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세상이, 순간이, 모든 계절이
요란하게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시간이 촉박한 여행객이 바쁘게 뛰는 발자국 소리, 여행을 앞둔 이들이 일행과 대화하는 소리. 지서는 그 소리들의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하늘로 항공기 한 대가 날아올랐다. 한 시간 후면 그녀 역시 하늘을 날아 그에게로 향할 것이다.
공항은 올 때마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특히 혼자 떠나는 일이 많았던 지서에겐 더더욱 미지의 공간이었다. 출장을 갈 때면 미팅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몇 번 되지도 않는 여행은 미리 처리해야 할 업무 때문에 충분한 계획도 없어 무작정 떠나야 했다. 그래서 여유 있게 시간을 잡고 공항에 와 커피를 마시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못내 어색하다.
무연을 떠난 지서는 집에 들러 여권과 간단한 짐만 챙기고 곧장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급하게 SNS를 검색해 찾은 현지 유학생의 도움으로 은기의 다음 경기 티켓도 샀다. 강팀과의 경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꽤 괜찮은 자리를 구했다. 은기에게 간다고 미리 이야길 해 줄까 하다가…… 괜히 서프라이즈를 해 보고 싶어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출근했어요?]
지금도, 간신히.
[응, 나 한 시간 후부터 연달아 미팅이라 연락 잘 안될 수도 있어.]
은기에게 말없이 비행기 티켓 사진을 보낼까 하다가 지서는 또 망설이고 또 참는다. 이런 장난이 치고 싶어서 퇴사를 숨긴 거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지서다운 짓은 분명 아니지만 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유치한 자신이 나쁘지 않았다.
탑승이 시작되자 지서는 게이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디 어여삐.
그렇게 살아야지.
은기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촉박한데 벌써부터 런던 시내는 꽤 막히기 시작했다. 이적한 후 몇 개월이 지났지만 구장과 트레이닝 센터가 위치한 남런던에만 머물렀을 뿐 중심부까지 나온 적은 별로 없었다. 택시 부르길 잘했지. 직접 운전해서 왔다면 오늘 안에 목적지에 도착 못 할 뻔했다.
스마트폰을 켜 지도를 찾아보니 몇 블록만 더 걸어 내려가면 목적지인 듯했다. 기사에게 설명하고 돈을 지불한 후 블랙캡에서 내린 은기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크게 지장은 없었지만 그냥, 마음이 급했다.
명품 매장이 즐비한 뉴 본드 스트릿을 빠르게 지났다. 더 서두르고 싶은데 인파가 많아 힘들었다. ‘고은기 아니야?’ 스쳐 지나간 한국인 관광객의 말소리가 은기의 뒤로 사라졌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누려 본 사람이 누릴 줄 안다고 리무진을 보내 주겠다는 제안을 괜히 거절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올드 본드 스트릿으로 접어들자 일전에 찾았던 매장이 은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입구로 다가갔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덩치 좋은 흑인 가드가 은기를 보고는 귀에 꽂은 리시버로 안쪽에 무언가 알리는 듯했다. 잠시 후, 확인이 되었는지 가드가 깍듯하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실내로 들어가자 은기를 알아본 셀러가 가까이 다가와 인사하며 반겼다. 백인인 그녀 역시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리해 틀어 올렸다. 잘 훈련된 듯한 비즈니스 미소와 완벽한 영국식 발음의 인사. 처음 방문했을 때 이미 경험했지만 또다시 겪어도 어색해 미칠 것 같은 환대였다.
은기는 셀러의 안내를 받으며 뒤를 따랐다. 짙은 와인색 카펫이 깔린 복도는 호화로웠다. 앤티크한 가구와 자수가 놓인 실크 벽지, 조도가 낮은 조명이 부티크나 살롱 같은 느낌을 주었다. 골드 포인트로 장식된 거울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평소 자주 입는 트레이닝복과 패딩 대신 코트를 챙겨 입은 은기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상기된 얼굴. 표정 관리 하려 해도 실실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정훈이 보면 모지리 같다고 놀릴지도 모른다.
