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7)

13. 빈집

뒤따르던 승합차의 정체는 예상보다 빨리 밝혀졌다.

“이 팀장 운전 잘한다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지서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본 남자는 자리를 권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태블릿 PC를 밀어 주며 말했다. 지서는 액정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태블릿 PC엔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의 두 사람이 있었다. 은기, 그리고 지서 자신.

은기를 보낸 다음 날 지서는 느닷없이 회장실로 불려 올라갔다. 임원 회의에서 PT를 한 경험은 있지만 다이렉트로 호출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조용히 비서실의 말을 전한 본부장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거 아니냐며 예상되는 게 없냐고 지서를 다그쳤다. 회장실. 최명훈. 이주애의 남편이자 최태하의 아버지. 추측할 만한 연결고리는 이것뿐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회장님께서 사람을 붙이신 거였나 봐요.”

지서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며 태블릿 PC 속 사진을 응시했다. 공항, 지서의 차에서 키스하는 사진이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공항에도 대기 중인 팀이 있었던 듯했다. 어쩌면 은기의 여권 정보를 이용해 사전에 편명까지 다 체크해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법이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 최명훈에겐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일 테니.

“사진 잘 나왔네요. 기념으로 가지고 싶을 정도로요.”

꽤나 맹랑한 지서의 말에 무표정했던 최명훈의 얼굴에 소리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회장실 비서라면 입 무거운 걸로는 손꼽히겠지만 괜히 신경이 쓰인 지서는 태블릿의 버튼을 눌러 화면을 꺼 버렸다. 두 사람이 앉은 원형 테이블로 다가온 비서가 지서와 명훈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행동이 깔끔하고 숙련된,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의 것이었다.

비서가 나갈 때까지 지서는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명훈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굵고 거친 남자의 손이 느릿한 박자로 테이블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어떠한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신경질적으로 느껴졌다.

회장실 내부 역시 그의 이러한 성향이 짙게 묻어났다. 창이 작아 실내가 어두웠고 적은 광량 때문인지 천고가 높았음에도 공기가 무거웠다. 한편에 나란히 놓여 있는 난 화분조차도 정물화처럼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정적이며 강박적인 성향이라고 했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태하는 아버지의 이러한 성향을 못 견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맹랑하네.”

최명훈이 품평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붙인 건 아니고, 내가 사진을 기자들에게 샀어요. 꽤 거금을 주고.”

생각을 정리했는지 최명훈이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지서는 시선을 들어 최명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엔 기묘한 적막이 흘렀다.

깔끔하게 넘긴 흰 백발, 칼같이 주름 잡힌 양복과 반질반질한 구두.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남자는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도 급하게 회장실로 부른 의도를 파악해 보려 했지만 그에게선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호감도, 적의도, 아무것도 없다.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은 표정 없는 얼굴은 무심한 듯 여유로워 보인다.

용의를 읽지 못하니 솔직하게 나가자. 지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회장님은 이 사진 사실 이유가 없으실 텐데요.”

맑은 연둣빛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아는 게 없었으면 이 사진 거들떠도 안 봤겠지.”

……그렇다면 그는 뭘 알고 있는 걸까.

긴장으로 입 안이 말라 왔다. 지서는 가늘게 떨려 오는 손을 애써 추스르며 찻잔을 들었다. 마음속으로 ‘침착하게’를 반복하며 알맞게 식은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몸 안으로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생각한다. 그가 아는 것. 태하와의 관계인지, 자신이 이주애의 딸이란 사실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주애가 긁을 때마다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악다구니를 써 놓고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니 망설이며 긴장하는 스스로가 이해 안 된다. 여자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싶기도 하고 평생 불안에 떨면서 가슴 졸이며 살았으면 싶기도 하다.

“태하랑 관계 정리했댔죠.”

지서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명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최태하 전무와의 관계는 벌써 몇 달 전에 정리했습니다. 돌이킬 생각도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 팀장한테 고맙게 생각해요. 그 혼사, 태하한테 꽤 중요하거든.”

“그런데 이 사진은 왜 사셨어요. 최 전무랑 찍힌 것도 아닌데요.”

왜 굳이 최 회장이 나섰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진이 공개된다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은기였다. 시즌 중에 연애질하느라 비행기 탔냐는 비아냥 정도는 듣겠지만 그조차도 적당히 포장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상이 알려진다면 여러 가지로 불편은 하겠지만 거금을 들여 사진을 사고 기사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팀장, 그동안 내 안사람이 누구인지 왜 외부에 안 알려졌을 거 같습니까.”

최 회장의 말에 잔을 들려던 지서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제가 이주애 씨 딸인 거, 회장님은 알고 계셨군요.”

태하와의 관계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었다. 그는 이주애의 남편으로서 지서를 부른 거였다.

