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법이 있으니 두렵지 않아-947화 (943/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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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 데릭 워커

탕!

“이게 무슨 소리냐!”

바스트레이 백작이 탁상을 내리치며 집무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물든 가신단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간다. 그들은 지금 말 그대로 파리목숨이었다.

“고작 1주일만에 도시 네 개가 함락되었다고!? 그 중 셋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

“그, 그것이…. 데릭 워커가 워낙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다보니….”

“미친놈들! 도시를 지키라고 보냈던 놈들이 성문을 열고 적을 맞이해!? 이건 반역이다! 모두 사형이다! 사형이야!”

“백작님!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워커 영지군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피신해야….”

“내가 내 영지를 버리고 어디에 간단 말이냐!?”

바스트레이 백작은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대추처럼 붉어진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절망, 한탄 등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데릭 워커!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악마와 거래한 거냐!? 아니면, 내부에 첩자를 심은 거냐!”

“백작님…!”

“올커니! 네놈도 데릭 워커의 첩자로구나! 그렇지 않으면, 놈이 이렇게나 빨리 우리 영지군을 무너뜨렸을 리 없다! 릴베로 자작! 네가 너에게 무엇을 못 해줬길래 나를 배신한 것이냐!?”

바스트레이 백작은 가신단중 최고참인 릴베로 자작에게 일갈했다.

“아닙니다! 백작님! 마음이 심란하신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 피신하지 않으면 정말 끝장입니다! 데릭 워커가 백작님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단 말입니다!”

릴베로 자작이 일갈하자 바스트레이 백작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혀, 현상금!?”

“놈은 백작님을 살려둘 생각이 없습니다. 2왕자님까지 등에 엎은 놈입니다. 분별 있는 행동을 할 리 없습니다.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그으으읏! 데릭 워커!”

모든 일의 원흉은 그놈이었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데릭 워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젠장! 어디로 도망가야 한단 말이냐!?”

“일단, 루이노 남작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당장은 루이노 남작령에서 은거하며 힘을 키워야 합니다. 데릭 워커는 강하지만 잔인합니다. 그가 정복한 영지에는 그에게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힘을 키우고, 그들과 조우해서 놈의 뒤를 쳐야 합니다.”

“데릭 워커…! 나는 오늘 여기서 물러나지만,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할 것이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복수를 맹세했다. 바스트레이 백작과 릴베로 자작, 그리고 그 외의 가신들은 영주성 옷장 뒤에 있는 비밀 통로로 갔다.

가족은 버렸다. 가족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체력이 약한 아내가 따라온다면, 금방 꼬리를 잡힐 것이다. 아내와 자식은 다시 만들면 된다.

호위 병력은 모조리 전방으로 보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결국, 피신하는 것은 바스트레이 백작과 가신단 뿐이었다.

“이 통로. 더럽군.”

사용한 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비밀 통로다. 자신이 이런 비참한 도망을 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통로 안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젠장…. 내가 이딴 수모를 겪다니…”

부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바스트레이 남작은 통로를 해쳐 나왔다. 바스트레이 백작과 릴베로 자작은 영주성 동쪽의 작은 동굴로 나왔다. 동쪽으로 쭉 이동하면 루이노 남작령이 나온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릴베로 자작. 말은 어디있나?”

“말은 없습니다. 백작님께서 쓸데 없는 지출을 줄이라고 하셔서, 도피마는 진작 처분했습니다.”

릴베로 자작의 대답에 바스트레이 백작은 땅을 치며 분노했다.

“멍청한 놈! 그러면, 루이노 남작령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냐!?”

“어쩔 수 없습니다. 망설일 시간은 없습니다! 포위망이 여기까지 미치기 전에 가야 합니다.”

릴베로 자작의 말에 바스트레이 남작은 애꿏은 잔디를 짓밟았다.

바스트레이 백작과 가신단은 숲길을 향해 걸었다. 젊은 시절 교양 수업의 일부로 검을 조금 만진 것이 전부인 바스트레이 남작에게 다른 영지까지의 행군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가신단 중에서도 지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다.

“으으읏…! 저는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켄테드 집사장! 정신 차리게!”

“버려라! 지친 놈까지 끌고 갈 여유는 없다!”

바스트레이 백작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50년 이상을 바스트레이 백작을 위해 봉사한 켄테드 집사장은 그렇게 버려졌다.

집사장 뿐만 아니라 쓰러진 이들은 가차 없이 버려졌다. 그것에 연민을 느끼는 가신은 소수였다. 애초에 자기들 목숨 부지하기 바쁘기 때문이었다.

