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같이 따먹히고 다닙니다-32화 (32/218)

< 32화 > 평생 보살펴 줄게요 (1)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

끝도 없는 죽음 속에서 무한히 회귀하는 캐릭터들을 여럿 봐왔으나, 진정 죽음의 순간에서 느끼는 그들의 고통을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겠지.

머리는 멍하고, 몸은 쾌락의 여운으로 인해 움찔거린다.

신체는 다시 이전의 상태를 되찾았으나, 쾌락에 절임이 되었던 정신만큼은 아직까지도 제 기능을 복구하지 못한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과 같은 무력감과 공포가 이어진다.

무의식적인 반사로 인해 눈물이 찔끔 삐져나오고, 기능을 잃은 입술과 혀는 구강 내부의 타액을 줄줄 새어나가도록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

“…!”

그는 꿈을 꾼다. 아니, 어쩌면 어떠한 장면들을 뇌 속에서 재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달아 여러 이미지가 휙휙 오가며 그의 뇌리를 스친다. 대부분은 눈앞을 새하얗게 만들 정도인 쾌락과 관련된 이미지이다. 여인의 젖가슴과, 보랏빛 여운과, 흐느적거리는 손과…

허나 그 이미지들이 지나간 후에 보여지는 것은, 마차 안에서 보았던 꿈 속 장소.

“…린!”

꽃이 소복히 쌓인 길을 건너면 또 그 앞에는 꽃이 살랑거리는 정원이 놓여져 있고,

그 꽃들을 밟아버릴까 걱정할 여유도 없는 미래의 자신은, 혹은 꿈 속의 자신은 어째서인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달린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뒤를 돌아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쫓기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망설이고 있다.

꽃밭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망설이다가…

이전에 보았던 그 존재를 다시…

“델린! 씨이발…”

떠올린다.

그리고 의식이 돌아온다.

“델… 케헥…”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덜그럭거리는 쇠사슬과 함께 몸부림치는 필마르크.

그 앞에 있는 것은 필마르크의 목을 조르는 네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한다. 조금 먹통이 되어 속도가 상당히 느리지만, 그래도 단 한 단어만큼은 쉽사리 도출해낼 수 있다.

‘돌아왔어…’

달달 떨리는 상태로 발버둥을 치던 필마르크가 잠잠해진다. 그녀의 목에서 뿜어져나오는 피가 남은 생명마저도 모두 사라졌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네바의 악력이 필마르크의 목을 조르는 것을 넘어서서 그녀의 목을 으깬 것이다.

“…”

헌데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는, 마치 그 기계처럼 변해버린 여기사의 뒷모습에서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느껴진다.

소름이 끼치는 무언가.

도무지 그것을 말로 표현해낼 재간이 없다.

“으, 으으…”

눈앞에서 사람을 죽인 모습을 본다는 것도 상당한 충격이겠으나, 징~ 하니 울리는 머리 속 쾌락의 여운이 덜 가신 상황이기까지 하니…

델린은 곧 뒷걸음질을 치며 달아나고야 말았다. 생존 본능으로 말미암은 반사적인 행동.

지금까지 자신을 뒤지기 직전까지 착정한 필마르크보다도 네바의 고요한 뒷모습이 더욱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사,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좁디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니 원형으로 죽 늘어진 계단이 보인다.

기억난다. 분명 네바에게 업힌 채로 이 수많은 계단을 내려왔었다.

허나 이제는 그 계단이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렸고…

“흐, 흐으윽…”

피를 뚝뚝 떨구는 그 고운 손으로 한 발짝 씩 다가오는 여기사는, 도무지 무슨 감정인 것인지 알 수조차 없는 경직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데…

“델린?”

“으아악! 살려주세요!”

패닉에 빠진 델린은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그는 더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해낼 수 없다.

네바가 조금만 뛰어도 금방 따라잡히리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목에 새겨진 저주조차도 인식하지 못하여서,

“끄아하아아악!”

곧 발목을 뭉개는 듯 밀려드는 엄청난 통증에 그대로 쓰러지고야 말았다.

“아학! 으흐윽! 끄흐윽!”

계단 중턱에서 제대로된 중심을 잡지 못하니 아주 당연한 물리법칙으로 인해 그의 몸뚱아리가 계단 위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추락이 끝난 지점은 계단 시작 부분에 가만히 서있던 네바의 발끝 바로 앞쪽이었으니.

“끼흐으윽… 아파아…”

그곳에서 엉엉 울며 발목을 움켜쥐는 델린은 더는 달아날 재간도 없이 네바의 아래에서 벌벌 떨 뿐이다.

“흑, 흐윽…”

무서워어…

차마 그녀를 올려다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공포 영화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질 않는다. 세포 하나하나가 도망치라고 비명을 지르는 이 섬뜩한 감각은, 내 모든 정신을 오염시켜 아이처럼 울게 만든다.

“델린.”

허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내 이름을 부른다. 그 음성 속에 담긴 위압감이 싸늘하게 마음을 휘감는다.

도무지 위를 올려다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신께서 다시 기회를 주신 거군요. 델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주셨어요.”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손에 묻은 필마르크의 진한 피가 내 이마를 타고 주륵 흘러내리는데,

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로드를 외칠지 말지를 고민하며 벌벌 떨 뿐이다…

“자비로운 우리의 여신님이 제게 기회를… 때묻지 않은 델린을 지켜낼 기회를 주셨군요. 아아. 페놀라 님.”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오해하고 있는 건가? 설마…!

자기가 회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델린. 고개를 들어요. 당신을 해치진 않으니.”

“저, 정말요…?”