그래, 이 정도 위치에 있는 남자가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출신이 모호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이 팀장도 알다시피 ST가 요즘 시끄러워요. 텔레콤 최명주가 버려뒀던 자기 아들을 데려와서 내세우기 시작했거든. 태하 경쟁자인 셈인데…… 내 아들이 거기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요. 그래서 안사람이 더 안달복달해서 이 팀장도 좀 괴롭혔을 거예요.”

“많이 괴롭혔어요.”

지서가 말을 고쳐 주자 최 회장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ST 최명훈의 아내가 결혼 전 유부남인 명진국 화백과의 사이에서 낳고 버려둔 딸이 있고, 그 딸이 축구 선수 고은기를 만나고, 고은기는 그 여자 때문에 시즌 중에 눈이 뒤집혀서 한국에 들어오고.”

평범한 연애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꽤나 자극적이다.

“내가 돈 써서 이 사진 안 샀으면 이 팀장은 오늘 11시에 자기 손으로 그 기사 우리 포털 메인 화면에 노출해야 했을지도 모르지.”

지서로서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은기도, 그녀 자신도 거리낄 것이 없지만 되도록 피해 가면 좋을 상황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왔다.

“그동안 내가 알면서도 나서지 않은 건…… 박 여사님과 약속을 해서였어요.”

최 회장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지서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박 여사라면.

“박화순 여사. 이 팀장과 내 안사람의 어머니. 장모님이라는 말은 입에 잘 안 붙네.”

최 회장이 자조적으로 말하고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박 여사님은 우리 쪽과 지서 양 사이에 접점이 생기는 걸 굉장히 끔찍하게 생각하셨어요. 지서 양이 다칠까 봐 걱정하신 거겠지.”

지서는 평온한 척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갑자기 손끝이 저리고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관계도와 상황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박 여사는 늘 지서에게 언니 앞길 망치지 말라며 행여나 찾을 생각도 하지 말고 괜히 연락해서 신세 질 생각도 말라고 잔소리를 해 댔다. 서울로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한 이유도 결국 이주애를 더 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애의 남편이 오너로 있는 회사에 입사한 것도, 최태하와의 관계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박 여사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런 말이 없어 모를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 처음 명함을 주었을 때 복잡한 얼굴을 했던 건 그 때문이었을까.

“……우리 노인네 어디까지 알고 있었어요.”

가끔씩 이질감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지서가 바라본 박 여사와 은기가 말하는 박 여사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서. 은기는 그녀가 지서 자신을 대단히 사랑한 것처럼 말하곤 했다.

“전부 다. 박 여사님은 태하 같은 손주사위 싫다며 두 사람 떼어 달라고 하셨고 난 주애가 원한다면 결혼시킬 생각도 있다고 했지. 우리 지서는 착하고 마음 넓고 건강한 놈 만나야 된다고 하시는데 애비인 내가 봐도 태하가 그런 남자는 아니라 여사님이 반대하시는 이유도 알 만했어요.”

이따금 만나는 남자 없냐고 떠봤으면서 다 알고 있었다니.

“지서 양이라면 태하 정리할 거라고 하시더군. 믿는다고.”

언제부터 날 그렇게 잘 알았다고. 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테이블 아래에 모아 둔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엄지손톱의 거스러미가 거슬려 잡아 뜯자 살갗이 따끔하다. 얕은 통증에도 눈에 핑, 열이 몰린다.

문득 박 여사의 조의금을 정리하며 느꼈던 의문이 뇌리를 스친다.

“……조의금 5,000만 원 회장님이시군요.”

지서의 물음에 명훈이 흔쾌히 시인했다.

“주애가 혹시나 내가 알고 있는 걸 눈치챌까 봐 조문은 못 했어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이주애 씨는 아예 안 왔거든요.”

지서는 까칠하게 대답하고는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공허했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을 해 주시는 거예요?”

“주애는 내가 모르길 원하니까. 내가 보기보다 애처가라.”

“복받았네요.”

지서가 빈정거리자 최 회장이 피식 웃었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눈매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애처가의 얼굴은 아닌데 의외였다.

“사진 사 주신 것 감사합니다.”

지서가 인사하자 최 회장이 서류 봉투 하나를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공짜 아니에요.”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지서는 초연한 얼굴로 봉투 속 서류를 꺼냈다. 부동산 서류였다. 서울 어디의 아파트, 지방 어디의 상가 같은 것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태하랑은 상관없어요. 새아버지가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서 양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박 여사님이 예전에 모두 거절을 하셨는데…… 그때랑은 상황이 달라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이 팀장 밥줄을 끊을 계획이라.”

“전 박화순 여사랑은 달라서 이런 거 거절 안 해요. 그러니까…….”

지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명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퇴사하라는 말씀이신 거잖아요.”

