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석형은 축구를 꽤 좋아한다. 그 때문에 지금의 회사, 포털 사이트 스퀘어에 입사해서도 굳이 스포츠 뉴스 편집자를 자원했다. 남들은 이제 뉴스는 A.I 의존도가 높아질 거라고, 왜 지원하냐고 참견했지만 석형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일한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였고 그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드디어 입사 3년을 넘기고 그는 처음으로 안식 휴가를 받았다. 그의 휴가 계획은 짤 것도 없었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 보고 싶은 팀의 경기를 모두 볼 수 있는 일정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첫 안식 휴가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첫 여행지, 런던에서 그는 꽤 만족스러운 여행을 시작했다. 박성조와 고은기, 두 한국인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직관했다. 돈 아낀다고 다섯 시간 동안 용써 가며 티켓팅한 보람이 있는 경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은기의 유니폼에 사인을 받는 것은 실패했다. 경기 다음 날 트레이닝 센터 앞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너무 급해서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이미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찾아온 한국인 팬들은 다 있는 고은기 사인이 석형만 없었다.
바람이 찬 곳에서 부슬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었더니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원래 저녁은 블로그 추천 맛집에 갈 계획이었지만 이 상태로는 적당히 배를 채우고 얼른 숙소로 가 쉬는 게 나을 듯해 석형은 눈에 들어온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맛집은 아닌지 실내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형은 그녀를 봤다.
갑자기 소리 소문도 없이 퇴사해 회사를 뒤흔들었던, 그 때문에 루머의 루머의 루머만 한 100개쯤 만들고 홀연히 사라진 연예 팀 리더 이지서를.
놀랍게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심히 빵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곁을 굉장히 훤칠한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맙소사. 고은기였다! 오늘 하루 종일 석형이 찬 바람과, 외로움과 싸우며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고은기!
“둘 다 사면 되지 뭘 그렇게 고민해요.”
한 손에 빵 트레이들 들고 있는 고은기가 다정한 어조로 말하며 지서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굉장히 자연스럽고 두 사람 모두 익숙해 보이는 스킨십이었다. 주고받는 시선이, 별것 아닌 대화가 누가 봐도 연인의 그것이었다. 석형은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그 이지서와 그 고은기가 맞았다.
프로 선수의 루틴이 아무 이유도 없이 바뀌는 게 아니다. 손목에 키스해 댈 때부터 알아봤어. 역시 연애였다.
그 순간, 핀잔을 주던 선배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넌 어떻게 보는 사람마다 연애 타령이냐. 고은기도 연애한다, 이지서도 연애한다. 왜? 둘이 연애한다 그러지?’
……선배, 그 둘이 연애를 하는 것 같은데요.
그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지서 역시 석형을 봤는지 들고 있던 집게를 놓친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형 매니저.”
“그…… 오랜만이에요, 지서 리더.”
지서가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석형이 오히려 민망했다.
“누구예요?”
반면에 은기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집게를 집어 직원에게 건네며 물었다.
“아, 그, 나 전 직장 후배.”
“아아.”
은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형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고은기라고 합니다. 이지서 씨 약혼자예요.”
석형은 멍한 얼굴로 지서를 한 번 보고는 은기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키도 더 크고 몸이 날렵하면서도 탄탄해 보였다. 석형은 감탄하며 다른 손으로 악수하고 있는 손을 감쌌다.
아아 역시, 손만 잡았는데도 현역 선수의 힘이 느껴진다. 이게 말로만 듣던 고은기의 피지컬인가. 공격수들에게는 통곡의 벽이라더니 정말 거대한 장벽 같다.
“저 계 탔네요.”
석형은 꿈에 취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순간을 위해 장석형은 런던의 비바람과 싸우며 허허벌판인 트레이닝 센터 앞에서 망부석처럼 고은기를 기다렸나 보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졌을 땐 고은기 이 새끼는 뭐 대단한 훈련을 하기에 안 기어 나오냐고, 개새끼라고 쌍욕을 했는데 그 은기 님은 지금 석형 자신과 마주 보고 앉아 겸상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서 씨 회사 후배셨으면…… 뉴스 편집자? 맞죠?”
은기가 앞접시에 석형 몫의 김치찌개를 덜어 주며 물었다.