도착한 곳은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더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셀러는 은기의 코트를 받아 걸어 주며 벨벳 소재의 청록색 앤티크 소파를 권했다. 익숙한 척 소파에 앉자 셀러가 이번엔 음료를 권한다. 그냥 빨리 주문한 물건이나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지. 은기는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며 탄산수를 주문했다.
셀러가 잠시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비운 사이, 전화가 왔다. 은기는 크리스털 잔에 담긴 탄산수를 마시며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보러 왔어요.”
― 반지는 어때. 예뻐?
“아직 못 봤어요. 지금 기다리는 중이에요.”
― 사이즈 잘 맞아야 될 텐데.
전화 속 여자의 말에 은기는 괜히 긴장해 자신의 왼손 약지를 슬쩍 바라보았다. 한국에 갔을 때 몰래 반지 사이즈를 재려 잠이 든 지서의 손가락에 테이핑용 밴드를 감았다.
― 너 긴장했어?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려.
“네, 이런 데 혼자 왔더니 어색하고…… 프러포즈 까일까 봐요.”
지서가 결혼에 회의적이라는 걸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도. 호기롭게 난생처음으로 거금을 들여 반지를 주문하면서도 그 생각이 내내 은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곱게 까여 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고은기가 이렇게 벌벌거리는 건지 궁금하네.
“누나, 제 결혼식엔 꼭 오세요.”
지서에겐 절대 안 하던 ‘누나’라는 호칭이 여자에겐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 가야지. 바쁜 고은기 선수와 달리 난 은퇴한 백수라 매우 한가하거든.
전화 속 여자가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올림픽 대표 팀 시절 홍보물이나 화보 촬영을 같이하며 가까워진 펜싱 대표 팀 선배로 그녀는 지난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와 동시에 결혼했다. 시즌 중이라 은기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축의금만 보냈었다.
지서와 비슷한 또래인 그녀는 뭘 모르는 은기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으며 그녀의 남편은 특별한 프러포즈링을 고를 안목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커플이라면 절대 기자들에게 말도 새어 나가지 않을 거였다.
“형님 옆에 계세요? 인사드리고 싶은데.”
그녀의 남편이 믿을 만한 보석상을 소개해 주고 지서에게 어울릴 디자인도 몇 가지 추천해 주었다.
― 어, 잠깐만. 해준아, 은기가 인사하고 싶다는데?
전화 너머로 무어라 말소리가 들렸다. 몸싸움이라도 하는 건지 소음이 심상치 않다.
― ……됐대. 받은 걸로 치겠대.
그녀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거절할 줄 알았다. 예민해 보였던 남자를 떠올리며 은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기는 전화를 끊고 마치 대단한 예식이라도 준비하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셀러가 케이스를 열고 은기 쪽으로 반지를 내밀었다. 지서처럼 차갑지만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였다. 은기가 말없이 바라만 보자 셀러의 설명이 이어졌다. 싱글 에메랄드 컷의 다이아몬드 센터스톤을 파베 다이아몬드가 어쨌다는데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빨리 지서에게 끼워 주며 결혼해 달라고 죽는 시늉을 해야겠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지서는 해를 따라 열두 시간의 긴 낮을 날아 그에게 왔다.
착륙 준비를 하는 비행기 창으로 일몰이 내리는 런던 시내와 도시를 관통하는 템스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게 런던아이인가. 붉은 조명을 밝힌 관람차를 보자 괜히 두근거렸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어도 시끄러운 비행기 소음과 건조하고 추운 환경에 더해 기내식까지 입에 맞지 않아 조금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냥 앉아서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데도 이렇게 미칠 거 같은데 은기는 도대체 어떻게 훌쩍 날아온 건지 모르겠다.
히스로공항의 자동 출입국 심사를 통과한 지서는 빠른 걸음으로 수화물 수취대로 향했다. 한꺼번에 쏟아진 여행객들로 인해 공항은 정신이 없었다. 내부는 인천과 달리 천고가 낮고 조명도 어두워 조금 답답했다. 얼른 빨리 여길 벗어나 편하게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수하물을 기다리며 휴대폰의 시간을 조정했다. 여긴 오후 5시쯤이려나. 머리로 계산하는데 휴대폰 신호가 잡히며 액정 화면에 서울과 런던의 시간이 나란히 떴다. 런던, PM 05:05. 은기의 팀 등번호가 5번이라 괜히 반가웠다. 지서는 내친김에 모르는 척 은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난 지금 퇴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지 은기에게선 바로 답장이 왔다.
