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외전- 어느 핵과금러 이야기 (8)
"다녀왔습니다!"
강경철은 이설아의 집 현관에 들어서며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했다.
소영이를 데려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설 수 있겠어?"
"응...."
경철은 업고 있던 소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발이 바닥에 닿자 소영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설아 씨? 소독약 있어? 소영이 발 다쳤는데."
경철이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야 설아가 나왔다.
설아의 표정은 단단했고 눈꼬리는 하늘을 향했다. 한눈에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돌아왔어? 엄마랑 살기 싫다고 나간 거 아니었어?"
설아가 매서운 눈초리로 추궁하자 소영은 다시 울상을 지었다. 보고 있는 경철도 무서워질 정도였다.
경철은 눈짓으로 소영에게 어서 사과하라며 신호를 보냈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소영은 울먹이면서도 제대로 사과했다.
그런 소영을 가만히 노려보던 설아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내 딸 안 해. 알았어?"
"웅....힝...."
"뭘 잘했다고 울어. 뚝 해."
그러면서 설아는 소영 앞에 쪼그려 앉아 상처를 확인했다.
맨발로 달리느라 소영의 발바닥은 새까매져 있었다. 곳곳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배어 나와서 경철도 보고 있기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발이 다 까졌네. 그러게 왜 맨발로 나갔어? 네가 무슨 원시인이야?"
"히잉...."
"가서 씻고 와. 나오면 약 발라줄게."
"웅...."
발이 아픈 소영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영이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설아는 표정을 풀었다.
"소영이 데려와 줘서 고마워. 힘들었지?"
"아니. 내 책임도 있으니까."
경철이 잘못한 건 없지만 어쨌든 경철이 없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괜히 집안에 분란만 일으킨 것 같아 경철의 마음은 찝찝했다.
"쌓이고 쌓인 게 터진 거야.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설아가 경철을 툭 치며 말했다. 설아의 스스럼 없는 태도에 경철은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 캐릭터 복구시켜야 한다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아, 혹시 게임도 삭제했어? '그림플로'라고 하는데."
"안 그래도 다시 설치 중이야."
경철이 보니 다운로드가 30%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다운로드 다 되면 해보자. 그리고 그 전에...."
경철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설아에게 내밀었다.
현금 3천만 원이 들어있는 돈 봉투. 오늘 2번째 트라이였다.
"이게 뭐야?"
돈 봉투를 본 설아의 표정이 굳었다.
"오해하지는 마. 소영이한테도 들었지? 이건 원래 계정 주인 찾느라고 건 상금이야. 캐릭터 복구해주는 대신 주는 사례금이기도 하고."
"도로 가져가. 나 돈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예상은 했지만 역시 설아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냉큼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설아야. 이건 원래 우리가 너한테 줘야 하는 돈이야. 우리는 그 계정을 복구해주면 3천만 원을준다고 이미 공지했어. 만약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린 시청자를 상대로 사기를 친 게 되는 거야. 3천만 원 현상금 걸어놓고 실컷 주목시켜 놨는데,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라 공짜로 해결했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넘어갈까? 당장 우릴 매장하려고 들걸?"
"그래도, 이렇게 큰 돈...."
경철의 거듭된 설득에도 설아는 망설였다.
경철은 그런 설아의 손에 억지로 봉투를 쥐여주었다.
"그냥 아무 생각 말고 받아줘. 솔직히 우리가 계정 복구해서 얻을 이익 생각하면 이거론 부족할 정도야. 그리고 소영이 내년에 대학도 보내야 하잖아. 소영이 대출받아서 학교 보낼 거야? 소영이 평생 학자금 대출 때문에 고생하게 할 거냐고."
솔직히 경철은 설아와 소영 모녀를 보고 있으면 안타까웠다. 경철 본인은 할머니 유산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사는데, 자신보다 훨씬 장래가 밝아 보였던 설아가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으니 왠지 모를 죄책감도 느껴졌다.
설아는 한참 동안 손에 얹힌 묵직한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 지금까지 헛살았나 봐."
설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교 시절 임신 사실이 발각됐을 때, 뒤에서 아무리 손가락질당해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다녔던 이설아. 그런 설아의 눈물에 경철은 또 자신이 말실수했다고 생각해 허둥거렸다.
