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

二章. 한입에 꿀꺽

“너만은 꼭 인간이 되어서 행복하게 살려무나.”

연희에게 그 한마디를 남긴 어미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연희는 어미의 몸이 새하얀 빛이 되어서 사방을 부유하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어미의 숨결이 밤하늘 반딧불이와 하나가 되어서 달님 곁으로 날아갔다.

“……참말 아름답구나.”

생전에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던 어미는 죽음조차 빛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연희는 어쩐지 몸에 기운이 빠졌다.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은 그녀는 그대로 선잠이 들었다.

“인간이 되어라.”

어미의 마지막 말만 여러 번 되뇌었다. 어미의 육신이 모두 흩어진 뒤에도 여러 날 그곳에서 잠만 청하던 연희가 몸을 일으켰다. 샘에 비친 축 처진 귀와 두 개뿐인 꼬리가 쓸쓸해 보였지만, 그녀는 힘을 내기로 했다.

“사내를 하나 유혹해서 내가 꿀꺽 삼켜야 해.”

꼬리가 두 개인 탓에 그녀는 인간으로 둔갑해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반드시 구미호가 되어야 했다.

“서둘러야 해.”

어미가 이르기를 이제 여우가 살기에는 너무 각박한 세상이라고 했다. 그들이 가진 여우 구슬을 노리는 사냥꾼이 득세하는 통에 인간이 되는 것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해결법이었다.

“인간으로 둔갑부터 해야지.”

연희가 제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자 머루처럼 검은 눈에 동그란 얼굴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꼬리가 아홉인 구미호는 절세가인이라고 하지만, 연희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래서야 누구를 유혹할 수 있을까.”

샘에 제 모습을 가만히 비춰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하긴 하지만 어미의 유언이니 일단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길로 산에서 내려온 연희가 이 마을, 저 마을 기웃거린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적당한 사내를 찾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첫눈에 느낌이 온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통할 것 같은 느낌의 사내가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 수작을 거는 사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저잣거리의 사내 몇이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뒤를 쫓아왔다.

‘아무나하고 그러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구척장신에 털이 숭숭한 사내와 입을 마주 댄다고 하면 구역질이 났고, 육 척의 살집이 있는 사내는 그것대로 내키지 않았다. 웬 늙은 사내는 쌀을 백 섬 주겠다면서 그녀를 구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희는 그런 게 전부 거슬리고 싫기만 했다.

유혹해서 죽일 건데, 이리 까다로울 이유가 있을까마는 그녀의 마음이 그랬다.

‘내가 원하는 사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야.’

연희가 원하는 상대는 적당히 잘생기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기를 여러 날.

그 밤 연희는 깊은 산을 지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랫마을에서는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할 것 같으니, 이 산을 넘기로 한 것이다.

“낭자. 그 산은 함부로 지나는 곳이 아니라오.”

산의 초입에서 만난 심마니가 다른 길을 알려 줬지만, 연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나는 구미호가 될 몸이니까.’

천신이나 수신과 맞붙는 것만 아니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숲 깊숙한 곳에 들어올수록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영력이 있기는 해도 곰이나 범을 만나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잖아.’

그때 어디선가 들개 소리가 났다. 위협적인 소리긴 하나 연희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깟 들개 두어 마리쯤 상대하지 못하려고.”

개 정도는 그녀의 송곳니를 보이는 것으로 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들개 두어 마리가 아니라 십수 마리였다.

크르르르렁.

‘맙소사, 저것들이 어디서 저리 떼거리로 몰려든 거야.’

침을 뚝뚝 흘리면서 으르렁대는 들개의 눈에는 그녀가 맛있는 참 거리로 보일 게 분명했다.

‘내가 작정하면 너희 같은 것을 이길 수 있지만.’

“오늘은 내가 바빠서 봐주는 거란다.”

연희는 얼른 고목을 찾아서 서둘러 올라갔다. 마음이 바쁜 나머지 헛손질을 해 버려 나무껍질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크르릉.

재빠른 들개가 쫓아와서 연희가 입은 치맛단을 마구 물고 잡아당겼다. 이대로라면 들개떼에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저리 가!”

두려움에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마구 나무를 탔다. 정신없이 나무에서 나무로 옮기기를 여러 번, 드디어 들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빨리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겠어.”

