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제자 : 백재성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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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머레이
아버지는 유명한 주의원. 어머니는 사회운동가이자, 변호사. 본인은 던전 헌터다.
그는 대다수의 여자가 완벽하다고 생각할만한 남자였다. 185cm의 훤칠한 키, 황금같이 아름다운 선명한 금발에 파란 눈, 그리고 창백한 피부.
그는 그야말로 백인이라는 클리셰의 집합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르는 점이지만, 아무리 미국에서 가장 흔한 인종이 백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처럼 영화에 나올 것 같은 훈훈한 미남 백인은 많지 않다. 좋은 집안, 좋은 부모님, 그리고 좋은 외모와 좋은 직업.
라파엘 머레이는 연애 시장과 결혼 시장을 모두 석권할 만한 배경과 능력을 가진 사내였다. 그러나 그것은 머레이에게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미 마음에 둔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의 소꿉친구인 레이나 에버렛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같은 초등학교의 같은 반이라는 인연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리고 그는 에버렛에게 한눈에 반했다.
에버렛 역시 자신처럼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금발의 백인 미녀였다. 가슴이 크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러나 영화 속의 금발 미녀처럼 멍청한 여자는 결코 아니었다. 에버렛은 어렸을 때부터 우월한 가슴과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레이처럼 결혼 시작을 석권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었다. 머레이는 자신의 짝이라면 에버렛 말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머레이는 에버렛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지만, 섣불리 고백할 수는 없었다. 에버렛은 그가 유일하게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고백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에버렛을 마음에 둔 머레이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꽃미남의 고백도 거절했다. 장례가 촉망한 운동부 선배의 고백도 거절했다. 멋진 리무진과 수행비서를 데리고 등교하는 부잣집 친구의 고백도 거절했다. 그래서 머레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당당히 밝힐 수 없었다. 수많은 경쟁자가 나가떨어진 것처럼, 자신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에.
그러나 그는 에버렛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아주 길게 보기로 했다. 에버렛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외모도 신경 써서 가꾸었고, 패션에도 관심을 보냈다.
그가 PC에 관심을 가진 것도, 사실 에버렛의 마음을 사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인권 운동을 하는 학생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는 결국 에버렛과 함께 헌터로 각성하기까지 했다. 머레이는 자신과 에버렛의 인연은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던전 헌터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파티를 만들었고 에버렛을 자신의 첫 번째 파티원으로 초대했다.
준비가 조금 길었지만, 확실한 판을 만들었다. 머레이는 이번 고백을 위해 10만 달러가 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다. 맞춤 정장도 맞췄고, 고급스러운 시계도 샀다. 머레이는 부족한 자신감을 완전히 메꾸고 남을 만한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의 고백이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에버렛 역시 자신에게 은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아침. 두 사람은 항상 같이 아침을 먹네.”
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하던 에버렛과 머레이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싱글벙글 웃는 재성이 두 사람이 식사하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바늘과 실처럼 항상 붙어 다니던 그의 여자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재성을 본 에버렛과 머레이의 표정이 대조적으로 변했다. 머레이는 인상을 찌푸렸으며, 에버렛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머레이는 그런 에버렛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재성은 두 사람에게 허락도 맡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합석했다.
“우리 둘이 식사하고 있는데.”
머레이가 불쾌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동양인 남자는 다른 건 나쁘지 않지만, 너무 천박하고 저질스럽다. 이런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에버렛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머레이는 그와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어라? 나, 실례한 건가?”
“괜찮아요. 앉으세요. 함께 먹으면 즐겁잖아요.”
에버렛은 재성에게 자리를 권유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머레이도 더 이상 뭐라 못했다.
에버렛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머레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그 여자친구분이 안 보이시네요.”
“아. 수진이 말이요? 제가 어젯밤에 너무 괴롭혀서 아직도 침대에서 못 일어나고 있어요. 하하. 정력이 너무 넘쳐서요.”
