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 수호자 : 데릭 워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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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파발로 떠났던 우드워드가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비교적 온전한 마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마을의 상태는 평소 오크가 침공했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목책 주변에 부서진 시설물 몇몇을 제외하면 크게 망가진 곳도 없었고, 다친 사람도 생각보다 적었다. 마을 젊은이가 절반 이상 갈려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드워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앗! 당신은 그때 만났던!?”
마을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파발을 전하는 길에 만났던 사람이었다. 저렇게 뚱뚱하게 살이 찐 사람은 인생에서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드로빈은 귀환한 우드워드에게 지원 요청에 대한 답변을 물었다. 마을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드려졌다.
“우드워드. 답변은 어떻게 되었지?”
“그, 그게…. 영지군이 다른 곳에서 작전 중이라, 지원 병력이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는군.”
“미친! 우리 목숨은 목숨도 아니라는 말인가!”
드로빈은 우드워드의 말을 듣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나 기다리라는 것은 사실상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워커가 없었다면 알렌 마을은 오크의 몽둥이에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리 사정해도 돌아오는 답이 그것뿐이었어…. 역시, 우리 같은 가난한 마을은 안중에도 없나 봐.”
“워커 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정말 아찔하군.”
드로빈이 걱정 반, 안도 반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을의 도움이 돼서 다행이로군.”
워커가 짤막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따분하다는 표정만 서려 있었다. 드로빈은 그런 워커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마을에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시중을 들 사람이 있으면 좋겠더군. 리타라고 했었나? 그 여자가 참 똘똘하고 잘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 그러십니까?”
워커가 리타를 언급하자, 드로빈의 표정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불안하게 변했다.
“리타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일손이 부족해 대접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점, 거듭 사과드립니다.”
***
훌륭한 사냥꾼을 판가름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일까? 사냥에 무지한 이라면, 화살의 명중률이나, 재빠른 순발력, 혹은 맹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강인한 근력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냥꾼들이 얼마나 겁쟁이인 줄 안다면, 분명 크게 놀라리라.
맹수나 몬스터는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들을 따라갈 수 없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태생적인 차이를 줄이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겠지만, 그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사냥하다 되려 사냥감이 되는 웃을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이유는 무기를 믿고 섣부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온 이들은 근력이나 순발력보다도 인내심으로 사냥을 성공시켰다. 덫을 놓고, 함정을 파서 사냥감을 조용히 기다리며, 맹수나 몬스터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소싯적, 날아다니는 사냥꾼이었던 깁스는 강인한 인내심과 조심성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그가 저지른 횡령도 그러한 인내심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는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돈을 빼돌렸다. 마치, 덫을 설치하고 성과를 기다라는 사냥꾼처럼, 그의 범죄 행위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비록, 천재지변이 일어나 오랫동안 세워 온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워커 님. 오늘 밤이 좋겠습니다.”
오크와의 싸움에 대한 승리로 들뜬 마을의 분위기는 달빛이 내려앉았는데도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대부분의 주민이 집에서 잠을 청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많은 사람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하므로 각자의 집에 들어갔지만, 나이 깨나 있는 마을 주민들은 오늘 있었던 놀라운 승리에 관해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워커가 깁스에게 물었다. 리타를 어떻게 범하냐는 것이었다.
그의 질문에 깁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참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어두운 하늘 위에서 고고하게 빛을 뽐내는 달빛이 깁스의 지독한 미소를 비춰주었다.
“마을 공용 창고로 가 계십시오. 마을 외진 곳에 있기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날이 밝기 전에 사람들이 알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오늘처럼 어수선한 밤에는 더욱더 그렇겠지요.”
“공용 창고에서 그녀를 범하라는 건가?”
“네. 야밤에 일을 치르기에 그만큼 어울리는 곳은 없을 겁니다. 환경이 조금 위생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으십니까?”
“뭐, 어쩔 수 없군.”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깁스는 고개를 숙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워커가 보기에 그의 표정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어떻게든 기정사실만 만들면, 약혼자가 있다고 한들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리타도 ‘강간당한 여자’라고 손가락질받기 싫을 테니, 순순히 워커 님의 것이 되겠죠. 원래, 여자는 강한 남자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호라. 네 녀석이 맞는 말도 하는군.”
“창고 위치는 아십니까?”
“마을을 구경하면서 확인했다. 걱정하지 마라.”
워커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몸을 돌려 창고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깁스는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워커의 모습이 어스름한 어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쾌재를 불렀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구나!”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계획은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 워커란 놈은 너무나 다루기 쉬운 사냥감이었다. 욕망이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 또한 그만큼 노골적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깁스는 재빨리 리타를 찾았다. 동생과 함께 축제의 뒷정리하는 리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깁스가 다가가자, 리타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물론, 억지 미소였다. 드로빈에게 깁스의 부정을 들은 리타로서는 그를 마냥 편하게만 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깁스에게서 나는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아무리 마을 분위기가 들떴다고 해도 술을 입에 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리타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촌장님. 혹시 음주하셨나요?”
