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2화 〉 후계자 : 종칠12
* * *
“갈림길이로군.”
마로가 신중한 표정으로 갈림길에 섰다.
이건 의미 없는 갈림길이다. 원래 길마다 다른 함정이 붙어 있는 갈림길인데, 세월이 흘러서 함정이 모두 고장 났기에 어딜 가나 편하게 갈 수 있다. 갈림길은 나중에 하나로 만난다.
‘원작에서 공우선과 마로는 이 갈림길에서 나뉘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원작에서는 마로와 공우선 둘이서 이곳에 도착하지만, 지금은 마로의 시종이 있다.
“두 개의 갈림길이라…. 장보도에 뭐라 나와 있지?”
“장보도가 알려주는 것은 이 미궁의 입구가 전부야. 이 이후로는 새로운 영역이란 거지.”
“그렇군…. 인원을 나누던가, 하나하나 찾아보든가 해야겠군.”
“표정이 급해 보이네. 똥이라도 마려워?”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다. 삼장로가 언제 우리를 쫓을지 모른다. 아무리 완벽하게 흔적을 지웠다 한들, 녀석의 정보력이라면 어떻게든 내 흔적을 찾을 것이다.”
기연을 코앞에 두고 삼장로를 상대하는 것은 그로서는 가장 생각하기 싫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될 테니까.
“그럼 나눠지자. 내가 왼쪽, 너는 오른쪽을 맡아.”
내 말에 마로는 고개를 들어 시종에게 말했다.
“전서부는 얼마나 있지?”
“총 세 장입니다.”
“좋아. 나눠지지. 너는 월비와 함께 가라.”
시종의 이름이 월비인가보다. 원작에도 나오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마로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로군.’
녀석은 내가 이뻐서 자기 시종을 붙여준 것이 아니다. 시종은 감시역이다. 내가 혹시 기연을 빼돌릴까 봐 그녀를 붙인 것이다.
기분 나쁘지는 않다. 녀석의 태도는 당연하다.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찬스가 생각보다 일찍 왔군.’
***
어둡고 습한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변화가 없는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함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길은 나에게 더더욱 지루했다.
나와 월비는 말없이 걸었다. 아니, 나는 말을 걸었지만, 월비는 묵묵부답이었다.
“월비라. 좋은 이름이군.”
“......”
“취미가 뭐지?”
“......”
“차기 교주의 시종이라면 당연히 무공 실력도 갖췄겠지? 무슨 무공을 익혔나?”
“......”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심지어 짜증도 부리지 않았다.
여우 가면 아래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없으니까.’
안 넘어가면 전기톱을 들고 와서라도 넘어가게 만든다. 그게 내 신조다.
“이상형은 어떤가? 마로 같은 녀석을 좋아하나?”
“......당신, 아까부터 말이 너무 많군요.”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냉기가 차갑게 깔린 진중한 목소리다.
내 치근거림이 짜증 나서 저런 건지, 원래 목소리가 저런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가 말을 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짜증이던 뭐던, 시작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심심하니까, 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루하게 똑같은 길만 계속 이어지잖아.”
“어떤 함정이 앞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기연이 숨겨진 곳에 함정이 없다는 것은 믿기 힘들죠.”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든 기관진식이라도 몇백 년을 버티지는 못해. 일반적으로는 말이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함정을 하나도 못 봤어.”
“무림에서 신중하지 않은 자의 말로는 항상 같더군요.”
한 번 입을 여니 제법 대화가 이어졌다.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큰 소득이다.
“저기 문이 보이는군. 드디어 이 좁은 복도가 끝나는 것 같아.”
커다란 철문이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히 녹이 슨 문이라 내공으로 신체를 강화해야 했다.
지옥의 악귀가 우는 것 같은 시끄러운 쇳소리가 좁은 복도에 무겁게 깔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복도가 주는 폐쇄적인 답답함이 사라졌다.
“전혀 다른 곳이로군요.”
월비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함정을 찾는 것이다. 이곳에 함정은 없었다.
