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73화 미라주
다음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어제처럼 미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찾아올까 신경이 쓰였는데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강식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미숙과 시간을 보낸 후 헬스장으로 향해 기분 좋게 운동을 끝내고 혜림과 헤어진 후 건물을 나왔다.
강식이는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만에 하나 포르쉐를 끌고 또 나탄다고 해도 그날처럼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곧장 차로 향해서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려는 그때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순간 불길한 기분을 느낀 강식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미정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미정이 조수석 문을 열려는 그때 강식이가 그대로 문을 잠궈버렸다.
“뭐야?!”
손잡이를 잡아 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자 미정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엑셀을 밟은 강식이가 그대로 갓길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
미정이 저만치 달려 나가는 BMW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 얽힐 뻔 했네.”
천천히 담장에 차를 댄 강식이가 홀가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어제처럼 조수석에 태울 뻔 했다.
“내가 순순히 태워줄 줄 알고? 어림도 없지.”
포르쉐는 어디다 두고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는지 모르겠지만 호락호락하게 태워줄 강식이가 아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롭게 보냈다.
낮잠도 푹 자고 제시간에 일어나 저녁을 챙겨먹고 씻은 후에 출근한 강식이는 김씨와 수다를 떨다가 기분 좋게 일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또 사우나에 들렸다 갈 거죠?”
“그래야지~ 자네는 곧장 집으로 갈 거지?”
“저도 그래야죠.”
“오늘 밤에 보자고~!”
중간에서 헤어진 김씨가 정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차로 향해 올라탔다. 그렇게 안전벨트를 매려다 말고 그대로 문을 잠궈 버렸다.
“문 안 열어?!”
신경질 적으로 소리치는 미정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식이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와씨.. 이젠 회사까지 찾아와서 저 지랄이네?”
순간적인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미정을 차에 태울 뻔 했다.
설마하니 회사 주차장에 매복을 하고 있을 줄 전혀 예상도 못 했다.
“정말 성격 특이하네.”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포기 할 줄도 알아야지 진짜 징했다.
집으로 돌아온 강식이가 천천히 차를 담장에 주차했다. 그리곤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미정이가 또 나타날까 싶어서 그런 것이다. 다행히 없다는 것이 확인 된 후에야 강식이는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식아, 너 무슨 일 있어?”
집에 들어온 강식이를 반갑게 맞아주던 미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별일 없어요.”
“표정이 뭔가 쫒기다 온 사람 같아서 그래.”
정곡을 찌르는 미숙 아주머니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지만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차려준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강식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고년을 어떻게 하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데.’
설마 어재 자신이 토꼈다고 회사 주차장에 매복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분명 내일도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 같았다.
그렇게 미정을 때어낼 방법을 고심하며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강식이가 헬스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헬스장에 가는 거지?”
밖으로 나온 강식이는 운전석 앞에 대기하고 서있는 미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아... 너도 참 징하다.”
“그렇게 도망치면 날 떼어 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오산이야.”
당당하게 말하는 미정의 모습에 강식이가 가까이 다가갔다.
“비켜봐, 헬스장 가야하니까.”
“타자마자 또 문 잠그려고?”
“걱정마라. 안 잠그니까.”
체념 한 듯한 강식이의 모습에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조수석으로 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미정이 순순히 비켜주며 조수석 쪽으로 돌아갔다.
차에 올라탄 강식이를 보며 미정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뭐야?”
문손잡이를 잡아 당겼던 미정은 조수석 문이 열리지 않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차가 출발하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창문을 두드리며 따라간 미정이 유유히 빠져나가는 차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미쳤냐? 널 차에 태우게.”
룸미러 너머로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정의 모습을 보며 강식이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강식씨 좋은 일 있어요?”
카드를 찍고 옷을 받아든 강식이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보이자 혜림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저야 늘 밝잖아요. 오늘 하루도 힘차게 보내 봐요, 혜림씨.”
그리곤 실실 쪼개면서 탈의실로 향하는 강식이의 모습에 혜림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혜림과 수다도 떨고 땀도 흘리며 기분 좋게 운동을 한 강식이가 샤워를 하면서 상태창을 켜서 체력 스탯을 올렸다.
이름: 최강식.
나이: 만26세.
마지막 학벌: 우수고등학교 졸업.
현재 남은 스탯: 10
힘:40
체력:43
민첩:40
외모:30
행운:50
정력:20
재능:50
현재 경험치 10%/100%
이제 체력을 7만 더 올리면 목표로 했던 50을 찍게 된다.
