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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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 빌어먹게 춥네.”

카이카르가 욕설을 지껄이면서 모자를 꾹 눌러썼다. 예전에 들렀을 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솔라는 정말 겨울에 방문할 만한 땅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난번에 들렀을 때보다도 더 춥게 느껴지는 게,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이번에 솔라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동굴 길이 생겨서 편안하게 온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솔라는 겨울에 열성적인 모룬카 교 광신자들이나 목숨 걸고 넘어가는 곳이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여름에도 종종 산을 넘다가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산맥이 험준했다.

카이카르는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근 들어 값이 올라간 순백의 솔라 산 석재로 만든 집이 사방에 넘쳐났으나 아름답기보다는 투박해 보였다. 소블래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코웃음을 친 카이카르가 경멸을 담아 내뱉었다.

“촌동네 같으니.”

“아무렴요, 소블래츠에 비하면 촌동네지요.”

카이카르를 따라온 시종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에 카이카르가 돌이나 파먹고 사는 동네지, 하고 다시 비웃었다. 그는 종자와 함께 솔라의 모든 것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시궁창 냄새가 난다든가, 볼거리도 없고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축들까지 볼품없다는 둥……. 그러나 어쩐지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에는 불량배며 부랑자가 흔하던 거리는 오늘따라 제법 깨끗했다.

그렇게 시종과 시시덕거리던 카이카르는 영주성에 다다를 때가 되자 근엄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치켜든 그의 시선이 영주성에 향했다. 이 영지에 그나마 볼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순백의 영주성이었다. 솔라를 에워싼 산맥처럼 깎아지른 듯 높이 세워진 영주성은 마치 예술 작품 같았다.

그가 활짝 열린 영주성 정문 앞에 서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다가왔다. 묵직한 갑주를 갖추어 입은 기사의 투구 속에서 초록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는 누구인가. 신분을 밝혀라.”

“나는 소블래츠에서 온 트리기오수스 카이카르로, 주메니에 오르생 공의 전언을 가지고 왔소. 솔라의 영주님을 뵙게 해 주시오.”

상대는 카이카르를 면밀하게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가 어깨에 매단 소블래츠의 휘장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카이카르는 기사의 뒤를 따라 활짝 열린 문을 넘었다. 솔라에는 몇 번 와 본 적이 있지만 영주성 안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주성 내부를 둘러보며 그는 내심 감탄했다. 이 영주성은 마치 겨울의 왕이나 거대한 진주를 깎아 만든 성처럼 아름다웠다. 지어진 지 꽤 오래된 성인데도 마치 어제 건축을 마친 것처럼 빛이 바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깝군, 아까워, 하면서 카이카르가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이 촌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이었다.

‘마치 거지가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격이지.’

그는 언젠가 그의 주군이 볼니를 이어 솔라까지 정복하게 되면 이 영주성을 여름 별장처럼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내성에 들어서자 기사는 카이카르를 젊은 총관에게 인도해 준 뒤 떠났다. 본인을 헤스 루 지나스라고 밝힌 총관은 그를 한 응접실로 안내했다. 햇빛이 잘 들고 한눈에 도시의 풍경이 내다보이는 아늑한 응접실이었다.

“영주님께서는 공무 중이시니 여기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혹 특별히 원하는 음료가 있습니까?”

“음, 뜨겁게 데운 술이면 좋겠군.”

“잘 알겠습니다. 이 추운 날 먼 길 오느라 힘드셨을 테니 가볍게 먹을 만한 것도 같이 내오도록 하지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총관이 응접실을 나갔다. 잠시 뒤 나이깨나 먹어 보이는 시종장이 따뜻하게 데운 술과 한 주먹 정도 크기의 흰 빵을 하나 내왔다. 제법 배가 고팠던 차라 얼른 빵을 가르니 그 안에 고기 속이 가득 차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을 후후 불어 먹자 놀랄 정도로 맛있었고 따끈한 술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가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뒤에 서서 기다리던 시종이 꿀꺽 침 넘기는 소리를 냈다.

카이카르는 오는 내내 충실히 시중을 든 그의 시종에게 찐빵 반을 건네 나누어 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는 동안 눈이 제법 많이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펑펑 내리는 눈을 보니 아까는 온 것도 아니었다.

가까이서 봤을 때에는 투박했던 건물도 멀리서 보니 제법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늙은 시종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혹여나 맛있는 찐빵을 다시 주려나 하고 쳐다보는데 그가 정중하게 알려 왔다.

“곧 영주님께서 드십니다.”

“오, 그런가.”

이 말을 들은 카이카르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와 떠들던 시종도 굳은 얼굴이 되어 각 잡힌 차렷 자세로 바르게 섰다. 잠시 뒤에 시종장이 문을 열어 주자 솔라의 젊은 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

카이카르가 저도 모르게 내심 감탄했다. 최근에 영주가 되었다는 이 젊은 청년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미리 전해 들었지만 듣던 것보다도 더 대단한 외모였다.