“맞아요. 이 팀장 남자 친구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 주애가 더 주목받을 수도 있거든. 난 아내를 지켜야겠어요. 여사님도 생전에 지서 양이 주애랑 더는 엮이지 않길 바라셨고, 내 손으로 정리해야겠다고 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이 팀장이 스퀘어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인재라 욕심이 나서 미뤄 두고만 있었어.”

명훈의 명료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그러니까 나가요. 최대한 빨리.”

어색한 정적이 이어진다.

‘아내를 지킨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 지서는 괜히 터져 나오려는 허탈한 웃음을 참았다.

최명훈과 주애가 같이 찍힌 기사 사진을 처음 보았던 날이 떠오른다. 대학 때였지. 늦은 밤, 과외 학생 보충을 해 주느라 기숙사 통금 시간이 아슬아슬해 죽어라 뛰었다. 숨 쉴 때마다 목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달렸지만 결국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날, 겨울의 보름달은 서럽게도 밝았다.

박 여사가 해 준 따뜻한 밥과 갈치조림을 생각하며 편의점에서 폐기 직전의 삼각김밥을 샀다. 도서관 열람실은 닫았고 바쁘게 사느라 잠시 신세 질 만한 친구도 없었기에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버석거리는 삼각김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그러다 편의점에 걸어 둔 모니터 화면에서 최명훈과 주애를 봤다. ST그룹 임원 인사 뉴스였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자료 화면이라 최명훈 옆의 여자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가슴에서 들끓던 날카로운 분노가 아직도 생생하다.

최태하가 여자의 의붓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뻤다. 드디어 여자의 약점을 거머쥐었다는 비틀린 쾌감,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길 바라는 속 좁은 바람, 만나자고 했을 때 밤새 준비한 매몰찬 말들. 그때부터 여자를 향한 분노를 원료로 살았다.

“나가라면 나가야죠. 회장님 말씀이신데요.”

지서가 한숨 쉬듯 말했다. 그냥 임원도 아니고, 최명훈은 스퀘어의 오너이다. 애초에 지서의 의사가 중요한 결정이 아니었다.

그동안 난 무얼 좇은 것인지. 순간 길을 잃은 것 같다.

“미디어 본부에서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 팀장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면 시간적 여유를 더 줄 수도 있어요.”

“아뇨, 그냥 지금 그만두겠습니다. 쫓겨나는 마당에 이제 제 알 바 아니잖아요.”

선심 쓰는 듯한 말에 지서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내가 이직처를 알아봐 줄 수도 있고.”

“괜찮습니다. 알아서 할게요.”

지서의 대답에 이 또한 예상했다는 듯 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 끝나셨으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요.”

지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묵례를 했다. 막상 마음을 정하니 잠시라도 이 건물에, 이 사무실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곧장 박스를 구해다 짐을 챙겨야지. 인수인계. 내가 알 게 뭐야.

“결혼하면 연락해요. 축의 하게.”

명훈의 말에 지서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됐습니다. 이걸로 충분해요.”

냉랭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한번, 처음보다 더 깊이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인사했다.

지체 없이 몸을 돌려 회장실을 나가자 등 뒤에서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비서실을 지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이미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어깨가 무거웠지만 지서는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걸었다.

쫓겨나는 상황인데도 왜인지 홀가분했다. 손에 들려 있는 이 서류가 여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는 증명서처럼 느껴졌다. 거절할까. 한순간 고민했지만 굳이 받았다. 자의로 이주애에게서 물러나고 싶진 않았다. 대가가 오가는 거래의 형태인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곧장 박스를 구해다 짐을 정리했다. 지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본부장은 무표정하게 자리를 정리하는 그녀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됐어요. 제가 별수 있나요. 일부러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을 골라 했다.

지서를 힐끔거리던 직원들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 다양한 루머가 돌겠지만 그도 한순간일 거라는 걸 안다. 팀장급이 빠지니 곤란하고 불편하겠지만 결국 또 시간이 지나면 조직은 자리를 잡을 것이다.

아예 없었던 것처럼 흔적을 지우고 싶어 물티슈로 책상을 박박 닦았다. 처음엔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도 점차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점심시간이 되자 우르르 사무실을 벗어났다. 조용해서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프를 길게 뜯어 상자를 봉했다.

머그 컵, 핸드크림, 철야에 대비해 가져다 둔 화장품 몇 개. 꽤 오래 일했는데 생각보다 짐이 별로 없었다. 오후엔 팀원들을 불러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리더 자리를 대신해 줄 선임에게 몇 가지 당부만 하면 될 듯했다. 어차피 뉴스는 예측 불허였고 늘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졌던 편집자들은 지서의 부재도 금방 적응할 것이다.

― 이지서 씨 맞으시죠? 여기 연화당 한의원입니다.

