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은기가 잠시 멈춰 음미한다.
모든 것들이 하얗게 휘발되어 날아간다. 아득한 다른 세상으로 빨려 가는 것 같은 느낌.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추락하다가 다시 저 하늘 위로 치솟았다. 감당 못 할 쾌감이 정신없이 반복돼 지서는 차라리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사랑해요.”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은기가 말했다. 지서는 대답할 겨를이 없어 그에게 자신의 손을 뻗어 내밀었다. 은기의 커다란 손이 흔쾌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지서의 귓가로 몸을 굽혀 주문을 걸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까 한 거 프러포즈 아니야. 잊어요. 빨리 잊어. 나중에 제대로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응?”
애원하며 되묻자 지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의 눈매가 느른하게 풀어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지서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어떤 신호처럼 몸 안에 자리 잡은 그의 성기가 좀 더 팽창하며 빈틈없이 그녀의 안을 빠듯하게 채웠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알 수 없는 비율로 뒤섞인 야릇한 쾌감과 통증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전신으로 그의 크고 단단한 몸이 느껴진다. 청량한 체취와 매끈한 피부, 따뜻한 체온. 모든 것이 아늑하고 좋아 지서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은기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아침 햇살이 그녀의 가슴팍에서 찬란하게 부셔졌다. 눈부심에 지서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은기는 커다란 몸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그 찰나, 은기는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싶단 생각을 한다. 햇빛조차도. 낮도, 밤도, 모두 훔쳐 나만 볼 수 있게.
시계가 어느덧 오전 6시를 가리킨다. 12시 비행기이니 빠듯하게 잡아도 11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하고, 여기서 늦어도 9시엔 나서야 한다. 시간을 계산하자 은기는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세 달 동안 쌓아 온 것들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세 시간 남짓뿐이었다. 3일 밤낮으로도 모자랄 것 같은데,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데.
“은기야.”
지서가 그를 부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얀 미소가 투명하게 빛난다. 그 순간, 거추장스럽다 생각했던 이 아침이 그에게는 다른 의미가 된다.
“좋아해.”
순간 은기의 얼굴이 굳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가만히 그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지서와 완전히 결합한 상태에서 그가 멍한 눈으로 입을 뗐다.
“한 번만 더 말해 줘요.”
은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좋아해.”
지서가 그의 손을 끌어가 엄지와 검지로 은기의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어떤 의미인지 안다. 알기에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손끝이 떨린다.
“다른 말로도 해야죠.”
은기가 조르며 천천히 지서에게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몸을 들썩이며 그를 비스듬히 보다가 열없이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서 그런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빨리 듣고 싶어서, 심술이 나서 은기는 더 거칠게 밀어붙였다.
“하읏.”
“빨리, 빨리 말해 줘요.”
더 깊이.
“빨리.”
“……사랑해.”
“한 번 더.”
“사랑, 으읏, 사랑해.”
지서는 간신히 참아 왔던 말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처음 해 본 고백은 그녀에게 그 어떠한 쾌감보다 더한 전율을 선사했다. 눈을 감는 날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쏟아지는 햇빛의 각도가, 부드러운 공기의 밀도가, 날짝지근한 몸의 느낌이. 그 모든 것이 완벽해 행복했다.
유한한 세상. 너라는 무한한 바다에 빠져 몸을 내맡긴다.
표류하던 이 마음의 행방, 종착지는 너이다.
그냥 비행기 놓쳐 보는 건 어떨까. FA컵 예선이 있긴 하지만 상대가 5부 리그 팀이라 감독은 2군과 유스 선수들 위주로 로테이션을 돌리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게다가 주말 리그 경기도 하위권 팀이라 벌써 몇 경기째 풀타임을 소화한 은기에게 되도록 체력 보충할 시간을 주겠다며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다. 수비수 로테이션이 충분하지 않으니 아마도 벤치에 앉게 될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체력적으로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놓치고 하루 더 있고 싶다는 소리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은기는 지금 지서의 차 조수석에 실려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너 이렇게 온 것도 신경 쓰인단 말야.”
“지서 씨.”
“안 돼. 당장 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지서가 냉정하게 은기의 말을 자르며 속도를 올렸다. 콘돔을 입에 물고 ‘한 번만 더’를 외쳐 대는 은기 때문에 미적거리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지금 서둘러 공항에 가도 시간이 빠듯하다.
말도 못 하나. 그렇게 빨리 보내고 싶나. 좀 서운했지만 지서의 성향을 알기에 은기는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운전에 몰두한 그녀를 힐끔거렸다. 완전히 집중했는지 지서는 손도 안 잡아 주었다.
강변북로를 빠져나와 방화대교로 들어서자 오가는 차가 한결 줄어들었다. 다리의 한가운데로 접어들자 붉은색의 커다란 물결 모양 구조물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A매치 데이가 끝나고 다시 팀에 복귀할 때면 종종 보던 풍경들이었다. 그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여름을 기점으로 모두 다 특별해졌다.
