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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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론야는 미심쩍은 얼굴로 지도를 쳐다봤다.

그는 얼마 전 곤란한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수상하게 로브를 뒤집어쓴 젊은 청년으로 솔라에 옷감이며 식료품을 거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웃돈까지 준다고 했으나 론야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겨울에 저 험준한 산맥을 가로지르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철에도 저놈의 산맥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상인들 사이에서 솔라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진이 급증했다느니, 눈사태가 나서 상단이 생매장당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성성했다. 모룬카 님께서 몸을 누인 곳이니 아무렴 그 험악함이 남다를 수밖에. 게다가 얼마 전에는 볼니의 군대가 솔라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가 위협을 가하지 않았나.

그런데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던 청년이 다시 한번 론야를 방문했다. 고생이 많았는지 며칠 전과 다르게 초췌하고 창백한 낯을 한 청년은 물건을 팔아 달라고 말하는 대신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솔라에서 볼니까지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데, 혹시 한번 와 보실 생각 있으신가요?’

‘뭐요? 솔라까지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길?’

사실 솔라와 볼니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산맥 때문에 이리저리 굽이굽이 길을 돌아 들어가니 일주일이나 걸리는 것이다. 산맥을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길이라니 사기꾼 같은 소리였다.

흰 눈을 뜨고 바라보는데 청년은 가타부타 더 말하지 않고 론야에게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간소한 지도 한 장을 건넸다.

‘우연찮게 발견한 곳입니다. 사기 같은 건 아니에요. 걱정되신다면 얼마든지 하인이나 용병을 거느리고 오시죠. 혹 모르니 호위는 가능한 한 많이 데려오실수록 좋겠네요. 내일까지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청년은 산뜻하게 상점을 돌아 나갔다. 론야는 하루 종일 미간을 찡그리며 약도를 노려보았다.

이튿날,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상점을 나섰다. 그는 자신의 상단과 종신 계약을 맺은 믿을 만한 용병들을 거느린 채 약도에 표시된 곳으로 향했다. 밑져 봐야 본전이 아니겠는가. 솔라와 직통으로 연결된 길이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돈 벌 수 있는 손님들이 늘어나는 거지.’

그렇게 호위를 잔뜩 거느리고 산기슭에 당도했을 때 용병이 연신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아, 하고 뒤늦게 뭔가 떠올린 듯 신음을 흘렸다.

“상주님. 이쪽으로 계속 가면 그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

“침묵하는 동굴 말입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침묵하는 동굴은 이 근방 주민들에게는 유명한 곳이었다. 볼니에서는 모두가 아이였을 시절 한 번쯤 말 안 들으면 동굴의 괴물이 잡으러 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도 불쾌한 모양새의 마수로 들어찬 동굴로,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몇 번이나 토벌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만 장소다. 동굴 근처에만 가지 않으면 안전하니 오래전부터 볼니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역시 사기였구나!’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사기꾼을 혼쭐이라도 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약도에 표시된 장소에 도달한 론야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나 했는데 침묵하는 동굴 근처에 사람이 떼거지로 모여 있었다. 경계하며 면밀히 살펴보니 죄다 상인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용병들만 모아도 몇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오셨네요. 이제 막 설명하고 동굴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 대규모 사기극에 당황해하는데 누군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눈처럼 흰 얼굴에 화사한 은발, 청회색의 눈까지 누가 봐도 자신이 솔라 사람이라고 외치는 듯한 사람이었다. 론야는 그제야 상대가 그제 제 가게를 찾아왔던 청년임을 깨달았다. 뭐라 더 말을 걸기도 전에 청년은 슥 그를 지나쳤다.

“이봐요, 얼마나 더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거요? 정말 동굴이 안전해지긴 한 겁니까?”

누군가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에 동조하여 불만스럽게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론야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목을 쭉 빼고 침묵하는 동굴을 살펴보았다. 듣기로는 마수로 가득 차 있다는데 그냥 봐서는 사람이 깎아 만든 듯 굴곡 하나 없이 아주 둥그런 원형의 동굴일 뿐이었다. 박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 질문에 청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위험천만하게도 동굴 입구 바로 앞에 섰다. 침묵하는 동굴이 어떤 위험한 곳인지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있는 용병들이 움찔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솔라에서 온 헤스라고 합니다. 저 기억하시나요?”

햇빛 아래서 청년, 헤스의 얼굴이 은은하게 빛났다. 제법 반반하니 여자 깨나 홀렸을 법한 얼굴이었다. 얼굴이나 목소리나 반지르르한 게 역시 사기꾼 아닐까? 론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헤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상인 여러분들이 하도 산맥이 험해서 넘어갈 수 없다고 하시니 제 나름대로 길을 찾아봤지요. 그리고 자, 길이 생겼습니다.”

짜잔, 하며 손을 들어 동굴을 가리키는데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헤스는 모두가 긴장하여 쳐다보는 가운데 어두운 동굴 속으로 자박자박 걸음 소리를 내며 한참 걸어 들어갔다가, 걸음 소리가 아득해서 들리지 않을 때쯤이 되자 다시 돌아왔다. 어디 하나 녹거나 상한 곳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가 다시 짜잔, 하고 손을 들어 동굴을 가리키며 외쳤다.