‘이렇게 운동을 빡시게 해도 그렇게 피곤하지가 않으니 정말 효과 만빵이란 말이야.’
전에는 상당히 지치고 피로가 많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체력 스탯은 올릴 때 마다 효과를 바로 체감 할 수 있으니 정말 좋았다.
상태창을 닫고 샤워를 한 강식이가 옷을 입고는 탈의실을 나왔다. 혜림과 헤어지고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밖으로 나가는데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너 진짜 웃긴다?”
보지 않아도 그게 미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웃기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이쯤하면 포기 할 때도 되지 않았냐?”
발걸음을 옮기는 강식이의 옆에 미정이 따라 붙었다.
“너 왜 그렇게 날 피하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미정이 강식이의 앞을 막아섰다.
“모르겠는데?”
“나 분명히 말했다? 너 장단 맞춰줄 시간 없다고.”
미정을 지나친 강식이가 다시 차로 걸어갔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왜 그렇게 날 무시해?”
“무시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리고 난 분명히 의사를 밝혔어.”
차 앞에 멈춰선 강식이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탈려고 하자 다시 미정이 막았다.
“비켜, 나 가야하니까.”
“타고 싶으면 날 밀어내고 타.”
“그런다고 내가 못 할 줄 아냐?”
강식이가 정말로 밀어내려고 하자 미정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꺄아앗!”
순간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소리 질러?”
“이번에도 도망치기만 해봐. 저 사람들 네 얼굴 다 봤어.”
그리곤 바로 조수석으로 가더니 그대로 차에 탔다.
뒷머리를 긁은 강식이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탔다.
“사람들 쳐다보니까, 출발해.”
갓길을 천천히 빠져나간 강식이가 띠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성격이 왜 그러냐?”
“내 성격이 뭐.”
“미친개처럼 지릴맞잖아.”
“누가 미친개야? 너야 말로 날 속이고 도망쳤잖아.”
“그럼 순순히 태워주고 싶겠냐?”
“분명히 내가 말했잖아. 한 달이라고. 그 후에 깔끔하게 헤어져주겠다고.”
“얼씨구 지랄을 해요.”
“너 계속 지랄 지랄 거릴래?!”
“이년아, 네가 지랄을 떨잖아. 매일 찾아와서.”
“너 혜림이에게도 이렇게 말해?”
강식이가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 미정이를 바라보았다.
“혜림이에게는 안 그러면서 왜 나에게는 그러는 건데!”
“넌 혜림씨가 아니잖아?”
“그럼 혜림이가 아니면 다 그렇게 말해?”
“당연히 아니지.”
“그럼 왜 나에게는 그렇게 말하는 건데!”
“네가 지랄발광을 하니까 그러지.”
미정이 강식이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골목에 들어가기 전에 내려 줄 테니까 돌아가. 그리고 난 장담에 맞춰줄 생각 없다고 말했어.”
“알았어. 그럼 잠깐만 대화 좀 해.”
“무슨 대화.”
“알았으니까 대화 좀 하자고.”
강식이가 천천히 갓길에 차를 대고 멈췄다.
“이제 포기 할 마음이 생겼나보지? 자 멈췄으니까 말해봐.”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혹시 내가 혜림이 보다 못 생겼기 때문이야?”
“그건 또 뭔 개소리야?”
“그렇잖아. 아니면 왜 그렇게 나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내가 선심 써서 한 달 동안 만나주겠다는데.”
“넌 그게 문제야.”
“뭐가?”
“네 말하는 게 상대를 배려하는 게 전혀 안 느껴진다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몰라?”
“내가 말하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소리야?”
“그것도 포함이 된다는 거지. 아무튼 네 외모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도 그렇게 잘난 외모가 아니잖아. 소개팅 자리에서 네가 날 찬 이유가 내 외모가 졸라 못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맞아.”
“......”
순간 욕이 입 밖으로 나올 뻔 한 강식이가 겨우 눌러 참았다.
“넌 상대를 좀 배려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이렇게 생활하는 게 뭐가 나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그게 잘 못 된 게 아니잖아.”
강식이는 순간 혜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맞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건 절대 잘 못 된 게 아니지..”
“그럼 뭐가 문제야.”
“너 직장은 있어?”
“없어.”
“스스로 돈은 벌어본 적은 있냐?”
