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주성 주방에 들러 손수 먹거리를 챙겨 블룸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특유의 예민한 오감으로 미리 알아챈 블룸이 놀라지도 않고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 치료도 식사도 거부한다더니, 심지어 그는 침대에 편히 누워 있지도 않은 채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블룸 경. 몸은 좀 어때? 지나스에게 듣자하니 치료도 받지 않는다면서.”
“저는 괜찮습니다, 영주님. 지금도 죄인에게 과분한 처사입니다.”
어둡다, 어두워……. 에이라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블룸이 웃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단순히 성격이 과묵한가 싶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내 자신의 과거에 짓눌려 있던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문 모습을 보니 왜 퀘스트에 실패 시 영구적으로 가신을 잃게 된다는 주의 사항이 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냥 물어서는 호락호락하게 대답하지 않을 것 같네.’
무릇 게임에서도 NPC마다의 호감도 공략이 다른 법……. 에이라는 블룸이 항명이란 말에 유독 저항하지 못했던 것과 현재 지나치게 죄책감에 몰입되어 있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냉정한 판단을 내린 그가 다소 거칠게 식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침대에 앉았다. 식기가 나동그라지며 챙그랑 소리를 내자 블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일단 자리에 앉아.”
블룸이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에이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사처럼 한쪽 무릎만을 꿇는 것도 아니었다.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죄인처럼 두 무릎 모두 꿇는 것이다. 썩 보기 편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에이라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쓰러진 동안 감히 허가도 없이 탈영한 것에 대한 죄는 묻지 않겠다.”
탈영이란 단어에 놀라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싸늘한 목소리에 블룸이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래, 송구해야 할 일이지. 경이 함부로 이탈한 덕분에 내가 소블래츠까지 직접 가야 했으니까. 경이 소블래츠에 포로로 잡힌 일이 영지 사이 외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기는 하나? 이를 대체 어떻게 수습할 건가?”
사실 블룸의 행동이 딱히 악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전쟁 터질 김에 에이라도 소블래츠에 이런 저런 시비를 걸어 대지 않았나. 그러나 외교에는 문외한인 블룸은 완전히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만약 알고도 그랬다면 아주 실망스러웠을 거야. 고의가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연신 쏟아지는 질타에 블룸의 숨소리가 불안정해졌다.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어렸다. 에이라는 일부러 하아, 하고 무거운 한숨을 한 번 쉰 뒤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블룸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을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 소블래츠에서 경을 죄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지?”
“그건…….”
“설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두고 내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에이라가 정말 죄인 대하듯이 서늘한 목소리로 블룸을 추궁하며 몰아붙였다.
“그대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지금 솔라로 진군하고 있는 소블래츠의 병사들에 대해 제대로 대책을 세울 수 있어.”
“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짜, 짧았습니다.”
블룸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질리더니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안 그래도 흔들리고 있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라가 속으로 블룸에게 사과했다. 경, 이 일이 끝나면 돌멩이를 통해서 심리 상담 좀 해 줄게…….
무어라 설명하려다 블룸이 기침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어 에이라가 마법으로 물이 찰랑이는 컵을 띄워 건넸다. 그제야 솔라에 돌아온 뒤로 블룸이 처음으로 물을 입에 댔다. 그조차 겨우 두어 모금뿐이었다. 목을 축이더니 블룸은 망설이다가 이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영주님께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악시온 출신입니다. 소블래츠 동남부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죠…….”
블룸이 태어난 곳은 소블래츠 어느 외곽의 마을로 악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블래츠의 많은 사람들은 모룬카 교를 믿었지만 모든 지역에서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항구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영주성과 모룬카 교단의 영향력도 줄어드는 까닭이었다. 특히나 외부와 교류가 거의 없던 악시온에서는 모룬카가 아니라 용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용을 섬기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용은 실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인간에게는 경외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악시온은 그저 용을 신으로서 모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이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는 용뿐만 아니라 마수까지 함께 섬겼다. 그냥 섬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신 공양을 올렸다. 보통 인신 공양으로 바쳐지는 것은 죄인과 노예들로 제사의 횟수가 아주 빈번했다. 못해도 1년에 한 번 몇 명을 바치는 대제사가 있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에 한 명씩 제단에 올릴 때도 있었다.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마수님의 침입이 잦아서, 용님이 노하셔 지진이 일어나서, 가뭄이 들어서 등등.
