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라는 지친 발을 질질 끌며 숙소로 돌아왔다. 최대한 돈을 아껴야 하는 긴급 상황이라 미궁 마법사는 물론이고 영주가 묵기에도 허름하고 부족한 감이 있는 여관이었다. 이곳 볼니도 모룬카 신도가 많은 곳이라 여관 입구에 나무를 깎아 만든 세 송이 꽃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훈제 닭인지 오리인지 모를 요리와 술을 한 잔 샀다. 오늘은 마시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솔라에 온 이후로 끊임없이 이어진 고생을 되짚어 보면서 제 가족을 죽인 놈에 대한 원한을 활활 불태웠다.
방 안에 테이블도 없다 보니 에이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술판을 벌였다. 질긴 훈제 새 요리를 안주 삼아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그가 한숨을 쉬었다. 돌멩이가 위로하려는지 찰싹 에이라의 뺨에 달라붙었다.
‘아공간에 있는 물건을 다 팔아 치운 뒤 식량을 넣으면 얼마나 될까.’
정 안 되면 에이라는 자신이 직접 왕복하면서 식량이라도 사다 나를 생각이었다. 어쨌든 제 아공간은 수레 두 대 분량 정도는 넣을 자리가 있었으니까. 어느 길을 따라 움직여야 가장 효율적이려나, 고민하면서 그가 지도 창을 불러왔다.
“음, 여기가 영주성이지. 이 길이 달움 협곡일 테고……. 이건 소블래츠로 갈 때 사용한 길. 볼니와 이어지는 가장 짧은 길은…… 정말 좁네. 겨우 수레 하나 지나다닐 정도겠는데.”
각 길마다 영지와 이어지는 길목에 초소 표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을 탐색하기 위해 맵을 축소하고 확대하기를 반복하다가 에이라가 멈칫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맵을 축소했다. 평소에는 솔라의 땅만 보이더니 지금은 볼니에 있어서인지 지도를 더 확대할 수 있었다.
“지도 좀 활성화해 봐.”
에이라의 요청에 곧 막대한 마력이 쑥 빠져나가며 지도에 여러 색상의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볼니에서 개화 마법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지도에 표시된 것이다. 극심한 마력 소비에 헛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꾹 참으며 지도를 샅샅이 살폈다.
취기로 인해 흰 뺨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무섭도록 집중하느라 반짝반짝 빛나는 청회색의 눈동자가 현재 자리한 여관과, 오늘 들른 무역상, 그리고 전서응이 자리한 곳부터 산맥까지 이었다. 곧 어느 지점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마침내 에이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점들이 몹시도 밀집한 곳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려다가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 바람에 마력의 공급이 뚝 끊기자 지도 창에서 바삐 움직이던 점들이 박제된 듯 멈추었다.
“이거 잘하면 길로 사용할 수 있겠는데?”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가 하고 또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에이라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 영지에 내다 팔 만한 것도 있잖아?”
흐흐, 흐흐흐, 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던 그는 마침내 술기운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벽에 아프게 머리인지 몸 어디인지를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그가 풀썩 침대에 누웠다.
“우리 영지도, 이제, 돈 좀, 만져야지…….”
독한 술에 취한 마법사는 행복하게 중얼중얼하다가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자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에이라의 머리 위로 지도 창이 깜박거렸다.
곧 돌멩이가 포르르 주인의 벌건 이마에 몸을 뉘었다. 까만 점 같은 눈이 지도 창을 바라보며 반짝 빛났다. 정령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푸른 점으로 이루어진 길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정령마저 눈을 감자 지도의 모든 점이 사라지며 붉은 점 한 개만을 남겼다. 제법 가까운 위치에 있는 붉은 점이 잠시 깜박이더니 그마저도 지도 창과 함께 사라졌다.
❄
“주인님, 어서 오십시오.”
에이라가 들어서자 미궁 노예들이 합창하듯 인사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려다 말고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노예들의 수가 부족했다.
“하나는 어디 있지?”
질문을 던지자 개중 가장 오래 일한 노예가 시선도 채 마주치지 못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오벤은 오늘 오전에 죽었습니다.”
“마수에게 먹이를 줄 때에는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에이라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꼭 한 달에 한 번은 안전 수칙을 어기다가 마수에게 죽는 노예들이 나왔다.
“내가 관리하고 있는 마수는 아무리 그 외양이 아름답고 귀엽고 멋져 보여도 한순간에 사람을 죽여 버릴 수 있는 애들이라 세심하고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번 주 내로 정독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 놓으라며 에이라는 책장에서 무거운 책을 꺼내 쿵, 소리가 나게 내려 두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에 그가 정성을 다해 주의 사항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중요한 책이었다.
노예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게 사람의 목숨을 여럿 해치다가 현장에서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자들이었다. 그 죄목이 이따금 아주 역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으나 에이라는 악질 범죄자라도 나름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매번 주의 사항을 지키지 못해 10년이라는 노역을 다 채우고 나가는 자가 이제까지 겨우 두 명 나왔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감시를 피해 재범을 저지르려다가 도로 잡혀 왔다. 이번에는 에이라의 노예가 되는 자비조차 얻지 못해 산 채로 어느 선배 마법사의 벽시계가 되었다고 한다.
