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163. 내 버프는 마약이다
'별 거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보다 훨씬 편안한 기분이 드는군요, 이 축복.'
혜용이 나간 방 안.
후, 하아.
혼자 남은 윤은하가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신경질나고 불안한 느낌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최혜용에게 축복을 받자마자 그런 기분이 싹 사라지고 속쓰림이 없어진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 걸 모르고 살았다니, 이제 이게 없으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버려요.'
이 답답하고 예민한 기분은, 보통 부모 생각이 날 때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것이었다.
한 번 찾아오면 쉽게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주변 모든 이에게 아낌받고 사랑받으며 자라온 윤은하에게 있어 유일한 컴플렉스나 다름없었기에.
하지만 최혜용이걸어준 버프 하나로 곧장 평정을 찾을 수 있었으니 기분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최혜용이 계속 옆에 있다면, 앞으로는 이런 불필요한 일로 기분 나빠질 필요는 없겠어요.'
윤은하는 애초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 혜용의 축복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평소 자신이 느끼던 부정적인 사고가 올라온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 혜용의 축복에는 의심할 거리 자체가 없으니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ㅡ 제가 가진 심신 안정 축복이 다른 축복술사들에 비해 과하게 성장한 면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말은, 다른 축복술사한테 이 축복을 받아 봤자 이것보다 덜하다는 뜻이겠지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데 날 지켜줄 수 있기까지. 후후, 이렇게나 가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사람은 처음이군요.'
마음이란 게 의지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컴플렉스란 것이 그렇다.
아무리 잊으려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머릿속에 둥둥 떠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컴플렉스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유일한 컴플렉스를 쉽고 빠르게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 혜용의 축복을, 윤은하는 상당히 유용하다고 여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사람으로 만들어 드리죠, 최혜용.'
단순히 금단 증세가 충족된 것 때문에 만족감이 몇 배가 된 줄도 모르고 혜용에 대한 관심을 쑥쑥 키워가는 윤은하였다.
-
혜용이 방으로 돌아왔다.
'허허, 참. 뭔가 점점 더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침대 위에 앉아 천천히 윤은하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윤준 가에서 빙의 전 최혜용의 기록을 지웠다라…… 어찌됐든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여.'
저번에 추측했던 것들이 좀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윤은하는 빙의 전 최혜용의 부모가 죽은 이유와 관련이 있고, 백윤서와 유지아는 혜용이 은하 그룹에 들어간 것을 윤은하에게 복수하는 것이라 착각해서 막으려 했다, 는 가정.
그럴 듯 하다 싶었지 확증까진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확신해도 될 것 같다.
'이모인 유지아가 이런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던 것도 그래…… 부모 놔두고 이모가 왜 그러겠어?'
유지아, 그녀가 혜용에게 이렇게까지정성인 것도 확실하게 설명된다.
그녀 역시 윤준 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가문에서 직접 내 정보를 없앨 정도면…… 진짜 뭐 극비로 취급할 만한 일에 휘말렸던 거겠지.'
부부 목숨 하나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윤은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네.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걸수도 있지만.'
그래도 혜용은 머릿속으로 메모했다.
( 윤은하는 빙의 전 최혜용에 대해 전혀 모른다 )
'그래, 이게 맞아.'
혜용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연히 윤은하의 태도였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그것도 부모와 관련된 원한을 가진 이가 자신에게 몰래 접근한 것을 아는데 마냥 아군이 되자고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몰라서 가문에 고발하지 않았고 모르니까 서로에게 쓸모가 있을 거라는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윤은하가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보자. 안 믿는다고 다른 수를 쓸 것도 아니잖아?'
윤은하는 뒷조사를 했다가 빙의 전 최혜용이 윤준 가의 어두운면과 관련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 자신을 노리고 있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윤은하가 계속해서 자신을 숨겨준다면,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윤은하가 가문에 고발할 경우인데…….'
백윤서와 유지아가 괜히 걱정하던 것이 아니었다.
ㅡ 당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조카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ㅡ 의미 없는 복수를 마치고 나면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ㅡ 이제 더는… 조카님이 과거의 일로 상처입지 않았으면 해요…….
유지아의 슬픔 가득한 얼굴과 울먹이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유지아는…… 단순히 윤은하에게 접근하는 것만 알고도 복수를 위해 그런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그건, 빙의 전 최혜용의 사정을 안다면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란 뜻이야.'
윤준 가 사람 중 분명히 누군가는 빙의 전 최혜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약 윤은하가 가문에 고발할 경우 그 사람의 귀에도 자신의 소식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외통수다.