전화가 온 것은 지서가 짐 정리를 마무리할 무렵이었다.

“……네.”

― 지난 2월에 저희 한의원에서 약 지어 드신 거 기억하시죠?

박 여사가 죽기 전, 느닷없이 서울에 찾아왔을 때 갔던 한의원인 듯했다.

“네, 기억합니다.”

― 어머님께서 봄, 가을로 따님 약 지어 달라고 예약하셨어요. 진맥 보고 가을 약 도와드리려 하는데 언제쯤 시간 괜찮으실까요?

사실 박 여사가 지어 준 한약은 반도 먹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챙겨 먹는 버릇이 되지 않아서였다.

“제가…… 지금은 시간이 안 돼서요.”

― 그럼 1주일 후에 다시 연락드리면 될까요? 어머님께서 저희 원장님께 각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하셨어요. 새로 진맥 짚고 약 짓는 게 가장 좋으니까 바쁘시겠지만 꼭 들러 주세요.

한의원 직원의 신신당부에 지서는 적당히 약속을 정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 박 여사가 따로 무언가 길게 이야기한다 했더니 한약 지어 먹을 시기를 상의했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박 여사는 그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문득, 지서의 시선이 창밖에 머물렀다. 길게 이어진 빌딩 숲 위로 가을의 햇살이 쏟아졌다. 하늘이 지나치게 파래서 비현실적이었다. 빛과 색이 너무 강해 눈이 시렸다.

복도 멀리서 걸어오던 태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다가오려 하자 지서는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녀의 의사를 눈치챘는지 등 뒤에서 태하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올해는 유독 계절의 경계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찾아왔다. 은기가 돌아가고 무연을 떠나며 느꼈던 여름의 끝. 집착적으로 일에 몰두하며 20대를 바쳤던 회사와의 작별과 만추.

다음은 겨울이겠지.

부디 따뜻하길.

간절히.

너무나도 간절히 기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꼬박 3일을 앓았다. 적당히 핑계를 대며 전화를 거절했더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은기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협박을 해 댔다.

평소 같으면 혼자 미련하게 며칠 끙끙거렸을 것을 그의 성화에 떠밀려 병원에 가 링거를 맞았다. 병원에 다녀온 게 확실하냐고 묻는 은기에겐 링거 주삿바늘을 꽂은 사진을 찍어 보냈다. 사진을 본 은기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기분 좋았다. 아프고 나니 도리어 개운했고 심리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앓느라 정신이 없어 퇴사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빨리 보고 싶다는 은기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몸이 회복되면 몰래 런던에 가서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평소 같으면 출근해서 분주할 오전 10시에 편하게 침대에 누워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나아졌다는 신호인지 허기가 져 호박죽을 배달해 먹었다. 박 여사가 해 줬던 것만큼 입에 맞진 않아 소금을 넣어 보고, 꿀도 넣어 봤지만 기억 속 그 맛은 나지 않았다.

늦은 밤, 지서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가 멍해 바로 휴대폰을 찾을 생각은 못 하고 잠시 허공을 멍하니 보았다. 누굴까. 이제 그녀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많지 않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은기는 늘 런던 시간으로 점심 식사 전, 지서가 퇴근하고 집에 도착할 무렵 전화를 하곤 했다. 퇴사했으니 회사도 아닐 거고 박 여사가 세상에 없으니 그녀도 아닐 테고, 정신없이 사느라 친구도 없고. 간혹 플라워 클래스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아니었다.

반쯤 눈을 감고 생각하는데 진동이 끊겼다가 곧바로 다시 이어졌다. 몸을 일으킨 지서는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액정 화면엔 퇴사와 동시에 휴대폰에서 삭제해 버린 번호가 떠 있었다.

“네.”

― 너 무슨 꿍꿍이야.

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몽롱하게 꿈속을 뛰어다니던 정신이 그녀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뭐가요.”

― 회사, 회사 그만뒀다며.

“바라던 거였잖아요. 사모님 원하는 대로 됐어요.”

아직 몸살기가 남아 있어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갑자기 오한이 들어 지서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고 목 끝까지 이불을 당겨 덮었다.

“서로 불편하고 불쾌한데 앞으로 이렇게 불쑥 연락하는 일 없었으면 싶군요.”

― ……너.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주애가 입을 다물었다. 지서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텅 빈 도로엔 차 한 대 찾아볼 수 없다. 이 넓은 도시에 나 혼자구나. 친모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얻는 깨달음이 이런 거라니.

“할 말 없으면 전화 끊겠습니다.”

지서는 나직이 말하며 휴대폰의 붉은빛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때, 여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 지서야, 엄마는…….

그 목소리에 순간 지서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엄마라니, 누구 엄마.”

코웃음 치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잃는 거 없이 자기 뜻대로 되니까 이제야 없던 모성애가 갑자기 샘솟았나 보죠.”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만큼 더 말이 날카롭고 신랄했다.

