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아는 게 힘이다
뜬금없이 해방된 율리어트의 특이 정보에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대악마...? 율리어트의 원수가 대악마라고?’
대악마. 판타지 세계관에 주로 등장하는 아주 사악하고 강대한 존재들.
‘...율리어트가 그토록 강하다고 말했던 게 저절로 납득되네.’
율리어트가아무리 뛰어난 모험가였다지만, 대악마는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흔히 용사라 불리는 자들이 완벽한 동료를 모아 마지막으로 상대하는 최종 보스가 아닌가.
민준은 대악마라는 단어에서 오는 커다란 무게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불안한 느낌이 마구 들기 시작하는데. 왜지? ’
눈에 띄게 안색이 변한 민준을 보며 율리어트가 말했다.
“자네 표정이 많이 어둡군. 그렇게까지 반응할지는 몰랐는데.”
율리어트는 민준이 마음이 불편해져 저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는 괜찮으니까. 일단 수련을 해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산에 도착한 이들은 평소처럼 수련을 진행했다.
네리엘도 옆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수련을 지켜보았다.
도시락을 챙겨 왔기에, 점심을 산에서 먹고 해가 질 때까지 수련을 계속했다.
민준이 쉬는 동안에는 네리엘도 간단한 무술 동작을 배웠다.
수련을 마치고 다 같이 산을 내려가는 길.
하루가 다 끝나가는데도 민준의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놓치고 있는데.’
답답함이 생긴 건 율리어트의 특이 정보를 열람한 이후부터.
대악마라는 단어를 본 순간 느꼈던 불편함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
민준은 자신의 방으로돌아와서도 그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일단... 차근차근 접근해보자.’
키워드는 대악마.
민준은 리얼 판타지에 떨어지고 나서 당장의 생존과 성장에 급급했다. 세계의 앞날이나 흐름 따위에는 큰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는 뜻.
‘감당하지 못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인가?’
하지만 율리어트는 놈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대악마가 흔하게 출현했더라면 세간에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없었다.
‘당연한 일이지. 대악마 같은 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면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말이 안 돼.’
전쟁이나 가난 등으로 상황이 열악한 지역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리얼 판타지는 비교적 혼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알았다.’
민준은 자신이 불안해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르키아 연대기의 최종 보스. 무의식 속에 그 존재가 떠올라 있던 것이다.
‘그걸 왜 생각 안 하고 있었지?’
생존과 아이템에 집중하느라 놓친 부분.
아르키아 연대기에는 대륙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무시무시한 녀석이 있었다.
‘놈의 등장에 인구가 절반이 넘게 줄었고 주인공 일행도 소설 후반부에서야 가까스로 격퇴했지.’
지금은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조차 알 수가 없다.
‘당장 놈이 활동을 시작할 거 같진 않아.’
민준이 엘리스의 생각을 알 수는 없다.
허나 지구의 인원들을 신세계에 이동시킨 것도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엘리스가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통하는 존재라면, 지금 시점에 대륙을 반파시킬 거악을 나타나게 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세계관에서 아예 빼놓았을지도.’
이는 민준의 바람이기도 했다.
소설 속 대륙 하나를 통째로 구현해 놓은 마당에 가장 중요한 최종 보스를 빼놓았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갈수록 세계의 난이도가 더 악랄해질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추측.
문제는 민준이 신세계에서 내렸던 추측들이 거의 다 들어맞았다는 점이다.
이제와서 자신의 감을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역시 강해지는 것밖에 답이 없나.’
강해져서 거악을 때려 부수겠다.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되겠다.
이런 거창한 포부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무력하게 죽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름 순탄하게 잘 성장하던 중이었는데. 이게 웬 궁상인지.’
모르는 게 약. 지금 민준의 심정이 딱 그 꼴이었다.
민준은 아르키아 연대기의 설정을 아는 것으로 분명 독보적인 이득을 얻어왔다.
헌데 그로 인해 고민과 걱정이 많아진 것 또한 사실이다.
‘에잇 미친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잊었냐? 모르는 게 왜 약이야. 씨발 아는 게 힘이다!’
민준은 머리는 아프더라도 많은 것을 아는 게 낫다고 결론 지었다.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민준은 아르키아 연대기의 최종 보스를 떠올렸다.
‘놈이 아마 봉인되어 있던 고대 생물이라 했었지?’
녀석은 먼 옛날 아르키아 대륙을지배하던 고대 생물.
민준은 그 고대 생물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은 뭐였더라. 레기아? 레티아? 아 그래. 레키아.’
기억나는 외형적 특징은 둘.
대체적인 모습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조금 더 크다는 것.
머리와 이마 사이 부분에 외뿔이 나 있다는 것.
‘악마도 있어, 고대 생물도 있어. 엘리스 이년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거 아냐?’
이 정도면 대륙이나 지역마다 저런 보스들을 심어놓은 걸수도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개 같은생각은 하지 말자.’
민준은 마지막 난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원수가 대악마라는 것을 율리어트에게 알려주어야 하나?’
민준이 라비스커스를 얻어내고, 율리어트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건 전부 소설에서 기반한 것이다.
율리어트는 이것을 정체를 밝힐 수 없는 특별한 능력 정도로 알고 있다.
대악마에 대해 얘기한들 정보의 출처를 캐묻진 않을 터.
