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불편한 동행
달의 시간이 끝이 난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
델린은 두 마녀 커플 사이에 끼인 채로 의식을 되찾는다.
언제부터 의식을 잃었던 것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눈을 뜰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그는 죽지 않았다. 무자비한 쾌락 속에서 그는 기어이 눈을 뜨고 다시 몸을 일으킨다.
"으, 으흐으..."
무게를 지탱하며 일어서려는 그의 팔조차 바들바들 떨린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온몸이 쑤셔온다. 덩달아 그의 머리까지도 고통으로 물든다.
기분나쁜 두통으로 인해 잔뜩 찡그린 델린은 주변을 살핀다.
"..."
주변에 널브러진 여인들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달콤한 잠에 빠져든 채이다. 만족스러운 섹스 후에는 늘 달콤한 잠이 뒤따르는 법.
"흐으..."
물론 델린은 [만족스러운] 섹스가 아니라 [극악무도한] 강간을 당한 상태이니 달콤한 잠은 개뿔. 아주 욱신욱신대는 몸뚱아리와 피로, 자괴감,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뼈저린 깨달음 등등이 있을 뿐.
그래도 델린은 여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침대 위를 빠져나간다. 그 정도의 힘은 아직 남아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지금이 유일한 그의 탈출 기회가 아닐까?
델린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자신의 옷가지를 대충 챙긴 채 뻥 뚫린 문 밖으로 향한다. 빗자루 하나를 목발처럼 짚고, 아주 힘겹게 도망친다.
높디 높은 하늘섬인 라프텔에서 어떻게 내려갈 것인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일단 나간다.
집안에서 풍기는 비릿하고 음탕한 냄새를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
허나, 문 밖을 나선 델린의 눈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비틀거리며 천천히 다가온다.
"...델린."
상냥함을 늘 잃지 않던 그 목소리에는 고통 섞인 신음이 묻어난다.
"치치.. 씨?"
"미안하구나. 늦어버렸네."
그녀는 자신의 피로 물든 팔뚝을 붙잡은 채로 힘겹게 걸어와서는,
"어딜 가니? 집으로 가야지.”
델린을 향해 잠시 싱긋 웃어보이고 자신의 집을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델린은 방금 자신이 도망쳐나온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나,
피를 뚝뚝 떨구며 걸어가는 치치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서 오렴. 밖은 아직 춥단다."
상처 가득한 그녀의 등은 고통으로 인해 나약해질 법도 한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선다.
"..."
잠깐의 침묵.
떨어져나간 대문과 안쪽에서 풍기는 비릿한 향.
자신과 델린의 침대를 차지한 여인들의 모습...
치치는 잠시 그 내부를 보며 굳어버리는가 싶더니,
곧 자신의 찢어진 모자가 들썩일 정도로 웃어재꼈다.
"하, 하흐흑... 큭... 아하핫..."
아마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그처럼 크게 웃은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이들이 보기엔 영 어색하고 미묘한 웃음이지만, 그녀는 지금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웃었다.
"아, 웃기네. 정말 웃기지 않니?"
치치는 다시 몸을 돌려 델린에게로 터덜터덜 걸어가서는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너도 고생했구나. 그래... 잠깐 산책이라도 하겠니?"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산책을 하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몸상태인 듯하나, 그녀는 앞장서서 걷는다.
"무서워하지 마렴. 더는 널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이제 난 네 스승이고, 넌 내 제자잖니. 제자와 스승은 서로를 아껴야 한단다."
델린은 허름한 옷을 여미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자주 내비치던 형식적인 미소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퍽 씁쓸하면서도 즐겁고...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한...
그런 미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
즐비해있던 어둠이 걷히며 빛이 새어드는 새벽녘.
치치는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치유마법을 끝도 없이 걸며 델린과 함께 걷는다.
그녀의 몸에 난 상처들은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
델린은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였기에 치치와 거리를 둔 채로 걷는다.