소블래츠 영주성에서 파견한 관리와 기사가 있긴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들에게 노예는 사람이 아닌 우둔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런 마을에서 블룸은 서부 출신의 외지인이라 노예가 된 부모 아래 태어나 유년 시절을 이름 없이 자랐다. 그러다가 몸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제한된 계급이나마 병사가 될 수 있었다. 노예로서는 아주 대단한 출세였다.
만약 악시온이 평범한 마을이었다면 블룸은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능력이 좋아 병사가 된 것이 오히려 블룸에게는 불행이 되었다.
열세 살에 재능을 인정받은 뒤 그는 처음에 병사가 된 것에 기뻐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매해마다 자신의 이웃과 친척이, 그리고 함께 놀고 지낸 친구들이 인신공양으로 바쳐지는 걸 보면서, 때로는 그 과정에 손을 보태며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상흔이 남고 무거운 감정들이 층층이 쌓였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블룸은 무감해진 눈으로 자신과 함께 자란 친구가 제물로 낙점되어 산 채로 제단 위에 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축처럼 제단에 묶여 울부짖는 친구의 가슴 위로 날카로운 칼날이 들이밀어지자 블룸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것이 폭발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주위에는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노예들을 착취하고 인신공양으로 바치던 영지민들, 병사들, 기사들, 그리고 소블래츠에서 파견된 어느 높으신 분들이 모두 참혹하게 살해된 채였다. 이 끔찍한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건 오로지 노예뿐이었다. 블룸은 피에 젖은 채 비틀비틀 걸어 제단에 올라 친구의 몸에 묶여 있던 끈을 끊어 주었다.
그의 친구가 울면서 감사의 의미로 발치에 입을 맞추었으나 그는 전혀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관리를 비롯해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영지민들을 학살한 이상 더는 마을에 남을 수 없었다. 마을에 남게 된다면 노예들에게 찾아올 미래는 그저 죽음뿐이었다. 블룸은 노예들과 함께 마을에서 도망쳤다. 곧 소블래츠의 맹렬한 추격이 이어졌다. 블룸은 노예들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소블래츠의 추격단과 맞서 싸웠다. 다행히 노예들은 모두 도망갈 수 있었으나 블룸은 홀로 남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죽인 놈들이 증오스러운지 아니면 미안한지조차 구분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생존해 나갔다. 그러다 쫓고 쫓기는 기나긴 추격전 끝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진 블룸을 구해 치료해 준 것이 바로 소블래츠에 갔다가 귀성하고 있던 솔라의 영주 내외였다.
그때 블룸은 소블래츠 전역에 지명 수배가 떨어진 상태였다. 덕분에 솔라의 영주 내외도 블룸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블룸에게는 운이 따랐다. 당시 솔라 영주 내외는 소블래츠의 영주에게 감정이 썩 좋지 않았다. 소블래츠의 영주성에서 지내는 동안 촌구석 영주라며 내내 무시당하고 박대당한 까닭이었다.
블룸의 부상이 워낙 심각하기도 했고 소블래츠의 영주에게 엿을 먹이고 싶기도 해서 그들은 급히 블룸을 마차에 싣고 귀환했다. 블룸이 영주성의 작은 방을 차지하고 난 뒤 얼마 안 가 곧 겨울이 들이닥쳤다. 기나긴 겨울 동안 솔라는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소블래츠에서는 더는 흔적을 찾지 못해 블룸이 죽었다고 여기고 추적을 멈추었다.
워낙 심하게 다쳤던 터라 블룸은 일여 년가량을 폐인처럼 지냈다. 밤만 되면 그가 죽이거나 죽도록 방조한 무수한 사람들이 악몽으로 찾아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타고난 신체적인 재능은 그의 목숨을 이어 붙였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언제까지고 놀고먹을 수는 없었던 블룸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 다시 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솔라의 병사가 하는 일은 악시온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사와 병사들은 마수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마수가 성벽을 넘어 인간을 공격하지 못하게 싸웠다. 영지민들은 병사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존재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갔다. 피폐했던 블룸의 마음은 영주 내외로부터 블룸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은혜를 입으면서, 그리고 마수로부터 사람을 지켜 내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추적이 멈추고 소블래츠에서 거의 잊힌 덕분에 블룸은 과거를 묻어 둔 채 십여 년을 넘는 세월을 솔라 가문에 감사하고 충성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오늘날 과거의 죄와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블룸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에이라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그에게 왜 정의로운 학살자라는 칭호가 붙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블룸이 구해 준 그 노예들이 그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이라가 다시 스탯 창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표 칭호가 바뀌어 있었다.
<악시온의 대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