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5)

五章. 금수의 교접

이곳에 온 지 석 달.

연희는 눈뜨면 그녀에게 덤벼드는 선비 탓에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여름인가 했는데, 산이 붉게 물들었다.

“하, 달이 참 곱구나.”

하루는 연희가 휘영청 뜬 보름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사내가 연희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아라.”

사내는 연희의 허리를 꼭 감싼 채 턱을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이제는 익숙한 체향에 연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추운데 왜 방에 들지 않고.”

“저기 달을 보고 있었소.”

연희는 뽀얗고 어여쁜 달을 보면서 어미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미의 유언도 되새겼다.

‘구미호가 되려면 여기를 내려가야 하는데…….’

하지만 사방에 둘러싸인 탱자나무를 지나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백면서생인 선비는 팔자도 좋았다. 이렇게 꼼짝없이 갇혔는데도 매일 싱글벙글하였다. 연희의 입에서 절로 긴 한숨이 흘렀다.

“휴…….”

“연희야. 줄 게 있다.”

그는 연희의 몸을 돌려세운 후 그녀의 손바닥에 옥가락지를 하나 내려 두었다.

“이게 뭐요.”

“가락지 아니더냐.”

“그러니까 이걸 왜 내게 주는 게요.”

품에 넣고 있었던지 가락지는 그의 온기를 담고 있어서 차갑지 않았다. 연희가 그 생소한 둥그런 것을 내려다보는데 사내가 입을 뗐다.

“우리 혼례를 올리자꾸나.”

순간 인간인 아비와 혼례를 올렸던 어미가 떠올랐다.

‘그냥 잡아먹는 편이 나을 걸 그랬다.’

그제야 어미의 슬픈 눈이 무엇을 말했는지 깨달았다. 어미는 아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백일을 속여서 구미호가 되면 다시는 인간 사내를 만날 수 없었다.

‘아비와 생이별을 하였구나.’

눈앞에서 그녀를 다정스레 내려다보는 사내 역시 마찬가지다. 혼례를 치르고 백일을 속일 수 있다면 그녀는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구미호가 된다.

‘하지만 이 사람을 영영 만날 수 없어.’

연희는 이제 그를 해치지도 못하고,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눈에 차지 않는 게냐?”

“그런 게 아니오.”

“이만하면 보아 줄 만한 외모가 아니더냐. 게다가 곳간에 재물도 제법 있단다.”

입술을 짓이기면서 연희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초조해진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면 이곳을 내려가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도 사 줄 수 있다.”

“마음을 주느니 그냥 그것을 모르는 편이 낫다.”

어미의 말이 계속 귓가를 울려서 연희는 눈물이 났다. 이곳에 머무르는 백일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사내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한번 심장에 박힌 연정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 울 만큼 내가 싫으냐.”

그의 손이 연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데, 그녀의 흐느낌이 더욱 세졌다. 그 손길이 하 따스해서 자꾸 기대고 싶었다.

“나도 현, 그대가 참말 좋소.”

실컷 울던 연희가 고백하자 사내의 손이 얼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정녕 나를 받아 주는 거냐.”

사내는 그녀가 큰 허락이라도 한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반응에 연희는 더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집도, 부모도, 아무것도 없소.”

그것뿐인가. 인간도 아니었다. 차마 고백할 수 없는 비밀을 꿀꺽 삼킨 연희가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네 집과 부모와 가족이 되어 주마.”

‘한 번뿐인 생, 끝이 슬픔으로 얼룩지더라도 나는 차마 이 사람을 저버릴 수 없겠구나.’

연희는 그의 말에 그대로 사내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은 사내는 한참 연희를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달과 버드나무 아래 물 한 그릇 떠 놓고 둘만의 화촉을 밝혔다.

“연희야. 해가 이미 저만치 떴는데 말이다.”

“나는 한 식경만 더 자고 싶소.”

“게으름을 부리다 소가 된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느냐.”

선비는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컴컴한 밤에 사내의 무릎을 베고 이야기를 듣노라면 세상 근심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희야. 이것 좀 먹어 보아라.”

아침부터 구운 개구리를 내미는 사내의 눈이 음흉하기 그지없었다. 연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기력이 달려서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씹거라. 체할라.”

그녀가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아먹자 다음으로는 약재를 달인 물을 내밀었다. 세상 냉랭하던 선비는 어디 가고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애정이 나날이 깊어질수록, 연희는 괴로웠다.

‘나는 현을 속이고 있다.’