[한국 새벽 1시 아니에요? 야근?]
[응.]
[난 아까 퇴근. 내일 경기라 오늘은 오전 훈련만 했어요.]
지서는 바로 그 경기를 보러 갈 계획이었다.
[거긴 몇 시야?]
[여기 오후 5시 조금 지났어요.]
그 대답에 드디어 은기와의 시차가 사라졌다는 게 실감됐다.
그냥 지금 바로 그에게 갈까. 지서는 ‘나 지금 런던’까지 입력했다가 잠시 망설였다. 벌써 몇 번을 이렇게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우습지. 이게 뭐라고. 연애라는 게 참 신기해서 안 그랬던 이지서까지도 유치하게 만든다.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백 버튼을 눌러 글자들을 지워 버렸다. 이럴 거였으면 여태 숨긴 보람이 없었다.
[내일 경기는 선발로 나올 거 같아?]
[아마도? 리그 5위 팀이랑 붙거든요. 나름 라이벌이라 선발일 거 같아요.]
캐리어를 찾은 지서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곧장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주말이니까 하루 종일 낮잠 자다가 일어나서 경기 보면 되겠다. 컨디션 괜찮아?]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나가는데 지서의 이름이 쓰인 종이를 든 남자가 보였다. 미리 예약한 픽업 서비스였다. 기사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면서도 은기와는 시답지도 않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식사는 무얼 먹었는지. 내일은 뭘 할 계획인지 같은 것들.
내일 지서는 오전엔 런던의 유명한 꽃시장을 둘러보고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한 후 은기의 홈구장에 갈 계획이었다. 저녁 경기이지만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샵에 들러 유니폼이랑 후디랑 이것저것 사야지. 기사를 보니 은기의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 판매량이 구단 선수들 중 5위 안에 든다고 한다. 블로그나 SNS에 검색만 해도 벌써 인증 사진이 꽤 많은 게 한국 관광객들의 주요 여행 코스가 된 듯했다. 물론 이 계획들을 은기에겐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지서가 탄 차는 천천히 공항을 빠져나가 영국의 길을 달렸다. 운전대의 방향이, 차선의 방향이 한국과는 반대인 게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다 기분 좋고 신기한 걸 보면 자신이 꽤 들뜨긴 한 모양이었다.
딱 1박만 예약한 호텔은 은기의 팀 구장 바로 앞, 전망이 근사한 곳이었다. 내일이면 바로 체크아웃할 테니 짐을 제대로 풀지 않았다. 지서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미니바의 맥주를 꺼내 마시며 은기와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 시차 적응이랄 것도 없었다.
지서는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꽃 선생이 알려 준 마켓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선생은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한번 들어 보라며 꽤 유명한 플라워 스쿨의 원데이 클래스도 몇 개 추천해 주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하고 맑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런 날씨. 지서는 편안한 청바지와 니트,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친 뒤 가벼운 에코백을 메고 길을 나섰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차림으로 도시를 여유 있게 걸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새삼스러워 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붉은 2층 버스를 타고 이동해 마켓에 도착했다. 주말에만 연다는 마켓의 초입 화단엔 핑크색 아네모네 꽃이 한 아름 피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앞에서 시간을 지체하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누군가 정성 들여 보살폈는지 꽃은 티 없이 싱싱했다. 문득 무연리 박 여사의 마당이 떠올랐다. 막 자란 듯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꽤나 정성껏 보살폈던 들꽃과 풀들.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그 밭이 풍성해질 것이다.