“한 번도 없어.”
“너도 참 대단하다.”
“너야 말로 이상한 거 아니야? 아빠가 날 위해서 지원을 해주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비꼬는 거야. 아빠가 딸을 위해서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
“넌 그럼 지금 네 생활에 만족한다는 거냐?”
“만족해. 부족 한 것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 아빠는 날 위해 모든지 다 해주는 사람이야. 넌 몰라 아빠가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그래~모든지 다 들어주는 잘난 아빠가 있어서 참 좋겠다. 난 그런 사람 없으니까 네 수준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만나. 나 같은 하류인생 따라다니지 말고.”
미정이 강식이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리곤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리더니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 모습에 강식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갓길에서 다시 출발해서 도로를 달리다 신호가 걸려 멈춰선 강식이가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애가 저지경이 되도록 놔둘 수가 있지?”
많은 사람을 만나본 강식이었지만 미정이 같은 애는 또 처음이었다.
“저래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생각만 하면 할수록 미정이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시각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는 미정이 역시도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지가 뭐가 잘났다고 나에게 훈수를 두는 거야.’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이젠 혜림이가 그 자식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저런 놈은 딱 질색이다.
집근처에 다다르자 미정이 택시를 멈춰 세웠다.
“잔돈은 됐어요.”
거스름돈을 받지도 않고 그대로 내린 미정이 집으로 향했다.
“뭐야?”
그렇게 집으로 향하던 미정은 순간 당황하며 멈춰 섰다.
“저기 임혁만 의원 딸이다!”
“딸이라고?”
순간 집 앞에 몰려 있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자신에게 몰려오는 모습에 미정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1년 전 모 건설사 임원에게 수억원의 뇌물을 받고 중구재개발지역 이권을 따낼 수 있도록 뒤를 봐주었다고 하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들리는 말에 의하면 2년전 선거에서 불법선거자금까지 세탁 모금하였다는 얘기도 있던데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십시오!”
“뇌물을 받고 수주를 따낼 수 있도록 뒤에서 힘을 써주었던 게 이번뿐만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하는지요!”
동시다발적으로 던져지는 질문과 그 내용에 미정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왔어요.”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사서 한 대 피우고 들어온 강식이가 불러도 대답이 없자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강식이 왔어?”
미숙은 티비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저거 봐봐.”
“예?”
발걸음을 옮겨 다가간 강식이가 티비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검찰은 1년 전 중구재개발지역 이권을 두고 뒤를 봐주는 대가로 수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의혹를 받고 있는 임혁만 실천당 대표에 대해서 소환장 발부를 검토 하겠다고 밝혔으며, 뇌물을 전해주었다고 알려진 임원 서모씨에 대해선 구속영장을 청구,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갈 것이라 밝혔습니다.]
“저게 무슨 일이라니? 윤학수 의원이 대권 출마를 포기해서 저 사람이 수월하게 경선에 이겨서 나가게 될 줄 알았는데 저런 일이 벌어지다니...”
만약 저게 다 사실이라면 저 사람의 대권, 아니 정치인생이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파랗게 질려 당황하던 미정은 다행히 자택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인파를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벌어진 일이 너무 충격이어서 정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고서도 한 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서둘러 마당과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으로 향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미정이 응접실에 지키고 서있는 수행비서들과 불안한 얼굴의 가정부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안에 있어요?”
수행비서 지웅에게 물었고 서재에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바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연 미정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
“기자들이 나를 둘러싸서 아버지가 수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느니 하는 질문들을 했었어요. 지금 그 말들이 다 사실이에요?”
“네 방에 올라가 있거라.”
“기자들이 한 말이 다 사실인지 아빠에게 묻잖아요.”
“네 방에 올라가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아, 아빠...”
당황한 미정이 말을 더듬었다.
“지금 너하고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올라가 있거라.”
잠시 동안 아버지를 바라보던 미정이 몸을 돌려 서재를 나왔다.
“아가씨.”
그리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지웅의 말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달칵.
방으로 들어와 살며시 뒤로 손을 밀며 문을 닫은 미정이 등을 기댔다.
“뇌물...”
아침에 집을 나갈 때 까지는 이런 일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기자들이 몰려 있었고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하지만 미정은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몰랐던 일인데 어떻게 대답을 한단 말인가.
늘 다정다감했던 아빠였다.
자신에게 저렇게 언성을 높이며 역정을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미정의 다리가 천천히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