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성 때문은 아닐까.”
“이 성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지나스가 또 이 지나친 행복이 갑작스럽게 끝나고 불행이 닥치는 건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의 얼굴로 물었다.
“겉보기에는 없는데, 이 성에 걸린 보존 마법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튼튼하거든.”
보존 마법의 효과도 어느 정도가 있지 용이 두들기는데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성이라니. 심지어 창문도 깨지기는커녕 덜컹거리는 법이 없었다. 야누조차 에이라가 보안 마법을 걸어 두자 창을 깨고 들어오지는 못하지 않았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단 거미들이 폭주한 것과 이 성이 지나치게 튼튼한 이유가 똑같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소블래츠와 볼니가 솔라를 정복하기 위한 이유와도 동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나스가 조심스럽게 에이라에게 권했다.
“그럼 한번 성을 뜯어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동안 저와 그레텔 경이 집무를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시간적인 여유야 만들면 되는 거고, 지금 당장은 곤란해. 성을 뜯었다가 스키트 비단 생산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시 가격이 오를걸. 최소한 모룬카 교의 축제가 끝날 때까지는 생산을 유지해야지.”
당장 소블래츠와 맞먹을 만한 유통 수단이 모룬카 교 정도밖에 없어서 스키트 비단 판매를 맡겼지만, 에이라는 종교 세력을 지나치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축제가 끝나면 상단에게도 신전에게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가격으로 스키트 비단을 유통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나 성을 뜯어봐야겠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겠어.”
한숨을 쉬는데 마치 결론이 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야누가 타이밍 좋게 슬그머니 도로 소파에 나태하게 누웠다. 에이라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설마 야누가 비단 거미 방에 숨어 들어가서 몰래 뭘 한 건 아니겠지……? 돌멩이를 쳐다보자 ‘No’ 하고 문구를 띄워서 에이라는 일단 찜찜한 기분을 접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내일 있을 영주님의 탄신연회를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여 성대하게 열 수 있게 된 게 정말 기쁩니다.”
“아, 나도 선물 좀 준비하러 가야겠군. 내일 보게나.”
요즘 들어 얼굴에 웃음이 만연한 지나스와 헤라가 서재를 나가자 에이라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야누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 용이 자신의 비단 거미나 수식에 무슨 수작을 부린 건 아닌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야누가 뜬금없이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옷은 벗는 거야?”
“네가 마치 내 몸을 보고 싶다는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봐서?”
“내가 대체 언제!”
그런데 어느새 야누의 잘빠진 가슴 흉근 위로 비늘이…….
에이라는 고개를 돌려 서재 문이 확실히 닫혀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야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청회색 눈동자에서 붉은 비늘이 점점이 빛났다. 정말이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에이라가 홀린 듯이 소파에 앉아 비늘을 어루만졌다. 조심스럽게 비늘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이음새의 근육 구조를 확인하면서 황홀하게 만끽하고 있는데 야누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지금 날 희롱하는 건가?”
젖혔던 비늘을 도로 돌려놓으며 에이라가 입을 딱 벌렸다.
“무슨 희롱……. 네가 먼저 벗었잖아.”
“내 몸을 보여 달라는 목적으로 쳐다본 거 아니라며? 나도 더워서 그냥 벗은 건데.”
“이 날씨에 덥다고? 그리고 비늘이 무슨 쿨러라도 돼?”
“쿨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 의심되면 한번 잘 관찰해 보든가.”
에이라가 미심쩍은 얼굴로 비늘을 다시 젖혀 보았다. 특별히 통풍에 도움 되어 보이는 구조물은 관찰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뜨끈뜨끈한 것 같은데…….”
“그건 네 희롱 때문에 흥분해서 그런 거고. 솔직히 너도 꽃다발 보니까 좀 흥분되지 않아?”
“아무리 내가, 좀……, 그래도 저런 걸 보고 흥분하지는 않거든.”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보니 블룸이 문을 열다 말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주의 체통과 사회적 체면의 중요성을 다시 떠올린 에이라가 얼른 후다닥 소파에서 일어났다.
“음, 블룸 경. 무슨 일이야?”
블룸은 에이라가 야누와 밀접하게 붙어 있던 것이나, 바닥에 떨어진 야누의 옷이 에이라의 마법으로 슬금슬금 기어올라 상체를 덮은 것 따위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보고했다.
“영주님이 지시했던 일을 모두 마쳤다는 것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말씀하신 그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
“으음…….”
팔짱을 낀 에이라가 침음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그가 블룸에게 지시하여 수습해 오도록 한, 한때 야누에게 보낸 적이 있는 사형수의 시신이었다. 눈 속에 덮여 있던 시신은 온전했으나 한편으로는 온전하지 않기도 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뉘어 있는 것이다. 블룸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영주님의 정부가 저지른 짓입니까?”
“정부…… 뭐, 야누? 아니, 정부 아냐. 그런 거 아니거든.”
