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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 배크제
마음이 심란했다.
세프라의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의 예언 능력이 사실이고, 이 세상이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많은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쥐가 난 상태에서 물에 빠진 것 같았다.
“젠장. 이런, 고민하는 거. 내 스타일이 아니야.”
고개를 휘저었다. 고민은 답을 주지 않는다. 내게 답을 주는 것은 언제나 행동이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무려, 10만 크레딧이나 얻었잖아. 이거라면….”
←아이템→
●기원의 어빌리티 쿠폰(S급)
↳F급 스킬, F급 어빌리티, F급 아이템 10만 크레딧, 그리고 기원의 돌을 재조합하여 S급에서 SSS급까지의 어빌리티 중 하나를 랜덤으로 습득한다.
←아이템→
그동안 묵혀 두었던 아이템을 드디어 사용할 수 있었다. F급 스킬과, 어빌리티, 아이템, 그리고 10만 크레딧. 필요한 건 모두 있었다.
←스테이터스→
-신뢰의 힘(F급)-
↳모든 상대에게 소량의 호감을 준다. 상대방의 호감도에 따라 버프 효율이 늘어난다. 호감도가 최상인 대상에게 일정한 확률로 버프의 특수 효과가 발동한다.
←스테이터스→
←스킬→
[발악 1Lv] (F급)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적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을 깨우친다.
←스킬→
←아이템→
●화강암 조각(F급)
↳규장질 마그마가 식으면서 형성된 화성암이다. 쓸모가 있을까?
※꽝!
←아이템→
“드디어 새로운 어빌리티 개방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결국 목표에 도달했다. 그게 중요하다.
[기원의 어빌리티 쿠폰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당근 빠따지.”
띠링!
제발 좋은 어빌리티 나와라.
SSS급이 나오는 것이 최고다. 행운 보정이 따라붙으면 SSS급을 노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면 SS급도 나쁘지 않다.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다.
[행운 보정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축하드립니다! SSS급 어빌리티, ‘공략의 눈'을 얻었습니다!]
←스테이터스→
-공략의 눈(SSS급)-
↳24시간에 한 번, 대상이 가진 ‘절대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개안한다. ‘절대 약점’을 공략하면, 신조차 소멸시킬 수 있다.
←스테이터스→
“응?”
내가 얻은 어빌리티는 무려 SSS급 어빌리티였다. 어빌리티의 이름은 ‘공략의 눈'이었다.
“공략의 눈?”
나는 어빌리티의 효과를 천천히 읽었다. 무척이나 직관적이고 단순한 어빌리티였다. 대상이 가진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어빌리티다. 그냥 약점이 아니라 무려 ‘절대 약점’이란다.
“회수가 24시간에 한 번이라…. 너무 미묘한 거 아니야? 이게 SSS급?”
횟수가 너무 적다. 게다가 실질적인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주는 부차적인 어빌리티다. 이 어빌리티가 SSS급인 것은 뒤에 나오는 설명 때문일 것이다.
[‘절대 약점’을 공략하면, 신조차 소멸시킬 수 있다.]
신이란 절대자조차 없앨 수 있는 힘.
이것은 유닉스 큐브가 보장하는 신살(神殺)의 힘이었다.
‘하지만 나한텐 좀 미묘한데.’
나는 다른 세계선의 적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공략'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숫하게 사용해온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얻은 공략의 눈이란 어빌리티는 뭔가, 사족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공략법을 적용할 수 없는 현실에선 도움이 될지도.’
세프라가 말했다. 세상의 종말이 머지않았다고.
머지않은 미래에 이 힘을 유용하게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유닉스 큐브가 지금 이 힘을 내게 준 것에서, 나는 유닉스 큐브의 의도가 느껴졌다.
세상의 종말.
만약 그러한 시기가 온다면, 그 때 내가 만날 적들은 분명,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 강할 것이다. 이 힘은 어쩌면 그것에 대한 대비책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내 주변을 덮었던 검은 공간이 사라졌다.
나는 세프라의 옥좌가 있던 공간에 돌아왔다. 내 주변에는 김민영 사부님을 포함한 우리 애들이 있었다. 그리고 세프라의 전령들도 여전히 있었다.
“오빠! 저 녀석, 갑자기 사라졌어요!”
