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시간의 시련 (4)
시간의 시련 17일 차.
“끄응...!”
투욱!
민준은 밖에서 사냥해 온 사슴 한 마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상의에는 늑대 가죽으로 직접 만든 두툼한 망토가 둘러져 있다.
‘오늘은 이것만 도축하고 나머지 시간은 수련만 할까?’
민준은 지난 보름 여간 거의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주변에서 발견한 생물은 늑대, 사슴, 토끼, 다람쥐 정도. 아주 간혹 몬스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있었지만, 그 흔적의 주인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몬스터의 발자국은 꽤 멀리 나가야 볼 수 있었으니까. 행동반경을 더 넓히기엔 불안하지.’
늑대만 해도 아직 손쉽게 해치우는 건 힘들다. 실제로 여태까지 사냥한 늑대는 세 마리뿐.
사슴이나 토끼를 사냥하는 것으로도 식량은 충분했다. 일주일 전에는 감자와 닮은 구황작물도 발견했다.
‘율리어트와 함께 지낼 때가끔 구워 먹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 루테.’
시련 세계에서 발견한 루테는 이전에 먹었던 것과 외형적 특징이 완벽히 같았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익혀 먹었었고, 독성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여기 짐승들은 경험치를 잘 주기도 하니. 굳이 멀리 나가려고무리할 필요는 없어.’
시련의 세계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첫 번째는 짐승을 사냥하는 것으로도 적지 않은 경험치를 얻는다는 것.
시련의 밖에서는 주로 몬스터 사냥으로 레벨업을 했다. 짐승들도 경험치를 준다는 건 1레벨에 확인을 한 사항이지만, 그 수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련 세계 속 짐승들은 유의미한 경험치를 주었다.
‘어제 회색늑대를 잡고 나서 또 레벨업을 했지.’
특히 많은 경험치를 주었을 것이라 예상되는 건 늑대. 민준이 상대했던웬만한 몬스터보다 강한 녀석이었으므로 많은 경험치를 주지 않았다면 매우 억울했을 것이다.
시련에서 올린 레벨은 벌써 3레벨이다. 사냥에 소모한 시간 대비 효율을 따지자면 굉장히 흡족한 성과다.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이 동굴의 안전성.
민준이 흔적 처리를 그때그때 잘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동굴 가까이에는 생명체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뭔가 시스템적 조치가 취해진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우연이든가.’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굴 안에서까지 지나치게 기감을 세울 필요는 없을 듯했다.
제일 도움이 되었던 정보는 식량들의 영양가였다.
처음에는 식량을 구했다는 안도감과 먹는 행복에 가려 눈치채지 못했으나, 며칠 고기를 먹으며 알 수 있었다.
시련 속 식량들은 섭취 시 얻는 에너지가 뛰어났다. 특히 격렬한 활동 후 몸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늑대 고기를 먹었을 때 효과가 가장 뚜렷했던 걸 보면 대상이 강하거나 희귀할수록 정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슴 고기도 나쁘지 않다고~ 맛도 있고 말이야.”
민준은 흥얼흥얼 혼잣말을 내뱉으며 사슴을 도축했다. 도축의 레벨도 한 단계 올라 D가 되었다. 전보다 능숙한 솜씨로 사슴을 해체했다.
부산물을 모두 정리해낸 민준은 배를 채우기 위해 루테와 고기 몇 덩이를 가져왔다.
타닥 타닥
루테는 모닥불에 던져 넣고 고기는 꼬챙이에 끼워 살살 익히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감자가 다 떨어졌네.’
고기가 맛있는 건 부정할 수 없으나 며칠을 육류만 먹고 있으면 입에 물리기 마련. 그런 의미에서 루테는 아주 탁월한 감초 역할을 해 주었다.
‘위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죄다 멀어서 말이지. 좀 가까이에 자랐으면 좋았을 텐데.’
루테는 땅 위에 짧은 줄기를 내밀고 있기에 발견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다만 몬스터 서식지 경계 즈음에 있다는 게 흠이었다.
‘그렇다 해도 경계니까. 내일 낮에 캐오든가 해야겠어.’
민준은 오늘 사냥에서 발견한 버섯 세 송이를 가져와 같이 구워냈다.
버섯은 식용임을 확인했던 갈색 버섯. 첫날 발견한 후 쭉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오늘 운이 좋게 세 송이를 따올 수 있었다.
점점 진해지는 고소한 냄새에 민준이 입맛을 다셨다. 시련 세계는 무언가 즐길 거리를 찾기도 힘든 환경. 허나 식사 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로 버섯을 싸 먹으면 겁나 맛있겠지?”
메인디쉬는 아껴두어야 한다. 민준은일단 겉이 까맣게 구워진 루테를 집어 껍질을 벗겼다.
슈우우우
껍질을 떼어내자 뜨거운 김이 속살을 통해 가득 뿜어져 나온다. 민준은 호호 불어 열기를 식히곤 바로 한입 물었다.
냠냠
“후우! 후우!”
내용물을 씹으며 뜨거운 공기를 수차례 뱉어낸다. 루테의 맛은 감자와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루테의 담백함이 좀 더 강하달까.
‘소금... 소금만 있었어도.’
하지만 눈이 내리는 산속에서 염분을 구하는 게 어디 쉽겠는가.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며 민준은 고기가 꽂힌 꼬지를 꺼냈다. 마찬가지로 대충 열기를 식히곤 입속에 털어 넣는다.
냠냠
‘크으 여기에 버섯이 함께한다면...!’
민준은 다른 고기 한 점을 집어, 잘 구워낸 버섯 한 송이와 함께 포개었다.
