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17)

에필로그 2

동틀 무렵부터 시작된 매미 소리는 해가 완전히 뜨자 점점 더 요란해졌다.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오수에 빠져 있던 지서는 멍하니 잠에서 깨 천장을 응시했다. 여기가 어디더라. 꿈이 현실처럼 선명하고 현실이 꿈처럼 몽롱하다. 다시 눈을 감자 몸이 저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후텁지근한 공기, 피부를 찌르는 햇빛. 아마도 여긴…….

“깼어?”

주방에서 나온 현숙이 지서에게 미지근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인지되었다.

“방금 보리차 끓여서 좀 식혔어. 너 이제 차가운 물 마시면 안 돼.”

지서의 고향, 무연리이다.

“과수원 집 여자가 콩국 주고 갔어. 점심에 콩국수 해 먹자.”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현숙이 요즘 유행한다는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찮을 텐데도 그녀는 끼니때마다 지서를 챙기는 데 열심이었다.

지서는 몸을 일으키려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현기증이 올라와 잠시 숨을 골랐다. 시계를 보니 토막잠을 잔 건 30분 남짓이었다. 여러 가지로 예민해져서 요즘엔 깊은 잠을 길게 자지 못한다. 몸의 변화가 지난달과 이번 달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면 또 금세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이제 조금만 움직여도 숨차고 힘들 때야. 엄마 되는 게 쉬운 게 아니란다.”

언제 또 나왔는지 현숙이 지서를 부축해 다시 리클라이너에 앉혀 주었다.

“몸이 좀 붓는 느낌이에요.”

액세서리가 답답하고 피부에 닿는 옷도 촉감이 좋지 않으면 거슬렸다. 원래 예민한 편이긴 했지만 감각 신경이 증폭되기라도 했는지 요즘 들어 부쩍 더 심해졌다.

“원래 그런 거야.”

“밤에 태동도 너무 심하고. 잠도 안 오고.”

“애기가 아빠 보고 싶은가 보다.”

지서의 말에 현숙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동그랗게 나온 그녀의 배에 부채질을 해 주었다.

“은기 내일 나오나?”

“네.”

“우리 군인 아저씨 애기 보고 싶다고 밤마다 울었을 텐데. 우리 아가 내일이면 아빠 보겠네!”

현숙은 이렇게 배 속 아이에게 말을 거는 시늉을 자주 하곤 했다.

“군인 아저씨는 무슨. 겨우 4주 훈련인데요.”

새초롬한 대꾸와는 달리 지서의 입술은 부드럽게 휘며 미소를 그렸다. 드디어 내일이면 은기가 온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은기는 예술체육요원으로 편성돼 4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과 봉사 활동 544시간으로 군복무를 대체하게 됐다. 임신한 지서를 돌봐 줄 친정도, 가까운 친척도 없어 은기는 훈련소 입소를 더 미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은기의 부모님 역시 중요한 연구 일정 때문에 보살펴 줄 여력이 되지 않아 그의 걱정이 컸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휴가를 이렇게 보내는 건 말도 안 되기에 지서가 등을 떠밀었다.

가기 싫다고 전날 밤까지도 우는 시늉을 했던 은기는 지서가 4주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이냐고 핀잔을 주자 은근히 삐진 눈치였다. 입소하는 날 차에서 헤어져 훈련소에 들어갈 때는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기사 사진이 떠 축구 커뮤니티에선 훈련받는 것도 싫어서 우냐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임신한 와이프 두고 훈련소 들어가니 얼마나 마음 쓰이겠냐는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겉으론 쿨하게 보냈지만 속으론 지서 역시 쿨하지 못했다. 훈련소에서 보낸 은기의 옷과 편지가 택배로 도착한 날엔 조금, 아니, 많이 울었다. 고작 4주라고 말할 땐 언제고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현숙은 자주 들락거리며 지서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은기에게 특별히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눈치 빠른 사람답게 과하지 않게, 적당히 편안한 배려가 고마웠다. 피를 나눴다면 아마도 평범한 친정 엄마와 딸의 모습이 이랬겠지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결혼을 했을 때, 그리고 아이를 가진 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친모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지서는 피하지도 그렇다고 살갑게 받아 주지도 않았다. 사실이냐 묻기에 그렇다고 확인만 해 줬을 뿐.

이제 주애의 목소리를 들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그리움을 찾고 결핍된 애정을 갈구하는 것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미움은 이미 쓸모를 다했고 증오는 메말라 바닥을 보였다. 새삼 깨닫는다. 파괴적인 감정이 이렇게 피곤한 거구나.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늘 아팠구나.