그 인물 역시 백윤서와 유지아처럼 「윤은하, 혹은 윤준 가에게 복수하려고 접근했구나」라고 여길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윤준 가에 압박받겠지…….'
단순히 압박 같은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해서 고문 같은 걸 당하게 될 가능성도…….
'오우, 나 존나 위험한 데다 발 걸치고 있구나.'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냥 평범하게 윤은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엄청 이득이 될 거라는 생각밖에 안 하고 있었는데.'
꼬이고, 꼬이고, 또 꼬인다.
혜용이 질색하는 상황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였다.
뭐가 잘못돼서, 거대한 세력에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
그래서 가진 능력을 적절히 숨기고 살던 것이었다.
ㅡ 제가 가문을 위한다면, 이런 당신을 이미 위에 고발했겠죠?
'고발, 고발이라.'
그 단어 하나 때문에 갈피를 잡기 힘들어진다.
원래 혜용의 계획은 좀 의심받더라도 금단 증상에 계속 시달리게 해서 자신에 대한 의존성을 높혀 내면 세계 간섭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각인이 5단계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버프를 받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혜용에 대한 의존성 역시 급상승하게 되어, 금단 증세를 한 번 맛보여주고 나면 내면 세계에 침범할 수 있게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런 계획을 세웠던 심리의 근본은, 가문을 배제한 결과였다.
윤준 가와 윤은하라는 존재를 따로 보았던 것이다.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윤은하가 버프에 대한 의심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한들 곧바로 행동에 나설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왜냐?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저번에도 설명했지만, 혜용의 버프는 겉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버프일 뿐이다.
금단 증세에 시달린다 해도 당장은 뭔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축복을 너무 받고 싶다」생각하게 될 즈음 버프를 의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의심한다 해도 당장 행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버프에다 음습한 수작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걸 윤은하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기껏해야 불러서 추궁 정도 할 것이다.
자기한테, 뭔가 하고 있냐고.
그럼 혜용은 모른척하면 그만이었다.
이건 그저 평범한 버프일 뿐이라고.
혜용의 힘은 상식적이지 않다.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힘을, 어떻게 알아채겠는가.
거기서 더 추궁해 오면 적반하장으로 나오면 되었다.
억울하다고, 애초에 그런 수작질을 부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버프 내용은 커스텀으로 얼마든 바꿀 수 있다.
정 신경쓰이면 다른 사람한테 시험해봐도 되고, 다른 축복술사를 불러와서 조사하는 것도 괜찮다고 연기력 버프까지 걸어 가면서 토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버티면 부정의 씨앗이 쌓여 자연스럽게 내면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때부터 진짜 조교를 시작한다는 계획이 원대하게 세워져 있었다.
악몽을 겪고 난 윤은하가 아무튼 이상하다고, 혜용을 족쳐 달라고 가문에다 요청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이상 그러기는 힘들테니까.
생각해 보라.
혜용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저 스카우트되어 윤은하의 경호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을 뿐이다.
최혜용이 겉보기에는 평범할 뿐인 버프 스킬을 써서 기분이 나빠지게 하는 수작질을 부렸다?
그걸 어떻게 밝힐 생각인가.
꿈 속에 누군가 나타나서 자길 범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최혜용인 것 같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 우리 아가씨가 한 명 묻고 싶으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였다.
물론 그런 식으로도 묻으려면 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
그러나 조건이 있다.
혜용이 있는 곳이 그냥 바깥 사회였다면, 말이다.
바깥 사회였으면 으슥한 곳에서 습격하는 식으로 아무도 모르게 혜용을 납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긴 아카데미 안.
사방이 바다인 섬이다.
아무리 윤준 가의 세가 대단하다 한들 국가가 세워둔 아카데미에 멀쩡히 재학중인 학생을 억지로 끌고 갈 순 없을 거라는 게 혜용의 생각이었다.
잘못을 했다면 모를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무슨무슨 법으로 혜용을 구속한다는 말인가.
무엇을 증거로?
증거 없이는 잡아들이기 힘든데, 증거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다.
이미 윤은하에게나타난 중독 증세를 문제로 삼는다 해도 그 역시 버프 커스텀으로 만든 버프를 교묘히 걸어 두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을 터.
적어도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혜용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극단적으로 생각해 봐도 빠져나갈 구멍은 분명 있었다.