향이 좋아 길에서 파는 따뜻한 라테를 사 마셨다. 살려고 마셔 댔던, 맛이 더럽게 없던 전 직장의 카페테리아 커피가 잠시 생각났다. 감히 이 커피에 비할 바 아니지. 어쩌면 커피가 이렇게 맛이 있는 건 퇴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마켓에서 지서는 보랏빛 아네모네를 한 단 샀다. 아네모네 꽃은 색깔별로 꽃말이 다양하다고 한다. 기대,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과 허무함, 영원한 사랑의 다짐. 그 수많은 꽃말 중에서 보랏빛 아네모네는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따 밤에 만나면 그에게 이 아네모네를 선물할 생각이다.
이 꽃이 모든 불운으로부터 널 지켜 줄 수 있길 바라면서.
경기 시작 두 시간 전, 라커 룸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구단 직원이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건넸다. 은기는 자신의 라커에 직원들이 미리 정리해 둔 유니폼과 장비를 확인하곤 받아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아메리카노는 쓰기만 하고 무슨 맛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경기 전 커피 한 잔은 혈액 순환을 개선하고 근육 손실을 방지해 트레이너들이 권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은기가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옆자리 동료가 역시 어린애 입맛이라며 장난을 쳐 왔다. 그 말에 어른 입맛인 지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책까지 보며 핸드 드립 커피 내리는 법을 연습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쓰던 드리퍼는 아마 지금쯤 지서의 집 부엌에 잘 있을 것이다.
그라운드 컨디션을 체크하고 웜업을 하기 위해 나가기 전까지도 지서와의 메시지 창은 조용했다. 한국은…… 새벽 2시쯤이다. 보통은 깨어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자는 건지 하루 종일 잠잠한 기분이다. 언제 이 물리적인 거리와 여덟 시간의 시차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은기는 아쉽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웜업 후 다시 라커 룸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미팅을 가졌다. 평소보다 감독의 지시 사항이 디테일하고 엄격했다. 킥오프 전부터 구장에 형광색 재킷을 입은 경찰들이 꽤 많이 보인다는 건 그만큼 주목도도 높고 과열되기 좋은 경기라는 뜻이다.
이번 주 내내 은기는 틈날 때마다 구단 스태프가 건네준 상대 팀 스트라이커의 비디오 분석 자료를 돌려 봤다. 리그 득점 3위. 왼발잡이. 스프린트는 좋지만 퍼스트 터치를 할 때 실수가 많이 나오는 편이며 다이빙에 능숙해 태클할 때 신경 써야 하는 타입. 그래도 오늘 전담 마크를 붙어야 하는 은기 입장에서는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양발 공격수들보다는 상대하기 나은 편이었다. 왼발 슈팅 상황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 충분히 승산 있다.
「오늘도 한국인들 많이 온 거 같던데.」
오늘의 풀백 파트너인 윌리엄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은기에게 말을 붙여 왔다.
「겨울 되면 더 많아질걸. 요즘 한국에서 내 인기가 하늘을 찔러.」
은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윌리엄이 그의 이마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처음엔 드문드문 있었던 태극기가 이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많아졌다. 경기가 없는 날엔 트레이닝 센터 앞에도 사인을 받으려 기다리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제법 많아 구단 직원들이 한번 들러 보라고 귀띔을 해 줄 정도였다.
최근 영국의 축구 전문 방송에서 박성조와 고은기 둘 중 누가 더 아시아 마케팅에 효과적인지 비교 분석까지 하는 바람에 한국에서도 양쪽 팬들끼리 싸움이 났다는 말도 얼핏 들었다. 그게 그렇게 키보드 붙들고 열 낼 일인지 은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건수만 있으면 일단 욕하고 싸우는 축구 팬들을 아는지라 보고도 못 본 척 성조와 통화하며 웃었다.
신 가드를 점검하고 손목에 테이핑을 감는데 갑자기 짧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인스타그램 업로드 알림이었다. SNS 설정을 꺼 두었는데 뭐지 싶어 터치하니 무려 1년 동안 업로드가 없었던, 은기가 예전부터 염탐하던 지서의 계정이었다. 버려둔 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은기는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런던이었다.