지수가 세프라가 있던 옥좌를 가리키며 말했다. 옥좌는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세프라가 다른 공간으로 전이한 것은 여기 있는 다른 애들에겐 찰나였던 것 같다. 세프라는 범상치 않은 힘을 사용하는 존재였다.
“세프라님의 기운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저 녀석들이?”
“곤란하군. 어이. 검은 머리 이계인. 세프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전령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주인인 세프라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세프라는 내 손에 죽었다. 정확히는 내 손을 빌려 자살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7레벨에 이르는 거짓말이 효력을 발휘하길 바랬다. 그러나, 녀석들은 내 말에 납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겠지.
“웃기지 마라. 네 녀석, 분명 세프라님과 함께 사라졌잖나!”
“서, 설마 세프라님이 저 녀석의 손에…?”
“하아암…. 멍청한 소리. 세프라님이 저런 녀석에게 당할 리 없잖아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
세프라 새끼.
뒤지기 전에 부하들한테 유언이라도 남기지.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냐.
세프라의 전령 하나하나의 실력은 나보다 낮다. 문제는 숫자다. 상대는 무려 열아홉 명이다. 만약, 놈들 하나하나가 블랑처럼 힘을 숨기고 있다면…. 사부님과 힘을 합쳐도 힘들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선공을 가져가야 한다. 나는 사부님께 눈치를 보냈다. 그러자 김민영 사부님이 뭔가 결심한듯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입이 있으면 말을..”
“모두 고개 돌리세요!”
사부님이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풀며 그렇게 외쳤다. 사부님의 말에 나와 우리 애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삐이이이이이이익!
익룡의 괴성 같은 가늘고 높은 소리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감은 눈을 뚫고 들어오는 엄청난 빛이 느껴졌다. 빛과 소리는 5초도 안 되서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잠잠해지며 사라졌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
김민영 사부님이 쓰러져 있었다. 사부님의 앞엔 열아홉의 전령이 나란히 서 있었다. 딱딱한 석상이 된 채로.
김민영 사부님의 어빌리티인, ‘고르곤의 눈’이 만든 기적이었다.
“사부님! 괜찮으세요!?”
쓰러진 김민영 사부님께 다가갔다. 사부님의 왼쪽 눈에 피가 흐른다. 파충류의 눈처럼 일자로 길게 찢어진 눈이다. 눈의 색깔이 무척이나 혼탁했다.
눈만 문제인 것이 아니다. 사부님의 호흡이 약해지고 있다. 심박이 천천히 줄어든다. 사부님은 명백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생명의 마나까지 모두 소진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승산이 없었거든요….”
아무리 사부님이라 해도 세프라의 전령을 열아홉이나 상대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사부님은 실제로 그들을 없애는데 당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 결과는 매우 훌륭했고,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큰 힘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제자님.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사부님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말했다. 그토록 넓게 보였던 사부님의 어깨가 이상하리만치 좁아 보였다.
“아닙니다. 일단, 말하지 마세요. 치유해드리겠습니다. 사부님, 저 이래 봬도 힐러입니다.”
“아뇨…. 힐로 될 게 아니에요. 제 생명의 불꽃은 이미 꺼졌어요…. 저 때문에 괜히 힘 낭비하지 마세요….”
실제로 사부님의 생명의 불꽃은 꺼졌다. 생명의 마나는 진원진기다. 일반인이라면 사용할 수조차 없는 생명의 힘이다. 김민영 사부님은 극상으로 익힌 KHC 덕분에 그러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하…. 제자님…. 저, 사실 봤답니다…. 제자님이 다른 여자들하고 응응하는 거 말이에요….”
“응응이 뭡니까?”
“제자님…. 짓궃어요….”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그것 때문에 저랑 서먹서먹하게 지낸 건가요?”
“헤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살갑게 대할 걸 그랬어요….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아니, 애초에 저는 제 인생을 전혀 몰랐네요….”
사부님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재성 제자님…. 제 자랑스러운 제자님…. 부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진을 멈추지 마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사부님이 눈을 감았다. 연지가 비명을 질렀다. 존경하는 김민영 사부님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없는 것 같다.
“재성아! 뭐라도 좀 해봐!”
“이미 했어.”
[‘김민영’이 사망했습니다.]
[라이프 베슬의 효과가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