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더티케인 (5)
강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해졌다.
“예?”
“유저. 무슨 말인지몰라?”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거라고.”
절대 먼저 질문하지 않았던 강욱이었지만,
이번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 그럼 혹시 국적은...”
“한국.”
강욱은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 진짭니까?”
“군번이라도 불러줘?”
“아, 아닙니다.”
“진짜 이름은 강민준이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호칭은 그냥 형이라 불러.”
“...정말 그래도 됩니까?”
“어.”
‘노예의 신분인 애를 거뒀다지만. 정말 노예처럼 다룰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강욱의 입에선 쉽게 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강욱은 군대 선임이 후임을 시험하는 그런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새끼 봐라. 킥킥. 형이라고 부르랬다고 진짜 형형 거리네. 야. 후임이 선임한테 형 거리게 돼 있냐?
-죄송합니다!
‘이거 혹시 그건가... 내가 폐급인지 아닌지. 거르는 그런...’
민준은 강욱이 어떤 오해를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골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다. 너무 편할 필욘 없지만 지나치게 딱딱할 필요도 없어. 아니면 빡세게 노예처럼 부려줄까?”
“아닙니다! 민준 형!”
“그래. 웬만하면 그 군대식 다나까도 좀 어떻게 해보고.”
“알겠어요! 형!”
민준이 속으로 작은 웃음을 삼켰다.
‘푸흡. 새끼 스킬창에 우렁찬 대답-S 같은 거라도 있냐? 뭐. 가는 길에 심심하진 않겠다.’
신세계에서 근 4개월, 시련세계에서 3년.
민준은 3년 4개월 만에 한국인을 마주한 것이다.
물론 50골드라는 큰돈을 사용했다.
심심함을 달래는 용도로는 지나친 거금이다.
약간 충동에 가까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써버린 걸 어쩌겠는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거겠지.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내게 될지는 쟤 하기에 달렸고.’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네리엘처럼 귀여운 여자애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율리어트랑 네리엘은 잘 지내나?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안부 차 연락이나 해 봐야겠다.’
민준이 잡생각을 하는 사이.
강욱은 아무 말 없이 부동자세로 앉아있다.
경직된 자세지만 아까처럼 심하게 긴장하고 있지는 않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는 표정이다.
‘내가 유저에다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입이 간질간질하겠지.’
민준은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생각이었다.
“일단 서로 질문 좀 주고받자. 나도 궁금한 게 많고. 너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 아냐.”
“네 형.”
민준이 먼저 질문했다.
“뭐하다가 노예로 붙잡힌 거냐? 대충 영지에서 도망가려다 잡혔다고 하던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네. 형도 튜토리얼을 겪으셨으니까 알고 계시죠? 마지막에 모험가와 주민을 고르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지.”
“저는 처음에 주민을 고르려고 했어요. 가족들이랑 같이요.”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가족이 있었더라면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형도 아시다시피 부모님 세대들은 신세계에 거의 넘어오지 않았잖아요?”
“응?”
민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 그런 거 모르는데?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넘어온 거 아녔나?’
민준의 표정을 읽은 강욱이 말했다.
“어... 형 모르셨어요?”
“어. 몰랐는데...?”
이상한 일은 아니다. 민준은 튜토리얼 중간쯤부터 주민이라는 선택지를 배제한상태였다.
따라서 튜토리얼 도우미였던 블루미에게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묻지 않았었다.
‘얘기를 듣기 전에 먼저.’
민준이 마법을 사용했다.
마차 안에서 밖으로 통하는 소리를 차단했다.
밖은 마차가 이동하는 소리로 시끄러워 웬만해선 소리가 새지 않을 것이나, 내용이 내용인 만큼 조심해야 한다.
우웅
“뭐 하신 거예요?”
“소리를 차단한 거야. 들으면 안 될 수 있으니까.”
“아아...”
강욱은 의도를 납득함과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저런 마법도 쓸 수 있구나. 형은 어떻게 저런 걸 배웠을까? 나랑 같은 유저인데...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민준이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까 그 부분도 같이 설명해봐.”