― 지서야, 엄마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너 낳았을 때 나…… 지금 너보다 어려서 철이 없었어. 그냥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울음소리가 들리자 짜증이 치민다.

“본인 잘못을 눈물로 합리화하려고 들지 말아요. 그 소린 우리가 처음 봤을 때 했어야죠. 난 그때…… 당신이 한 말 다 기억하는데.”

어떤 환상에 빠져 있었다. 친모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날 이 작은 마을에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분명 그녀도 날 그리워하고 있었을 거라고.

환상이 깨지자 그 조각들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전부 붙들었다. 때로는 그 파편에 벤 상처 때문에 온몸이 아팠지만 그 고통에서 오는 분노를 원동력으로 살았다.

극심한 피로감과 허탈함이 파도처럼 스민다.

난 도대체 무얼 좇았던 걸까.

― 엄마 납골당, 납골당…… 알려 줘.

“싫어요. 박 여사가 원하지 않았어요.”

왜 박 여사가 눈을 감으며 막내딸에게만, 이지서에게만 연락해 달라 했는지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주애를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딸을 포기하고 마음에서 버렸다.

“빨리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럼 알려 줬을 텐데. 난 그래도 당신이 장례식에는 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노인네는 당신이 안 올 거라는 걸 알았나 봐. 연락하지 말라고 별표까지 해서 메모 남긴 걸 보면.”

전화 너머 주애의 흐느낌이 거세졌다.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당신이 우는지. 지서는 쓰게 웃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꾸욱 눌렀다. 조소하며 신랄하게 여자를 비난하고 싶은데 가슴에 응고되어 있던 그리움이 용해되어 지서의 끓는점을 낮추었다. 매개는 이 순간 또 느끼고 마는 박 여사의 부재이다. 그렇게 액체가 된 슬픔은 혈관을 타고 몸 안으로 퍼지며 눈물로 흐른다.

“날 원하지 않았다고 했죠. 그래요. 당신이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인정할게요. 내 존재 자체가 이주애 씨한테는 폭력이었을 테니 날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당신 감정 존중해요. 나보다 키운 아들이 더 소중할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 박 여사를 부정한 건 난 용서가 안 돼요. 본인 죄책감 덜겠다고 나랑 박 여사 이용하지 말아요. 지금도 생각만 하면 화가 나서 그대로 전부 다 되갚아 주고 싶은데…….”

지서는 말을 길게 끌며 엷게 웃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가득 차서 시간이 모자라다고 투덜거리던 은기라면 지서가 그러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평생 죄책감 속에서 외롭고 화려하게 늙으세요. ST그룹 최명훈의 아내로 살기 위해 자기 엄마 마지막 가는 길도 외면했는데 그 자리 빼면 당신한테 뭐가 남아.”

―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해. 엄마가 다 이야기할게. 너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들으면 나 이해할 거야. 엄마가…….

“사모님, 우리 이제 만날 일 없어요.”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평소보다 날이 어두웠다.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박화순 여사 유언 지켜 줘요. 납골당 찾아가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지서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앉아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정신을 차린 지서는 곧장 무연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계속 최명훈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박 여사님 생전에 지서 양이 주애랑 더는 엮이지 않길 바라셨고.’

여태껏 지서는 그저 박 여사가 자신과 이주애가 엮이길 바라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이지서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주애의 흠결이자 장애물이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딸을 위해서. 오로지 박화순의 진짜 딸인 이주애, 아니, 이지윤을 위해서.

의문이 들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옷을 입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무연에 간다 해서 박 여사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곳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대답해 줄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서는 길을 나선다. 그때가 이른 새벽, 4시였다.

밤이 길어져 가는 내내 길이 어두웠다. 그 길을 달리며 지서는 박 여사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섰던 그 밤을 떠올렸다. 막연하게 공허하다고만 생각했던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박 여사의 시신을 확인하고 차갑게 식은 그녀의 뺨을 꽤 오래 만졌던 기억. 아무리 만져도 차갑기만 해 그때서야 인정한 죽음. 덤덤하게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던 장례식장의 그 작은 방. 그 여름날의 후텁지근한 온도와 습도. 미리 준비한 듯한 영정 사진.

떠올리자,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며 사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시야가 흐려 운전에 방해가 돼 눈을 빠르게 깜빡여 흘려 버렸다.

도무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아침은 그녀가 무연에 다다를 무렵부터 천천히 밝아 왔다. IC를 빠져나올 때쯤엔 차창 밖은 완전히 밝아 밤의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아침을 찾아 무연에 온 기분이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마을에 지서는 조용히 숨어들었다.