“또 갈림길…. 게다가 이번에는 갈림길이 네 개군요.”
우리의 정면에는 네 갈래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저기도 아까의 갈림길과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도 상관없는 길이지.’
원작의 내용을 알 리가 없는 월비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 입장에서 나와 헤어진다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녀는 마로의 명령을 받고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니까.
그러나, 네 개나 되는 갈림길을 모두 둘러보는 것은 시간 낭비가 크다. 마로의 말처럼 삼장로의 능력이라면 늦게나마 그의 흔적을 찾아 쫓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당신은 어느 쪽이 정답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가장 왼쪽? 아니면 오른쪽? 잘 모르겠군.”
“하긴. 단서가 전혀 없으니, 알 리가 없겠군요. 운에 의존하는 것은 정말 싫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네요. 오른쪽을 탐색..”
그녀는 말을 끝맞치지 못했다. 누군가의 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왔나.’
삼장로의 끄나풀이 분명하다. 예상보다 추적이 빠르다.
‘추적에 특화된 법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게 아니면, 이 속도는 설명이 안 돼.’
아마 마로 쪽에도 자객이 갔을 것이다. 녀석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월비는 바로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마로만큼은 아니지만, 강렬한 마기가 그녀의 전신을 둘러쌌다. 그녀의 무공 실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준비하십시오. 능구렁이의 사냥개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귀찮게 됐군. 설마, 본인이 직접 왔나?”
“그는 짜증 날 정도로 꾀가 깊고 신중한 인간입니다. 게다가 제 몸은 끔찍이 아끼죠. 본인이 현장에 나설 리 없습니다.”
삼장로에 대한 월비의 평가는 정확했다. 놈이 직접 몸을 움직일 때는 어지간히 빡쳤을 때 말고는 없다.
‘그리고 그게 놈의 실책이지.’
삼장로가 그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였다면, 나로서도 대처하기 난감했을 것이다.
원작의 한 챕터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고수인 그를 지금 상태에서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최선을 다해도 도망이 한계다.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을 들었다. 월비는 비수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우며 적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적의 수를 셌다. 자객은 총 열 명이었다.
나 암살자요 하고 광고하는 듯, 온몸을 검은 옷으로 도배한 자객 열 명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월비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암영대(???)의 인원을 끌고 왔군요.”
“강한 놈들인가?”
“암살부대로는 말석이긴 하지만, 본교 소속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실력 보증은 되죠. 삼장로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암영대밖에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아무리 삼장로라고 해도 그가 마교의 모든 전투 부대를 움직일 수는 없다. 오히려, 특정 전투 부대의 대주 같은 경우는 장로보다 큰 권력을 쥔 경우도 있다.
배분이 중요시되는 정파와 달리, 마교는 힘의 논리가 우선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조장. 왼쪽은 애송이의 시종입니다. 오른쪽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보에 보고되지 않는 인물이로군. 게다가 기물처럼 보이는 복면을 써서 누군지 전혀 파악이 안 돼.”
“저 기물, 꽤 비싼 것 같은데, 놈을 쓰러뜨리면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우리의 규칙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목을 벤 상대의 전리품은 곧 자신의 것이다!”
녀석들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내 히든 마스크를 가져가고 싶은 모양이다. 꿈의 꿈같은 이야기다.
“주의하십시오. 암영대의 합격술은 정파의 어중이떠중이들처럼 가볍지 않습니다.”
월비는 대놓고 정파를 무시했다. 마교 사람이니 당연하다.
화나지는 않았다. 내가 정파인도 아니고.
“저기 저 조장처럼 보이는 놈과 나머지 떨거지들. 둘 중 누굴 맡겠어?”
“제게 묻는 건가요?”
“여기에 너 말고 더 있나?”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좋아요. 저는 나머지를 맡겠습니다. 그들의 합격기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버거울 겁니다.”