“말끔하게 마수를 제거하여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랍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어서 술렁이는 소리가 일었다. 동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고개만 갸웃했고 동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의심 반 놀라움 반으로 연신 동굴과 헤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약간 흥분한 론야가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

“아니, 정말 동굴의 마수가 사라졌다고? 대체 언제부터 사라진 거요?”

“이틀 전부터요. 위험한 마수가 꽤 많기에 제가 말끔히 청소했죠.”

그저 마치 지나가던 길이 더러워서 싹싹 비질이라도 했다는 듯 평이한 어조였다.

“댁이? 대체 무슨 수로?”

“마법으로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며 헤스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눈부신 광원 여러 개가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대부분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으나 몇몇의 마법사 용병들은 눈을 부릅뜨며 마법사와 광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게 그저 어지간한 수준의 빛 마법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로도 론야는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까지 저 동굴을 토벌하려고 한 마법사들은 다 바보 멍청이였단 말인가? 론야처럼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따지고 질문을 쏟아붓기 전에 마법사 헤스는 휙 몸을 돌렸다.

“제가 앞장서서 안내하겠습니다. 딱 하루만 시간을 투자하시면 솔라에 도착할 수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따라오실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더니 질문을 던질 기회조차 주지 않고 동굴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개중 용감한 상인이 부리나케 마법사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많은 이들이 너도나도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저 혼자가 아닌 데다가 각자 호위로 용병도 끌고 왔으니 많은 머릿수에 용기를 낸 것이다.

동굴은 누가 일부러 사포로 문질러 다듬은 것처럼 바닥과 벽면이 아주 매끄러웠다. 바닥에는 미끄럼을 방지할 요량으로 깔아 놓은 건지 고운 흙모래 위를 구슬처럼 동그란 자갈들이 굴러다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높기도 했다. 론야가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셈했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언제 어디서 짐승과 마수, 산적이 습격할지 몰라. 동굴에서는 적어도 갑작스러운 기습은 없지. 이 정도면 말과 수레도 여러 대 너끈히 통과하겠는데. 경사도 거의 없어서 평지 같고.’

심지어 바깥보다 훨씬 덜 추워서 겉옷을 벗기까지 해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상인들의 얼굴에 다들 비슷한 계산이 떠오른 것 같았다. 산맥을 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얼마든지 식량과 옷감을 판매해 줄 수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헤스라는 마법사가 제시했던 웃돈을 생각했다. 소블래츠나 볼니에 내다 파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일 것이다.

‘이 정도로 잘 닦인 길이면 아예 솔라와 장기 계약을 맺는 것도 괜찮겠지.’

게다가 솔라는 모룬카 님께서 몸을 누이신 곳이 아닌가. 독실한 신도들은 지금도 짐을 바리바리 싸서 목숨을 걸고 기어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럼 산맥이 워낙 험해서 감히 들를 엄두도 내지 못하던 평범한 신도들이 이 길을 통해 솔라를 오가게 된다면?

사람이 오가는 길은 곧 돈이다. 론야는 바쁘게 머리를 굴리면서 혹여나 더 얻을 정보가 있을까 싶어 헤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못해도 삼천 년도 전부터 수십만 마리의 마수들이 1세크론씩 녹여 먹으며 만들어 낸 동굴이랍니다. 융해 마수들이 여기저기 구멍 내는 건 꽤 봐 왔지만…… 이건 정말 예술적이에요. 이런 동굴 현상은 엄청나게 희귀해요. 우연의 일치로 여러 조건이 맞아 일정한 산성을 띤 환경을 삼천 년 내내 유지해 온 거죠! 마수들을 쓸어 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자기장을 따라 난 길이라 일직선이 아닌 건 아쉽지만 이 정도로도 정말 훌륭하죠. 지토르기트 아종 특유의 끌원형 물결무늬가 이렇게 뚜렷한 건 처음 보네요. 특히 바닥에 깔린 퇴적물에서 약 20입크론이나 되는 단위의 헤오로페 파형을 관찰할 수 있는데…….”

멀쩡한 얼굴로 미친 사람 헛소리 같은 말만 줄줄 이어져서 뭐라는 건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론야는 그러려니 하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은 끝에 그들은 동굴 끝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매끈했던 길과는 다르게 동굴 끝부분은 다소 울퉁불퉁 엉성했다. 사람이 억지로 깨트린 것 같았다. 어이쿠, 하면서 상인 두어 명이 넘어지자 같이 비틀거리면서 헤스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한 50년만 더 있어도 말끔하게 뚫렸을 텐데 말이에요. 꽤 고생했어요. 동굴을 뚫느라 마력이 거의 바닥나서 하마터면 융융이들에게 잡아먹힐 뻔했거든요.” 

융융이들이라는 건 마수 이름인가? 론야가 갸웃하는 동안 드디어 환한 햇살이 그들을 맞이했다. 동굴 입구에 선 헤스가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자, 여러분…… 솔라 도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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