빈집에 들어가자 뽀얗게 앉은 먼지가 지서를 반겼다. 49재 때는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납골당으로 향했던 탓에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은 스산했다. 보일러를 틀어 온도를 올리고 걸레를 빨아 온 집 안을 구석구석 닦았다. 또 집을 비우면 다시 먼지가 앉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청소를 끝마칠 무렵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보일러 온도를 올려 둔 탓에 바닥은 뜨끈뜨끈했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지서는 지난여름 이곳에 머물렀을 때 애써 외면했던 박 여사의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주저앉자 시야가 낮아졌다. 낡은 장롱에 기대 방을 둘러보았다. 박 여사는 늘 이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박 여사님은 우리 쪽과 지서 양 사이에 접점이 생기는 걸 굉장히 끔찍하게 생각하셨어요. 지서 양이 다칠까 봐 걱정하신 거겠지.’

잊을 수 없는 최명훈의 말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헤집었다. 왜 다들 박화순 여사가 이지서를 대단히 사랑한 것처럼 말하는 걸까. 은기도, 최명훈도.

‘엄마만 아니었으면…… 너 낳지도 않았어.’

하다못해 이주애도.

지서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뭐든 자신이 하려는 것은 막고 보던 박 여사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 했을 때 공부는 무에 하냐고, 서울 가면 다 잘되는 줄 아냐며 그냥 집에 붙어 있으라 했던 것도 그녀였고 잘 사는 친모한테 행여나 연락하지 말라고 단도리하던 것도 그녀였다.

그랬는데.

가슴이 빠듯하게 죄어들었다. 왜 응원해 주지 않고 뭐든 반대만 했냐고,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따지고 싶은데 박 여사는 답이 없다.

스스로 병원에 갔다고 했지. 마지막을 예감하며 영정 사진까지 찍어 놓고 지서 자신에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눈감는 마당에 얼굴 보기도 싫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자꾸만…… 자꾸만.

지서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방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니 그녀의 생전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낡은 가계부를 펼치니 색이 바랜 흰 봉투가 떨어졌다. 보내는 사람, 박화순. 받는 사람, 이지윤. 주소를 적은 딱딱한 필체는 박 여사의 것이었다. 보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봉투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수취인 불명, 혹은 반송. 봉투를 뜯자 사진 몇 장이 떨어진다. 모두 지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서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꺼냈다. 무언가를 싸 둔 작은 보자기를 풀어내니 배냇저고리가 나온다. 노란 모자도, 어설픈 솜씨로 만든 종이 카네이션도. 뭘 이렇게 모아 둔 거냐고, 입술을 깨물며 다음 상자를 여니 그동안의 성적표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또 다른 상자 안, 비교적 최근 것으로 보이는 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겉면엔 ‘지서’ 단 두 글자뿐이었다. 힘을 주어 썼는지 볼펜의 눌린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지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봉투를 열었다. 박 여사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편지면서 잘 보이게 두지 않고 꽁꽁 숨겨 둔 것도 박 여사다웠다.

지서 보거라.

처음 편지를 남기려니 글이 서툴구나. 말이 엉켜 벌써 종이를 다섯 장이나 낭비했다. 이게 마지막 종이다. 이번에도 엉망이 된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이려니 생각하고 편지 쓰기를 그만두려 한다.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발견할 때쯤이면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내가 가면 이제 하늘 아래 네 피붙이라곤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계속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생각하였다. 허나 여기까지이다. 시간의 흐름은 만인에게 공평해 내가 욕심부려 잡는다 해도 잡히지가 않더구나. 나는 늙었고 이제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할 때가 왔다. 달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는 것처럼 사람이 나고 가는 것 또한 순리이니 너무 슬퍼 말거라.

너에게 내 임종을 지키게 할 자신이 없다. 널 생각하면 생에 미련이 깊어지니 마음 편히 떠날 수 없어 내 숨 끊어지면 불러 달라 청했다. 그리하기로 했으니 섭섭하다면 부디 용서해 다오. 장례 또한 혼자 치르게 할 것 같다. 곁에서 손잡고 보듬으며 지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마지막 길 네 배웅은 받고 싶은 게 늙은이의 욕심이다. 미안하다. 뭐든 할미가 다 미안하다.

내 배로 낳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 내가 널 낳았다면 젖이 돌아 배불리 먹였을 텐데 그러지 못해 가슴을 쳤다. 그래도 넌 내 자식이고 내 새끼다.

나는 배운 것 없는 옛날 사람이라 찾아온 생명이라면 마땅히 세상에 꺼내 두는 게 맞다 생각했다. 너에게 인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이었겠지만 난 널 만나 기뻤던 순간이 더 많았다. 돌밭을 갈며 손이 부르트도록 호미질을 해야 했지만 고단한 농사일도 널 먹이기 위해서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잘 여문 감자가 나올 때면 얼른 네 입에 넣어 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난 이미 오래전 하나뿐인 딸자식을 잃었다. 내가 부덕하여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까닭이지만 그래도 하늘을 탓하며 울었다. 그래서 글줄 읽는 네가 자랑스러웠지만 세상 밖으로 훌쩍 떠날까 두렵기도 했다. 험한 풍파를 만나 네가 다칠까, 거친 세상에 너마저 잃을까 무서웠다. 그럼 난 살지 못한다.