"지금까지 남한테 손 안 벌리려고 죽어라 일했어. 소영이는 내가 낳겠다고 고집부렸으니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이런 게 당연한 거라고. 가난하고 힘들어도 나만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어. 소영이가 속으론 어떻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정말 바보 같아. 난 엄마 자격도 없어...."
설아는 흐느껴 울었다. 역시 아닌 척해도 딸 소영이가 했던 말이 가슴에 박힌 것이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해 무일푼으로 가출한 이설아다. 부모의 도움조차 없이 여자 혼자 힘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얼마나 고생했을까? 경철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뻣뻣한 중년 남성의 대표자인 경철에게 우는 여자를 달래는 재능 따윈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아야. 소영이도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사춘기 때는 조금만 틀어져도 아무 말이나 막 나오는 거. 그런 거 전부 진심으로 들을 필요 없어. 넌 자랑스러워해도 돼. 소영이를 누가 낳아 키웠는데? 네가 그때 가출 안 했으면 소영인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어."
"흑, 윽....."
경철은 설아의 옆자리로 이동해 등을 도닥여주었다. 손에 걸리는 브라끈의 감촉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경철아, 나 너무 힘들었어.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어."
"그래. 다 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죽고 싶을 때마다, 소영이가 눈에 밟혀서.... 나까지 죽으면 소영이한텐 아무도 없으니까, 소영이 때문에라도 죽을 수 없었어. 내가 소영이를 살린 게 아니야. 소영이가 날 살린 거야."
설아는 둑이 터진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설아를 보는 경철의 마음도 아팠다.
만약 유즈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와락 끌어안아주기라도 했겠지. 하지만 경철에게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댔으면 하는 마음에 설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것만이라도 경철로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설아는 경철에게서 떨어졌다.
"....고마워 경철아."
"좀 진정됐어?"
"응...이제 괜찮아."
설아는 부끄러운 듯이 머뭇거렸다. 경철은 다행인 듯 아쉬운 듯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엄마~ 약~."
"어, 소영아 잠깐만!"
마침 소영이의 부르는 소리에 설아는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경철도 왠지 그 자리가 불편했기에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소독약 따가워~."
"좀 참아."
설아는 소영의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경철도 걱정이었기에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그 모습을 살폈다.
그런데 하필 상처 부위가 발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소영이의 맨발과 맨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아저씨 변태. 어딜 봐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소영이 경철에게 일침을 가했다. 설아도 도끼눈을 뜨고 경철을 돌아보았다.
"아니, 난 그냥 그...."`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훔쳐본 모양이 됐다. 입지가 좁아진 경철은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고 거실 구석으로 이동했다.
"휴...."
거실 구석에서 경철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설아와 소영은 완전 평상시로 돌아와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경철은 왠지 씁쓸함을 느꼈다.
분명 경철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종류의 행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가족의 단란함.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복 같은 것들을 경철은 모른다. 또 앞으로도 평생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련한 쓸쓸함을 느끼며 경철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이럴 때 경철이 전화를 걸 상대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통화가 연결되고 신의주가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일은 잘되셨습니까?]
"그래 의주야. 이야기 잘 됐고, 이제 복구하려고 게임 설치하는 중이야."
[정말입니까?!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의주의 목소리에도 기쁨이 묻어났다. 경철은 괜히 뿌듯했다.
"내가 지금 방송을 못 봐서 그런데 유즈는 좀 어때?"
[예. 낮엔 계속 마을안을 돌아다니다가, 해지고 나서는 레이가 없어진 자리에 줄곧 앉아만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네. 엉뚱한 곳에서 부활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삭제될 당시 레이는 알몸인 상태였다. 아무리 귀족 구역이라지만 알몸의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즈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더욱 극적인 부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것이다.
"그럼 다운로드 다 되면 바로 복구시킬게. 아마 30분 안에 될 거야."
[예, 형님. 저희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끊는다."
그리고 통화를 종료한 경철은 두 모녀에게 다가갔다.
"설아야."
"어?"
경철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걸자 두 사람의 시선이 경철에게 향했다.
"이 집 월세야?"
"어? 월세인데."
당돌한 경철의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설아는 제대로 대답했다.
"직장은?"
"직장? 직장은 왜?"