ICN→LHR이 쓰여 있는 비행기 티켓. 기내에서 찍은 게 분명한, 위에서 내려다본 런던의 야경. 주말에만 열린다는 플리 마켓과 보라색 꽃다발. 그리고 GO가 마킹된, 지금 은기가 입고 있는 유니폼과 경기장의 전경.
사진을 보고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는데 스타팅 준비 하라는 직원의 외침이 들려와 은기는 재빨리 휴대폰을 끄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은기! 은기!」
그 사진들의 의미를 생각하며 또다시 멍하니 있는데 오늘 은기와 입장할 에스코트 키즈가 그를 쿡쿡 찌르며 말을 붙여 왔다. 6~7살 정도 되어 보이는 흑인 아이였다. 하이 파이브를 하자는 듯 아이가 손을 내밀자 은기는 웃으며 자신의 손을 크게 펼쳐 보였다. 커다란 손에 작은 손을 연달아 세 번 부딪친 아이가 밝게 웃자 그는 작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입장 신호가 들어오자 선수들은 나란히 줄을 서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집중. 집중.
은기는 에스코트 키즈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해 봤다. 하지만 이미 정신은 관중석 어딘가에 있을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지서의 자리는 그라운드와 아주 가깝지는 않았지만 전체를 보기엔 꽤 괜찮은 위치였다. 급하게 왔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싶어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푸른 잔디와 쨍한 조명, 붉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은기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대충 둘러만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시안 관중도 제법 많았다. 위기 상황에서 은기가 상대의 패스를 끊거나 태클을 성공시킬 때마다 들려오는 응원가와 함성이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직접 관전하는 경기는 TV 중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거칠었다. 선수들끼리 몸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둔탁한 소리가 관중석까지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였다. 초반은 은기의 팀이 밀리는 양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은기가 어쩐지 통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라 신경이 쓰였지만 경기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자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다른 관중들은 공의 움직임을 따라 경기를 볼 때도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등번호가 보이지 않아도, 지서는 뛰는 폼만으로도 은기를 정확하게 구별해 냈다. 딱히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중률은 굉장히 높았다. 거기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만 은기가 오늘따라 경기가 끊길 때마다 관중석을 많이 훑어보는 느낌이었다. 꽤 집요하게, 누굴 찾는 사람처럼.
팽팽한 흐름으로 이어지며 전반은 0 대 0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직 축구를 볼 줄 몰라 해설 없는 직관은 지루할 줄 알았는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골 찬스마다, 실점 위기마다 지서 역시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특히 위기 상황 때마다 몸에 하도 힘을 주어서인지 어깨가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지서는 경기장에 마련된 펍에서 맥주를 사 마셨다. 갈증이 나 단번에 한 잔을 다 비우자 뺨이 붉어지며 열이 올랐다. 해가 지며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너무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한 잔에도 취기가 올라와서인지 조금 춥기도 했다.
「혹시 한국인? 고은기 보러 왔어?」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아까부터 힐끔거리던 옆자리 남자가 지서의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오래된 팬인 듯 팀을 상징하는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응, 한국인. 고은기 보러 왔어.」
「혼자 왔나 보네. 대단한 팬인가 봐.」
30대 중반, 혹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자연스럽게 말을 섞는 솜씨가 노련했다. 지서가 웃기만 하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축구 잘 모르는 거 같아서. 내가 설명해 주는 게 빠를 거 같은데.」
디테일한 규정이 이해 안 될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걸 본 모양이었다. 지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신이 나서 그녀에게 팀의 포메이션이나 교체에 따른 전술 변화 같은 걸 설명해 주었다. 서양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와 풍부한 표정이 재미있었다. 센터백이 어쩌고 풀백이 어쩌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락거리면서 꽤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설명을 듣는 중간에 은기가 골과 다름없는 슈팅을 몸을 던져 막아 냈고 바로 이어진 역습 상황에서 드디어 선제골이 터졌다. 그 덕에 흥분한 남자의 말이 빨라지고, 팬들만 아는 은어까지 섞어 말하는 바람에 3분의 1은 못 알아들었다.