‘그렇다고 원수를 밝히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전성기의 율리어트도 감당하지 못한 적이다.
이제와서 그에게 원수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못하면 좌절감만 얹어주는 그림이 될 테다.
‘...이건 좀 더 신중히 판단해야겠어. 일단은 숨기도록 하자.’
***
민준이 율리어트에게 마검술을 배운 것도 보름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현재 민준의 상태창.
강민준/모험가(10등급)
레벨:9
힘:15 체력:15 감각:16 마력:12(11+1)
보유 스킬:마법, 인벤토리, 검술-D,
가르시아식 비전 마나 호흡법-C, 도축-E
보유 특성:정결지체-S
스탯 부분에서많은 성장이 있었다.
율리어트와 사냥을 다니며 레벨은 9가 되었고, 레벨업을 하며 받은 스탯을 골고루 분배했다.
레벨업을 통한 스탯 성장 외에도 평범한 수련을 통해 스탯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알아냈다.
마나 호흡을 통해 마력을 올리는 게 가능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련으로 스탯을 얻는 게 쉽진 않았지. 힘과 체력에서 각각 1밖에 올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중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가 될 것이다.
사냥을 끝내고 나면 몬스터를 도축하는 일도 잦았으므로 도축 스킬의 랭크도 한 단계 올라 E가 되었다.
여러 마법을 배우고 검술도 열심히 수련했지만, 이 두 분야에서 D등급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아마 짧은 시간 안에 숙련도를 더 올리기에는 무리인 듯했다.
유일하게 C등급을 달성한 것이마나 호흡법.
정결지체의 영향인지, 따로 재능이있는 것인지 마나 호흡에 있어서는 유독 성취가 빨랐다.
마지막으로 바뀐 것은 민준이 사용하는 무기.
백화검(百花劍)-B
이게 어디서 난 무기냐?
민준이 첫 던전을 소탕하고 돌아왔을 당시. 율리어트에게 시비를 걸었던 다니엘이 사용하던 무기다.
민준과 율리어트는 그들을 경비대에 넘기기 전 무기를 뺏어 대장간에 넣어두었다.
나머지 두 무기의 등급은 C.
검을 세 자루씩이나 들고 다닐 필요는 없었으므로 민준은 백화검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이 검은 따로 스탯을올려주는 효과는 없었다.
그럼에도 민준은 매우 만족해하며 백화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단순히 검 자체의 성능이 뛰어났기 때문.
강도와 마나 전도율이 높은 이 검은 마검술을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무기였다.
“다 됐군. 이제 가서 씻고 오게.”
“아. 감사합니다.”
민준은지금 머리를 자르던 중이었다.
이곳에 지내다 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율리어트는 자신의 머리를 직접 자른다고 했다.
민준이 보기에 율리어트의 머리 스타일은 매우 깔끔하고 멋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신뢰도 가겠다, 머리를 자르지 않은 지도 오래됐겠다, 율리어트에게 머리 손질을 부탁한 것이다.
민준은 쪼그려 앉아 대야 속 물에 비친 자신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오... 괜찮은데? 맘에 들어.’
마치 전문 바버샵에서 자른 듯한 모습.
옆과 뒷머리는 매우 짧게 깎아 내고 앞머리는 시원하게 이마가 보일 정도로만 잘랐다.
머리를 헹구고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털었다.
“하하 내가 보기엔 잘 어울리는데. 자네는 어떤가.”
“최곱니다. 맡기길 잘한 거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내가 재주가 좀 많아.”
그 말 따나 율리어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1급 모험가는 다 저런 것일까? 그는 특히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분야를 가리지 않고 능숙한 것 같았다.
시간은 이른 아침.
민준은 네리엘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리엘은 아직 자고 있습니까?”
“조용한 거 보니 그런 거 같아. 어제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네리엘이 수련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오래 누워 지낸 탓에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재밌어서 그러는 거 같은데, 열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루마다 성취가 쑥쑥 늘어나는게 승부 욕이 생길 정도야.’
진심으로 질투한다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보인다는 뜻.
네리엘은 신체 능력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지만, 민준이 가장 놀랐던 부분은 마법에 관한 성취였다.
네리엘은 아주 어릴 때 마법을 조금 배운 이후로 전혀 접점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민준이 배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마법을 따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마법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은데.’
민준도 마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네리엘의 마법 재능은 궤가 달랐다.
율리어트도 이를 깨달았는지 민준에게 양해를 구하고,남는 시간에 네리엘의 수련도 조금씩 봐주었다.
아직 마법에초짜인 민준도 그 재능의 대단함을 느낄 정도인데 율리어트는 어떻겠는가.
민준은 이제 배운걸 체화 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율리어트가 중간 틈틈이 네리엘을 가르치는 것 정도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무튼, 어제 유독 수련에 매진한 네리엘은 집에 돌아와서도 배운 걸 연습하였고 그 탓에 상당히 피로한 모양이었다.
“어쩌지? 말없이 먼저 산에 가면 분명 서운해할 거 같단말이야.”
“뭐 조금만 기다리죠. 곧 깨지 않겠습니까.”
“하하... 신경 써 줘서 고맙군.”
율리어트는 마당에 있는 마루에 앉아 편안히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와 함께한 것도 이제 한 달이 다 돼 가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