그런데 계속, 뒤에 보이는 차가 거슬린다.
“은기야.”
“오른쪽 대각선에 있는 흰색 카니발 보이죠.”
다리를 완전히 빠져나와 공항 고속도로에 접어들 무렵 은기가 조수석 쪽 사이드 미러를 보며 물었다.
“응.”
지서 역시 눈치챘는지 차분하게 답했다.
“아는 차야? 에이전시라거나.”
그녀의 물음에 은기는 아예 몸을 돌려 창밖으로 뒤따라오는 차를 확인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구형 승합차였다.
“아뇨. 전 혼자 다녀서 승용차로 픽업 나와요.”
그리고 에이전시에는 한국에 온 걸 알리지도 않았다. 영국에서 일을 봐주는 현지 직원에게 공항으로 가자고 닦달하면서도 한국엔 알리지 말아 달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오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지금 은기가 한국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직원과 지서뿐이다.
카니발이 가까이 붙자 지서는 사이드 미러를 통해 번호판을 확인했다.
“……렌트카네.”
골치 아프게.
지서가 차선을 바꾸자 카니발이 금세 뒤로 따라붙었다. 하필이면 또 계속 조수석 쪽으로 바짝 붙는 게 신경 쓰였다. 선팅을 짙게 한 편이라 누가 탔는지 얼굴이 구별될 정도로 보이진 않을 테지만…….
은기는 지난밤, 몰래 한국에 들어왔을 때처럼 모자를 쓰고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뒤 의자를 젖혔다.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핑계 대기 애매한 상황이긴 한데 그렇다고 저렇게 차까지 동원해서 따라다닐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신인 시절부터 인터뷰를 하고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 은기의 개인적인 연락처를 알고 있는 기자들도 몇 있었다. 그가 한국에 왔다는 말이 돌았다면 직접 전화로 물어봤을 것이다. 굳이 저럴 이유가 없다.
뭘까.
그도 아니면, 짐작 가는 건…….
“기자 같아. 열애설 파파라치 찍는 매체들 저렇게 다닌다고 들었거든.”
지서가 차선을 바꾸며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기사 공급을 계약한 연예 매체 담당자와의 미팅 자리에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연예인 커플들 사이에선 장기 렌트카 번호판을 부착한 승합차 주의보가 내려졌다고.
거기다 또 하나.
‘요즘 쟤 털려고 다들 눈에 불을 켠다는 말이 있어요. 어디 매체는 국장이 사진 팀에 고은기 스캔들 현상금도 걸었대요. 완전 먹잇감.’
바로 어제 스포츠 팀 편집자와 나눈 대화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도대체 한국에 들어온 건 어떻게 안 거지.
“기자라니 설마.”
은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너 인기 많아.”
축구 좋아하기로 유명한 남자 연예인부터 고은기로 축구에 ‘입덕’했다며 경기 중계 화면을 찍어 인증하는 여자 연예인들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은기의 팬임을 밝혔다. 공개적으로 예능 프로그램 섭외를 요청하거나 연예인 조기 축구회에 초대하고 싶다고 언급하는 건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직관을 온 여자 연예인이 SNS에 인증 사진을 올릴 때면 뭐든 엮고 보는 스포츠 팬들 사이에선 사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뒤따랐고 이상한 뉘앙스의 기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지서는 웃어넘겼지만 오히려 은기가 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곤 했다.
“손잡이 꽉 잡아. 따돌릴 거야.”
지서는 차의 에코 모드를 풀고 스포츠 모드로 바꾸었다. 가속 페달을 밟자 엔진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속도를 올리자 차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승합차가 허둥지둥 따라붙었지만 운전 스킬과 자동차 엔진의 차이인지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서울에서부터 내내 미행하던 승합차는 이제 몰래 쫓아간다는 자각도 없어 보였다.
엔진의 소음과 창밖의 바람 소리는 요란했지만 지서의 운전은 안정적이었다. 점점 뒤로 멀어지는 승합차를 확인한 은기가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부담스럽게.”
옆눈으로 봤는지 지서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민망하거나 쑥스러울 때, 그녀는 저렇게 입술을 움직이거나 앙다물곤 했다.
“헤어지기 싫어서요.”
“……차 안 보이지?”
영종대교에 접어들 무렵, 점으로 보이던 승합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전 사진 찍혀도 상관없어요.”
지서는 못 들은 척, 속도를 줄이며 버튼을 눌러 다시 에코 모드로 바꾸었다.
은기는 동요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삐죽거리는 지서를 보다가 넓게 펼쳐진 서해로 시선을 옮겼다. 지서를 무연에 두고 출국했던 그날은 해무가 짙게 껴 시야가 어두웠는데 오늘은 날이 굉장히 맑아 눈이 시렸다. 은기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더듬어 보다가 여기서 영국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어 보았다.