“아, 네. 엘리스가 신이 되고 나서 세계를 재구성했잖아요.”
“그렇지.”
“지금 저희가 살아가는 리얼 판타지 세계는 그중에서 본 무대정도로 보시면 돼요.”
본 무대라 함은 다른 세계도 있다는 말.
“그럼 여기 말고 다른 세계도 있어?”
“네. 거의 확실해요.”
“어떻게 알았는데?”
“제가 가족이랑 같은 지역을 배정받으려고 물어봤거든요.”
강욱은 당시 대화를 알려주었다.
-가족이랑 같은 지역에 배정되고 싶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김강욱님의 직계 가족을 검색해볼게요!
-김강욱님의 가족들은 현재 아무도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지 않으세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이미 신세계로 넘어간 건가?
-아뇨! 본무대에 넘어오신 건 강욱님밖에 없어요! 나머지 분들은 다른 세계에 계신 거 같네요!
-왜 나는 본무대에 배정되고 가족들은 그러지 못한 거지? 알려줄 수 있어?
-여러 기준이 있죠!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블루미가 알려준 기준은 바로 나이대였다.
민준은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확인했다.
“그니까.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제외된다는 말이야?”
“맞아요. 다른 유저들과도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다들똑같은 대답을 하더라고요.”
민준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하긴. 아무리 신세계가 넓어도 지구의 총인구를 추가로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지.’
게다가 어린아이나 노인들은신세계의 생활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터.
‘나름 조치는 해놨다는 건가. 다른 세계는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 궁금하다만. 그것까지 알 방법은 없겠지.’
강욱과 블루미의 대화 속에서.
유독 신경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런데 블루미가 여기를 본 무대라 했다고?”
“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본 무대. 공을 들여 만든 메인 세계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기능이나 목적이 있다는 뜻에서 본 무대라면?
‘왠지 엘리스라면 또 뭣 같은 함정을심어놨을 거 같은데.’
민준은 아차 했다.
‘아으. 이놈의 입방정. 이상한 거 추측하려 하지마.’
민준은 눈짓으로 계속 얘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네. 그래서 가족을 빼고 다른 친구나 지인들을 알아봤는데. 이미 다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그럼 랜덤으로 돌렸나?”
“그쵸. 지역만 제가 정한 거죠. 그렇게 신세계 생활을 시작했는데.”
강욱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모험가로 시작하셨나요?”
“난 모험가로 시작했지.”
“굉장히 고생하셨겠네요. 솔직히 모험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 주민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주민은 집을 제공 받는 거 알고 계세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게 공짜로 주는 건 줄 알았는데. 어리석었죠. 아무리 주민이라지만 누가 공짜로 집을 주겠어요.”
“인원만 맞추면 집을 주는 게 아니야?”
“아니에요. 주민으로 시작하면 관련 튜토리얼을 추가로 받아요. 일에 대한 것과 계약에 관한 내용이죠.”
“계약?”
“영지에서 수행하게 될 일을 간단히 배우고. 집에 대한 계약을 맺는 거예요. 거기에 할부로 집세를 갚아나가는 항목이 들어있죠.”
민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발 그런 게 있었다고? 주민으로 시작했으면 좆될 뻔했네.’
강욱은 영지에서 무단으로 도망치다 노예가 되었다.
계약을 해지하는 게 쉬웠다면. 저런 극단적인 방식을 택했을 리 없다.
“계약에는 그런 내용이 있어요. 정해진 최소기간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제 잘못으로 일을 수행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토해내야 돼요.”
“만약 그러지 못하면?”
“영지법에 따라서 처벌받겠죠. 저 같은 경우는 운이 나쁘게 노예로 팔려나간 거고요. 아니다. 죽지는 않았으니 운이 좋은 걸 수도 있겠네요.”
주민도 만만치 않다는 말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민준이 물었다.
“근데 도망은 왜 친 거야.”
“형 제가 자기소개 했을 때 한 말 기억하세요?”
“어떤 거?”
“일머리도 빠르고 이것저것 잘한다는 말요.”