쏘옥
우물우물
‘이야...!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
고기와 같이 먹어서 생기는 조화 때문일까? 버섯에서는 이전에 먹었을 때와는 다른 단맛도 나는 것 같았다.
“꿀꺽~!”
[신규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응?”
그런데. 내용물을 삼키자 느닷없이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민준은 연달아 떠오르는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상태이상 출혈에 걸렸습니다. 특성 정결지체의 영향으로 출혈의 정도가 감소합니다.]
[상태이상 환각에 걸렸습니다. 특성 정결지체의 영향으로 환각의 정도가 감소합니다.]
[상태이상 발작에 걸렸습니다. 특성정결지체의 영향으로 발작의 정도가 감소합니다.]
[상태이상 무력화에 걸렸습니다. 특성 정결지체의 영향으로 무력화의 정도가 감소합니다.]
“으웨에에에엑!!!”
민준은 복부에서 격한 통증을 느끼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부들부들부들
바닥에 바싹 엎드린 채 온몸을 비틀어댄다.
“쿠웨에엑! 으웨에에엑엑! 쿨럭!”
식도를 타고 피가 섞인 토사물이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악! 허어어억....! 허억...!”
민준은 즉시 배에 마력을 돌리며 응급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가 거의 없다.
“씨, 씨발 끄아아아!!!”
고통의 정도가 심상치 않다. 뱃가죽을 불태우고 찢어발기듯 격통이 차오른다.
일렁일렁
눈앞에 모든 것들이 일그러져 보인다.
세상이돌아간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괴롭히는 격통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깔깔깔깔깔
‘어...’
정체불명의 형상이 시야를 채운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
‘주, 죽는건가...?’
외마디 의문과 함께 민준의 의식이 끊겼다.
***
“푸하악! 으...어... 으어어어어....!”
민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퉤! 푸으읍! 퉷퉤!”
입안에는 진득한 찌꺼기들이 가득하다.
“으으윽...”
민준은 눈꺼풀을 들기도 힘들 만큼 무기력한 상태였다.
‘시발...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덜덜덜덜
의식이 어느 정도 돌아온 민준은 자신을 강하게 휩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모닥불은 이미 다 타버려 꺼진 지 오래돼 보였다.
그나마 두르고 있던 가죽 망토 덕에 얼어 죽지는 않은 듯.
‘얼어 죽는 건 둘째치고 빌어먹을 상태이상들은 도대체 뭐냐고...!’
민준은 가까스로 몸을 돌려 조금 더 편한 자세로 누웠다.
“끄으윽...!”
전신은 얼어붙기 직전. 피부를 아리는 추위와 함께, 배에서도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아... 하아...”
주변은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옷과 주변에는 피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팔, 다리 손과 얼굴에도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음의 그 끔찍한 통증과 어지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마력을 움직여 전신에 퍼트려 보았다.
사아아아
“흐읍...!”
자신의 위가 손상을 입은 건 확실하다. 출혈은 멎었지만 괜찮아지려면 오랜 회복이 필요해 보였다.
덜덜덜덜
‘...진짜로 죽을 뻔했다.’
자신이 죽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던 상황. 죽음이라는 공포가 뇌리를 강하게 스쳐 지났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버섯?’
민준이 생각하기에 이 사단을 만든 건 버섯이 분명했다.
‘일단 나중에...’
민준은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마력을 끊임없이 전신에 돌리며 가까스로 앉은 자세를 만들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구워놓고 먹지 못한 꼬챙이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민준은 꼬챙이 하나를 챙겨 몸을 옆으로 돌렸다.
“끄윽..”
무릎을 꿇고 장작을 쌓아 둔 곳으로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한 뼘 한 뼘 나아갈 때마다 전신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그를 다시 괴롭혔다. 버텨내야 한다. 체온이라도 정상으로 만들어야 유의미한 회복을 꾀할 수 있을 터.
투욱
길게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는다. 손 끝에 장작과 나뭇가지들이 만져진다.
덥석
툭 툭 투둑 투둑
장작과 나뭇가지 몇 개를 겹쳐 올린다. 무거운 입술을 떼어 마법을 사용한다.
“...플레어.”
화르륵.
“하아... 하아...”
단순히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빠져버렸다.
민준은 불길에 언 몸을 녹이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사슴 고기를 보았다.
덜덜덜덜...
추위에 떠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더 빠르게 회복하려면 에너지를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뭘 먹어서 잘못된 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엉망이 된 뱃속에 음식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 또한 몹시 두려웠다.
‘...아냐 버섯이 확실해.’
민준은 기절하기 전 먹었던 버섯의 맛을 떠올렸다.
처음 갈색 버섯을 먹었을 때 났던 고소한 맛이 아닌 진한 단맛.
단순히 고기와 같이 먹어서 달게 느껴진 줄 알았는데, 아예 종류가 다른 버섯이었나 보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사슴 고기를 씹어 넘겼다.
“으윽...!”
음식물이 위에 도달하자마자 찌릿, 고통이 엄습했다.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구토감을 최대한 억누르며 버텨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통증은 그나마 참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아...”
민준은 모닥불 옆에 웅크려 누웠다. 지친 몸에서 밀려오기 시작하는 수면욕.
‘눈을 좀 붙이고 싶은데... 이대로 잠들었다가 죽는 건 아니겠지?’
민준은 밀려오는 수마가 지친 몸 때문인지 목숨이 꺼져가는 현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만으로 기적이다. 기적을 두 번이나 바랄 순 없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민준은 머리를 비우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깨어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짧지만 수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신규 업적을 획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