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02_ 데뷔조 연습 (3)
일일 연습생 체험.
오전 수업을 받고 12시가 되자 매니저 실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들을 모두 이끌고 식당으로 움직였다.
“이거 먹고 다음 수업시간은 4시 시작인 거 알지?”
“네.”
“옙!”
“예.”
“신입으로 들어 온 해솔이 좀 너희들이 잘 챙겨라. 적응하기 쉽게.”
“아휴! 매니저님, 제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하시는 거에여?”
“그래, 우연이 네가 이런 쪽으로는 워낙 잘 하지. 믿는다.”
서로경쟁하는 사이다 보니 연습생들끼리 감정싸움이 터질 때가 있는데, 소속사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누가 데뷔조에 속할지 아직 확정 되지 않은 상황에서 멤버가 될 연습생들끼리 다툼이 생긴다?
시작부터 누가 삐걱거리는 걸 환영할까.
데뷔조에 올라간 이상 서로 견제하는 것까지는 말릴 수 없어도 과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는 건 막아야 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기우연의 넉살 좋은 성격은 소속사에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요소 중 하나이다.
“난 지금 하늘이 노란데 이제 점심 먹어야 되는 상황이네. 하루가 왜 이렇게 기냐?”
“헤헤. 힘내세여, 행님! 익숙해지면 나쁘지 않아요. 아! 근데 오후 수업은 좀 더 빡셉니다.”
하루에 두 번 수업.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버티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밥 먹고 4시까지 뭐해?”
“개인 연습하는 거죠.”
“4시에 수업이 있는데도?”
“데뷔조에서는 수업에서도 잘 해내야 해요. 평소 모습도 평가가 들어가거든요. 저번 수업 때보다 얼마나 발전해서 왔는지 평가 받아요. 우리 쌤들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연습생을 제일 좋아해요.”
5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해서 그런가, 꼬맹이가 알려주는 지식들이 무척이나 알찼다.
‘어? 좋은 향기?’
그때, 문득 코끝을 스치는 좋은 향기에 저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우와.’
주책없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한 엄청난 미모의 여성이 좋은 향기의 진원지였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임에도 이목구비가 워낙 뚜렷해서 쉽게 잊히지 않을 미인이다.
다만 표정이 너무나도 우울해보여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다가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어? 주아 누님?”
그리고 그 미인을 향해 기우연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누님! 이쪽이요.”
그녀도 기우연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더니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기우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
“흐흐~ 누님, 오랜만이에요. 일행 없으면 우리랑 먹어요.”
“음, 실장님은?”
“바쁘신가 봐요. 잠깐 와서 몇 마디 하시더니 훌쩍 사라지셨어요.”
“그럼 얘기 들은 건 없는 거야?”
“얘기여? 소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새로운 소문이라도 나왔어요?”
“별 건 아니야. 나 이번 달 끝으로 연습생 계약 해지하기로 했어.”
“넵?”
기우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 또한 놀라서 수저질을 멈췄다.
저런 미모를 가졌는데 데뷔를 못하고 퇴출당한다고?
“누, 누님 진심이세요?”
“응. 진심이야.”
“너무 아깝잖아요. 누님이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데! 조금만 더 버텨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도 오래 생각했어. 근데 여기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도 남자 아이돌 그룹 만든다고 하잖아. 벌써 두 번째야. 여자 아이돌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워낙 치열해서 뜨는 게 어려우니까 회사에서 아예 데뷔시킬 마음이 없는 것 같아.”
“에이, 그럴 리가요! 우리 회사에 여자 연습생들이 몇 명인데요.”
기우연은 연습생 계약을 해지하고 나간다는 그녀를 말려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단호해보였다.
“다음에 여자 아이돌 그룹을 만든다고 해도 나한테 기회가 오는 건 아닐 것 같아.”
그녀도 결국 나이를 문제 삼고 있었다.
지금 남자 아이돌을 새롭게 런칭했으니 회사는 새 그룹 서포트에 온 힘을 다할 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갈 거고, 새 그룹을 만든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려면 4~5년은 우습게 흐를 터.
“그럼 내 나이는 26살이 될 거야. 스물 중반에 아이돌로 데뷔한다고? 17살, 18살짜리들이랑? 이쯤 했으면 포기할 때도 됐어.”
“누님 실력이 너무 아까워요.”
“그렇지 않아도 실장님이 날 잡아주시더라. 가망 없는 애면 잡지도 않는다던데 덕분에 허했던 마음이 좀 채워졌어.”
“연습생 그만두면 앞으로 뭐 하시려고요.”
“배우 일 해보려고.”
“우왓! 배우요?!”
“내가 미모가 좀 되잖니. 배우는 서른이 전성기고.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으니까 한 번 도전해보려고. 사실 이미 컨텍 하고 있는 소속사도 있어. 이건 비밀이니까 입 조심 부탁할게.”
“당연하져!!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시면서. 헤헷!”
비록 연습생 생활을 포기했지만, 그녀는 이 바닥을 완전히 뜰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나도 속으로 저 얼굴이 이대로 묻히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중이었기에 잘 됐다 싶었다.
