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인간 : 백재성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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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 씨는 오후 1시가 넘어서야 깨어났다. 그렇게까지 힘차게 달렸으니, 이 정도 늦잠은 애교로 봐줘야겠다. 수진 씨를 위해 손수 준비했던 아침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자취 경력이 길어서 요리는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조금 아쉽다. 점심은 인근 도시락 가게에서 사 온 치킨마요였다.
“음냐.. 음냐.. 맛있네요.”
어색한 공기가 흐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수진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섹스에 의한 열량 소모 때문에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도시락 하나를 몽땅 까먹고 후식으로 라면도 한 개 끓여 먹었다.
내 앞에서 폭식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는지, 라면 국물을 모두 들이키고서야 시선을 내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 어제 너무 격렬하게 해서…. 평소에는 이렇게 많이 안 먹어요.”
변명하는 모습이 꼭 남자 손 한번 못 잡아본 처녀 같다. 아마 거울을 보면 나는 무척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부끄럽지 않게 간밤의 대단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며 수진 씨의 편을 들어 주었다.
“엄청난 섹스였죠. 수진 씨의 앞구멍과 뒷구멍 모두에 그렇게 싸댔으니, 임신은 확정이겠네요. 크큭! 혹시 뒤에도 애기가 생기려나.”
마지막은 시답잖은 농담이다. 수진 씨는 내 조크 포인트를 잡지 못하고 자못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아, 너무 가볍게 나갔나? 여자에게 임신은 꽤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
물론, 수진 씨의 얼굴에는 경악이나 당혹스러움보다는 걱정의 표정이 앞섰다. 내가 자신을 임신시켰다는 사실 자체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임신 후에 일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 수진 씨는 내가 주문만 한다면 배란유도제를 먹고 내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리라.
그녀는 언제든지 쉽게 임신시킬 수 있는 임신 주머니였다. 물론, 나도 내 자식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다. 현실은 망가와 다르니까. 당연히 프레그넌시 컨트롤이란 스킬이 없었다면, 착실하게 콘돔을 쓸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어제는 위험일이었으니까.
“임신…. 준비할 것이 많겠네요. 우선, 병원부터….”
“아, 수진 씨. 농담이에요.”
나는 그녀가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전에 그녀를 생각의 늪에서 꺼냈다. 수진 씨는 농담이라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분명, 어제 내가 그녀의 보지에 시원하게 정액을 싸지른 것은 사실이니까.
내가 어제 그녀에게 주입한 정액은 일반인이라면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네다섯 명이 합심해야 짜낼 만한 양이었다. 위험일이 아니라도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혹시…. 묶으셨나요?”
추리 방향은 이해하지만 아쉽게도 틀렸다. 그녀로서는 정답을 맞출 수 없는 문제니 어쩔 수 없다. 나는 프레그넌시 컨트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내친김에 파워 오브 섹스의 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기로 했다. 다만, 말만 하면 신빙성이 적으니, 그녀가 강해졌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거에 관해서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잠깐 일어날까요. 요 근처 공원에서 이야기하죠.”
수진 씨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모양처 같은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든다. 역시, 그녀는 내 첫 번째 노예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빌라를 나왔다.
여름이 오는 향기가 대기에서 느껴진다. 이제 곧 눅눅한 여름 공기가 열대야와 함께 올 것이다. 좁고 퀴퀴한 원룸에서 더운 여름을 보내는 것은 무척 고역이다. 수진 씨의 방에는 에어컨이 있는 모양이지만, 내 방에는 없다.
여름을 위해서 에어컨을 하나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던전 헌터가 되면 돈에 쪼들릴 일은 없을 테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시려고 공원에 가는 거죠? 차라리 카페가 낫지 않을까요?”
수진 씨는 내게 바짝 몸을 붙이며 그렇게 물었다. 절대 이웃 정도의 관계로는 형성될 수 없는 간격이다. 그녀가 내 충실한 노예라는 것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혹시, 이것이 바로 파워 오브 섹스의 ‘노예화’ 효과인가? 툴팁에 적혀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다.
“수진 씨가 납득하려면 바깥이 더 좋습니다. 실험할 것이 조금 있거든요.”
“실험할 거요?”
“네. 다 왔네요.”
운 좋게 오늘은 공원에 꼬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능력 테스트야 누가 있어도 상관없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양이다. 게다가 내가 수진 씨에게 할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전에 스킬을 테스트했던 장소로 갔다. 공원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잔디밭이다. ‘잔디 밟지 마시오.’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게 출입하는 곳이다. 이게, 공중 도덕적으로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진 씨. 아니, 이렇게까지 가까운 관계가 됐는데, 존칭은 조금 그렇네요.”
“확실히…. 이제 저는 재성 씨 꺼니까,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수진 씨, 나이가 혹시 몇 살이세요?”
“스물네 살이요. 재성 씨는요?”