「은기 저 수비는 한 골 넣은 거나 마찬가지야.」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은근슬쩍 흥분을 핑계 삼아 지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 골 들어간 줄 알았어.」
지서가 슬쩍 몸을 틀어 남자를 떼어 놓으며 말했다. 술 때문인지 경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인지 지서의 얼굴이 붉었다.
경기는 1 대 0, 은기 팀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에 만족한 서포터즈들은 기립해 발을 구르며 응원가를 불렀고 선수들은 관중석 가까이까지 다가와 악수를 해 주고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은기 왜 저러지?」
남자가 의아한 듯 은기를 보며 말했다. 꽤 오래 그라운드에 남아 팬 서비스를 해 주기로 유명한 은기인데 오늘은 곧장 유니폼을 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주고는 그대로 뛰다시피 그라운드를 빠져나가 버렸다. 부상인가 싶었지만 걸음걸이나 폼이 아직 한 경기 더 뛰어도 될 만큼 멀쩡해 보였다.
「아, 그건 그렇고 혹시 이후에 다른 일정 있어? 스타디움 앞에 괜찮은 펍이 있는데. 혹시 시간 된다면 나랑…….」
남자가 말을 하는 그때, 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 옆에 그 남자 누구예요?
전화를 받자 은기가 다짜고짜 물었다. 평소와 달리 말투가 경직되었고 목소리는 낮았다. 지서는 아무런 말 없이 슬쩍 남자를 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가끔 보면 은기는 시야가 그냥 넓은 게 아니라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것 같았다.
“잠깐만.”
지서는 전화에 대고 은기에게 말한 후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덕분에 오늘 경기 잘 봤어. 고마워.」
명백한 거절의 의미.
남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악수를 하자 지서는 다시 한번 가볍게 묵례를 하곤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 어디야?”
호텔에 맡겨 두었던 짐을 찾은 지서는 로비에서 은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경기 끝나고 놀라게 해 주려 했는데, 초반에 집중하지 못했던 모습은 지서 자신이 런던에 왔다는 걸 눈치채서였던 것 같다.
[나와요.]
호텔 앞에 검은 세단이 들어서고 곧이어 은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캐리어를 끌고 나가자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제가 짐 실을 테니까 타세요. 안에서 기다려요.”
“네, 감사합니다.”
“제 일인데요 뭘. 런던에 와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직원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차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는데 갑자기 지서의 몸이 기우뚱하며 그대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강하고 무지막지한 힘과 안정적인 품, 지서보다 조금 높은 체온.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기였다.
“뭐야, 왜 몰래 오고 그래요.”
막 샤워를 했는지 은기의 머리카락은 아직 젖어 있었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망했어.”
지서가 웃으며 말하자 은기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확인하듯 꼼꼼히 살폈다. 직원이 운전석에 탔지만 은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미 충분히 서프라이즈 했어요. 완전 놀라서, 꿈꾸는 줄 알았잖아.”
밤이라 어두워 또렷하게 보일 리 없는데도 몇 번이고 눈을 맞춘 은기가 쪽 소리 나게 지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 왔어요?”
“어제.”
이번엔 이마에.
“오자마자 나한테 왔어야지.”
그리고 뺨에.
“은기야,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지서가 민망해하며 은기의 어깨를 밀어 떼어 놓으려 하자 운전을 하던 직원이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저는 없는 사람 취급 하셔도 됩니다.”
있는 사람을 어떻게 없는 사람 취급 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지서가 한숨 쉬듯 말하자 직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진짜 여자 친구분,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전 은기 선수 또 몰래 한국 간다고 할까 봐 여권을 숨겨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은기가 또 만지려 하자 지서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영국에 좀 오래 있을 거 같거든요.”
그 말에 은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회사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나 잘렸어. 그 여자 남편이 당장 나가라던데.”
“……진짜?”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하다. 좋으면서 티 안 내려고 꾹 참는 얼굴. 보조개가 잠깐 패었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뭘요.”
지서의 물음에 은기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나 사직당했는데 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아니…… 그럼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은기가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또 덥석 지서를 끌어안았다.
“좋으니까 그러죠.”