본체로 변하면 속도가 더 날 것 같은데, 기운이 없어서인지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푸드덕푸드덕.

“무슨 소리야.”

으스스해 보이는 나뭇가지 위로 누런 안광이 번뜩여서 연희를 두렵게 했다. 어미와 함께 있을 때는 저깟 것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었는데.

“여기서 하룻밤만 묵게 해 줘.”

그녀의 입에서 비굴한 음성이 흘렀다. 그래도 나무 위가 아래보다는 나았다.

“너무해.”

새들은 부리를 까딱대면서 연희에게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연희는 못 들은 척하면서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나무 꼭대기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뱀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나 큰지 한입에 그녀를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뱀이라면 질색이었다.

“으헛. 뱀이 있었구나.”

당장 나무를 타고 내려온 연희는 울상을 지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익숙한 산이 아닌지라 쉴 만한 굴이 어디 있는지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간신히 찾은 굴은 이미 주인이 있었다. 하마터면 산만 한 곰의 앞발에 맞아서 그대로 죽을 뻔하였다.

‘오늘 일진이 무척 사납구나.’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는 곰에게 쓸린 팔을 핥았다. 그때 산 정상에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저기 산꼭대기에 빛이 있어.”

빛은 딱 세 가지뿐이었다. 세상을 밝히는 해님, 무덤가를 빛내는 도깨비불,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불.

‘저건 아무래도 인간이 만든 불이야.’

남은 힘을 죄다 짜낸 연희가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왜 이런 곳에 인간이 사는 거지.”

손톱이 부러지고, 얼굴에 생채기가 났지만, 다시 들개한테 쫓길 생각을 하니 다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 아니면 어쩌나.”

아무리 힘들어도 도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헉. 헉.”

얼마나 올랐을까.

벼랑 끝까지 오르자 정말 집이 한 채 덩그러니 있었다.

“뭐야. 정말 집이잖아.”

놀란 눈을 한 연희가 주변을 대충 살폈다.

집 앞에는 커다란 버드나무와 옆에 작은 샘이 있었다. 샘에는 휘영청 달이 한가득 비치고 있었다. 연희는 무릎으로 기어간 후 샘에 얼굴을 담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높은 곳은 안전하겠지.”

가만 귀를 기울여 보니 이곳에는 작은 새의 지저귐도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코를 이리저리 킁킁대던 연희는 곧 긴장이 풀렸다. 이렇게 아무런 냄새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라니 쉬기에 적합했다.

“너무 피곤해.”

하품을 내뱉은 연희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누가 감히 여기에서 잠을 자라고 했지?”

한참 곤하게 잠을 청하는데 누가 자꾸 그녀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연희는 손으로 그것을 뿌리치다 화를 버럭 냈다.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던데!”

“…….”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리 고운 사내가 존재할 수 있던가.

호리호리한 몸매에 뽀얀 피부, 입술이 마치 석류즙을 으깨 놓은 것처럼 붉었다. 눈은 또 얼마나 검고 짙은지, 바라보기만 해도 풍덩 빠질 것 같았다. 순간 연희는 깨달았다.

‘이 사내로구나.’

이런 사내라면 입을 맞대는 것이 전혀 싫지 않을 것 같았다. 연희는 최대한 눈을 내리깔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렇게 하면 웬만한 사내는 전부 홀릴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는지, 사내는 여전히 서늘한 말투였다.

“왜 남의 집에 왔는지 설명부터 하여라.”

연희는 먼지를 툴툴 털면서 일어나 사내를 흘끗댔다.

“곱게 생겼는데 입이 제법 걸구나.”

“나 말이더냐?”

연희의 말에 놀란 사내가 큰 소리를 냈다.

“여기에 생명이 있는 것은 선비님과 나뿐이지 않소.”

그녀는 똑바로 서서 사내를 쏘아봤다. 외양은 퍽 마음에 들었는데, 어째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힘들게 찾은 인간인데 꼭 너를 유혹하고야 말겠다.’

아직 꼬리는 두 개뿐이지만,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데 능하다는 여우가 아닌가.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연희가 생긋 웃었다.

“선비님, 혹시 식모는 안 구하시는지요?”

“……식모라니?”