“오. 저랑 동갑이네요. 저도 스물넷. 기막힌 우연이네요. 어쩌면 우리는 하늘이 점지해 준 운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운명론 따위는 믿지 않지만, 내 말이 제법 로맨틱하게 들렸는지 수진 씨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한층 경쾌하다. 역시 여자들은 이런 멘트를 좋아한다.
“그럼, 편하게 말 놓을까요?”
“좋아. 수진아…. 조금 어색하긴 해도 차차 적응되겠지?”
“응. 나는 별로 안 어색한데. 후후. 재성아~♥”
눈에서 하트가 뿅뿅 튀어나온다. 말을 놓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감성이 섬세한 수진 씨니까, 이런 사소한 변화에도 여러 감흥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 이제부터는 수진이지.
“흠흠! 수진아.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을 잘 들어줘. 그리고 내가 조금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해도, 나를 믿어줘.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가능하면.”
“응. 믿을게.”
수진이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를 신뢰하는 것은 좋지만, 대답이 너무 단칼 같다. 머리에서 사고하지 않고 내뱉은 말 같다. 상대가 나이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람을 잘 믿는 건지 모르겠다. 제발 전자이길 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 수진이 너는 임신하지 않아. 물론, 내가 정관 수술을 한 것은 아니야. 네가 임신하지 않는 이유는 내 어빌리티 때문이야.”
어빌리티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알기 쉬운 반응이다. 헌터인 수진이에게 어빌리티는 꽤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재성이 너는 분명 라이트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지? 그 어빌리티로 임신을 통제할 수도 있어?”
하나의 어빌리티에서 파생되는 테크닉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테크닉이 존재한다. 그러나 임신 조절 같은 능력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라이트 컨트롤의 테크닉이 될 수 없다. 테크닉은 기본적으로 어빌리티를 응용한 기술이다.
“아니. 임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빌리티야. 즉, 나는 복수의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오른손을 들었다. 수진이가 나를 아무리 신뢰한다고 해도 말만으로는 믿음을 불어넣기 부족하다. 나는 오른손 위에 밝게 빛나는 구체를 생성했다. 내가 라이트 컨트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사롭고 자애로운 빛…. 라이트 컨트롤…. 확실하네.”
수진이는 홀린 듯 내가 만든 빛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이 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홀한 빛에 잠깐 취했다. 내 빛을 몇 초 동안 응시한 수진이는 이윽고 내가 한 말을 이해하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뜬 얼굴로 외쳤다.
“잠깐! 뭐….? 복수의 어빌..”
수진이는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하지만, 주의해서 나쁜 것은 없다. 역시, 내 노예 일호는 눈치도 빠르다. 수진이에 대한 사랑 스택이 하나 늘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증명할 수 있어. 바로 이렇게.”
나는 왼손으로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라이트 컨트롤의 대척점이라 불리며, 데모닉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능력. 그래서 나도 사용을 꺼린 능력이었다.
우우우우웅!
“......다크니스 컨트롤.”
수진이는 내 손 위에 나타난 검은색 구체를 보고 그 어빌리티의 이름을 짧게 읊조렸다. 나에게는 어빌리티가 아니라 스킬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다수의 어빌리티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두 가지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에게 목격되면 변명할 구석이 없다. 나는 재빨리 어둠의 구체를 없앴다. 빛의 구체와는 다른 음습한 힘의 결정체는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뭐, 이런 거지. 과학자들은 복수의 어빌리티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과학계의 미래가 참 걱정되네.”
“어떻게…. 여러 개의 어빌리티를….”
수진이는 조금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빌리티는 수진이에게 굉장히 심오한 주제다. 수진이는 던전 헌터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중에 어빌리티에 관한 것도 껴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어빌리티를 강화할만한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을 테니까.
그녀가 어빌리티에 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요 며칠간에 대화로도 충분히 알았다. 수진이 입장에서는 내가 보여준 것은 갑자기 중력이 물체를 밀어내는 것 같은 기괴한 현상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나도 분명 인간은 두 개 이상의 어빌리티를 가질 수 없다고 들었는데…. 수많은 논문에서 같은 사실이 적혀 있었어.”
“그럼, 그 논문들은 모두 폐기돼야겠군. 물론, 나는 이것을 대외적으로 밝힐 생각이 없지만. 아무튼, 내가 가진 어빌리티는 총 두 개야. 하나는 엘리멘탈 마스터리. 다른 하나는 파워 오브 섹스.”
사실, 내 어빌리티는 파워 오브 섹스 하나이다. 엘리멘탈 마스터리는 스킬이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별로 이득도 없으면서 귀찮기만 하다. 나는 최대한 그녀가 이해하기 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파워 오브 섹스는 섹스를 통해 나와 파트너를 성장시키는 힘이야. 즉, 나와 섹스하기만 해도 강해진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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