인간인 척하면서 그의 곁에 있지만, 그녀는 여우다. 이대로 백일만 지나면 구미호가 되어서, 그를 떠나야 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어찌나 야속한지 곧 눈이 내리는 겨울이 왔다.

“후함! 요즘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지.”

겨울잠도 안 자는 여우인데, 너무 심하게 피곤했다. 연희는 곳간에 들러서 말린 대추를 잔뜩 먹고 있었다. 쫄깃쫄깃하고 달짝지근한 게 수십 개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옷 위로 손을 대 보니까 배가 조금 불룩해진 것 같기도 했다.

“가만. 내가 달거리를 언제 했더라?”

곰곰이 따져봤으나 마지막 달거리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를 갖고 잠이 그리도 오더구나. 또 말린 대추를 참말 맛있게 먹었단다.”

어미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별안간 떠올랐다.

“맙소사! 내가 현의 아이를…….”

짐작이 맞는다면 반은 여우, 반은 인간인 아이를 품게 되었다. 순간 치마폭에 담겨 있던 대추가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밤낮으로 교접했으니 아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조심했어야지!”

연희는 저의 부주의를 꾸짖으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아이라니, 현의 아이라니. 아주 조금 기뻤지만, 근심이 더 컸다. 현은 그녀를 부모 잃은 인간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밝히면 나를 괴물처럼 볼 거야.’

그와 연희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같은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아, 그 전에…… 백일이 다가오고 있어.’

이대로라면 그녀는 구미호가 될 것이고, 현을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당장 떠나야겠구나.”

배 속의 아이와 현을 모두 지킬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연희는 곧장 곳간을 나섰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살을 후벼 팠다.

“바람이 차구나.”

사방을 둘러싼 탱자나무를 바라보던 연희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오늘따라 곤한 잠을 청하는 사내를 향해서 큰절을 올렸다.

“서방님, 부디 강녕하세요.”

부르면 익숙해져 버릴까 봐, 한 번도 그를 서방님이라고 불러 주지도 못했다. 인제 와서 그것이 후회될 줄이야. 참말 서글펐다.

‘이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오.’

나 같은 추악한 것은 잊고 고운 색시 만나서 백년해로하시길.

진심을 담은 인사를 남긴 그녀는 탱자나무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가시에 몸이 찢어질 것 같은 순간 여우로 변신했다. 꼬리가 두 개뿐인 몸으로 가시 사이를 통과하는데, 온몸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포기하면 안 돼.”

이를 악물고 가시를 타 넘는데 꼬리가 끊어졌다. 꼬리 하나가 가시 사이에 걸려서 떨어져 나갔지만 주워 올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라도 본다면 이곳을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이런 그녀를 보면 현이 가지 말라고 붙잡을 게 뻔했다. 그의 애원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백일이 지나게 되어서 그녀는 구미호가 될지 모르나, 두 사람은 영원히 남남이 된다.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야.’

그곳을 벗어난 연희는 벼랑을 타고 정신없이 달렸다. 밤낮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가슴이 누더기처럼 뭉개졌다. 그러는 동안 연신 속으로 중얼댄 말이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 * *

동굴에서 홀로 몸을 푼 연희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출산하느라 탈진했으나,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다. 작은 손은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꽉 움켜쥔 채였다.

“사내아이로구나.”

구미호가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하지만 아비를 똑 닮은 아이는 그 자체가 좋기만 했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던 그녀지만, 힘껏 아기를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안은 그녀가 굴 밖으로 나왔다.

“계속 굴에서 머물 수야 없지.”

아이는 반은 인간이었으니 산 아래 내려가서 사는 게 옳았다.

“하지만 어디에서 사나.”

처음에는 머물 곳이 없어서 폐가에서 대충 지냈다. 문도 없는 방에 아이를 뉘어 놓고 연희는 서투른 솜씨로 집을 고쳤다. 싸리를 엮어다가 문에 달았다. 누군가 버리는 옷감을 얻어 와서 기저귀도 끊고 아기 요도 만들었다.

“이것을 좀 팔려고 하는데요.”

산에 나물을 캐 와 팔아서 입에 풀칠을 겨우 했다. 그것을 삼 년 했더니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하나 살 수 있었다. 그사이 아들 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걷고, 달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잠이 들면 달빛에 의지하여 바느질했고, 나물을 다듬었다.

‘어쩌면 저리도 아비를 닮았을까.’

