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제2부 귀족편 - 승작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향한다.
거리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며칠 전에도 한 번 왔던 길이지만, 느낌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이전만큼 많은 마차가 왕성을 향해 길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싸우려 들던 저번과 달리,다들 묵묵히 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 없구만.
"미네르바. 몸은 괜찮아?"
미네르바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엉덩이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찰싹 손등을 맞았다.
"이런 때에도 태평하네."
미네르바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미네르바가 너무 긴장하는 거라니까.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어.우린 가서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거야."
양손이 허전해진 나는 밀레느를 들어 내 무릎 위에 태웠다. 그대로 얼굴을 부비자 밀레느가 앙탈을 부리며 내 얼굴을 밀어냈다.
"유즈. 그런데 우리 지금 뭐 하러 가는 거야?"
"밀레느는 얌전히 구경만 하면 돼."
언니들이 말 안 하는데 굳이 내가 떠들 필요는 없겠지.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랑말랑한 밀레느의 몸의 감촉을 즐겼다.
밀레느도 앞으로 5년만 더 키우면 멜리사처럼 멋진 몸매의 누님으로 변신할 텐데. 이대로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멜리사도 괜찮아?"
"네, 도련님."
멜리사는 담담했다. 동네 마실이라도 나가는 듯한 표정이다. 저 평온한 얼굴 아래에 뭘생각하고 있을까.
사실 제일 걱정되는 게 멜리사다.워낙 본인 의사가 확고해서 허락하긴했지만, 돼지 백작과 얼굴을 맞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본인은 이제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트라우마가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괜히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백작님.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흠. 그러지."
나는 마부의 의견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왕성 입구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아까부터 줄 서있는 마차들 때문에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자매를 차례로 에스코트해 마차에서 내리게 한다. 그러자 우리를 눈치챈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흔치 않은 붉은 머리를 한 미녀세 자매. 여기 있는 사람은 전원 귀족가의 일원일 테니, 눈에 띄는 세자매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당당하게 걸어. 오늘의 주인공이니까."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된 밀레느의 등을 툭 두드리고는 일행의 앞장을 섰다.
만약 시비를 거는 놈이 있으면 혀를 뽑아줄 작정으로 주위에 눈총을 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몇몇 인간이 황급히 시선을 사릴 뿐, 덤벼드는 용자는 없는 모양이다. 흥.
"국왕 폐하께 초대장을 받아 왔는데. 어디로 가면 돼?"
"어서 오십시오. 왕좌의 대회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무기를 든 기사들이 왕궁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편지를 보이자 왕성 안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이전에 건국 기념일 파티에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귀족 같은 복장을 한 인물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까.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왕좌의 대회랑이라는 장소에.
"거창한 이름에 비해 별것도 없구만. 넓기만 넓을 뿐이지."
"도련님."
내 실없는 발언에 멜리사가 옆구리를 찌른다. 안내한 기사도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별다른 장식도 없는, 단지 넓을 뿐인 공간이었다. 앞쪽 단상에 아마 국왕 폐하 전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의자가 한 쌍 놓여있을 뿐이었다.
"홋홋호. 그야 그런 용도로 지었으니 당연한 걸세. 유즈 브릴란테 백작."
그렇게 말을 걸어온 이는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인 변태 재상이었다. 재상의 뒤엔 2명의 기사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 변태...."
"재상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멜리사가 내 말을 끊고 노인네와의 사이에 끼어들어 인사를 했다.
가면도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변태 할아범.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면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일세, 멜리사 레드스타 양. 그리고 레드스타 가의 딸들이여. 자네들의 가정에 일어난 불행은 이 늙은이가 왕국을 대표해 사죄함세."
"흥. 엉뚱한 죄 뒤집어씌워서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면 단가?"
내 말에 미네르바가 제발 조용히하라는 듯 옆구리를 찌른다. 지들이 할 말 대신 해줬는데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그러자 재상은 한탄하듯 말했다.