“아. 기억하지.”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거 진짜거든요? 근데 제 일이 유독 그런 건지. 너무 힘들었어요.”
“무슨 일을 했는데?”
강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적당한 말도 붙이기 애매해요. 억지로 껴 맞춘다면. 업무를 비롯한 시종 역할을 하면서, 기타 잡일을 모두 도맡아 하는 주 6회 야근의 헬가다꾼?”
“뭐야 그 끔찍한 직종은.”
“그러니까요. 심지어 부조리도 심하고 갑질도 장난이 아니에요. 특히 이 세계에는 명확한 신분이 정해져 있으니까.”
“귀족이랑 대면하는 경우도 있어?”
“아주 가끔요. 귀족의 행패가저까지내려오는 경우는 꽤 자주 있었죠. 내리 갈굼처럼요.”
귀족에게서 내려오는 내리 갈굼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망칠만하네.”
“맞아요. 스트레스 아니면 과로로 죽을 거 같았거든요.”
“도망은 니가 주도한 거야?”
강욱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같이 붙잡혀 있던 나머지 두 명 있죠? 그닥 친한 사람들은 아니었는데 그 사람들이 먼저 제안했어요. 야반도주를 하자고.”
“그런데 실패했군.”
“네. 어차피 저도 동의했던 일이니까 그 사람들을 원망하진 않아요. 하지만 계획 자체는 엉터리였어요. 도망치기 전에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강욱의 사정은 잘 알았다.
이제는 민준이 질문을 받을 차례.
“이제 네가 궁금한 걸 물어봐. 자세히는 아니라도 웬만큼은 알려줄게.”
“네.”
잠시 후 강욱이 물었다.
“형 5급 모험가랑 싸워 이겼다는 말. 진짜예요?”
“대련이었지만.”
“대련이라도 이긴 건 이긴 거잖아요.”
“그렇지.”
강욱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우와... 형은 어떻게 그렇게 강해요? 우리가 넘어온 지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잖아요.”
민준은 그간의 행적을 설명했다.
아르키아 연대기라는 소설과 시련에 대한 내용은 제외했다.
영약은 우연히 얻었다는 설정.
율리어트는네리엘의 저주를 풀어준 일을 숨기고 어쩌다 인연이 닿은 스승 정도로 축약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
하지만 민준의 모습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자신을 데려오는 데 50골드라는 거금을 사용하고,
마차를 타고 다니며 용병을 고용해 거느리고 있다.
자신은 접해본 적도 없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강욱은 큰 의심없이 민준의 말을 믿었다.
“와...! 형님은 말 그대로 주인공이네요!”
“주...인공?”
“네!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요.”
주인공. 되게 낯이 뜨거워지는 말이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아르키아 연대기라는 치트키.
나비 여왕을 만난 일은, 치트를 제외하더라도 우연이 겹친 기연이다.
율리어트라는 스승에게무력의 기반을 닦아내고.
3년의 시련 또한 이겨내 압도적인 유저의 정상에 오른 지금.
‘이거 완전 주인공이네?’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았다.
그러나 주인공이란 단어는 떠올려 보지 못했다.
강욱은 자신이 민준이라도 된 마냥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유저들의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니. 사람들이 괜히 국뽕 국뽕 하는게 아닌가 봐요. 왜 내가 기분이 좋아지지?”
“헛소리 하지마 인마.”
“하하... 그래도 노예로 팔려나갈 땐 앞이 막막했는데. 형님 같은 사람한테오게 되다니. 저 사실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었네요.”
“벌써부터 풀어지려고? 이거 아직 멀쩡하다.”
민준이 강욱의 노예 증서를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저 눈치 없는 놈 아니에요. 버림받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휴. 대답은.”
“형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주인공은 주변 동료도 중요하다고요. 전 형의 연대기에 민폐 캐릭이나 낙오 캐릭터로 남지 않을 겁니다.”
“너무 들떴다. 슬슬 자제 좀 해.”
“네엡!”
“형 이제 잔다. 떠들었더니 피곤하네.”
“주무십쇼!”
민준은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싹싹하니. 맘에 드네. 반은 합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