솔라의 영주인 솔라 싱 에이라는 마치 영주성이 인간으로 화한 것 같은 외양이었다. 영주는 머리카락을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길렀는데, 솔라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은발이었는데도 뭔가 특별해 보였다. 눈처럼 흰 피부며 청회색이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솔라에서 흔해빠진 색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색감의 조화가 각별했다.

카이카르는 잠시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다가 영주가 자리에 앉았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소블래츠에서 주메니에 오르생 공의 전언을 가지고 온 트리기오수스 카이카르입니다.”

“음, 자리에 앉게.”

영주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어디선가 담요가 나풀거리며 날아와 무릎을 덮었다. 마석이 타오르고 있던 화로도 스르륵 가까워지는 걸 보며 카이카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보통 솔라 정도의 작은 영지의 영주에게 이 정도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영주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만하게 앉아 있다가 느지막이 일어서 고개만 겨우 까닥여 인사했을 터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예의를 차리는 건 상대가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바로 미궁 마법사…….

오르생의 명령에 따라 제법 머나먼 곳까지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그는 살면서 딱 두 번 미궁 마법사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의 만남마다 카이카르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마치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서운 금속 골렘이 거대한 주먹으로 마수 떼를 깔아뭉개거나 미궁 마법사에게 멋도 모르고 까불었다가 팔과 다리가 거꾸로 뒤집혀 울부짖으며 짐승처럼 기어 다니는 영주를 보게 되면 누구나 미궁 마법사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법을 배우는 법이다. 그 외에도 그는 미궁 마법사에 대한 여러 소문들을 지인들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했다…….

“그래, 오르생 공의 전언이란 게 무엇이지?”

“영주님께서도 아마 들으셨겠지만, 안타깝게도 볼니에 지진이 일어나 닐마 아르발트 공과 그의 적장자인 닐마 아르간 공자가 실종되었습니다.”

“음, 그렇다고 하더군. 부디 두 부자가 모룬카 님의 품 안에서 평온히 쉬기를.”

신실한 편인지 영주가 손을 들어 성호를 긋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자꾸 뭔가 쓰다듬는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반투명하고 자그마한 마수 같은 것이 영주의 손바닥 위에 있어 카이카르가 흠칫했다. 그가 몸가짐을 더욱 바르게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비극이지요. 이로 인해 지난번 솔라에서 맺은 협정이 무효화되었으니…….”

카이카르가 넌지시 계약의 당사자인 닐마 아르발트가 죽었으니 비단 거미 숲의 소유권은 자신들이 거머쥐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젊고 아름다운 영주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카이카르가 이번 지진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얼마나 컸는가 떠들다가 깊이 한숨을 쉬며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번 지진으로 인해 비단 거미 숲에 살고 있던 거미들이 모두 인근의 숲으로 도망가 버린 듯합니다.”

“흠. 볼니의 인근 숲이라면…… 아주 광활하지 않던가?”

“예, 그렇지요. 덕분에 주메니에 오르생 공께서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말이 상심이었지 노발대발 무섭도록 화를 냈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비단 거미들이 도망가 버린 건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인 탓이었다. 솔라에서 물밑 협상으로 비단 거미 사육법까지 알아냈는데 오르생이 가지게 된 비단 거미라곤 고작 세 마리가 전부였다. 이 거미들로는 겨우 일 년에 다섯 필 정도의 스키트 비단만 생산할 수 있었다. 값비싸고 진귀한 비단이 순식간에 동이 나버린 상황을 무마해 보고자 카이카르가 이 추운 땅까지 온 것이다.

“영주님께서는 그 미궁 마법사이시지 않습니까. 혹시…… 도망간 비단 거미들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흠…….”

솔라의 영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조용히 차를 마셨다. 뭐든 성과를 내야 하는 카이카르가 좀 더 아부를 해 볼까 생각하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은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시행하기에 위험할 텐데.”

“아! 괜찮습니다.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처음으로 영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아름답게 생긴 미인이 미소까지 짓자 마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영주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불쑥 허공을 가르며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 안에서 뭔가 복잡하게 생긴 도구와 물병을 꺼냈다. 언제 봐도 미궁 마법사들의 마법은 아주 놀라웠다.

“이 물병을 도구에 끼운 뒤 사방에 뿌리면 근처에 있는 비단 거미들이 몰려들 텐데, 문제점이 하나 있네. 근처의 다른 마수들까지 죄다 끌어들인다는 점이지.”

“과연 위험하군요.”

카이카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들판에서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마수들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볼니 숲의 마수는 더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마수들을 상대하는 건 기사와 병사들이지 그가 아니었다. 물끄러미 위험해 보이는 미궁 마법사의 도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소유 중인 스키트 비단을 제게 판매해 주신다면 시세보다 더 값을 비싸게 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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