진이가 자랄수록 아이의 얼굴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가 보였다. 잠든 아이의 이불을 끌어 덮어 주던 연희의 눈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다른 우울한 생각에 잠길 새가 없다고 내내 저를 몰아붙였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던 연희의 얼굴에 세상 근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 * *

세월이 흘러 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콜록, 콜록.”

그녀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졌다.

꼬리 하나를 잃은 탓에 영력은 조금도 쌓이지 않았다. 이제는 영원히 구미호가 될 수 없었다. 연희는 다른 소원은 없었다.

‘우리 진이가 클 동안만 제발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앞으로 십 년만 더 뒷바라지하면, 그때는 아이가 홀로 남겨져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진이는 총명한 아이니까 말이야.’

잠든 아이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이 젖어 들었다.

‘어미가 이런 몸이라서 미안하구나.’

진이는 다른 아이와 무척 달랐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의젓했고, 감각이 무척 기민했다. 아마 크면 클수록 평범한 인간과는 더 차이가 날 게 분명했다.

‘어미가 변변치 못해서 네게 좋은 옷도, 책 한 권도 사 주지 못하니 면목이 없구나.’

한숨을 쉬는데 호롱불이 어른거렸다. 붉은빛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원망하고 계시려나. 그렇겠지.’

그녀를 꼭 품어 주던 사내의 너른 가슴이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어머니, 마음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하셨죠.’

하지만 이리 멀리 떨어진 지금 그녀는 그 추억마저 없이 어찌 살 수 있었겠나 생각했다.

‘마음을 줘 버리고 와서 늘 함께 있는 기분인걸요.’

힘든 형편에도 차마 팔지 못한 가락지를 매만지던 연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던 그녀 앞에 오 년 만에 선비가 나타났다.

“내 것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진이를 이리에게 던져 준 사내가 밤새 그녀를 탐하고 탐했다.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그를 전혀 잊지 않았던 탓에 연희는 아주 오랜만에 쾌락에 몸부림쳤다.

‘어제 그의 품에 안겨서는 아니 되었는데…….’

잠결에도 간밤의 일을 곱씹으면서 깊은 후회를 했다. 그러다 눈을 뜬 연희는 낯익은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현이 사랑을 나누던 방이 분명했다.

“내가 언제 이곳에 온 거지.”

머리가 아파서 손을 위로 뻗는데, 누군가 입을 열었다.

“사흘을 앓아누우셨습니다. 그러니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습니다.”

“누구세요.”

혼자 있는 줄 알았던 방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천을 개고 있었다. 눈을 크고 뜨고 보자니 평범한 할머니인 줄 알았던 여인에게서 학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 나처럼 인간으로 둔갑한 짐승이로구나.’

“몸이 많이 쇠하여서 기력을 보하는 약을 썼습니다.”

무뚝뚝하나 나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연희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혹시 제 아들 소식을 아시는지요.”

진이를 생각하자 눈물이 차올라서 연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련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도련님?”

왜 그녀의 아들을 그렇게 부르는 걸까.

연희가 의아한 눈을 하는데, 학 할멈이 말을 이었다.

“제가 나리께도 말씀드리겠지만 당분간 교접은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짐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나는 학 할멈의 말에 연희의 볼이 잔뜩 붉어졌다. 어쨌든 진이가 무사하다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현과 입맞춤을 했던 게 떠올랐다.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연희가 얼른 입술을 뗐다.

“저기 현은, 현은…….”

“곧 오실 겁니다.”

“아! 그가 무사하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여우와 입을 맞추고 사흘이 지났는데 살아 있던 인간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가만 누워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문고리가 움직였다. 방을 들어서는 것은 현이었다.

“곤한 잠을 깨운 모양이로구나.”

마치 헤어진 적이 없다는 듯 다정한 음성이었다.

“하…….”

그의 얼굴을 확인한 연희는 그대로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걸었다. 움직일 때마다 몸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으나, 그를 안고 손으로 만져 봐야 했다.

‘귀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그가 맞는지 확인해야 해.’

만일 그녀가 그를 죽게 했다면…….

‘나는 살 자격도 없어.’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던 사내가 가벼이 웃었다.

“처음에는 그리 가시를 세우더니 인제 보니 울보가 따로 없구나.”

‘저건 그가 확실한데…….’

조금 수척해졌으나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는 내내 그리워하던 그것이었다. 사내의 미소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앗!”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그때 강한 손이 그녀를 잡아 주었다. 그의 품에 안긴 연희가 힘겹게 입을 뗐다.