재성의 말에 에버렛과 머레이의 표정이 또다시 나뉘었다. 에버렛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재성의 입에 집중했다. 반면, 머레이는 불쾌감이 담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흠. 내가 가능하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여자를 그렇게 대하거나 말하는 건 좀 무례해 보여. 나중에 그런 태도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생길지도 몰라.”
머레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에버렛을 흘끗 엿봤다.
조금 멋있어 보였나?
한국어 실력이 에버렛처럼 완벽하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그런가? 하지만, 우린 연인 사이인데. 이게 보통 아니야?”
재성은 머레이의 지적에도 불쾌한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에버렛은 재성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머레이는 이번에도 에버렛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이 재성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보통이란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사회에 그런 태도는 비난받을 수 있어.”
“그런 태도?”
“여자를 함부로 다루는 태도 말이야. 우린 던전 헌터야. 스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해. 왜냐하면 우리는 기득권을 가진 특권 계층이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여자에게 세심하게 대해 줘. 우리의 사생활을 눈에 불을 켜고 파헤치는 파파라치나, 사회부 기자들에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흠…. 나는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알아야지. 배워야 할 사람이 배우지 못한 것은 자랑스러운 게 아니니까.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차별과 편견이 존재했어. 이 세상은 유리 천장투성이야. 기득권 남자들은 온통 여자를 불쾌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성 상품화 산업을 찍어내서 돈을 벌지. 영화, 드라마, 게임, 포르노…. 등등. 사회는 아직 여자를 도구로 보고 있어.”
머레이는 무아지경에 빠져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재성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야. PC라고 들어봤지?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인과 동양인, 히스패닉 등등. 모든 인류는 동등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PC란 그런 비정상에 관한 고함이자, 촉구야. 그리고 그 가장 큰 흐름은 페미니즘이지.”
머레이의 일장 연설에도 재성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 새끼는 위장 페미 새끼다. 말하면서 에버렛을 슬금슬금 보는 게 다 보이네. 병신 새끼.’
재성이 보기에 머레이는 전형적으로 사상을 도구로 이용하는 놈이었다. 그가 말을 하는 중간마다 에버렛의 눈치를 보는 것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에버렛도 그것을 알아챈 듯,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여자를 도구로 삼을지는 몰라도, 저 새끼는 PC를 도구로 삼네. 여자의 보지에 박고 기쁨을 준다. 이게 진짜 페미니즘이지. 크큭!’
재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답답한 이야기네. 뭐, 남자 여자가 서로 사랑하면, 섹스 하는 게 당연하잖아. 굳이 그런 거에 페미니즘이니 그런 걸 넣을 필요가 있어?”
“아직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것 같군. 뭐, 네가 이해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머레이는 그렇게 말하고 포크를 들었다. 이곳의 샐러드는 꽤 맛있었다. 드레싱의 맛이 아닌, 야채 본연의 맛이 좋았다. 재성의 접시 위에는 고기가 가득했다. 재성의 접시는 머레이보다 에버렛 쪽에 가까웠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야한 여자가 좋아. 연애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속궁합이니까.”
재성의 말에 머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성관계는 사람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야. 혼전순결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문란한 생활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해.”
“음…. 꼭 그건 아닐지도….?”
머레이의 말에 에버렛이 태클을 걸었다. 머레이는 그녀의 말에 양상추를 찍던 포크를 멈췄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말에 태클을 건 적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주제에서 그녀가 반대 의견을 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얼마든지 관계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쵸. 그쵸. 게다가, 섹스, 기분 좋다고.”
“아…. 그런가? 나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에, 에버렛! 이 녀석하고 진지하게 대화하지 마! 쳇! 여자한테 그런 저속한 말 하는 거 아니야.”
“저속하다니. 머레이, 우린 성인이야 섹스 정도가 저속할 나이는 한참 지났잖아.”
머레이의 말에 에버렛은 반박했다. 머레이는 대화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오늘의 에버렛은 평소와 달랐다.
“으흠…! 그런가? 뭐, 아무튼 굳이 아침 식사 중에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대화의 분위기는 재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가 보기에, 애초에 머레이와 에버렛은 이어지기 힘든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랐다. 에버렛은 절대 금욕적인 남자 아래서 행복해질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이혼할 것이다.