“슬슬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몬스터 나오기 딱 좋은 숲이다. 기사단이 정기적으로 몬스터를 토벌한다고 하지만,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아니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어딘가에서 야영을 해야겠군. 릴베로 자작. 야영지를 찾아라.”

“알겠습니다.”

야영지라고 해서 별 건 없었다. 가져온 물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무와 돌을 모아 불을 피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불도 오래 피울 수 없었다. 적에게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릴베로 자작은 몸을 조금 녹이고 바로 불을 껐다.

“좀 더 피워도 되지 않나?”

바스트레이 백작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릴베로 자작은 다시 불을 피웠다.

밤이 되었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흙바닥에 몸을 누웠다.

비참함이 느껴졌다. 이런 비참함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갔다. 그의 앞엔 언제나 아첨하는 가신들이 있었으며, 손을 뻗으면 아름다운 여자와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눈앞에 있는 것은 공허한 하늘과 더럽게 아름다운 별 뿐이다.

명예도, 영광도, 재산도, 권력도,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데릭 워커란 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데릭 워커….”

죽이고 싶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놈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면, 나 또한 네 모든 것을 빼앗아주마.”

명예도, 영광도, 재산도, 권력도.

이제 그 어느 것도 필요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데릭 워커의 멸망.

그의 남은 인생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인생이 될 것이다.

“데릭 워커. 이 후안 바스트레이 백작의 원한을 산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병신아. 일어나.”

청명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스트레이 백작은 눈을 떴다.

“으으음…!”

흙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생 푹신한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해온 그다. 더러운 흙바닥이 익숙할 리 없었다.

몸이 이상했다. 아무리 잠에서 막 깼다지만,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꽁꽁 묶은 것 같았다.

“이건 무슨….”

착각이 아니었다. 시야가 돌아오자 자신이 묶은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양팔을 전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묶였다.

“무슨 일이냐!?”

“바스트레이 남작. 나 알지?”

금발의 미청년이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를 리 있나.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데릭 워커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데릭 워커! 네놈!”

바스트레이 백작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소리치며 이를 갈았다. 그에 데릭 워커는 킬킬 웃으며 답했다.

“병신같은 놈. 아주 꿀잠을 자더라. 넌 영주성보다 길거리가 더 어울린다. 노숙자가 네 천직인가 봐.”

“이 죽일 놈의 새끼! 이거, 당장 풀어라!”

바스트레이 백작의 발작에 워커는 킥킥 웃을 뿐이었다.

워커의 옆에는 두 소녀가 있었다. 너무나 닮아서, 머리카락 색깔이 아니면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쌍둥이 자매였다. 한 쪽은 보랏빛 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쪽은 파란 머리였다.

두 자매의 복장은 극적으로 달랐다. 파란 머리의 소녀는 나풀나풀한 로브 차림이었다. 전투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활동성 높은 패션이다.

보랏빛 머리 소녀는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우유처럼 하얗고 매끈한 피부가 과감하게 드러났다. 때 하나 타지 않은 아름다운 육체는 탄탄한 근육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엔 빛을 반짝이는 장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우리 애들이 너를 만나길 정말 기다렸어.”

워커는 라일락과 델피를 한 번씩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년들 모른다! 데릭 워커! 당장 이걸 풀어라!”

“너는 당연히 모르겠지. 하지만, 애들은 너를 아주 잘 알거든. 투기장 기억 나?”

투기장.

그것은 바스트레이 영지의 쏠쏠한 수입원이었다. 모종의 사고로 무너지기 전까지, 투기장에서 나온 이익은 바스트레이 영지를 풍유롭게 만들었다.

“이 애들, 투기장 출신이거든. 이것만으로도 애들이 너에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알겠지?”

“젠장! 나는 투기장에 관여하지 않았다! 모두 가신들이 한 일이다! 영주인 내가 그딴 사사로운 일까지 관여할 리 없지 않느냐!”

“흐음. 저렇다는데? 릴베로 자작. 정말이야?”

워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곳에는 딱딱한 자세로 서 있는 릴베로 자작이 있었다. 바스트레이 백작과 달리 구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혀 아닙니다. 백작님은 투기장 경영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셨습니다. 영주성엔 그 증거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릴베로 자작! 역시 네놈이었구나! 네놈이 우릴 배신한 것이로구나!”

바스트레이 백작의 분노에 릴베로 자작은 뻔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백작님. 저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항복하자고 했을 때, 진작 항복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겁니다.”

데릭 워커에게 바스트레이 백작의 도주 경로를 흘린 것은 릴베로 자작이었다. 그는 이미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워커와 내통하고 있었다.

“하하. 집안 싸움은 나중에 하라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워커가 라일락과 델피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바스트레이 백작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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