모든 감정을 말끔히 정리하니 내가 가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잃고 나서야 깨달은 박화순 여사의 사랑, 늘 벗어나고 싶었지만 돌아갈 때마다 따뜻하게 쉬게 해 주었던 내 고향,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은기와 이제 태어날 아이.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스마트폰 진동 소리에 지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떠 확인해 보니 은기의 어머니였다. 미국 대학의 생명공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메일을 보내곤 했다. 전화나 모바일 메신저는 선호하지 않는다며, 형식적인 안부 인사는 필요 없으니 메일이나 주고받자고. 지서 역시 이쪽이 편했다.

처음에는 경직되었지만 시어머니와의 대화는 점점 주제가 다채로워졌다. 예의를 모르는 그녀의 이웃부터 지금 연구 중인 바이러스 RNA 전사체 분석 이야기까지. 오늘의 주제는 주인이 바뀌고 맛없어진 시모의 단골 컵케이크집에 관한 것이었다.

지서는 주로 자신이 디자인한 꽃다발이나 바스켓, 웨딩 장식 사진과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오늘은 시모에게 마당 담벼락에 핀 장미꽃 사진을 전송했다. 뼛속까지 공학 교수인 그녀였지만 꽃을 보는 것만큼은 좋아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현숙이 콩국수에 넣을 오이라도 다듬는지 주방에선 일정한 박자의 칼질 소리가 들렸다. 오이가 잘리는 사각거리는 소리. 통통통, 칼이 나무 도마를 때리는 소리. 백색 소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 도와드려요?”

지서가 묻자 그녀가 주방에서 고개만 쑥 내밀고 핀잔을 주었다.

“됐네요. 그 몸으로 돕긴 뭘 도와. 넌 그냥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게 돕는 거야.”

그 말에 지서는 엷게 웃으며 리클라이너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드디어 내일, 은기가 돌아온다.

지서는 침대에 모로 누워 벌써 10분째 뉴스 애플리케이션을 켜 놓고 새로고침을 했다. 이제 슬슬 퇴소 시간인데, 분명 기사 사진이 올라올 텐데 아직 업데이트된 게 없다.

오늘 은기는 4주 훈련소 일정을 마친다.

입소할 때는 지서도 배웅하러 같이 갔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되어 은기는 퇴소는 혼자 하겠다며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 만삭에 가까운 임산부라 지서까지 픽업해 가면 에이전트도 신경 쓰일 테니 집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거였다.

다시 새로고침을 누르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편 은기^^♥]

처음 저장한 그대로 그냥 두었더니 은기가 기어코 바꾸었다. 앞에 ‘남편’만 추가한 이름이었다.

“응.”

― 나 나왔어요.

“수고했어.”

― 몸은 어때요? 우리 아가는?

“괜찮아. 잘 있지.”

― 그럼 나 잠깐 인터뷰만 하고 갈게요. 기자들 입소할 때보다 많이 와서 인터뷰해 줘야 해요.

“응. 끝나고 전화해.”

전화를 끊고 다시 새로고침을 하자 기사 사진 몇십 장이 업데이트된다. 기자들에게 인사하는 사진. 잠시 전화하겠다고 손짓하는 사진. 모자를 쓰고 있긴 하지만 머리카락이 입소할 때보다는 좀 더 자란 것 같다. 살도 좀 빠진 듯하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생기 넘치고 건강해 안심이 된다. 단 몇 마디 대화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말이 되나.

다 비슷비슷한 기사 사진들을 넘겨 보다가 지서는 까무룩 잠이 든다.

누군가 이마를 만지며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느낌이 들었다. 어렴풋 깨자 흐린 시야의 틈으로 커다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지서의 이니셜을 새겨 넣은 손목의 타투, 익숙한 비누 향과 물 냄새. 이 인기척. 누구인지 안다.

이마에서 맴돌던 온기가 아쉽게 멀어지자 지서는 잠투정을 하듯 뒤척이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낑낑거렸다.

“어, 깼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그가 도착한 걸 보니 낮잠을 꽤 길게 잤나 보다.

“잠깐만. 나 옷 좀 입고.”

원래도 깔끔한 편이었던 은기는 지서가 임신한 후로 그녀보다 더 까다롭게 굴었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오면 손 씻고 외출복을 갈아입기 전엔 접촉하는 것도 꺼렸다. 저러다 아이 태어나면 무균실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서가 눈을 감은 채로 안아 달라는 듯 손을 위로 뻗자 옷을 입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야.”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쿵, 울리는 소음과 함께 은기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지서가 눈을 뜨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정강이를 문지르던 그가 얼른 다가와 그녀를 잡았다.

“자, 남편 왔다.”

오자마자 샤워를 했는지 얼굴이 뽀얗다.

“인터뷰하고 전화한다며.”

지서는 다시 눈을 감으며 은기에게 기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했는데 잠든 거 같아서 그냥 끊었어요. 잘 잤어요?”

“으응.”

“배 더 나온 거 같네.”