‘저 얼굴이면 배우를 하는 게 훨씬 낫지.’
그때, 돌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거 아는가?
너무 예쁜 사람을 만나면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든 거.
나도 모르게 눈을 깔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근데 이분은 누구? 처음 보는 분인데.”
“아참! 누님이랑 얘기하느라 행님 소개시켜드린다는 걸 까먹었네요. 이번에 새로 데뷔조로 들어오셨어요. 이쪽 누님은 진주아 누님이세요. 서로 인사 나눠요!”
“진해솔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데뷔 조에 새로 들어왔다라…. 부럽네요. 그쪽은 100% 데뷔하시겠어요.”
“역시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네요. 누님이 생각해도 그런 것 같죠?”
“딱 봐도 비주얼로 들인 애 같은데. 너희 데뷔조 애들이 유난히 얼굴이 좀 약하긴했어. 부럽다. 이럴 땐 내가 여자라는 게 화난다니까.”
“누님이 남자였으면 이미 데뷔하고도 남았져. 나중에 배우로 데뷔하시고 OST 부르세여. 아마 팬들이 깜짝 놀랄 거에여.”
기우연은 진주아씨가 완전히 이쪽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는지 다시 발랄해져서 말했다.
“그래. 응원해줘서 고마워. 너도 이번에 꼭 데뷔하길 기도할게. 너라도 먼저 데뷔해서 성공했으면 좋겠다.”
“넵! 먼저 데뷔해서 미리 레드카펫 쫙 깔아둘게요. 누님은 레드카펫 밟고 오십셔!”
“너는 남자애가 참 넉살도 좋아. 후후!”
“그게 제 매력이져~”
다만 나는 머릿속이 좀 복잡했다.
불쑥 치솟은 욕구 때문이었다.
‘기왕 잘 거면 이런 여자랑 자보고 싶은데.’
아직 이세계에 적응이 되지 않은 터라 내 주제에 대쉬를 해도 될지 고민이 됐다.
지구에서 저런 미모의 여성이었으면 감히 다가가는 것 자체가 허락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긴 남녀역전 세계.
거기다가 내 외모는 아이돌 수준으로 상향 된 상황이었다.
‘해볼까.’
나는 태연한 척 대화를 이어가며 기회를 엿봤다.
내 머릿속에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 잘 들어오질 않았다.
‘할까? 말까? 시팔, 질러? 말아?’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반납하러 가는 순간이었다.
일단 번호만이라도 따자는 생각에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네?”
진주아씨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우연은 식판을 반납하느라 정신없었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호,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
“데뷔조라서 곤란하실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너무 제 이상형이라서요.”
내가 번호를 따려고 했는데, 웬걸.
역으로 내 번호가 따이고 있었다.
“010-XXXX-XXXXX입니다.”
“앗! 이렇게 바로 말씀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해요! 절~대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진주아 씨가 수줍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만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미인이 나한테 귀찮게 굴지 않겠다며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 믿어지질 않았다.
‘진짜 포니가 한 말이 사실이었어.’
임신이니 뭐니 황당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여기는 남자가 없어서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세상이 맞았던 거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조차도 남자에게 먼저 호감을 표시해야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자에게 한 없이 가혹한 세계였다.
♣♣♣
오후 수업을 받기 위해 연습실에 들어가니 학교를 다녀 온 데뷔조 연습생들이 속속히 모여들고 있었다.
밥을 먹은 뒤 기우연에게 댄스 교습을 받았던 나는 데뷔조 연습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해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제 또 수업을 들으려면 체력을 회복해둬야 한다는 기우연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강경태도 왔네.’
오전 수업 때 폭풍 즙을 짠 게 창피했는지 밥도 같이 먹지 않고 약속 있다며 사라졌던 강경태가 멀쩡한 모습으로 연습실에 들어왔다.
한편, 기우연은 나를 데뷔조 연습생들에게 소개시켜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행님 얼굴에서 빛이 나지 않아요? 이런 비주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인 거에여.”
“누가 캐스팅해서 데려온 거지?”
“누군지 몰라도 나중에 보너스 좀 두둑하게 받으실 듯.”
“진짜 잘 생기셨네요.”
“그동안 뭐하셨어요? 그동안 캐스팅 많이 당하셨을 것 같은데.”
오전반 강경태의 경계심 때문에 오후반 데뷔조 애들도 나를 경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나를 대놓고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더라.
잠깐 의아했으나 곧 납득했다.
‘사실 이게 정상이지. 강경태처럼 대놓고 적의를 보내는 건 하수 중의 하수야. 속으로 뜯고 씹어 겉으로는 착한 척 해서 평판 신경 써야지.’
서로 경쟁하는 사이지만, 섣불리 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면상을 바닥에 갈아버리고 싶은 새끼한테도 고개를 숙이고, 아부를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강경태야 말로 오히려 순진한 녀석이라 볼 수 있다.
앞에선 웃다가 뒤에서 뒤통수 갈기는 새끼들을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