리타의 인사를 받은 깁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좋은 날이어서 좀 마셨다. 동생과 함께 뒷정리하는 건가? 대견하군.”
“별것 아니에요. 남자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이런 일이라도 해야죠.”
“정작 싸운 것은 워커 님이 데려온 메이드였지만. 뭐, 그건 그렇고, 잠시 확인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확인해 줬으면 하는 것이요?”
깁스의 말에 리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래. 아까 전에 작업하느라 삽을 꺼내 썼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잠깐 보니, 숫자가 다른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야밤에 미안하긴 하지만, 삽의 숫자 좀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 정확히 스물네 개가 있어야 한다만.”
그 말에 리타와 꼭 붙어 있던 비앙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 일은 내일 날이 밝고 해도 되잖아요.”
“쯧쯧. 어른이 말하는데 토 달지 마라. 이런 일은 미리미리 안 하면 나중에 개수가 맞지 않는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지.”
“그래. 비앙카. 촌장님 말씀이 맞아. 내가 잠깐, 창고에 갔다 올게. 너는 여기서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줘.”
언니가 깁스의 편을 들자, 비앙카는 토라진 듯 볼을 부풀리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흥. 그래라. 난 여기 정리하고 있을 거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다. 고생 좀 해다오.”
깁스의 격려에 리타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서 물건의 수량을 확인하는 것. 솔직히 귀찮을 뿐이지 큰일은 아니었다. 깁스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리타는 설마 그가 자신을 해할 음모를 꾸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네. 그럼 갔다 올게요. 촌장님도 어서 들어가 쉬세요.”
“후후. 고맙구나 리타. 네가 마을의 보배로구나.”
깁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위기에 빠진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가장 중요한 카드였다.
리타가 마을 창고로 향하자, 깁스는 몰래 그녀의 뒤를 미행했다.
리타는 작은 등불에 의지해 공용 창고까지는 걸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이내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창고가 보였다.
***
나는 마을 공용 창고에 도착했다.
이 주변은 온통 밀밭투성이라, 가장 가까운 민가와의 거리가 족히 500m 이상 떨어져 있다. 창고 안에서 무슨 소란이 나도 주위에서 알아채기 힘든 거리다.
어째서 이런 외진 곳에 창고를 지었나 하니, 예전에는 이쪽에도 집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년쯤 전 오크 침공에서 크게 부서졌을 때, 재건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옮겼단다. 마을 공용 창고는 따로 옮기기도 뭐해서 이렇게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잘 정리된 내부가 보였다. 크기는 대략 20평 정도다.
각종 농기구나, 삽, 목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물을 정비한다든지, 마을 회관을 고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깁스의 배려인지, 창고 안쪽에 두툼한 지푸라기가 깔려 있었다. 침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성했지만, 맨땅보다는 나을 것 같다. 아마, 여기에서 섹스하라는 것 같다.
“아마, 내가 강간할 때 뒤통수를 노리겠지.”
나는 창고의 창문을 확인했다. 지푸라기가 깔린 곳과 살짝 떨어진 곳에 작은 창문이 나 있다. 이 창고의 유일한 창문이었다.
창고를 살피는데, 갑자기 조용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리타가 창고로 다가오고 있었다.
끼이익!
창고 문이 열렸다.
“응? 워커 님?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세요?”
“리타로군.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좋은 밤이다.”
“네!? 아 네…. 좋은 밤이네요. 축제의 열기 때문인지, 평소에는 잘 시간인데, 졸음이 조금도 오지 않아요.”
리타가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주변을 살폈다.
리타를 뒤쫓는 어떤 인영이 포착되었다. 상대가 깁스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깁스의 계획은 간단명료하다. 내가 리타를 범할 때, 드로빈을 불러온다. 그리고 드로빈과 내가 싸우게 되면, 우리를 모두 죽인다. 아마 화살로 저격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치정 싸움으로 죽은 것이라고 현장을 위조할 것이다. 아마 제삼자가 보면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것이다.
리타를 강간하려던 데릭 워커, 그런 워커를 공격한 드로빈. 두 사람의 난투는 무고한 리타마저 사고로 죽게 만들고, 결국 둘 다 죽는다.
적당히 시체에 상흔을 내면 이런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 후비진 시골 마을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겠지.
이렇게 하면, 자신의 혐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죽는 완전 범죄가 성립된다.
드로빈은 아마 약혼녀를 강간한 외지인에게 분노의 칼을 휘두르다 사망한 정의로운 마을 청년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건드렸다가 죽은 추잡한 인간으로 죽을 것이고.
단순하지만, 제법 짜임새 있는 계획이다. 나도 나중에 쓸 일이 있으면 써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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