그녀를 향한 억한 심정보다도, 어떻게 살아있는지 오히려 궁금할 정도인 그녀의 상태로 인해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거리를 둔다.
뭐. 사실 그것들보다는 목발을 짚으며 걷는 상황이라 속도가 잘 나지 않는 게 더 큰 요인이긴 하다.
“후후…”
치치가 그 망가진 초식동물같은 델린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하룻밤 새에 아주 초췌한 꼴이 되어버린 둘은 그렇게 터덜터덜 거리를 걷는다.
먼저 침묵을 깨는 것은 치치.
그녀의 머릿속에는 늦은 밤 마주친 두 여인과의 만남이 떠날 기미도 없이 계속해서 머물고 있다.
"델린. 내 귀여운 제자... 아무래도 아래쪽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구나. 그렇지?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어... 그래도, 사랑받고 있더구나. 정말로..."
사랑이라는 단어에 델린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춘다.
그의 머릿속에 두 여인이 떠오른다.
"...설마, 만났어요?"
"그래. 만나버렸지 뭐니."
필마르크는 지하 감옥에 있을 테고...
그럼 네바에게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당했다는 걸까?
"...절 찾고 있군요."
"그래. 찾고 있어."
"치치 씨도 진 모양이네요. 휴우... 네바는 막을 수가 없어요..."
"네바... 그 기사하고, 필마르크도 있었어. 누군지 알지?"
이런 시발.
둘 다?
"둘이 같이 있었다고요? 말도 안 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서로 죽이려고 난리를...!"
"널 찾으려고 서로 돕는 게 아닐까? 무거운 사랑이구나."
잠시 침묵이 돌아온다.
그 침묵 사이에는 희미한 새벽녘의 햇빛조차 닿지 않아서 너무도 슬프고 차갑다.
둘 모두 직감한다.
그 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곧 라프텔로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너무 걱정하진 마렴. 아무리 그 둘이 강하다고 해도 여기선 널 지킬 수 있거든."
"...지키긴 뭘 지켜요. 여기서 따먹히나 그 둘한테 끌려가서 따먹히나 똑같구만. 게다가 그 둘이 가만히 있겠어요? 분명 여기까지 와서 목덜미를 잡고 끌고갈 거야. 분명... 씨이발!"
"화났니? 미안하구나. 그래도... 여기는 괜찮아. 앞으로는 다른 마녀들이 너한테 손대지 못하도록 약속을 받아둘게."
"화나진 않았고요. 그냥 답도 없구나 싶어서 기분이 좆같은 것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발... 약속은 무슨. 에휴..."
델린은 치치를 믿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로드를 외치지 않는다.
이미 로드를 외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아니. 원래부터도 로드를 외칠 기회는 없었다. 네바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아다니는 이상, 로드는 이제 쓸모가 없다.
"그래도... 네가 재능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정말이야. 내 마법을 푼 건 네가 처음이란다."
"재능은 무슨! 재능이 있었으면 그 마녀 세 명이 들어왔을 때 그렇게 존나게 따먹히진 않았을 거라고요!"
"진정하고 누나 말을 들어. 정말이란다. 누나는 마법 가지고는 절대 거짓말 안 해."
"..."
"마법을 배우렴. 누나가 최고로 만들어 줄게. 누나랑 같이 최고를 노리자. 넌... 대마녀는 못 되겠지만, 위대한 마법사 정도는 될 수 있어."
"배워서 뭐하는데요. 배워서 네바랑 필마르크가 쳐들어올때 제가 다 죽여버려요? 하아..."
"바로 그거지."
조금씩 아무는 치치의 상처처럼,
조금씩 해가 뜬다.
"내 모든 걸 너에게 줄게. 널 만난 다음부터 드디어 내게도 빛이 비추는 구나. 드디어... 살아있는 것 같아. 드디어."
그녀에게 네바와 필마르크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조용하고...
