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버프는 마약이다 (120)화 (120/230)



〈 120화 〉120. 내 버프는 마약이다

대륙의 검사들이라면 사지가 잘려나가도 싸울  있게 하는 방법을 배운다.


마나 방벽과 비슷한 이치였다.


마나가 아직 잃어버린 팔다리에 적응하기 전에, 마치 잘려나간 것이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절단된 부위부터 마나를 이어붙여 신체에 방벽을 덧씌우듯 사지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뇌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계속 서서 움직인다.


척추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허리에 힘을 주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수단은 한 번 전투가 끝나면 쓸 수 없다.


기력의 소모 역시 극심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치는 싸움…….

이런 전투를  수 있는 건 두 검사가 진정한 호적수를 만나 자신의 모든 힘과 생명을 쏟아붓고 있을 때 뿐이었다.


수십 번의 격돌 중에 권진아의 손가락 네 개가 잘려나갔다.

그러나, 잘려나간 자리에 푸른 기운이 들어차 검을 놓치지 않았다.


또 수십 번의 격돌 중에 성유란의 발목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푸른 기운이 환부를 봉합하듯 둘러싸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격돌하는 사이에서도 서로를 베고, 베고, 또 벤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는 순간 반드시 신체한 부위가 잘려나갔다.

둘 다 살아남는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검사들이란 모두 저렇게 싸우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자들만 있는 건가 싶었다.

수십 번의 격돌과 다시 수십 번의 격돌.

검도 몸도 너덜너덜하다.


잘려나가 마나로 연장한 부위들은 모조리 피로 들어찼다.

당장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 끝낼 때가 왔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죽여 주마, 괴물!"
"아니야, 조금 더. 조금 더 싸울 것이다!"


베어넘기려는 이안과 막아내려는 괴물.


카각!

두 검이닿는 순간, 성유란의 검날이 부러져나갔다.

촤악!

가슴부터 옆구리까지 모든 중추 신경계를 베고 지나가는 일격.

철저히 죽음만을 향해 달려가는 싸움의 끝을 고하듯 피가 터져나오며 자세가 무너졌다.

승리를 쟁취한 것은, 혜용의 버프를 받은 권진아와 이안 쪽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강함의 당위성에 맞설 만한 대적자를 찾았고, 성유란과 권진아의 검술 실력 차이도 혜용의 버프로 해결되었으니.

이 처절한 전투는 해답을 찾은 것에 대한 마지막 퍼포먼스, 발악과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쿵!

성유란이 힘없이 쓰러졌다.

"이번엔 내가 완전히 이겼군."
"안타깝다… 조금만 더 가면 보일  같았는데."

그나마 멀쩡한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해 뻗는 바이러스.


중추 신경계가 파괴되었어도 마나의 힘으로 잠깐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듯했다.

"한 번, 단 한 번의 기회만 더 준다면……."
"아니, 이제 네게 기회는 없다."


이안이 괴물의 가슴팍, 정확히 심장 부근에  끝을 가져다대었다.


"우린 여기 있어선 안 돼."
"큭큭, 그렇긴 하지."
"다시 만나 반가웠다. 잘 가라."
"나 역시… 너와 두 번 싸울  있어 즐거웠다."


푸욱!


바이러스의 숨을 끊고 헉헉대며 돌아서는 이안.

그의 발걸음이  발자국 옆, 스스로에게 보호막을 걸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혜용에게로 향했다.


"험하게 싸워서 미안하군.네 동료…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다."

아, 그건 됐어요.

어차피 일 끝나면 멀쩡하게 돌아오는데요 뭐.

"괜찮습니다. 납득… 할 겁니다."
"훌륭한 의지를 가진 검사였다. 양지 바른 곳에… 묻어… 그래, 사과 나무 아래가,좋겠군……."

대륙에서 검사의 묘지는 사과 나무 아래를 최고로 치니까…….

이안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철퍽!


마나로 연장한 사지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고여 있던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다리가 없는 탓에 균형을 잃고 엎어지는 권진아의 몸.


그녀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죽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권진아가 죽어서 이안이 빠져나간 걸지도 몰랐다.


그때 해골 병사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ㅡ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ㅡ 우리의 땅을 지켜냈다!!


이안이 이끄는 바하프 군의 승리.

그것을 혜용이 인식한 순간, 석양이 부서지며 한낮의 낡은 태양빛이 내리쬐었다.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지상을 보니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어느새 멀쩡해진 채로 쓰러져 있는 성유란과 권진아의 모습만이 보일 뿐.


"휴우."