선비는 그녀의 말에 아주 질색이라는 투로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나는 그런 게 필요도 없고, 내 공간에 누가 있는 것을 싫어한다.”

차가운 말을 남긴 사내가 등을 돌리자 연희는 절박해졌다.

“갈 데가 없어서 그럽니다. 보름만 좀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에도 사내는 전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연희는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면서 소리쳤다.

“산군이 부모를 모두 해쳤습니다. 보름 동안 갈 만한 곳을 생각해 낼 테니-.”

딱히 거짓은 아니었다.

사냥꾼이 어미를 해쳤으니, 천애 고아가 된 그녀 아니던가.

“산군이…….”

사내가 굵은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보름만이다.”

“고맙소.”

“인사는 되었고, 저기를 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절대로 걸리적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

사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허물어져 가는 외양간이었다. 연희는 방 한 칸도 내어 주지 않는 각박한 사내를 보면서 등 뒤에서 혀를 내둘렀다.

* *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헛간에 숨어서 공략해야 할 사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사내는 소위 말하는 백면서생인 듯 보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책을 읽고,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또 책을 읽었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도, 딱히 멀리 나가는 법도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픈데…….”

구미호가 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비바람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의 영력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잘것없었다.

“어디 구경이라도 해 볼까.”

선비의 집은 겉은 허름해 보였지만 곳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산꼭대기에 누가 이것을 가져다 두었으려나.”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니에 술 단지, 말린 과일과 생선이 그득한 그곳은 연희에게 별천지였다.

“이리 많으니 좀 나눠 먹어도 되지 않겠어?”

연희는 쌀가마니 위에 걸터앉아서 곶감부터 날름 빼먹었다.

“달다. 달아.”

한참 선비의 곳간을 축내다 보니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다.

“이래서야 언제 유혹해서 사내를 꿀꺽 삼키냐고.”

연희는 쌀로 밥을 지어다 식혜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상에 말린 고구마와 함께 올린 후 사내의 방 문을 두드렸다.

“참 좀 드세요.”

“내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여기 온 지 사흘째,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알려 주신 방법으로 만든 건데, 참말 맛있습니다.”

그녀의 말 어떤 부분이 사내를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닫힌 문 너머로 그의 음성이 제법 가깝게 들렸다.

“상을 두고 물러가거라. 그리고 이런 것은 필요 없다.”

“먹는 모습만 보고 가겠습니다.”

사내가 비척비척 걸어 나오더니, 그녀 앞에 우뚝 섰다. 사흘 만에 보는 사내의 인물이 하도 고와서 연희는 침을 꼴딱 삼켰다. 옥색 포를 느슨하게 걸친 모습이 꼭 신선처럼 우아해 보였다.

‘저 포를 벗기면 뽀얀 속살이 드러날까.’

연희가 손을 들어서 눈을 비비는데, 그가 팔을 뻗어서 식혜를 마셨다. 식혜 방울이 흘러 그의 목울대를 지나는데 연희의 아랫배가 바싹 조였다.

“……맛있죠?”

“달다.”

짧은 평을 남긴 사내는 곧장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혼자가 된 연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어찌나 야속한지, 사내와의 사이는 여전히 멀기만 한데 이곳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사내를 본 것도 서너 번은 될까.”

유혹하기는커녕 사내의 이름도 몰랐고, 손잡기도 요원해 보였다.

“이러다가 입술을 맞대기는커녕 쫓겨나게 생겼어.”

하늘에서 어미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여우 체면이 영 안 선다는 말이야.”

헛간 지푸라기 더미 위에 가만 누워 있던 연희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일단 이름부터 물어보자.”

뭐든 한 걸음씩이다.

이름을 알고, 손을 잡고 나면 이후로는 순조로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여름의 한중간, 초저녁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쿠르릉 소리와 함께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수신이 노하기라도 한 건가.”

연희는 어미가 해 주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무릎을 감쌌다. 산에는 산군이 있고, 하늘에는 천신이 있댔다. 비를 뿌리는 것은 수신이요, 구미호는 그들에 비하면 하찮은 존재라고 했다.

“범을 조심해야 한단다.”

숲에서 범을 만나면 무조건 달아나라고도 했다. 크고 포악한 짐승은 이리나 여우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목덜미를 뜯어서 죽인단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오래 지내고 싶다.”