진학을 반대하는 이유를 묻는 너에게 잘했다 칭찬 한마디 못 해 준 게 내 한이다. 큰돈 들여 가르치지 못했는데 내 새끼가 이렇게 잘났구나 몰래 뿌듯했다. 네가 서러워하며 왜 반대했냐고 따져 물을 때마다 난 그저 소리 없이 아팠다. 옆에 두고 곱게만 키우고 싶었는데 모두 내 욕심이었다.

몰아붙이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네 몸 약해진 게 고생한 탓 같아 내 가슴에 두고두고 멍울이다. 반년마다 진맥 짚고 약 지어 달라 부탁했다. 돈도 내 미리 지불하여 좋은 약재로 정성껏 달여 달라 말해 뒀다. 때마다 전화 갈 것이니 일한다 미루지 말고 잘 찾아 먹거라. 몸이 차 걱정이다. 너 닮은 고운 자식 낳으려면 늘 몸 따뜻하게 스스로를 보살피거라.

가끔 서울살이 고단할 땐 고향에 내려와 푹 쉬었으면 해 집을 고쳐 두었다. 네가 좋아하던 꽃도 심고 나름 가꾸었으나 마음에 찰지 모르겠다. 이제 난 죽어 없어도 지서 널 반겨 줄 것들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속상한 일 있을 때, 좋은 일 있을 때 이곳에 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러길 바란다.

세상사 별거 없다. 속 끓이며 애태우지 말고 네 삶을 살아라. 내가 채워 주지 못한 빈자리 탓에 네가 스스로 생채기 만들 때마다 죄스러웠다. 너와 나를 버린 이는 부박하여 제 욕심만 좇을 위인이니 현혹되지 말거라. 당장은 서러워도 지나 보면 부질없고 쓸모없다. 속에 담아 두지 말고 마음의 응어리는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라.

넌 누구보다 똑똑하고 어여쁜 사람이다. 진정으로 널 사랑해 주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너에게도 찾아올 거라 믿는다. 정성껏 사랑하여 오래도록 해로하길 바란다.

정신이 희미하구나. 예상 못 한 눈비에 어깨가 푹 젖어도 금세 해가 떠 말려 주었고 네가 고사리손 내밀어 주어 생이 마냥 고달프지 않았다. 그런대로 살 만했다. 그러니 애달파 말아라.

내 여력이 여기까지다. 부족한 할미에게 와 주어 고마웠다.

배불러 낳지 않았으나 난 네 어미 되어 행복했다.

부디 어여삐 살아 다오.

어느새 한낮이었다.

외울 만큼 편지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은 지서는 종이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뒤 몇 번이고 매만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울기를 수시간.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갔는지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네 어미 되어 행복했다. 부디 어여삐 살아 다오.

마지막 문장이 처음엔 가슴을 할퀴며 상처를 냈다. 두 번째엔 그 상처를 더 후벼 팠고, 세 번째엔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쓰리고 아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짓을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가만히 지서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 무릎 베고 눕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 좋았던 기억도 분명 있었다며 헐뜯고 싸우던 때를 반추하니 그녀와 지나가듯 약속한 제주도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 꿈으로만 그려야 한다는 차가운 현실에 몸이 덜덜 떨리고 추웠다.

두고 가지 못할까 봐, 너 아파하는 얼굴 볼 자신이 없어 임종도 지키지 못하게 하다니.

눈감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한 박 여사를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지고 온몸이 아팠다.

밥은 먹었냐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몸의 수분이 완전히 다 마르진 않았는지 눈물이 또다시 뜨겁게 뚝뚝 떨어졌다. 지서는 그대로 몸을 기울여 방에 누워 웅크렸다. 기진맥진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어린 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서는 이유도 없이 앓았고 그럴 때면 박 여사는 밤새 품에 안고 달래 주었다. 그녀의 방, 아랫목의 온돌 바닥은 충분히 뜨거웠지만 그 품만큼 따뜻하진 않았다. 극심한 무기력함이 몸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지서는 더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잠시 선잠이 들었다.

죽은 듯 잠들었다 생각했는데 진동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땐 채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지서는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목소리가 왜 그래요.

“자다 깨서.”

― 아직도 아픈 거 아니죠?

은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바람이 빠져 쪼글쪼글해졌던 마음에 새로운 산소가 찼다.

“괜찮아. 좀 잤더니 멍해서 그래.”