‘매 시각마다 비명 소리를 알람 삼다니, 그 선배도 참 취향 특이하지…….’
인간 벽시계는 대체 어떻게 된 물건인가, 궁금해하다가 아차 하며 에이라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수가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경쾌도 했다. 제 소중한 컬렉션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발걸음은 한 번 멈추는 일이 없었다.
기다란 지하 복도 끝에는 자물쇠가 걸린 문이 하나 있었다. 에이라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자물쇠가 풀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안에 들어선 그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아, 하고 감탄하는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가 이제까지 봐 온 마수 중 가장 아름다운 개체였다. 붉은 머리카락은 아주 곱고 부드러워 보였고,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붉은 눈은 아름다운 보석 같았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 근육질의 다부진 몸에 탄탄한 다리까지 실로 멋진 이족 보행 개체였다.
에이라가 나타나자 날카롭게 방 안을 둘러보고 있던 붉은 눈이 잠깐 커지더니 이내 가늘어졌다. 잡혀 오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인명을 해친 녀석이라고 들었음에도 에이라는 겁도 없이 총총 앞으로 접근했다. 이렇게 보니 목과 손목에 차고 있는 수갑과 쇠사슬이 마치 액세서리처럼 잘 어울렸다.
그가 손을 뻗자 반응하며 붉은 마수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에이라는 아주 신중하게 입에 물린 재갈을 어루만지다가 뺨을 스쳐 아름다운 눈동자를 담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예뻐라.”
재갈 물린 입에서 답답한 듯 그르렁 하는 소리가 났다. 첫눈에 상대에게 반해 버린 에이라가 망설이다가 달칵 재갈을 풀어 주었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온 재갈에 말간 침이 이어졌다. 불그스름한 혀가 재갈에 눌린 자국이 난 입술을 야하게 핥자 잠깐 넋이 나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안 돼. 내가 아무리 마수를 좋아한다지만 발정까지 날 수는 없어.’
이제 보니 다부진 몸에는 채찍 자국이 여럿 나 있었다. 붉은 자국을 쓸어 보다가 문득 에이라는 자신이 채찍으로 이 마수의 몸에 경도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어느새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아파도 참아야 해. 착하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에이라가 상냥하게 말했다. 흰 손가락 끝이 턱을 긁다가 이내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하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지며 몸에 붉은 상흔을 새겼다.
그러자 완벽에 가까운 모양새의 몸이 꿈틀거렸다. 조각처럼 새겨진 근육이 통증에 반응해 단단하게 수축하면서 깊은 골을 만들었다. 다시 채찍을 휘두르자 짜악, 소리와 함께 제법 두툼한 가슴에, 그리고 말 근육 같은 허벅지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마수의 입에서 큭,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힘이 들어갔는지 이어진 상처에서 실선 같은 피가 배어 나왔다.
충분히 경도 실험을 마친 뒤 에이라가 채찍을 내려놓았다. 그는 제가 만든 상처를 살피기 위해 울퉁불퉁한 근육의 결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바지를 입었나? 하고 내려다보았다가 잠깐 실소했다. 마수인데 바지를 입었을 리가 없지. 벌거벗은 몸은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조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몸에 홀린 탓인지 자신에게 못 박힌 붉은 시선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을 상처를 어루만지던 에이라가 황홀해하며 중얼거렸다.
“이 속도 겉처럼 예쁠까?”
절걱, 마수를 얽매고 있는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평생 험한 일 한 번 한 적 없어 곱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가슴 위를 헤맨다. 두근두근두근 다소 빠르게 뛰는 심박수였다. 이 마수의 심장도 인간처럼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슴을 배회하던 손은 이내 복근으로 내려와 손톱을 세웠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선홍빛 이형의 장기들은 분명 겉처럼 아름다우리라…….
그렇게 몰두하던 중, 문득 뒷덜미가 따가워 고개를 든 에이라는 마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통을 참던 입술이 삐뚜름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에이라.”
“……응?”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이 마수가 말을 했네? 심지어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눈을 깜박깜박하는데 크크, 웃은 마수가 상체에 힘을 주었다. 팔뚝의 삼두근이 불뚝 튀어나오나 싶더니 곧 우드득 소리를 내며 쇠사슬을 끊었다.
“어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라 얼빠져 있는데 마수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나머지 손의 수갑을 풀었다. 뒤늦게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훅 쏜살같이 날아온 손이 목을 움켜쥐며 졸랐다. 헉, 하고 숨이 막혔다. 목의 쇠사슬까지 끊어 낸 마수가 풀어낸 수갑을 에이라의 손목에 채웠다. 철컥, 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아, 안 돼! 어떻게 마수가…….”
경악하는 사이 마수가 목에 쇠사슬을 감아 가볍게 조이며 바닥에 찍어 눌렀다. 인간의 것이 아닌 커다란 성기가 척추를 따라 선액을 줄줄 흘려 대며 문지르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이상하게 마법이 써지지가 않았다. 마수가 에이라의 귀를 아프게 짓씹으면서 으르렁댔다.
“어디 한번 마수한테 뒈지도록 박혀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