은기가 커다란 손으로 배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잘 있었어? 하고 인사를 했다. 아빠가 온 걸 아는 건지 바로 요란한 태동이 느껴졌다. 은기가 양손을 대자 더 거세진다.

“나 얘 때문에 잠 못 잤어.”

사실 따지자면 4주 동안 내내 잠을 설쳤다. 첫 주 차엔 걱정이 돼서, 2주 차엔 보고 싶어서, 3주 차엔 분리불안이 심해서, 4주 차엔 시간이 너무나 안 가서. 임신 중이라 호르몬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은기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 그런 거겠지만 그냥 밤에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때면 태동도 덩달아 심해졌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나도 있다는 자기주장 같아 웃기는 녀석이네 싶었다.

“엄마 괴롭히면 어떡해.”

은기가 지서를 눕히고는 배를 살살 만져 주자 태동이 점점 잦아들었다. 사실은 너 때문이야. 은기 네가 곁에 없어서. 투정 부리고 싶은 걸 지서는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도 힘들었어요. 아, 이래서 탈영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코끝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은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장난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지나치게 진지했다. 은기는 고개를 숙여 지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기분 좋아 지서는 눈을 감았다.

“나 또 잠 와.”

“자요. 내가 옆에 있을게.”

은기는 지서를 안아 편하게 자세를 잡아 주었다. 살며시 그녀의 왼쪽 가슴에 손을 대자 일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안도감과 충족감이 뒤꿈치를 간질이며 올라와 서서히 그의 몸 전체를 감싼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졸고 있는 그녀가 야속하다가도 내 아이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는 투정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안심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내가 곁에 있어서, 안도감이 들어서. 당신이 내 품 안에서 잠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하다.

은기는 엄지로 가만히 지서의 감은 눈을 더듬어 만지다 충동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이런 소소한 입맞춤에도 여전히 첫 키스의 순간처럼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와의 모든 키스는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파고든다.

우리의 계절을 떠올린다. 겨울처럼 차갑고 건조한 당신에게 빠지던 그 순간을. 이토록 날 뜨겁게 만들던 그 서늘한 눈동자를.

무연에서 만난 나의 인연.

내가 언제부터, 얼마나 동경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당신은 아마 짐작도 못 하겠지.

지서는 신중하게 꽃을 꺾어 풀과 잘 엮었다. 그녀의 마당 정원엔 꽃이 가득했다. 남는 공간에 씨를 뿌려만 놓고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는데 자연이란 놀랍다. 어느새 꽃과 풀이 제법 자라 풍성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 냄새가, 들꽃 향이 진동한다. 지서는 달콤한 꽃향기를 깊이 마신다. 사랑에도 향이 있다면 분명 이와 같을 것이다.

줄기를 묶어 꽃다발을 고정하고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저 멀리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은기가 뛰어오는 게 보인다. 지서가 손을 흔들자 은기가 밝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얼어붙은 나의 세계를 구원해 준 그에게 들꽃 다발을 내밀며 속삭인다. 널 사랑하는 내가 좋아서, 날 사랑하게 되었다고.

꽃을 받은 은기가 부드럽게 포옹한다. 그 너른 품 안에서 지서는 꽃처럼 웃는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꽃은 활짝 피었으며 내 곁엔 네가 있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한 여름의 오후.

우리의 계절은 온화하다.

― fin

작가 후기

“당신이 안녕하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지냅니다.”

동네에 빵순이인 제가 엄청 좋아하는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세트를 사면 저 메시지 띠를 둘러 포장을 해 줍니다. 지금도 그 집 카스테라를 먹으며 이 후기를 쓰고 있는데, 로마인의 편지 인사말이라고 해요. 비록 먹보여서 알게 된 메시지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언젠가는 꼭 한번 써먹고 싶었어요.

평안하신가요. 저는 잘 지냅니다.

‘계절의 온도’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입니다. 고즈넉한 시골을 좋아하고, 꽃도 좋아요. 맛있는 음식도 좋아하고, 네, 축구도 좋아합니다. 작년에 유럽 축구 투어를 다녀오면서 ‘아 이걸 써야지. 출간하고 또 와야지!’ 했는데 이제 여행은 기약이 없어졌고 제 K리그 시즌권도 환불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들이 특별한 일들이 되어 버렸네요. 제가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싶었던 여름의 낭만과 계절의 위로가 책 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이 될까 봐 걱정이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질 거라 믿습니다.

‘계절의 온도’가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큰 도움 주신 뿔미디어 다향의 심은지 님을 비롯한 편집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든든한 가족, 다정한 김리키 님과 친구들에게도 사랑을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인사드릴 땐 세상이 무사하길 바랍니다.

2020년, 8월.

민혜윤 드림.

❖ 참고 문헌

오유미, 『오차원의 꽃』, 비타북스, 2018

오경아, 『안아주는 정원』, 샘터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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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빈집』,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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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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