‘물론, 머레이 이 새끼도 진지하게 금욕적인 사람은 아니지. 이 새끼는 존나 가식쟁이야. 차라리 나처럼 당당하게 여자 따먹지.’
거짓말의 권위자인 재성은 머레이의 가식을 알아챘다. 그가 잰틀맨인 척, 페미니스트인 척, 그리고 혼전순결주의자인 척하는 것은 모두 에버렛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머레이는 에버렛의 겉모습만 보고, 그녀가 완전무결하고 청순한 동화책 속의 공주라고 착각했고, 동화책 속의 왕자님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가식을 두른 것이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비극이었다.
‘나는 그런 비극을 끝내는 왕자님인가?’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은 식사를 계속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가장 늦게 합류한 재성이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본인 입으로는 무슨 훈련을 하러 간다고 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불청객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테이블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머레이는 이 이상한 기류에 당혹스러웠지만, 할 말이 없었다.
***
‘여기 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에버렛은 가져온 짐 사이에서 옷 한 벌을 찾았다. 그녀가 가진 옷은 대부분 기능성을 중시한다. 그렇지 않은 옷은 딱 두 벌이다.
하나는 몸에 딱 맞는 맞춤 정장인데,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나 입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색 슬립 원피스였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실크로 된 슬립 원피스였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산 옷이었다.
옆트임이 있는 원피스라 그녀의 장점인 길쭉한 다리가 훤히 보였다. 풍만한 가슴골이 제법 노골적으로 노출되었고, 겨드랑이 부분도 시원하게 드러났다. 등은 허리의 중간 부분까지 트여 있었다.
이걸 사고 입은 적은 손에 꼽는다. 여자친구들과 파티를 했을 때, 몇 번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워크숍에 특별히 가지고 다녔다. 혹시, 머레이 앞에서 입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버렛은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여자인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 미녀가 흥분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후후. 제법 잘 어울리나?)
너무 과격하지 않을까 싶은 복장이다. 그러나, 에버렛은 갑자기 일탈이 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 재성과 수진의 과격한 행위를 보며 키워온 뜨거운 욕망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그녀와 함께 유학을 온 미국인 헌터 몇 명이 그녀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오. 누구 꼬시러 가?)
(넌 아니니까, 기대하지 마.)
(쳇. 아쉽구먼. 머레이, 그 범생이는 그런 복장, 별로 안 좋아하지 않을까?)
(글쎄?)
에버렛은 대담한 복장을 입고 평소처럼 주변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모인다. 여자 중에는 작은 목소리로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뭐야. 여기가 무슨 클럽인 줄 아나?”
“저렇게 예쁜 사람은 원래 남자 꼬실 생각밖에 안 하잖아.”
이상하게 에버렛은 그런 뒷담화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여자로서 패배를 시인하는 것 같았다. 있는 자의 여유였다.
(에버렛!)
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지어져 있다. 에버렛은 그런 상황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 이렇게 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점점 머레이가 남자로 안 보였다.
(그 옷은 뭐야? 혹시, 누구랑 벌칙 게임 했어?)
(아니. 내가 원해서 입은 거야.)
(옷이 너무 얇아. 다른 사람들이 다 너를 보고 있잖아.)
(그래서 그게 뭐? 내가 예쁘니까 나를 보는 거 아니야? 카를로스! 그렇지 않아?)
에버렛의 말에 카를로스라고 불린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럼. 천사가 지상에 강림했는데, 구경하지 않을 수 없잖아?)
머레이는 카를로스의 말을 무시하고 거칠게 말했다.
(에버렛! 네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마! 이건…. 너무 가벼워 보여.)
머레이의 말에 에버렛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자신의 복장을 칭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남자였다면…. 여자로서 자신이 기뻐할 만한 말을 아낌없이 해줬을 것이다.
(내 몸은 내 거야. 너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 받고 싶었다. 연수원을 빙 둘러 산책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머레이는 에버렛이 걸어간 방향을 보며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카를로스가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여자는 원래 변덕스러운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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