곰이나 범 같은 무시무시한 산짐승도 없고, 그녀가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옛 기억을 더듬는데 헛간 바깥 바닥으로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말로 비는 싫은데…….”

비가 오던 날 어미는 사냥꾼에게 구슬을 빼앗겼다. 연희를 지키려던 어미가 단단히 버티고 서 있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우리는 인간을 해친 적도 없는데 말이야.”

연희가 힘을 주자 인간의 몸에 꼬리 두 개가 튀어나왔다. 인간의 간을 백 개 먹거나, 인간과 혼인을 해서 여우라는 사실을 백일 동안 숨기면 구미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연희의 어미는 후자였다.

“연희야. 차라리 인간을 먹거라.”

아비는 본 적 없던 연희에게 어미는 그리 말씀하셨다.

“마음을 주느니 그냥 그것을 모르는 편이 낫다.”

“마음……?”

연희는 그것이 무언지 아직 몰랐다.

배가 고프면 속이 쓰렸고, 추우면 어깨가 벌벌 떨린다는 것만 알았다. 어미에게 배울 것이 태산이었지만, 이제 그녀 혼자였다. 그때 헛간 지붕을 뚫고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워.”

추위에 유독 약한 연희가 수선을 피우면서 몸을 움직여 봤지만, 헛간에서 비를 피할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피를 쫄딱 맞기를 몇 시간. 덜덜 떨다가 입술이 퍼레진 연희는 이러다 죽지 싶었다.

‘아직 죽을 수 없지. 어미의 유언을 꼭 이루고 말 거야.’

이 집에는 특이하게 방이 한 칸뿐이었고, 달리 갈 만한 곳이 없었다. 하늘이 번쩍거리는데 곳간에 있자니 그것은 또 그것대로 두려웠다. 연희는 염치 불고하고 사내의 방을 찾았다.

“저기…… 계십니까.”

“성가시게 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그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말입니다.”

에취.

그때 연희의 입에서 요란한 재채기가 터지자 사내의 허락이 떨어졌다.

“잠시만 허락하겠다.”

마지못해 들인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연희는 사내가 변덕을 부릴까 저어되어서 급히 장지문을 열었다. 사내는 흰 포를 느슨하게 걸친 채 흰 화선지 위에다 소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산을 그린 병풍 앞에 앉은 그는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꼭 선녀 같잖아.’

바깥은 천둥 번개에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이곳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사뭇 다른 풍경에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라고 부르지 말아라.”

“저는 연희라고 하는데,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곧 떠날 텐데 네가 나를 부를 일이 뭐가 있더냐.”

연희는 그녀의 꾀에 넘어오지 않는 사내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네. 나리.”

“하, 나는 산……. 그냥 선비님이라고 이르도록 해라.”

연희는 이름 하나를 알려 주는 데도 저리 인색한 사내를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어째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인가.

에취.

“선비님. 저기 이불 하나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유려한 붓놀림을 보이던 사내의 반듯한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연희가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고개를 쳐든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비를 맞아서 말입니다.”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희미한 호롱불 너머로 비에 젖은 여인이었다. 짙은 두 눈을 지나 오뚝한 코, 그 아래 붉은 입술이 추운지 미세하게 떨렸다. 저고리가 흠뻑 젖어서 훤하게 비치는 속살을 본 순간, 그제야 방 안에 먹 냄새가 아닌 여인의 달콤한 살내가 진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가져가거라.”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사내는 다시 붓을 놀렸다. 살금살금 다가와 이불을 하나 꺼내 들었고, 다시 조심스레 구석으로 돌아갔다. 걸음마다 비 냄새가 진동했고, 그 비릿한 물 냄새에 사내의 가슴이 반응했다.

‘참말 성가시구나.’

홀로 고고히 그림을 그리던 고즈넉한 밤을 모두 망쳐 버린 것 같았다. 화선지 위 붓이 닿은 곳의 소나무 가지가 흐트러졌고, 세세하게 표현되어야 할 뾰족한 잎이 모조리 뭉개졌다.

“감사합니다. 선비님.”

“하…….”

이불을 꼭 껴안고 구석에 기댄 연희가 인사를 건넸으나,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 곤하게 잠이 든 것 같던 여인의 입에서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찮구나. 정말.”