“네, 맞아요. 지서 리더는 연예 쪽이셨고요, 전 스포츠 편집자입니다. 직속 후배는 아니지만 저 순환 근무 할 때 지서 리더한테 많이 배웠어요.”
은기의 권유로 세 사람은 베이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식집으로 이동했다. 연봉이 100억 가까이 될 거라더니 차가 무려 벤틀리였다. 아까 트레이닝 센터에서 탔던 차는 람보르기니랬는데. 역시 부럽고 대단한 새끼였다.
“옆 팀이었는데 같은 본부라 자주 겹쳤어. 석형 매니저 안식 휴가 온 거예요?”
지서의 물음에 뜨끈한 국물을 떠먹던 석형이 황급히 대답했다.
“네! 저 안식 휴가로 축구 보러 왔어요. 사실, 사실 저 어제 고은기 선수 경기 직관 했거든요.”
생각난 차에 석형은 배낭에서 은기의 유니폼을 꺼내 네임 펜과 함께 내밀었다.
“오늘 사인받으러 트레이닝 센터에 갔는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은기 선수 나갔다고 해서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사인 좀…….”
밥상머리에서 이건 좀 예의가 아닌 듯싶었지만 이 사인 받겠다고 오늘 하루를 날린 석형의 입장에선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은기는 석형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사인만 해 준다던데 여자 친구 후배라고 특별 대우인지 ‘영국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메시지도 써 주었다.
“저, 그런데 두 분은…… 약혼자라고 하신 걸 보면 결혼을……?”
석형이 말끝을 흐리자 지서는 기침을 하며 물을 마셨고 은기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시즌 끝나고 결혼식 올릴 거예요.”
“와……, 와아…… 진짜 축하드려요.”
석형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박수 치는 시늉을 했다. 회의 때마다 자신이 아는 기자한테 들었다면서 고은기 걸 그룹 누구랑 사귄다느니, 배우 누구랑 양다리라느니 거짓부렁을 일삼으며 유언비어를 떠들고 다녔던 선배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쪽팔릴까 생각하니 짜릿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석형 매니저, 오늘 우리 본 거…….”
“당연히 비밀이죠. 저 장석형, 입 무겁습니다. 지서 리더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의 말에 지서는 안심한 듯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적이지 못하고 쌀쌀맞고 차가운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만난 지서는 석형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초반에 진입 장벽이 높아서 그렇지 일은 참 잘했다. 합리적이고 티 안 내면서 후배들 배려도 잘하고.
석형과 가까이 지내는 연예 팀 동기는 지금도 가끔 지서를 그리워한다. 사람을 너무 답답하게 하는 타입이라며, 매몰차다고 흉을 보던 연예 팀 선임들은 이제야 그녀가 윗사람들의 압박으로부터 팀원들을 얼마나 열심히 보호해 줬는지 깨닫는 모양이었다. 지서 리더의 컴백을 기다리는 동기에겐 안타깝지만 석형은 지금 은기 옆의 그녀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은기는 괜찮다는 석형을 그가 머무는 호텔까지 태워다 주었다. 축구 커뮤니티에 우연히 고은기 만나서 같이 밥 먹고 호텔까지 차도 얻어 탔다고 글 쓰면 아무도 안 믿어 주겠지. 식당에서 은기와 석형, 둘이 찍은 사진을 올리며 후기를 작성해도 다들 뻥친다며 핀잔을 줄 것이 뻔했다.
“은기 선수, 혹시요.”
“네.”
“저 SNS에 사진 업로드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지서 리더 이야기는 빼고요.”
“네, 괜찮아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은기가 부드럽게 차를 몰아 호텔 앞에 정차했다. 어쩜, 장롱면허인 석형이 보기에 은기는 운전도 축구만큼 능숙했다.
“지서 리더 오늘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소희, 강현 매니저 둘 다 지서 리더 많이 그리워해요.”
“……그래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연락 왔었는데.”
지서가 멋쩍어하며 답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 비 오는데 내리지 마세요. 저 빨리 뛰어가면 돼요.”
“잘 지내요. 여행도 즐겁게, 조심히 다니구요.”
“오늘 정말 반가웠습니다. 가 볼게요.”