그제서야 혜용도 마음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어찌저찌 한 건 해결이군.'

이번에는 권진아가 많이 노력해 줬다.

성유란이야 바이러스에 잠식당해 있었다고 해도 권진아의 경우에는 빙의.


몸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분명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꿋꿋이 버티고 서서 싸웠다.


컨셉이라고는 하지만 상관 되는 입장에서 대견하지 않을  없었다.

혜용이 다가가 권진아의 상태를 살폈다.

'이번 MVP는 너다, 권진아.'

권진아가 깨어나면 질릴 정도로 칭찬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으, 윽……!!"

성유란이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리더니 곧 머리를 감싸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가 본데.'

혜용이 다가가 이것저것 찔러볼  물었다.


"…성유란 선배."
"넌……."


성유란이 주저앉은 채 고개를 돌렸다.

혜용을보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선배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곧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이는 성유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전부 기억나…… 이 손으로, 적어도 수십을 베어넘겼지."


성유란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눈빛을 했다.

'어, 전부 기억하는구나. 이럼  되는데.'


권진아처럼 일부만 기억하면 어떻게 잘 사기쳐서 뭔가  보려고 했는데 초장부터 계획이 박살나 버렸다.

이렇게 되면 술수보다는 정석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교관을 데려와 줘. 순순히 체포될 테니."

순순히 체포된다라.

하는 행동을 보니 성유란은 자신이 저지른 짓이 무서워서 숨기고 도망치려고 했던 권진아와는 성향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스케일이 다른 것도 있지만  한 명을 죽인 기억만 있어도 그녀는 자수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깊게 엮이진 못하더라도 신뢰정도는 얻을  있겠지.'

당당해 보이지만 성유란은 작게 떨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죽을 날보단 살 날이 한참 남은 창창한 나이에 인생이 어둠 속으로 처박히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


편안한 기분 버프를 걸어주면서 안심시켜 주도록 하자.

"걱정하지 말아요, 선배. 선배가 저지른 일 모두 없던 게 됐으니."
"뭐, 라고?"
"저기 저 여자애가 선배를 쓰러뜨리면서요."


성유란의 시선이 혜용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순식간에 옮겨갔다.


혜용이 반듯하게 눕혀 놓은 권진아의 얼굴을 보고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성유란.


마지막 결전까지 기억이 난 듯하다.

"어떻게, 된 거지……?"
"일단,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에서 얘기할까요."

주저앉아 있던 성유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병원.


대련 중 쓰러졌다는 핑계로 권진아를 데려가서 침대에 눕혀놓고 성유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럼 내가 겪었던 일 모두 꿈 속이었다는 건가?"
"정확히는 저희가 꿈으로 만든 거죠. 늦었다면 현실이 되어 버렸을 거에요."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직접 겪어 보셨잖아요?"

당신이 이상해진 것은 악령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악령은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엄정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퇴마사가 아니면 악령을 제재할 수단이 없어요!

하지만 그 악령은 나와 내 부하가 처치했으니 안심하라구!


혜용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 정도였다.

수작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최대한 성유란이 겪은 일을 토대로 신뢰만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입을 털었다.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겠네……."


성유란은 혜용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애걸복걸하는 눈빛을 보내 왔다.


"좀  자세히 설명해 줄 수는 없겠어?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아서……."
"이해가 안 가는  당연한 거에요,선배. 예전부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 왔고, 가벼운 대련 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제어를 잃고 후배를 베어버렸다는 것. 이걸계기로 악령에 잠식당한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현실적인 요소가 없어요."
"그래, 그러니, 사건의 전말이라거나 너와 이 아이의 정체 같은  좀 알려 줘."
"죄송하지만 선배, 선배가 아셔도 될 건 딱 이 정도에요. 이 세상에는 사람을 홀려 잠식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을 죽이려 하는 악령이라는사악한 존재가 있고, 그것을 없애기 위한 퇴마사들이 모인 비밀 집단이 있다. 선배가 그 이상 알게 되면 저는 어쩔 수 없이 기억 소거의 의무를 갖게 돼요. 아, 이 사실을 누군가한테 말하고 다녀도마찬가지고요. 물론 믿을사람은 없겠지만……."
"기, 기억 소거라니."

제대로 속여 넘기기는 했는지 기억 소거라는 말에 성유란이 깨갱 하고 꼬리를 내려 버린다.


'휴. 다 필요없으니 기억 지워 달라면 어째야 될지 싶었는데잘 풀린 모양이야.'


흡족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 성유란이 재차 질문해 왔다.