지서가 삐진 시늉을 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은기는 더 열심히 그녀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가만 보면 은기는 예전부터 자신의 덩치를 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큰 몸을 들이대며 치근덕거리는데 누가 피할 수 있을까. 맞닿은 몸으로 그의 온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서는 운전석의 눈치를 보고는 몰래 그의 입술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춰 주었다. 그제야 은기의 몸짓이 얌전해진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나중에, 집에 가서.’라고 하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할 말이 많았는데 단둘이 되자 서로 엉겨 붙기에 바빴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 이유와 다시 찾은 무연에서 박 여사의 편지를 발견한 일,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은 은기의 집에 들어서 키스하는 순간, 그가 번쩍 들어 안는 순간 모두 지서의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날아갔다.
침실까지 갈 여력도 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혀를 얽었다. 뜨거운 호흡과 부드러운 촉감이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은기는 입을 맞춘 채 지서의 상의 안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 손안 가득 가슴을 움켜쥔다. 가슴 만져도 되냐며 손 떨던 게 떠올라 지서는 잠시 웃는다. 그가 젖가슴을 매만질 때마다 그녀의 호흡이 서서히 가빠져 온다. 은기가 입술을 내려 부드러운 살을 만족할 만큼 빨자 작은 신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지서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 예민한 살을 간질인다. 창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흰 벽지에 흐리게 어른거린다. 바람이 제법 거센지 나무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손바닥만 한 낙엽이 날렸다. 지서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감는다. 시각을 차단한 채 다른 감각으로 그의 흔적과 움직임을 쫓아 본다. 은기에게선 여전히 물을 듬뿍 먹은 잔디나 산뜻한 바람에 실려 올 것 같은 시원하고 청량한 체향이 난다. 엉켜드는 살갗은 따스하고 매끄러우며 혀는 달다.
이내 지서의 옷이 완전히 벗겨졌다. 그녀 자신이 벗었는지 그가 벗겼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둘은 좁은 소파에서 서로의 맨몸을 완전히 밀착한 채, 만지고, 키스하고 있었다.
가슴에 고개를 묻고 양껏 핥고 빨던 은기가 잠시 길게 호흡했다. 그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녀의 가슴팍에 떨어져 가슴골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적나라한 감각이 지서의 흥분을 부추긴다. 양다리를 활짝 벌리자 이미 잔뜩 흥분한 남성이 허벅지 안쪽 살에 닿았다. 연약한 피부가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은기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일으켜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 마주 앉은 자세로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둘은 충분히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은기는 가만히 그녀의 뺨을 만졌고 지서는 그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오늘 생긴 게 분명한 손등의 넓은 상처를 자신의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쓰다듬기도 했다.
은기가 그녀의 양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로 내리며 지서의 안으로 묵직하게 진입했다. 빠듯하고 버거웠지만 지서는 첫 삽입의 순간, 이 감각이 좋았다.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것 같아서. 그가 채워 주는 충만함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지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양어깨를 짚고 아래위로 반복해 움직일 때마다 은기의 단정하고 잘생긴 이마에 미세하게 실금이 갔다. 남자답게 근육이 잡힌 가슴팍은 눈에 띌 정도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지서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못 참겠다는 듯 은기의 커다란 손이 지서의 허벅지를 꾹 잡아 누르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지서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은기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힘들어요?”
“아, 음.”
그녀가 대답 대신 눈을 감으며 신음하자 그가 다시 꾸욱 지서의 허리를 누르며 묵직하게 밀착했다. 순간적으로 지서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움직임을 빠르게 반복했다. 그녀의 입에선 가냘픈 신음이 흘렀지만 은기가 입을 맞춰 모두 다 자신의 입 속으로 삼켜 버렸다.
풍성한 긴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지서의 흰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잡티 없이 매끈하고 투명한 피부엔 은기 자신이 만든 열꽃이 빼곡하게 피어올랐다. 색소가 옅은 그녀의 몸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입으로 씹고 빨아 꽃을 피워 내고 싶기도 하고 상처 하나 생기지 않도록 품 안에 가두어 보호해 주고 싶기도 하다.