인원을 추려 섬에 잡입시킨 다음 몰래 기습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A급 S급 각성자들을 우루루 모아서 덮치는 게 아닌 이상은, 보호막이 어느 정돈버텨줄 터였다.
코스트가 많이 늘어난 지금, 혜용의 능력도 그렇게 약하진 않아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보호막은 이동 방해 스킬 같은 것도 전부 막아주기 때문에, 성물로 보호막을 켜고 회피용 버프에 코스트를 몰빵하면 웬만한 인력으로는 혜용을 붙잡기 힘들었다.
유지아가 주었던 신성력도 있으니 안정성은 더더욱 올라간다.
그렇게 한 번 습격을 피해 두면 시설 측에 연락해서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일러바쳐 두 번째 습격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니까 시설 건물 안에만 박혀 있으면 그럭저럭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 방심의 방심이 겹쳐서 잡혀 버렸을 경우도 생각해 보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당해버렸다 해도 혜용에게는 공명이라는 능력이 있다.
란팡이나 권진아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사정을 설명해서 백윤서 교관과 유지아 교관에게 이 소식을 알려달라고 하면 그 둘도 알게 될 터.
백윤서는 몰라도 유지아라면 분명 혜용을 구하기 위해 힘을 써 줄 것이다.
시설 측에만 알려도 멀쩡한 학생이 의문의 납치를 당한 것에 정부가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까지 일이 커지면 윤준 가라도 마냥 묻어 버리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 악물고 하고자 하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윤은하 한 명이 증거도 없이 아무튼 당했다고 떼쓰는 것 하나 만으로 어디까지 커버해 줄까.
내면 세계 간섭의 진짜 무서운 점은 상대방이 잘 때라면 언제 어디서든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쯤 되면 부정의 씨앗이 쌓여 자연스레 간섭이 가능해질 테니 미친 듯이 윤은하를 괴롭혀서 굴복시킨 다음 명령을 철회시키면 그만이었다.
혜용은 특유의 쫄보 기질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만약의 만약까지 생각해 두었었다.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서 윤은하를 굴복시킨다는 계획을 실행한 건데, 윤은하와 나누었던대화로 얻은 정보 하나로 전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의심이 가면 그냥 고발해 버리면 땡이잖아…….'
모든 것은 혜용이 아무런 잘못이 없을 때 성립한다.
하지만, 윤은하가 말한 대로라면 혜용은 고발당하는 것 자체만으로 잘못한 게 되었다.
'가문에 확실한 원한이 있다는 걸 알면 계속 날 예의주시하면서 어떻게 해 볼 틈만 노리겠지. 죽이든, 고문해서 정신교육을 하든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거야.'
기숙사에서 뻐기는 방식으로 당장 윤준 가의 공격을 피해 봤자 평생 도망칠 수는 없었다.
시간을 끌어 내면 세계 간섭으로 윤은하를 완전히 굴복시켜서 이쪽 편으로 만든다 해도, 습격 자체가 멈출지는…….
'잘못되면 좆되는 선택지 뿐이냐 어떻게?'
차라리 지금 안 게 잘 된 거긴 하다.
몰랐으면 그대로 진행했을 테고, 의심을 거듭한 윤은하가 가문에 자신을 고발할 것이 분명했으니.
'스읍, 지금 와서 발 뺄 수도 없고.'
혜용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별 트러블 없이 윤은하의 내면 세계에 침입해서 끝까지 의심 안 받고 조교할 방법은 없으려나.'
여기서 윤준 가의 타겟이 되면 소위 말하는 배드엔딩에 가까워진다.
혜용 본인도 문제지만 인식의 씨앗을 모으는 데도 제약이 생긴다.
어쩌면, 바이러스가 공격해와도 막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백윤서랑 유지아가 괜히 경고한 게 아니었는데. 덫에 스스로 발을 들이민 거나 다름없구만…….'
만약 혜용이 빙의 전 최혜용의 과거를 전부 알았다면 이런 위험한 상황에 몸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알 때와 모를 때의 사고방식이 이렇게나 다른 걸 보면 정보라는 게 참 중요하긴 중요했다.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있다.
버티다 보면 돌파구가 있을지도 몰랐다.
바이러스가 뿅 하고 나와서 새로운 능력을 헌납하고 갈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건 너무 갔네.'
어느새 바이러스를 능력 나오는 뽑기 기계 정도로 생각하게 된 혜용이 무슨 생각하는 거냐며 스스로에게 묻고는 피식 웃는 것으로 답답한 마음을 환기시켰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나와도 한 번 상의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