“당신 살아 있는 거요. 참말이오?”

사내의 큰 손이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그 손이 따뜻한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죽기는 왜 죽는단 거냐.”

“내가 말해 주지 않았소. 나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라고.”

소리를 치면서 연희가 몸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그녀의 턱을 움켜잡더니 눈을 빤히 맞췄다.

“연희야. 걱정하지 말아라. 네 지아비는 죽지 않는다.”

“어째서…….”

“나는 산군이니까.”

“……!”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연희가 얼른 몸을 뗐다.

그녀의 지아비가 산군이라니.

“미련하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말과 달리 연희에게 다가서는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냥 인간인데…….”

“산군이 아니면 그 짐승들은 뭐라고 설명하겠느냐.”

“그런 거라면 왜 내가 이제껏 느끼지 못한 게요.”

꼬리가 둘뿐이었어도 여우인 그녀가 인간으로 둔갑한 짐승의 기운을 모를 리 없었다.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아둔하기는. 내 산군인데 기척을 숨기는 일이 어려울 것 같으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이 따스하였다.

“아……. 그럼 우리 진이는 무사한 거요.”

“그 아이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네 걱정이나 하여라.”

현은 그와 아들 걱정을 하느라 핼쑥해진 연희의 볼을 가만 쓸었다.

* * *

이현은 산을 지키는 산군이었다.

거칠 게 없는 범의 몸인 데다 워낙 외모가 훤칠하기까지 해 그는 인기가 넘쳤다. 인간, 신 할 것 없이 그를 봤다 하면 몸부터 던졌다. 본디 욕정을 느껴 본 일이 없던 그에게 그런 무리는 성가실 따름이었다.

‘지긋지긋한 것들.’

그리하여 속세에 염증을 느낀 현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거처를 두었다. 산군으로서 돌봐야 할 일이야 바람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필요할 때만 가끔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읽는 삶은 평화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을 어지럽힌 미꾸라지가 하나 나타났다.

‘도대체 그 결계를 어찌 뚫었지.’

그의 영역에서 태연히 잠을 청하던 여우를 본 현은 무척 불쾌하기만 했다. 그 당돌한 여우는 보름 동안 머무르게 해 달라고 떼를 썼다.

‘어림도 없지.’

그는 분명 거절하려 했다.

‘이대로 한입에 삼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텐데.’

그러다 여우가 부모를 잃었다고 하는 순간 약간의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자연의 이치이긴 하나, 딱하구나.’

꼬리도 달랑 두 개뿐이라 초라하기 그지없는 여우였다.

‘저대로 두면 얼마 가지 못해서 죽을 테지.’

불쌍한 처지라고 방심했더니 이 연희라고 하는 계집이 자꾸 그를 귀찮게 했다. 비가 오면 춥다면서 방에 기어들어 오고, 맛있는 것을 차려 오는데 그게 영 싫지 않았다.

‘자꾸 보니 생긴 것도 퍽 곱구나.’

처음에는 몰랐는데 동그란 눈과 빨간 입술이 퍽 요염했다. 그러다 도화주를 훔쳐 먹고 현을 도발했던 밤, 그는 이성을 잃었다.

‘달다. 참말 달다.’

작은 몸은 이마부터 발끝까지 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행위는 곧 진심이 되었다. 그는 이대로 연희를 먹어 치우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어찌 이리 귀여울꼬.’

입을 맞추자니까 손으로 입을 막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죽을까 염려하는 게냐.’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알고 있는 연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는, 혼례를 올리고 백일이 지나면 그의 정체를 알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연희가 구미호 되는 것을 도와줘야지.’

가끔 그녀가 한숨을 쉴 때면 비밀을 숨기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지만, 지금 밝혀 버리면 연희는 구미호가 되지 못한다.

‘우스운 규칙 아니더냐.’

그가 누구든지 간에 연희가 인간이라고 믿고 백일을 지나야 한다니. 중간에 그가 가진 힘으로 연희를 구미호로 만들어 줄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게 어미의 유언이었다고 하니까 기다려 줘야겠지.’

가끔 잠꼬대가 심한 밤이면 연희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구미호가 되어서 인간으로 둔갑하여 살라는 어미의 심정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저리 어여쁜 것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꼬.’

그러나 이제 그가 있는 한 연희에게는 어떤 시련도 없을 게 분명했다.

혼례도 치르고, 밤낮으로 그의 애정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애정이 어찌나 깊은지 산을 모두 내어 주고, 제 살을 모두 줄 정도였다.