"맞는 말일세. 우리는 무능하고 부패한 귀족들을 제때 처리하지 못해 레드스타 자작과 같이 선량하고 충성심 깊은 귀족이 희생시키고 말았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오늘 이렇게 모인 것이고."
재상 할배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 이 장소의 이름은 왕좌의 대회랑이라고 하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이곳이 국왕 폐하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 된다네. 굳이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필요는 없어. 이렇게 비어있는 상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기능미가 아니겠는가?"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머릿속에서 이 회랑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왕좌를 지키는 국왕과 왕비. 그리고 그런 왕족을 지키기 위해 회랑에 방어선을 친 기사들.
밀려오는 적군. 부딪히는 창과 칼.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하지만 여기까지 뚫렸다면 이미 전투의 결과 따윈 보나 마나겠지. 내 머릿속엔 적의 병사들이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엔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왕좌의 대회랑'의 또 다른 이름은 '숙청의 대회랑'이라고도 한다네. 왠지 아는가? 바로 여기서 역사에 남은 수많은 매국노들이 숙청을 당했기 때문이지."
재상은 마치 손주에게 옛날 이야기라도 들려주듯 말했다. 그 내용은 손자에게 들려줄 만큼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리고 오늘 여러분이 모인 이유도 그 숙청의 자리를 보여주기 위함이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 여러분은 오늘왕국의 새로운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될 것이오."
재상 영감은 주변의 다른 귀족들을 향해서 말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귀족은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갑자기 소집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뭔가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겠지.
"그럼 일을 시작해볼까. 죄인들을 데려오시게."
"옛!"
재상의 말에 따라 기사들이 부리나케 뛰어나간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연결된 죄수들도 함께끌려왔다.
그 죄수 뭉치의 가장 선두에 돼지머리 백작이 있었다. 이름은 루이데룬 백작이라 했던가.
하지만 여전히 뚱뚱한 것 말고는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없었다. 칼빵이라도 맞은 건지 한쪽 팔이 시뻘건 피로 젖어 있었고, 머리는 산발에 얼굴도 두들겨 맞아 피떡이 되어 있었다.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엄청 맞은 모양이군. 그 끔찍한 모양새에 멜리사도 말을 잃고 말았다.
할 수 없지. 나라도 말을 걸어줄까.
"어이. 돼지 백작. 오랜만이야."
"큽, 읍읍...!"
돼지 백작은 핏발선 눈으로 날 노려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에 물려진 재갈에 의해 말이 막히고 말았다. 재갈을 문 돼지 백작을 보자 왠지 사과를 문 돼지 통구이가떠올랐다.
"꼴을 보아하니 돼지 백작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군. 멜리사. 뭐라고 작별 인사라도 해주지 그래?"
하지만 멜리사는 가늘게 떨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반쯤 미쳐서 죽이려 달려드는 편이 좋았을 텐데.
저거 봐. 떨고만 있으니까오히려 돼지가 기세등등해져서 달려들려고 하잖아.
다행히 내가 나서기도 전에 옆에 있던 기사가 돼지 백작을 바닥에내치며 눌러버렸다.
"쿠헙!"
돼지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돼지 백작. 순순히 죽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꼭 끔찍하게 죽고싶다면야 날뛰어도 말리지 않겠지만."
돼지 백작은 그런 꼴이 되어서까지 나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기분나빴으므로 그 돼지머리를 발로 자근자근 밟아주었다.
"국왕 폐하 입장!"
그때 마침 어느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재상을 포함한 모든 인원이 고개를 숙이며 제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물론 나도 거기에 따랐다.
몇 개의 발걸음 소리가 단상의 왕좌를 향해 걷는다.
가만히 숙이고 있자니 몸이 근질거린 나는 힐끗 눈을 들어 국왕 폐하란 분이 어떻게 생겼나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 모습은 상상대로였다고나 할까, 적당한 외모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 아마도 국왕,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미인이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안색이 안 좋은 여성이 왕비겠지.