모른 척하자니 방으로 들인 것은 그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첫날 그대로 내쳐야 했는데…….’

이리 험준한 산세에, 그것도 가장 오르기 힘든 봉우리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이런 성가신 일이 싫어서였는데.

“젠장.”

포를 펄럭이면서 여인에게 다가가니 언뜻 보기에도 열감이 있었다.

“고뿔이라도 걸린 게냐.”

그가 묻자 잠이 든 연희가 입을 달싹이려고 했다.

“어머니…….”

짜증이 치밀어서 그대로 돌아서려던 사내는 어미를 찾는 여인의 가까이에 앉았다.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여인은 갓 성년을 지났을까. 아직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곱게 가르마를 지은 머리가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있었다. 산군에게 죽었다는 부모가 제법 애지중지 키웠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 감정은 변덕에 가까운 것일 터.”

그는 늘 뜻대로 하고 살아왔고, 오늘 역시 마찬가지이다. 손을 뻗은 그가 연희의 이마를 쓸어내리자 그녀의 입에서 한결 가벼운 숨소리가 났다.

“쯧…….”

입김을 불자 젖은 저고리며 치마가 순식간에 말랐다. 할 일을 마친 그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어쩐지 가슴이 일렁거렸다.

“뭐지…….”

너무 짜증이 나면 이리 현기증도 날 수 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사내는 그리고 있던 그림을 찢어 버린 채 새 화선지를 깔았다. 그리고 연적의 물을 따라, 벼루에 먹을 진하게 갈기 시작했다. 진한 먹 냄새가 풍기자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 그는 구석에서 잠든 연희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 *

“잘 잤다. 어……?”

두 팔을 쭉 뻗는데 폭신한 이불이 손에 잡혀서 놀란 연희가 몸을 세웠다.

“참. 어제 선비님 방에 왔었지.”

몸이 오슬오슬 떨렸는데 자고 나니 다행히 개운했다.

“그런데 선비님은 어딜 가신 거야.”

그의 방에 연희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얼른 유혹해서 이 방에서 입도 맞대고…….”

사내의 가슴에 기댄 제 모습을 상상하자니 코에서 더운 김이 솟구쳤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정돈한 후 봉창을 열었다.

“저건 뭐야.”

사내가 어제 그리던 그림이 보였다. 그녀가 있는 산이 화선지에 멋들어지게 완성되어 있었다.

“매일 그림만 그리는 것을 보면 화공일지도 몰라.”

그러면 이리 은둔생활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거구나. 하지만 내가 그런 것을 따져서 무엇 하게.’

어차피 사내를 유혹해서 죽일 작정인데.

연희의 마음 두 개가 대립하였다.

“에이, 쓸데없는 생각 말자.”

그녀는 고개를 저은 후 얼른 방을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비를 뿌려대고 있었고, 그녀가 머물렀던 헛간의 지붕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이리 폭우가 내리는데, 선비님은 어딜 가신 게지.”

밖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딘가에서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게 어찌나 반가운지 저도 모르게 연희가 버선발로 달려가서 사내의 앞에 섰다.

“비가 오는데, 우구(雨具)도 없이 어찌 나가셨습니까.”

“시끄럽다.”

그녀의 상기된 볼을 본 사내가 차갑게 대꾸한 채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연희는 그 뒤를 졸졸 따르다 닫힌 문 앞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저 사내를 유혹하는 것은 글렀나 보다.’

저리 냉기만 풍기는 사내를 무슨 수로 유혹할 것인가.

‘그래도 참 좋구나.’

무릎을 안고 비 내리는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연희는 장지문 너머의 사내 생각에 히죽 웃었다. 혼자는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어서일까. 어쩐지 비가 오는 것이 어제보다는 덜 무서웠다.

비가 그치자 연희는 헛간 지붕 수리에 나섰다. 하지만 높은 곳에 올라오긴 했어도, 할 줄 아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궂은일은 모두 어미가 도맡아 했고 연희는 이제까지 어미에게 의지만 했었다.

‘인제 와서 철이 들면 무얼 하나.’

어미는 죽고 없는데……. 헛간 지붕에 주저앉은 연희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이 불어서 지푸라기가 사방에 날렸고, 그것이 꼭 제 신세 같아서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이제 약속했던 보름 중의 열흘이 지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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