하지만 오 년 전 그날, 연희가 사라졌다.

그의 심장을 모조리 삼키고서, 빈껍데기만을 남긴 채.

‘이런 나를 두고 떠나?’

그때 느꼈던 허망함, 분노, 상실감은 생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연희를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한 번도 내 것을 잃어버린 적 없으니.’

그가 어깨를 물어서 반려의 흔적까지 새겨 두었지만, 연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꼬리를 하나 잃으면서 고유의 체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한 번은 힘을 발동하겠지.’

그는 한시도 집중을 흩뜨리지 않은 채 연희의 힘을 감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죽은 건지, 지난 시간 동안 연희는 한 번도 영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연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습게도 아들 덕분이었다.

‘이게 무슨 기운이지.’

산봉우리 서너 개만큼 떨어져 있는 민가에서 그와 비슷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묘한 일이군.’

버드나무에 기대고 서 있던 그의 머릿속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그는 당장 산의 짐승에게 신호를 보냈고, 산 몇 개를 순식간에 타고 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것을 되찾았다.

* * *

“연희야, 오늘 바람이 참 좋구나.”

현이 툇마루에 앉아서 방 안에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약과를 얻어 왔는데, 문을 한번 열어 보지 않으련?”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연희는 그가 산군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참을 울었다. 사랑하는 사내를 죽게 했을까 봐 속앓이했노라 고백하는데, 지켜보는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

산에 와서 훌쩍 자란 진이를 만난 연희는 재회가 반가워서 또 눈물 바람이었다. 이리에게 다치기는커녕 살이 올라서 볼이 통통해졌다. 비단옷을 걸친 아들의 모습은 참말 귀여웠다. 연희는 손으로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고백했다.

‘어미는 여우란다.’

평범한 어미가 되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연희는 작은 몸을 부둥켜안고 꺽꺽댔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연희의 등을 두드리더니 가만 입을 뗐다.

“산에는 다르게 생긴 짐승이 많은걸요. 그러니 하나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우와 산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뭔가 큰 힘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집채만 한 이리도, 인간을 찢어발길 만한 파괴력을 지닌 곰조차도 진이를 두려워하였으니 말이다.

현도 제 아들이 생겼다는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그게 대수겠나.

극적인 재회 이후 연희가 현에게 삐져서는 이렇게 열흘 넘게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온갖 패물과 간식을 가지고 와서 구슬려 봤지만, 연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

현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부 연희가 구미호가 되라고 도와주려 했던 게 아닌가. 처음부터 그녀가 여우인 줄 알고서 속아 준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더 많이 사랑하는 내가 져 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하는 수 없이 현은 어울리지 않는 약한 척을 하기로 했다.

“여인은 사내의 눈물에 퍽 약하다오.”

이 수법은 산 너머 수신이 알려 준 건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를 안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야겠구나.”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라서, 연기를 펼치는 현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이제 눈물을 좀 흘려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았다. 그러다 연희가 사라졌던 지난 5년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졌다.

“처음부터 잘해 줄 걸 하고 후회했었다.”

이리 귀한 인연을 맺을 줄 알았으면 헛간에 재우지 않았을 텐데.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걸 하고 후회했다.”

어미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홀로 아이를 키웠을 너를 몰랐던 내가 원망스럽구나.”

현은 저고리를 벗어서 손을 높이 쳐들었다. 손끝에서 장검 같은 손톱이 비집고 나왔다.

“으윽!”

그대로 가슴을 후벼 팠더니 절로 신음이 터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마당을 채우고, 붉은 피가 툇마루에 점점이 튀었다. 그러자 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연기였는데, 하다 보니 이입이 되어서 현은 잔뜩 울부짖었다.

퍼드덕퍼드덕.

산을 호령하는 현의 음성에 놀란 새 떼가 소란스레 날아올랐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짓이오.”

문을 열고 나온 연희는 다시 손톱으로 자해하려는 사내의 손을 붙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를 생각하면서 이 흉터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고.”

“왜 이리 극단적인 게요. 이런 상처를 보는 내 심정은 헤아리지도 않고…….”

현은 신묘한 영력으로 이깟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었으나,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해서 연희가 저를 보게 하고 싶어서.

지금은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

“나를 봐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지 않으냐!”

털썩 주저앉은 연희가 그대로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서 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혼란스러워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가 나를 속였다고 원망할 자격도 없다.’

그녀 역시 여우인 것을 밝히지 않았으니 말이다.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보자 연희는 속상했다.

