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 수호자 : 데릭 워커28
* * *
리타는 루나에게 마을을 대표해서 필사적으로 사과를 표하며 그녀의 마음을 녹이기는 쉽지 않았다.
루나 입장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지켜주었던 마을 사람들이 대놓고 배신을 한 꼴이니,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리타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대신 사과드릴게요. 마을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원래는 저렇게 몰상식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리타 님이 사과할 문제가 아닙니다.”
루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리타에게 말했다. 얼음 결정처럼 냉랭한 목소리에서 루나의 의드고 분명히 드러났다.
“아니요. 마을 사람의 일원으로서 이번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어요. 하아. 정말, 다른 사람들이 잠시 뭐에 씌인 모양이에요. 루나 님께 그런 말을 하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그렇게 루나의 옆에서 연신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데, 마을 주민 한 명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자경단원 중 하나이자, 마을에서 드로빈 다음으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자크였다. 꽁지머리를 한 그는 도도도 달려와서 루나의 앞에 섰다.
루나는 자리에서 서서 자신의 앞을 막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녀의 기세는, 당장 비키지 않으면 못 볼 꼴 당할 것이라고 무언의 의사를 전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평범한 청년은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었다.
자크는 루나의 맹수 같은 기세에 눌려 뒤로 몇 걸음 물러났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는 루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나 님! 정말 죄송합니다!”
“자크 오빠!”
리타처럼 루나의 옆에 나란히 걷던 비앙카가 앳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루나 님.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루나는 냉랭한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 말을 하려고 여기 온 겁니까?”
“저희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사죄로 루나 님을 위해 작은 연회를 베풀고 싶습니다.”
“주인님이 오크 무리에 납치당한 이 상황에서 연회를 즐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물러나시죠.”
루나는 매몰찬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러나 자크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 루나의 눈썹이 약하게 꿈틀거렸다.
“자크. 일단 물러나세요.”
리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크를 타일렀지만, 자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마을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작은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부디 저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자크의 한결같은 태도에 루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리타가 옆에서 자크를 거들었다. 물론, 그녀는 자크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러한 초대를 한 지는 전혀 몰랐다.
“루나 님. 마을 사람들이 반성한 모양이에요. 저희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 일은 용서해주세요.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휴우. 알겠습니다. 아까 전에 들었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죠.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루나가 차가운 눈동자로 자크를 쏘아봤다. 자크는 호랑이를 앞에 둔 토끼처럼 몸을 움츠리면 뒤로 물러났다.
“저, 저희의 사죄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네. 리타 님과 비앙카 님의 얼굴을 봐서, 딱 한 번만 용서해드리죠.”
“감사합니다! 루나 님! 오늘 저녁에 마을 회관에서 루나 님을 성대하게 모시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나는 천천히 자크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두 자매에게 말했다.
“리타와 비앙카도 돌아가시죠.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루나 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나 님!”
리타와 비앙카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자크는 루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정신 차려서 다행이네요.”
비앙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자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타의 말에 대꾸했다.
“그, 그렇지.”
***
“으으으….”
머리가 띵했다. 드로빈은 어질어질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온몸에 감각이 흐릿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암전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두 팔이 뒤로 묶였음을 깨달았다.
“젠장! 마을 놈들…. 여긴 어디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곳이었다. 마을 공용 창고다.
“큿! 밧줄로 단단히도 묶었군!”
드로빈은 안간힘을 써서 두 팔을 움직이려 해봤다. 그러나 밧줄에 꽁꽁 묶인 팔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드로빈은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에게 밧줄 다루는 것은 매우 친숙한 일이다. 그는 묶는 것도 능숙했고 푸는 것도 마찬가지로 능숙했다.
주위를 살핀 드로빈은 밧줄을 끊을 만한 정당한 도구를 발견했다. 커다란 삽이었다.
다행히 발은 묶이지 않았다. 드로빈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벽에 비스듬이 기대어진 삽날에 두 손을 가져갔다.
팔이 뒤로 돌아가 묶였기 때문에 자세가 조금 불편했지만, 어떻게든 밧줄의 매듭 부분과 삽날을 맞출 수 있었다.