단호히 부정한 뒤 에이라가 가까이 다가가 시신의 단면을 살폈다. 그의 형과 소블래츠에 습격당해 죽은 볼니 사람들의 시신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았다. 동일인의 소행이다. 이제까지 분명히 야누가 사형수를 죽였을 거라 생각해 왔던 에이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야누가 한 짓은 아닐 거야.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죽인 걸 본 적도 없고, 게다가 좀 위화감이 들어. 난 검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야누 키에 비해 절단면의 높이가 좀 낮지 않나?”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흔적을 보았을 때 검에 베인 상처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군요. 날이 무딘 무기인 것 같습니다.”
상흔을 살펴본 블룸의 의견은 야누와 비슷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블룸의 얼굴에는 야누에 대한 의구심이 어려 있었다. 에이라도 의심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야누의 짓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가족과 볼니의 영주를 죽인 그자가 우연히 솔라를 돌아다니다가 죄인과 조우하여 죽인 것이라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야누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만약에 누구든 야누의 곁에 있던 사람이 위험할 확률이 커서, 일부러 죽어도 되는 자를 내놓으라고 한 거라면…….
거기까지 다다르자 에이라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눈을 내리깐 채 한참 말이 없는 동안 블룸은 묵묵히 기다렸다.
‘내가 짐작한 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어쨌든 뭐든 확실한 건 없으니 뭐든 대비해 놔야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에이라가 블룸에게 죄인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두라고 지시했다. 생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지만 어쨌든 죽은 뒤에라도 안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서재로 돌아가는 길에 에이라는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성 밖으로 향하던 야누를 발견했다.
“야누? 어디 가?”
“네 생일 선물 구하러.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게.”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대답하더니 이내 야누가 훌쩍 내성 벽을 넘어 사라졌다. 에이라는 바로 지도 창을 열어 야누가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했다. 야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솔라를 에워싼 산맥 방향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 뒤에 확인해 보니 야누를 표시하는 검붉은 점이 산맥 깊은 곳에 쿡 박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희귀한 마수라도 구해 오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게다가 미궁에서는 연구에 미쳐 있느라 그동안 생일은 단 한 번도 챙겨 본 적이 없던 것이다. 그제야 에이라는 탄신연회가 있는 내일이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푹 잔 에이라는 드물게도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잠시 창밖에 펼쳐진 순백의 도시를 구경하고 있자 곧 보텔로가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주름진 얼굴에 애정이 가득 담긴 미소가 떠올랐다.
“에이라 님, 오늘은 이걸 입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변변찮은 실력이나마 직접 옷을 지어 보았습니다.”
“보텔로가 직접?”
에이라가 놀라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스키트 비단으로 정성스럽게 지은 옷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추위를 잘 타는 에이라를 위해 일부러 원단을 두텁게 짜 푸른색으로 염색한 옷이었다. 에이라에게 있어 보텔로는 어렸을 때 그를 돌봐 줘 가장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노환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이렇게 손수 옷을 지었다니…….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몹시 따뜻해졌다.
그는 새삼 솔라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땅이 아닌 사람임을 느꼈다. 솔라 사람들에게 깊은 호감을 품을 때마다 솔라에 대한 애정도 늘어났다.
“정말 고마워, 보텔로. 잘 입도록 할게.”
“입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럴게. 보텔로도 오래오래 건강해.”
서로 덕담을 건넨 뒤에 에이라는 보텔로가 직접 지어 온 옷을 입었다. 치수도 딱 맞을 뿐만 아니라 색감도 에이라에게 잘 어울렸다.
보텔로의 정성 어린 옷을 입고 에이라는 만찬장으로 향했다. 만찬장에는 최근 영지가 풍족해진 덕에 얼굴이 환해진 가신들이 각각 스키트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에이라가 이번에 손수 스키트 비단을 뽑아 염색한 원단으로 만든 옷이었다. 닐마 아르간도 안 좋은 몸을 이끌고 나와 초췌한 얼굴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에이라가 자리에 앉자 곧 시종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을 테이블 위로 날랐다. 지나스가 풍족한 재정을 아주 기뻐한 흔적이 음식마다 남아 있었다. 재료며 향신료에 아낌없이 돈을 써서 솔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큰한 향이 코끝까지 올라왔다.
야누가 등장한 건 에이라가 가신들에게서 선물을 받으며 만찬을 한창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는 커다란 자루를 짊어진 채 만찬장 문을 벌컥 열며 나타났다. 그러더니 당당하게 에이라가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누에게 문을 열어 준 시종이 헐레벌떡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곧 아주 자연스럽게 에이라의 바로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왁자하게 웃고 떠들던 가신들이 일제히 조용히 에이라와 야누를 흘끗거렸다.
‘설마 저 자루에 마수를 잡아 왔나?’
설레서 바라보기도 잠시……. 야누가 자루를 열더니 안에서 무언가 한 줌 쥐어 에이라 근처에 흩뿌렸다. 차르르륵 바닥을 굴러다니는 건 마석 한 무더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