"알았어, 그러면 멋대로 질문할 테니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대답해 줘."
"그런 것도 곤란한데요……."
"선을 넘는 것 같으면 알아서 끊어 주면 되잖아."
"알았어요."

역시 악령 사태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보니 권진아만큼은 아니어도 혜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컨셉에 심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정말 내가 저지른 짓들은 전부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어떤 식으로?"
"선배가 처음에 베었다던 후배부터 선배의 검에 당한 수십 명의 사람들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요. 검에 베이기 전, 난리가 벌어지기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기억은 모두 저희 쪽에서 소거했고요."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선배만 해도 오른팔 말고 만신창이가 됐었는데 지금은 멀쩡하잖아요."
"그래, 그렇네. 직접 보고 겪은 걸 언제까지고 부정할 순 없겠지."

정확한 방식은 저장된 세계를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전에 미나에게 들은 바로는 바이러스가 세계 조작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내면 세계를 퍼뜨리는것은 바이러스에 잠식된 숙주가 등장인물들을 죽이기 직전!

그럼 이제 현실에서는 거기서 시간이 멈춘다.

바이러스가 해결되면 내면 세계가 걷히고 다시금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숙주가 여기에 있기에 아무도 죽지 않게 된다.


기억이 사라지고 숙주와 무언가 하고 있던 사람은 어? 내가 뭐 하고 있었지? 하며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그것 뿐.


모든 걸 기억하는 것은 혜용과,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적 있는 사람과, 인식의 씨앗이 완전히 개화한 인원들밖에 없었다.

"그 악령이란 놈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건가?"
"네. 애초에 제가 여기 입학한 이유부터 놈들을 쫓기 위해서에요."
"혹시 이 아이도……?"
"네, 선배처럼 악령에게 잠식된  제가 구했죠. 그 이후로 절 따라 주고 있어요."
"그랬구나, 갑자기 다른 세계에 살게 된 기분이 드는걸……."


성유란이 뭔가 결심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더 이상은 묻지 않을게. 이 기억을 소거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잘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도 좋아. 나는 너희들한테 구해진 거잖아? 이런 은혜를 입고도 당연하게 넘길 만큼 배은망덕한 인간은 아냐."


좋았어.


부려먹을 만한 사람 한  겟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으음……."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몸을 뒤척이며 깨어나려는 권진아.


성유란이 흠칫 놀라곤 권진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대, 장……."

권진아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찾은 사람은 혜용이었다.


"그래, 진아야. 나 여기 있어."

그렇게 말해 주니 권진아가 눈을 떴다.

혜용 쪽으로 한 번.


성유란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성유란, 선배님……."
"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후배님…."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보고 혜용은 생각했다.


나한테는 반말해 놓고 권진아한테는 존댓말?

게다가 얼굴도 묘하게 붉히고 있는  같고.


설마…….


"그, 감사합니다. 후배님께서 악령에 조종당하던 절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저보다는 저, 저 사람이……."
"최혜용 후배님께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감정입니다만……."

성유란이 권진아의 왼손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권진아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때, 마지막에 검을 나누면서 굉장히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맞부딪힐 때마다 몰랐던 것을 깨달아 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로서는 처음, 처음느껴보는 감각이었습니다."
"그, 그런가요."
"아무래도 저는 후배님을 한 명의 검사로서 존경하게 된  같습니다. 부디 제게 새로운,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저와 자주 대련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설마 권진아에게 반해버렸다거나 연애 감정 같은 게 생긴 건 아닐까 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다.

저 빛나는 눈에 담긴 것은 순수한 열의와 선망.


성유란이 입으로내뱉었던 단어, 존경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했다.

"아, 저, 그게, 기, 기쁘지만…… 저는 선배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C랭크의 평범한 검사에 불과한데……! 제가 선배님을 가르친다니 불가능이에요!"
"괜찮습니다 후배님. 단순히 지금의 실력이 부족한 거라면 제가 성심성의껏 단련시켜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후배님께 굉장한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요!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랭크를 뛰어넘고 제게 가르침을 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저기……."

권진아가 눈빛으로 슬쩍 헬프 콜을 보냈다.


대장, 제발  사람 좀 어떻게 해 줘요!


하지만 혜용은 어깨를  번 으쓱한 뒤에 피식 웃고  뿐이었다.

'검사라는 족속들은, 그런 일을 겪고도 검을 우선해서 생각하는 걸까. 대단하구만.'

그 카나센의 괴물이라는 놈도 검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인간이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권진아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성유란을 보니 검에 미친 악령이 붙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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