창을 열자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었다. 충동적으로 한국에 와서 지금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게 꿈같았다.
“은기야.”
혹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터미널 맞지?”
“네에.”
은기는 일부러 발음을 길게 끌어 대답했다.
“나 내려만 줄게. 혹시 몰라서.”
기자들이 출국장에도 대기할 수 있으니 꺼려진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알려지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불필요하게 구설수에 오르는 게 신경 쓰여서 그래.”
지서가 가만히 덧붙였다. 은기는 삐진 척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안 그런 척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녀는 꽤 귀엽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괜찮아요.”
“골 먹으면 시즌 중에 한국 들락거리면서 연애하느라 폼 떨어져서 그렇다고 악플 달릴 거 뻔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면서 그동안 꽤 챙겨 봤는지 이제 지서도 이 판의 생리를 대충 파악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악담 심한데 꼬투리 잡히는 거 같아서 별로야. 날 잡아서 다 고소해 버려. 우리 포털은 그런 거 협조 잘해 줘. 댓글이랑 아이디 정보 법무 팀에 요청하면 다 넘겨줄 거야.”
“원래 그래요. 괜찮아.”
“난 안 괜찮아. 왜 시간 들여서 남 욕을 하고 그래? 나 열 명은 아이디도 외웠어.”
“기사 댓글들 보지 말지.”
내 일 때문에 대신 화내 주는 게 마냥 좋기만 하다면, 너무 철이 없는 건가.
“안 보는 게 쉽니.”
지서가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툭툭 핸들을 쳤다. 도대체 뭘 봤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는 건지.
“액막이도 아니고 사람한테 욕받이가 뭐야. 욕받이여서 욕해도 된다잖아.”
이미 은기는 선후배들은 물론 팬들 사이에서도 대한민국 국가대표 팀 차기 욕받이로 낙점되었고, 어차피 그런 말들은 운동을 계속하는 한 더 심해질 게 분명해 그냥 즐기기로 했다. 현 욕받이인 선배의 말에 따르면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나. 그는 자신이 5년 후 대표 팀에서 은퇴할 테니 그때 은기 네게 욕받이 자리를 완전히 물려주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차는 어느덧 2 터미널 출국장으로 접어들었다. 평일이었지만 비행기가 몰려 있는 시간이라 하차장이 제법 붐볐다. 지서가 그중 가장 한적한 곳에 정차하자 모자를 고쳐 쓴 은기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일단, 파파라치 기자들처럼 보이는 차는 없었다.
“들어갈게요. 내리지 마요.”
“응.”
“한 달 후면 A매치 뛰러 오니까, 그때 봐요.”
“……응.”
“사랑해요.”
이제 버릇과 습관이 되어 버린 은기의 고백에 지서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기 두려워서 입에 담기 어려워한다는 걸 아는데도 오늘따라 미묘하게 서운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섹스할 때 처음으로 들어 본 고백이 전부였다. 원래 연애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작은 것에 집착하게 하고 쪼잔하게 만드는 건지, 새삼스러웠다.
“갈게요.”
은기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내디디려는데.
“……사랑해.”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은기는 조금 멍한 얼굴로 지서를 뒤돌아봤다.
“못 들었어요.”
“그…… 아, 음, 맨정신으로 말하려니까 부끄럽다.”
지서가 난감하단 얼굴로 손부채를 만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사랑해.”
같은 말인데도 밤의 고백과 낮의 고백은 무게는 동일하지만 밀도가 다르다.
은기는 불쑥 차 안으로 깊이 몸을 넣었다. 그러곤 운전석까지 다가가 지서를 당겨 입을 맞추었다. 빠르고 기습적인 키스에 놀랐는지 잠시 몸을 떨던 지서 역시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흔쾌히 응했다.
수도 없이 많이,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와 입을 맞추었지만 그 모든 기억 속 오감을 뛰어넘는 감각이 이어졌다. 혀가 섞이는 소리를, 달콤한 맛을, 까슬한 혀와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따스한 너의 체취를, 그리고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지난여름의 너를.
떨어지는 입술이 아쉽다. 밤만 계속 덧붙여 끝도 없이 이어 뒀다면 계속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댈 수 있었을까.
“나 가요.”
“응.”
“전화할게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은기가 차에서 내렸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몇 번 그녀 쪽을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빠르게 옮겨 출국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지서는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핸들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미소, 목소리, 향기. 그의 모든 것에서 특유의 응집력을 느끼곤 한다. 따스한 물 같은 편안함과 흘러넘치지 않게 붙들어 주는 표면장력 같은 것을.
그녀의 불안은 그의 깊은 입맞춤에 질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