“사냥용 매듭이로군. 하아…. 이 솜씨라면, 젠킨스가 묶은 것 같은데…. 그 어설픈 녀석이 묶어서 다행이야. 하르겐이 했다면 절대 못 풀었겠지.”
매듭과 삽날을 몇 번 부비부비해서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 드로빈은 30여 분의 사투 끝에 팔을 구속한 매듭을 완전히 풀었다.
손목에 선명한 밧줄 자국이 생겼다. 살이 쓸려서 매우 쓰리고 아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리타를 찾아가야 해! 젠장. 마을 놈들…. 모두 미쳤어.”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깥에서 빗장을 걸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도 나무판자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드로빈은 삽을 들어 창문을 막은 나무판자를 두들겼다.
쿵! 쿵! 쿵!
그때, 갑자기 창고 문이 열렸다. 드로빈은 깜짝 놀라며 열린 문을 향해 삽을 겨눴다.
“오. 이미 풀었군. 역시, 마을 최고의 사냥꾼다워.”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주나이드 할아버지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나이드 할아버지는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두 손을 들어 올려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하아.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리타를 그 백인대장 놈에게 바치려고 하고 있어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변했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주나이드 할아버지는 괜찮습니까?”
“나야 그렇지. 일단, 지금은 사람들의 광기를 막는 것이 우선인 것 같군. 빨리 리타를 구해.”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죠?”
“저녁이야. 마을 사람들이 회관에서 연회 비슷한 것을 열더군. 리타는 그 사람들의 시꺼먼 의도를 모르는 모양이야. 리타를 구할 사람은 자네뿐이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로빈은 고개를 숙이며 창고를 나갔다. 그는 전력으로 마을 회관을 향해 뛰었다.
***
“그러고 보니, 드로빈은 어디 있죠?”
음식 준비를 마친 리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식기를 나르던 젠킨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으음. 사냥하러 나간 모양이야. 아직 안 돌아왔나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 돌아왔다니…. 게다라 이런 난리통에 사냥이라뇨.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요?”
“녀석은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잖아.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젠킨스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리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희 이렇게 형편 좋게 연회를 열어도 될까요? 아직, 워커 님을 구하지 못했잖아요.”
“큼! 맛있게 먹고 힘쓰자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오크에게 잡혔다면 이미 생사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워커 님은 분명히 살아 있을 거에요!”
리타가 발끈하며 말하자 젠킨스가 손을 휘저으며 동의했다.
“그래, 그래. 그래도, 오늘은 일단 오늘의 시간을 즐기자고. 음식 준비하느라 수고 많았어 리타. 이제 너도 푹 쉬어.”
마침, 회관 문이 열리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루나와 켈리였다. 켈리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넣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았고, 루나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도하게 걸어왔다.
“루나 님! 켈리 님!”
리타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환영했다.
“우와~! 맛있는 음식이 잔뜩하네요.”
켈리가 회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두 분을 위한 자리입니다.”
하르겐이 회관 안쪽에서 등장했다. 그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술병이 들려 있었다. 젠킨스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2실버짜리 와인이잖아. 아니, 숙성도를 생각하면 족히 5실버는 되려나?”
“좋은 날이지 좋은 술이 빠질 수 없지.”
루나와 켈리는 하르겐의 의해 자리가 안내되었다. 두 사람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저희의 무례함을 사과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음식들을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하르겐이 만면에 가득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는 리타와 켈리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럼, 마을의 무궁한 발전과 리타 님, 켈리 님의 헌신에 감사하며, 잔을 들겠습니다. 모두 건배!”
“““건배!”””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잔을 들어 올렸다. 루나와 켈리도 함께 잔을 들었다. 그 순간, 회관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리타! 피해!”
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회간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하르겐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쳇.”
“드, 드로빈!?”
리타는 갑자기 난입한 자신의 약혼자를 보고 깜작 놀랐다. 수상한 상황을 감지한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군요.”
“이, 이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하르겐이 손을 내저었다. 루나는 자신의 술잔을 곁눈질로 보았다.
“혹시, 여기에도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건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