왕과 왕비는 나란히 단상 위의 의자에 앉고, 그 옆으로 왕태자와 엘리자베스가 나란히 섰다.
엘리자베스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자 그녀도 나를 알아봤는지 작게 미소를 짓는다.
"모두 고개를 들라."
엄숙한 국왕 폐하의 명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아직 숙이고 있는 건 바닥에 짓눌린 돼지 백작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오늘 이렇게 참석해주어 감사한다. 다들 궁금해하고 있겠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국왕 폐하의 느긋한 목소리가 홀에 울린다. 그 근엄한 눈길이 바닥에 눌려있는 돼지 백작을 향했다.
"그동안 우리 왕국을 좀먹어 온 부패한 귀족이 있었다. 그는 빌헤임 왕국과 내통하며 기밀을 팔아먹고 뇌물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죄를 선량한 귀족에게 뒤집어씌웠고, 짐은 어리석게도 그 가짜 증거를 믿고 선량한 귀족을 벌하고 말았다.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노틸러스 레드스타 자작을."
직접 이름이 언급되자 옆에 있던 자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레드스타 가의 딸들이여."
"네, 폐하."
세 자매가 목소리를 맞춰 나란히 대답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레드스타 가문에 내렸던 모든 처분을 없었던 일로 하겠다. 예전처럼 레드스타의 가명을 자칭할 수 있으며, 몰수한 재산은 모두 돌려주겠노라. 또한 차녀 미네르바 레드스타에게 자작위를 수여하며, 미네르바 레드스타 자작을 다시 여백작으로 승작한다. 미네르바 레드스타는 여백작으로서 부친의 유지를 이어 왕국에 충성을다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여백작으로 승작.
국왕이 말하는 중에 불만을 떠들어댈 바보는 없었지만, 회랑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묘한 것이었다. 귀족으로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계집애가 하루아침에 백작이 됐으니까.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종자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과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당연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같았으면 더 내놓으라고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왕국과 왕가는 레드스타 가문에 일어난 비극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건 짐이 부족한 탓에 일어난 일이다. 부디 용서하길 바란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휘유. 미네르바는 하루아침에 여백작인가. 대단하구먼.
집에 돌아가면 우리 젊은 여백작님과 굴욕의 야외 노출 섹스라도 해볼까. 가면으로 얼굴만 가리면 괜찮지 않을까?
"또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매국노들을 적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즈 브릴란테 명예 백작."
"예, 폐하."
딴생각하느라 대답이조금 늦을 뻔했다.
안 되지 안 돼. 아무리 무능해도 국왕한테 밉보이는 건 좋지 않다. 앞으로의 평화로운 생활을 위해서라도.
"브릴란테 명예 백작은 헌터로서 뛰어난 성과를 거둬 스스로의 힘으로 명예 백작위를 거머쥐었을 뿐만아니라, 이번 일로 왕국에 대한 충성심과 자질 또한 선보였다. 그 공적을 기려 명예백작에서 정식 백작으로 승작하도록 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나도 마찬가지로정식 백작이 되었다. 이건 엘리자베스와 미리 이야기가 돼있던 일이니까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집에 백작이 둘?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이 사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몰수한 재산은 돌려준다고 했으니 저택은 미네르바가 돌려받는 건가? 그럼 나는 쫓겨나고? 내 돈 주고 샀는데?
내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국왕의 말은 계속됐다.
"브릴란테 백작은 또한 루이데룬 백작의 처와자식에 대해 구명을 탄원했다고 들었다만, 구명을 청원한 이유는 뭐지?"
"물론 성노예로 삼아 평생 아이 낳는 가축으로 부려 먹기 위함이옵니다, 폐하."
"흠?"
아차. 딴생각 하느라 나도 모르게 본심이.
대회랑의 기온이 5도 정도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