“자기는 경험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삼장로의 마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요. 그들의 합격기를 받아치지 못했다면, 제가 여기에 있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월비의 대꾸였다. 나는 자연스레 조장을 맡게 되었다.
저런 시커먼 놈들과 오래 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식한 돌진이다. 일부러 녀석에게 빈틈을 잔뜩 주었다.
“바보 같은 놈! 칼 좀 쓴다고 우리를 정면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로 생각하나!?”
놈들이 질서정연하게 합격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월비가 아니었다.
“당신들의 상대는 접니다.”
월비의 비수가 선두에 선 놈을 향해 날아갔다. 내공이 서린 비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상대방의 손목을 꿰뚫었다.
“크핫!”
“조심해! 저년, 보통 실력이 아니야! 암영대의 7조가 저년 손에 몰살당했다!”
“씨발! 칠삼이를 죽인 년이로군! 저년은 죽이지 마라! 칠삼이 대가리를 자른 년의 속살 맛좀 보자!”
“강간은 죽여서 하면 되잖아! 여유로운 소리 하지 마!”
“다 너 같은 변태 취향인 줄 아냐? 이잇! 조심!”
월비의 비수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이곳만큼 암살자에게 좋은 무덤이 또 있을까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쓸쓸히 죽으세요.”
월비는 저승사자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토끼 가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표정도 목소리처럼 차가울 것이 분명했다. 존나 꼴리는 매도하는 표정일 것 같다.
“크하하! 멍청한 년! 우리의 암영실락진(????)에 단신으로 뛰어들다니!”
우우우우웅!
진법이 가동한다. 질서정연하게 선 암살자들을 중심으로 묵직한 내기의 순환이 시작되었다. 월비가 노리는 것은 선두에 선 암살자였다.
“암영실락진의 핵심은 중심이나 후미가 아니라 선두죠. 암영대의 7조가 어째서 제 손에 몰살당했는지, 공부가 부족하네요.”
“칫! 진법의 원리를 꿰고 있다는 건가!? 그래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낙오자투성이 7조와 우리 3조는 다르다!”
선두의 암살자가 내기를 폭발시키며 월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에는 시커먼 검기가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어디에 정신을 빼고 있는 것이냐!?”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조장의 검이 내 옆구리를 스쳤다. 여유롭게 보법을 밟으며 뒤로 피했다.
‘힘, 스피드. 모두 내가 앞서는군.’
놈의 1합에 전투력 측정이 끝났다.
“흐흐흐! 네놈의 신묘한 기물는 내 것이다. 그 복면이 있으면 정체를 숨기는 게 더 수월하겠군.”
“이게, 그렇게 가지고 싶나?”
“기물는 있으면 있을수록 이득이지. 우리 암살자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단 말이야. 뛰어난 기물를 사용하면 말도 안 되는 실력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으니까. 어둠과 기물! 이것은 우리를 최강으로 만들어 준다!”
“바닥을 기는 벌레 같은 패배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군.”
“뭐라 지껄여도 좋다. 넌 여기서 죽은 목숨이니까.”
녀석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잔영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에 녹아든 것이다.
단순히 빠르게 움직인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공기의 흐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물을 쓰는 것이로군.’
녀석이 기물을 신봉하는 이유를 알겠다.
‘모습을 숨기는 기물이 분명해. 하지만, 시각 정보만 숨기는 것이겠지.’
저런 약해빠진 놈이 그 이상의 효력을 가진 기물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만약,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테니까. 힘이 없는 놈은 기물도 지킬 수 없다.
감각을 집중했다. 단련된 무림인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눈 이외로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생각해보니, 그냥 다크니스 레이더를 쓰면 되잖아?’
상황에 심취되어 되지도 않는 마음의 눈을 열려고 했다. 바로 다크니스 레이더를 사용했다. 예상대로 놈은 천천히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꾸짖을 갈!!!!”
허공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녀석이 있는 쪽이었다.
푹!!!
놈의 심장에 검이 꽂혔다. 오히려 방심한 쪽은 상대였다. 자기 모습이 절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녀석의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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