힘겹게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전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밝은 미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혹시 나도 죽이진 않을까 벌벌 떨게 만드는 그 비현실적인 살기가 사라졌음에 안도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네, 네바! 일부러 도망친게 아니예요. 너무 무서워서…”

“쉿. 괜찮아요. 내가 너무 험한 모습을 보인 셈이니까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다행이다…!

필마르크 그년이 뒤져버린 건 그냥 잊어버려! 나라도 살아야지…!!

“그리고, 미안해요. 이젠 아마 우리 둘 다 죽게 될 겁니다.”

에?

왜?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저 쓰레기를 죽였으니… 결국 모두가 그 책임을 제게 묻겠죠.”

“그, 그렇군요오…”

“델린 당신도… 내가 없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거예요. 당신처럼 가녀린 사람이 살기엔 가혹한 세상이니.”

그녀가 나를 끌어안는다.

잠깐만… 이거 뭔가 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고 함께 가요. 고통없이 보내줄 테니까, 그쪽에서 날 기다려줘요.”

“네, 네바? 잠깐…”

“사랑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잠깐만요! 뭔가 좀 잘못 생각하신 것 같은데…! 으읍!”

그렇게 둘은 차가운 지하 아래에서 몸을 맞댄다.

상당히 오랜 기간을 따먹혔던 델린에겐 그 진득한 교미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나, 알바토르 왕국 최강의 검 네바의 아래에서 반항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애틋하게 이어지는 마지막 섹스가 끝난 뒤엔…

“델린. 사랑해요.”

“자, 잠깐만요! 네바!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요. 일단 진정하고 그 검은 좀 내려놓ㄱ…”

콰직-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델린의 머리가 완전히 짓이겨진다.

그렇게 다시 한번 델린은 죽음을 맞이하고…

[당신은 사망하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세이브된 지점으로 자동 복원됩니다.]

다시 돌아온다.

“끄아학! 허억, 허어억…”

시발.

씨바알!

내 머리… 머리.

아… 붙어있어…

“케흑, 크흐윽…”

필마르크?

“시이발… 존나게 아프네…”

그녀와 눈이 맞는다. 둘 모두 죽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감한다.

그드드드드득-

“델린… 씨이발… 이거 풀어… 빨리!…”

육중한 돌문의 봉인이 풀어진다. 서서히 좁은 통로가 모습을 비춘다.

나도, 필마르크도,

방금 두 번의 일을 겪고 나서야 세이브&로드 기능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비로소 이해한다.

내가 뒤져버리면 다시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오는구나…!

“빨… 커흐윽… 빨리이…”

고문을 당할 적의 몸으로 돌아온 필마르크는 피를 연달아 토해내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시… 싫어! 너만 뒤져! 다시 이렇게 돌아온다는걸 알면 네바가 날 죽이진 않을 테니까앗…!”

그렇다!

아마 호감도 상승으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 회귀하는 듯한 네바는, 방금 전엔 나를 죽였으나 이번에는 분명 죽이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이전에는 다신 없을 기회라 생각하고 날 죽인 거지만, 이번에는 두 번째니까!

분명 나한테는 다시 친절하게 대해줄 거라고!

“이… 씨이발…”

내 예상과 크게 엇나가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온 네바는 사뭇 놀란 얼굴로 나와 필마르크를 번갈아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몸을 풀며 필마르크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죽어라 패기 시작했다.

얼굴과 주먹이 부딪히는 둔탁하고 찰진 소리가 감옥을 잔뜩 메운다.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그 소리가 상당히 섬뜩하긴 하나, 저걸 맞는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데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

피와 땀이 튀는 그 단순하면서도 매서운 분풀이는 이후로도 몇 분 가량 더 이어지다가,

필마르크의 목숨줄이 끊어지기 딱 직전까지만 행해진 뒤 멈추었다.

“후우…”

시발…

이제 끝이지?

쉬었다가 또 패는 건 아니지…?

존나 무섭네…

“페놀라 님. 감사합니다. 제 평생을 바쳐 당신께 헌신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제게 다시 한번 그 자비를 베푸신 넓은 아량과 은총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네바는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는 이세계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 뒤엔.

“델린. 집으로 돌아가죠. 더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것 같아서요.”

“넷, 네엣…”

날 들쳐업은 채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 지하감옥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이제 다 끝났구나.

그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났…

아. 잠깐만.

“저, 저기. 근데 제 발목은요…?”

“발목?”

“어… 네. 발목이요.”

“신경쓰지 마세요. 필요한 것들은 전부 내가 가져다줄 테니까.”

어라…?

이 말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나갈 필요 없어요. 앞으론 내 곁에만 있으면 됩니다. 발목은 쓸 필요 없잖아요. 집 안에서는 필요한 게 있으면 다른 메이드들을 부르도록 해요. 산책을 나가고 싶으면 나한테 업히면 되는 거고. 발목은 쓸 필요 없죠?”

“에…?”

“이대로 쭉. 평생. 다리 안 써도 불편하지 않도록 다 해줄 테니까 고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잘 된 거죠. 바깥 세상은 더럽고 흉흉하지만 우리 집 안쪽은 안전해요. 더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지켜줄게요. 그래. 이제 알았어. 결국 에바도 그래서 절 떠난 거예요. 내가 더 빈틈없이 가둬둬야 했어. 괜히 돌아다니게 해서 그랬던 거야. 델린 당신은 그 아이보다도 더 연약하니 앞으로는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요. 집에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할 거예요. 앞으로는 늘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때마다 사랑을 나눠요. 이대로 쭉. 우리가 죽을 때까지. 평생. 아니야. 고작 그정도로는 안 돼.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그래. 바다 건너 마왕이 지키고 있다는 신의 정원으로 가서 차라리 우리 둘 모두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빕시다. 아니야. 우리 자식들까지 전부. 늙지도 않게 해달라고 합시다. 그래야 언제까지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로드!”

[세이브 지점으로 로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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