인사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석형은 비를 피해 빠르게 호텔 로비로 뛰었다. 배낭의 물기를 털며 뒤돌아보니 어느새 차는 사라졌다.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석형은 배낭을 뒤져 은기의 유니폼을 확인했다.
사인이 선명한 것을 보니 헛걸 본 건 아니었다.
“결혼식 하면 올 사람 없다더니, 많이 그리워하는 후배도 있고. 우리 결혼식 꼭 하고 후배들도 불러요. 그럼 되겠다.”
은기가 트렁크에 실어 둔 꽃을 지서의 작업실로 옮겨 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서는 못 들은 척 꽃과 리본을 정리했다.
지서는 결혼식은 작게, 가족끼리만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식을 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친구도 별로 없고 회사는 그만뒀고 유일한 가족인 박 여사는 고인이니 괜히 위축이 되었는데 은기는 남들 하는 건 다 해 주고 싶다며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결혼식 해요. 예쁜 드레스 입고 떠들썩하게. 지서 씨 싫으면 기사 나가도 얼굴 알려지지 않게 할게요. 네?”
은기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줄기와 이파리를 치워 주며 말했다.
“지서 씨, 응?”
이번엔 눈을 크게 뜨고 애교 부리듯 눈짓을 한다.
함께 마켓에 들러 꽃을 사고 빵집에 들렀던 차였다. 식사는 집에서 간단하게 할 예정이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전 직장 후배와 마주쳤다. 좀 어리긴 하지만 사려 깊은 타입이니 은기와 지서의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고.”
지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하자 은기는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뒤로 다가와 허리를 안았다. 여전히 그의 체온은 낮을 닮아 따뜻했다.
“지서 씨 계속 이렇게 춥게 있다간 감기 걸릴 거 같은데, 그냥 플라워 쇼케이스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지서의 작업실은 난방을 꺼 두어 늘 서늘했다. 꽃을 싱싱하게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히터를 꺼 두고 창을 열어 두는 편이었다. 겨울이라 온도도 적당하고 옷을 두껍게 입으면 되는데 은기는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며 당장 꽃 보관용 냉장고를 사자고 성화였다.
“너무 비싸. 그리고 나 이제 겨우 4주짜리 클래스 하나 수료했어. 이 작업실만으로도 충분해.”
드디어 원데이 클래스에서 탈피하고 처음 3일짜리 클래스를 수료했을 때 은기는 지서 몰래 빈방에 작업실을 꾸며 주었다. 지서의 키에 딱 맞는 테이블과 원예 도구들, 인터넷으로 눈여겨봤던 리본과 포장지가 가득한 방이었다.
“또 다른 과정도 들을 거잖아요. 이렇게 추운 데서 작업하면 몸 상해요.”
“그건 이번 클래스 수료하면.”
“그럼 살 거죠?”
“응.”
지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은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감촉과 서늘한 온도가 기분 좋다며 은기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는 것을 좋아했다.
“혹시 회사 일 다시 하고 싶진 않아요?”
은기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이따금 자신의 직업과 상황 때문에 지서의 선택지가 좁아지는 것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회사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성질부릴 때는 언제고. 어리구나 싶다가도 이렇게 마음 써 줄 때면 세심한 성품이 고맙기만 했다.
“지금도 좋아. 꽃 실컷 만지고, 보고 싶었던 뮤지컬도 지겹게 보고.”
“그래도.”
“일은, 그때 난 그 일이 너무 좋고 하고 싶었다기보단…….”
지서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은기의 곁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후 스스로의 시간을 반추하며 고민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늦었지만 그 일을 찾기로 했다.
“그때 난 독기가 머리끝까지 차서 악밖에 남은 게 없었거든.”
지나간 시간을 되짚자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져 지서는 차분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꽃을 정리했다. 라넌큘러스, 장미, 골드 퐁퐁. 그중 붉은 라넌큘러스의 끝을 다듬은 뒤 은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짧게 자른 줄기를 그의 귀에 꽂아 보았다. 단 한 송이만으로도 멋진 센터피스가 완성되었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네 옆에서 쉬는 거야.”
지서는 은기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자신감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지서에겐 어떤 확신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넌 내 편이 되어 주겠지.
이 믿음은 동요 없이 굳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