은기는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며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깊게 안았다. 그러면서도 더욱 빠르고 깊게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완전히 지서의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릴 때마다 서서히 차올랐던 쾌감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맞물린 곳이 뜨겁게 뒤엉키며 젖은 소리를 낸다. 지서의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힘이 들어간다. 뜻밖의 압박감을 느끼며 은기는 크게 신음을 터트린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쾌락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그렇게 정점에 다다른 순간 은기는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는 지서의 말랑한 몸을 깊이 껴안았다. 땀과 체액이 뒤섞여 피부가 끈적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한 채 나른한 정사의 여운을 즐겼다.
조금 낮았던 지서의 체온은 어느새 그의 것을 닮아 간다.
잠에서 깨자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은기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품 안이 허전해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지서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침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자고 있었다. 은기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고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왔다. 그녀는 모르는 것 같지만 지서는 잠버릇이 아주 조금 험했다.
은기는 곤히 잠든 지서의 숨소리를 살폈다. 일정하고 안정적이다. 목덜미의 맥을 슬쩍 짚자 평온한 심박이 느껴진다. 늘 혼자 잠들었던 이 침대에 지서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은기는 그렇게 한참을 관찰했다. 그사이 또 지서의 몸이 슬금슬금 멀어지자 아예 품 안에 완전히 가두어 꽉 옭아맸다.
함께 샤워하고 함께 잠이 들기 전 지서는 반쯤 졸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는 못했는데 영국에 있는 플라워 스쿨 과정을 몇 가지 들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른다는 뜻. 그동안 바삐 살아온 만큼 충분히 여유를 즐겼으면 좋겠는데 은기의 그녀는 잠시도 쉬지 못하는 성향인 듯했다.
은기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지서에게 자신의 허벅지를 베도록 내주었다. 지난여름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유혹하던 지서를 떠올리자 다시 몸 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평생 동안 쓸 인내심을 총동원했던 것 같다. 꿈틀거리는 본능을 애써 다스리며, 당장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을 내리누르며.
커튼 틈으로 달빛이 비쳐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에 길게 금을 그었다. 그 흔적을 따라 시선이 닿은 곳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꽂힌 보랏빛 꽃다발이 있었다. 저 꽃 이름이…… 아네모네라고 했던가. 불운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는 꽃이라고 했다. 꽃말을 설명해 주며 지서는 부상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마음으로 꽃을 샀다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리 없이 웃으며 은기는 팔을 뻗어 침대 옆 협탁 깊은 곳에 숨겨 둔 벨벳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고심해서 준비한 프러포즈링의 센터스톤이 달빛에 반짝였다. 이 반지를 끼워 주기까지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지금 그의 품 안에 있다.
괜히 긴장이 돼 반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 주었다. 혹시나 클까 봐, 혹은 작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았다. 드디어 주인을 찾았어. 은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약지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슬쩍 몸을 굽혀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 보았다.
나랑 결혼해 줘요.
잠이 든 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허벅지에 팔을 감으며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승낙의 의미인 것만 같아 그는 그녀의 뺨에 살짝 키스한다.
한 번으로는 아쉬워 두 번, 그리고 세 번. 뺨에서 이마로, 이마에서 입술로 키스를 이어 간다. 잠에서 깬 지서가 멍하니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그 여름의 무연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푸르스름한 달빛은 늘 은기가 꼼꼼하게 쳐 주었던 모기장으로 변하고 짙은 아네모네 꽃의 향은 모기향 냄새가 되어 코끝을 간질인다.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던 마당의 커다란 나무, 그 아래 함께 복숭아를 나눠 먹던 평상. 모든 순간이 설레었던 우리의 그 뜨거웠던 여름.
다음 여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앞으로 당신과 내가 만들어 갈 우리의 계절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지서야.”
은기가 부르자 지서가 엷게 웃으며 그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왜 반말하냐는 의미겠지만 은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잠이 든다.
아직 지서는 은기가 끼워 준 반지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평소엔 그렇게 예민하면서 이럴 땐 묘하게 둔하단 말이야. 속으로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며 은기는 눈을 감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사랑해요.
꿈에서 봐요.
작게 고백하자 세상이, 순간이, 모든 계절이 그녀로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