너무나도 지루했던 인생을 향한 폭죽.
정신이 번쩍 드는 강자들.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 미래들.
그런 그녀들이 사랑하는 사내.
그 사내가 자신의 제자이며, 그 누구도 깬 적이 없었던 자신의 마법을 깨트린 유일무이한 존재.
치치는 행복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저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려고 하시는 건데요."
델린이 묻는다.
"내 첫 제자잖니."
"다른 마녀들은 그럼 뭔데요. 맨날 교수님~ 언니~ 하면서 따라다니더만."
"걔들은 학생들이고, 동생들이지. 제자는 너 하나란다."
"..."
"델린. 날 믿으렴. 내 곁에 머물면서 마법을 배워. 마법 하나 모르는 네가 내 마법에 저항했다는 건 말이지? 네가 나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란다."
헛소리가 분명해.
6월 모의고사는 물론이고 9월 모의고사까지 망친 고3 수험생에게 다가가서는,
넌 논술이 잘 어울려! 분명 내 밑에서 조금만 배우면 명문대도 들어갈 수 있어!
...라고 지껄이는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말만 믿던 친구놈 하나가 눈물을 펑펑 쏟던 모습이 떠오른다.
허나.
델린이 기댈 곳은 치치 뿐이다.
"...일단 다른 마녀들한테 빨리 약속부터 받아주세요. 절 건드리지 않는다고."
"그래. 날이 다 밝으면 바로 가야지."
해가 어느덧 고개를 내밀고는 세상에 빛을 힘차게 뿌리기 시작한다.
그 포근한 태양의 마나가 대지를 감싸며 모두를 굽어살핀다.
이제, 아침이 그들을 찾아오리라.
그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델린과 치치는 마음을 잠시 연다.
***
"허억, 허어억..."
네바는 잔뜩 다친 필마르크를 업은 채로 낑낑대며 골목으로 들어선다.
아직 아침이 채 찾아오지 않은 그녀들에겐 따스하고 밝은 햇살 아래보다도 어두운 뒷골목이 더욱 안전하다.
"이 바보가...!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 피하다니! 피할 능력도 없으면서 왜 끼어들었...! 후우..."
치치가 사각에서 만든 마나의 장창은 기어코 필마르크의 옆구리를 꿰뚫고야 말았다.
도적을 노린 공격은 아니었으나, 결국 맞은 것은 도적이었다.
원래였다면 심장에 직격했을 일격에 잘 대처한 것이긴 해도, 곧 추격이 따라붙을 마당에 그런 큰 상처는 아주 곤란하지 않겠는가.
"씨... 이바알... 수갑 좀 쳐 풀던지..."
필마르크가 네바를 아끼거나 해서 구한 것은 아니다. 그저, 네바가 죽어버리면 다음 세이브&로드 시점에는 돌이킬 수도 없는 개같은 상황이 올 수 있으니, 합리적인 판단 끝에 내린 이기적인 결정이었을 뿐이다.
"젠장! 피가...!"
네바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필마르크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죽으면 델린을 제대로 추적할 수 없으니 죽지 않게끔 돕는 것 뿐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곧 도와줄 사람을...!"
탁-
필마르크가 네바의 손목을 붙잡는다.
"...병신. 도와주겠냐."
"..."
참으로 슬픈 것은.
의지할 곳이 서로 뿐이라는 것.
"그냥... 씨이발... 수갑 좀 쳐 풀라고. 이 정도 상처는 나 혼자서도 치료할 수 있으니까..."
"약속해라."
"뭘...!"
"델린을 같이 찾겠다고. 뒤통수를 치더라도 그 다음에 치겠다고."
"아후, 이 병신이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좋아. 대신 나도 약속하지. 만약 일이 다 잘 풀린다면... 네가 죽지 않도록 꼭 도와주마."
아직 어두운 뒷골목.
네바와 필마르크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마음을 잠시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