‘그가 아픈 것은 죽어도 싫어.’

손으로 상처를 더듬으면서 떨리는 음성을 냈다.

“이 몸이 누구 건데 함부로 상처를 낸다는 거요.”

“누구 거라니. 알면 어서 말해 보아라.”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한 연희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림 속의 선녀 같은 사내가 그녀 앞에 있었다. 먹으로 그려 둔 것 같은 짙은 눈썹, 종이가 베일 것 같은 콧날, 연지보다 붉은 입술. 천하제일의 미색에다 산을 호령하는 산군이 그녀의 지아비였다. 이런 사내가 그녀를 원하고 원한단다. 5년하고도 열흘을 꼬박 기다려 준 사내를 바라보던 연희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걸 꼭 말해 줘야 안다는 거요. 현은 내 거요.”

“그래. 나는 털 한 터럭까지 전부 연희 네 거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기만 하던 손길에서 끈적거림이 묻어났다. 더운 숨을 뿜어내던 현이 자꾸 그녀에게 안겼다.

“그런데 왜 이리 살을 비비는 거요.”

“연희야. 보름을 참았다.”

바지 앞섶을 뚫을 기세로 솟은 양물을 내려다보던 현이 눈을 휘어 웃었다.

“이러다 사리가 나오겠구나.”

“진이도 있고, 학 할멈도 있고…….”

멀리 버드나무를 쳐다보던 연희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곧장 답했다.

“진이는 마실을 갔단다.”

“어디를 말이오.”

“그건 차차 이야기해 줄 테니. 어서.”

고개를 숙인 사내가 연희의 고름을 이에 물고서 양손을 치마 속에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치마폭에 모두 쏟아졌다. 손길이 어찌나 급한지 현의 거친 숨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리 다 벗기면 어쩌자는 게요.”

순식간에 적삼과 다리속곳 차림이 된 연희가 민망하여 볼을 붉혔다. 이곳은 두 사람이 처음 교접했던 툇마루였다.

“정말 아름답구나.”

적삼 속에 꼿꼿하게 선 붉은 정점과 흥건하게 젖기 시작한 속곳을 보던 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현의 손이 연희의 발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연희야. 얼른.”

현이 재촉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핏줄이 불거진 성기의 겉을 혀로 쓸었다. 단지, 혀만 가져다 댔을 뿐인데 현의 양물이 곧 터질 것처럼 꿈틀댔다.

“하, 못 참겠구나.”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한 현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곧장 다리속곳 사이로 성기를 쑤셔 넣었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놀란 연희가 숨을 제대로 못 쉬자 곧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것을 머금었다.

“나를 마시거라. 그러면 시원할 게다.”

“하읏, 미치겠습니다.”

달콤한 입맞춤과 거친 교접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연희의 입에서 연신 교성이 터져 흘렀다. 질척한 애액이 툇마루를 타고 댓돌 위에 둥근 점을 만들었다. 그녀의 귀에 연신 사랑을 속삭이면서 추삽질을 하던 달뜬 음성이 들렸다.

“이제 나를 뭐라고 부르련. 연희야.”

“현…….”

“그것도 좋다만…….”

“서방님.”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 놓자 현의 양물이 그녀의 속살에서 더욱 부풀었다. 길고 굵은 것이 자궁 입구를 잔뜩 쑤셔 대자 숨이 막혔다.

“너무 깊게 박으면, 흐앙…….”

쾌락에 덜덜 떨던 연희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다. 이대로 그에게 모조리 먹힐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에도 현은 성기를 속살에 박아 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현의 입술에서 쾌락에 취한 음성이 흘렀다.

“너를 탐하고 탐하여도 부족하구나.”

“하아…… 두렵습니다.”

“내 사랑이 너를 두렵게 하느냐. 응.”

거의 울 것 같은 사내의 고백에 연희는 버둥대는 것을 멈추었다. 그의 사랑은 오갈 데 없던 그녀의 삶을 비추어 주는 유일한 빛이 되었다.

“으응…….”

연희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고개를 숙인 그가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연희야. 사랑한다.”

“흐, 사랑해-.”

흥분으로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연희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또르르 흘렀다. 두 사람은 양손을 깍지 껴서 잡은 채로 연신 허리 짓을 이어 나갔다. 서로에게 열중하노라고 해가 저무는지도 모른 채였다.

부드럽게 늠실대는 버드나무 사이로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와 거대한 범이 한 몸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구미호의 연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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