아무래도 애정 결핍이 맞나 보다. 애정 과다인 고은기 목소리를 들으니 숨쉬기 힘들게 가슴을 쑤셔 댔던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지금 거기 아침 아니야?”

― 네, 오전 훈련 있어서 출근 준비 중인데…… 어젯밤에 지서 씨 꿈 꿨어요. 그러고 나니까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주말이니까 집이겠지 싶어서 전화했어요.

어느새 주말이라니. 백수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짜 감각이 희미해졌다.

은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향했다. 첫걸음을 떼자 두통 때문에 머리가 띵하고 사물의 경계가 희뿌옇게 번졌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걸어 나가 마당의 평상에 앉았다. 하늘이 온통 잿빛이었다.

― 밖이에요? 바람 부는 거 같은데.

“응, 나 사실 무연리 내려왔어. 갑자기 가고 싶어져서.”

지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입구 쪽 낙엽이 떨어져 앙상해진 감나무에 감 몇 개가 매달려 있었다. 은기네 할머니가 담벼락을 따라 감나무를 심을 때 한 그루 얻어 온 거라 들었다. 이미 까치밥이 되었는지 남은 게 별로 없다.

“눈 올 것 같네.”

다음엔 감을 따 매달아 두어야겠다. 찬 바람을 견디고 나면 감은 말랑한 곶감이 되겠지.

― 뭐 보고 있어요?

“감나무.”

― 감나무는 우리 집에 있는 게 크고 좋은데.

“그러게. 박 여사네 감나무는 한 그루만 덜렁 있어서 심심해 보여.”

서늘한 바람이 불어 감나무의 가지를 흔들고 우느라 부어오른 지서의 눈가를 스쳤다. 찬 기운이 기분 좋아 그 바람을 온전히 맞으며 감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멀쩡한 거 있나 보는데 까치가 다 먹었나 봐.”

― 홍시 얼려 먹으면 맛있는데.

은기가 지서 대신 아쉬워했다. 그 순간 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감 한 알이 지서의 눈에 들어왔다.

“아, 나 잠깐만.”

지서는 휴대폰을 평상에 내려놓고 마당 한구석에 있는 기다란 과일 따는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중 하나, 까치가 두고 간 감을 조심스럽게 땄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선홍빛 껍질이 예뻤다.

― 찾았어요?

“응, 너무 예쁘다.”

지서는 휴대폰을 터치해 스피커폰으로 바꾸고는 홍시가 된 감을 반으로 갈라 입에 넣었다. 날이 추워 살짝 언 홍시는 떫지 않고 달았다.

“맛있어.”

울컥 지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뒤로 젖혀 봤지만 소용없었다. 포기한 그녀는 울면서 홍시를 한 입 더 먹었다. 눈가는 뜨겁고 입 안은 차가웠다.

― 천천히 먹어요.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반쪽 남은 감을 마저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홍시를 꿀꺽 삼키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두드렸다.

“은기야, 보고 싶어.”

― 나도요.

“사랑해.”

― 나도 사랑해요.

지서는 몇 번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늘에선 어느새 진눈깨비가 날렸다.

첫눈이었다.

지서는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었던 박 여사의 방을 치웠다. 최대한 처음 모습과 비슷하도록 그녀의 방식대로 정리해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박 여사가 남긴 편지는 외투 안주머니에 부적처럼 품었다.

보일러와 전등을 끄고 빈집을 나서기 위해 장님처럼 어두운 벽을 더듬어 현관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다 말고 지서는 잠시 멈춰 서 박 여사의 집을 둘러봤다. 해가 짧아진 탓에 밖이 벌써 어두워져 사물이 희미했지만 이미 집의 구조는 지서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선명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면 주방에 있던 박 여사는 말없이 내다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지서가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찐 감자나 고구마 한 알을 우유와 함께 내주었다. 그러곤 자신의 방 장롱에 기대 지서가 먹는 것을 몰래 훔쳐보고는 빈 그릇을 받아 갔다. 직접 가져다 두어도 되는데 꼭, 고집스럽게 그랬다. 무릎이 불편해 다리를 절면서 가던 그 뒷모습이, 색 바랜 꽃무늬 옷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서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몸을 돌려 마당을 가로지른다. 흩날리던 눈은 흔적도 없다. 꿈을 꾼 걸까. 분명 눈이 내렸는데.

대문을 열고 문의 경계를 넘으려다 잠시 망설이며 돌아본다. 불 꺼진 빈집. 작별 인사를 건네 보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대문을 밀어 닫는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박 여사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 같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어린 날 배운 시가 귓가에 맴돈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뒤늦게 깨달은 그리움이 납처럼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아직도 남은 눈물이 다시 뜨겁게 떨어진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1)

가엾은 내 사랑.

가엾은 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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