"아무튼."
"....여기 앞 마트에서 캐셔 하고 있어."
"월급은?"
"그건 또 왜?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연속으로 던져지는 사적인 질문에 설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아야. 이건 내가 그냥 하는 제안이니까, 만약 싫으면 거절해도 돼."
그리고 경철은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경철은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거절해도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경철로서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질 참이었다.
"우리 집이 아파튼데 방이 많이 남거든. 워낙 넓다 보니 청소할 곳도 많고, 남자 혼자 사니까 밥해줄 사람도 없어. 원래 일하던 아줌마도 얼마 전에 그만둬버렸고. 그래서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가능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들이고 싶어."
경철은 말하면서 설아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쾌한 것처럼 보이면 얼른 이야길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모녀는 그저 멍하니 경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경철은 불안한 기분으로 이야길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설아랑 소영이랑 같이 우리 집에서 살지 않을래? 다른 거 없이 밥이랑 집안일만 해주면 돼. 숙식하는 가정부처럼 말이야. 만약 정 요리가 안 되면 배달 음식 시켜도 되고. 월급이나 퇴직금은 제대로 줄 거야. 만약 내 사정으로 도중에 내보낸다고 하면 살 집이랑 직장도구해줄게. 물론 계약서도 쓸 거고."
경철은 생각했던 내용을 단숨에 말했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설아와 이소영, 두 사람 모두 여성이고, 집주인인 자신은 남성이다. 아무리 경철이라도 흑심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두 모녀를 보며 가슴 속에 애틋한 무언가가 싹텄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떠올린 거니까.
그런 속셈을 설아도 모를 리 없겠지. 설아가 혼자 몸이면 모르지만 다 큰 딸인 소영이도 있다. 설아가 생각하기에 경철의 존재가 딸 소영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면 분명 거절할 것이다.
만약 거절당하면.... 그땐 어쩔 수 없다. 평생 이렇게 살다 죽어야지 뭐.
경철의 이야길 듣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설아는 겨우 결심했는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경철아, 이야긴 고맙지만...."
"아저씨 저요! 제가 할게요, 가정부!"
설아는 분명 거절하려고 했다. 경철도 설아의 표정을 보고서 결과를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소영이가 중간에 말을 끊더니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이소영! 어른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말랬지!"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애들이 괴롭힌단 말이야. 가난하고 아빠도 없는 애라고."
"뭐?"
갑작스러운 소영의 충격 고백에 설아는 충격을 받았다. 경철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영아 그게 무슨....."
설아가 소영에게 따져 물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설아의 스마트폰이 작동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다운로드가 끝난 것이다.
"엄마. 먼저 계정 복구부터 하자.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잖아."
"....알았어. 그럼 그 얘긴 나중에 해."
설아도 이미 큰돈을 받았기 때문에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설아의 스마트폰 앞에 머리를 맞대고 모였다.
"그런데 계정 복구는 어떻게 하는 거야?"
"글쎄, 나도 복구는 안 해봐서 잘...."
"아이참. 이리 줘봐요, 제가 할 테니까."
역시 최신기기를 조작하는 건 젊은 아이들이 잘했다. 버벅대는 두 사람에게서 스마트폰을 뺏은 소영은 순식간에 계정 복구 절차를 마쳤다.
"이소영. 너 엄마 주민등록번호도 외우고 있었어?"
"응? 당연한 거 아니야? 엄마도 내 번호 외우고 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다른 데 또 어디다 썼어?"
설아와 소영 모녀는 또 투닥거리기 시작했지만 경철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막 레이가 부활하려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유즈튜브의 방송 역사상으로 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경철은 기대를 품고서 화면에 집중했다.
"....잠깐만. 이거 뭐니? 이 여자애 왜 벗고 있어?"
설아의 얼어붙은 목소리를 들은 경철은 그제야 설아에게 그림플로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단 사실을 떠올렸다.
어른인 경철이 성인용 게임을 하는 게 문제 될 일은 없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소영이 이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건 큰 문제였다.
"크흠, 늦었으니 난 이만...."
"강경철. 이게 뭐냐니까?"
은근슬쩍 일어나려던경철은 날카로운 설아의 눈빛에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날 경철은 소영이와 나란히 앉아 한참 동안 꾸중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