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03_ 데이트(1)
첫날 댄스 수업은 절망 편이었는데, 이틑 날이라고 해서 기적처럼 상황이 역전 될 리가 없었다.
노래.
적어도 음치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주제에 음색이 좋은 탓에 칭찬을 받기는 했다.
다만 이후에 이어진 혹평은 내 멘탈을 위협했다.
‘뭔 선생이라는 사람이 애들한테 그런 독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고작 17살, 18살 정도 되는 연습생들에게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해댔다.
어릴 때부터 저런 말을 듣고 자라면 자존감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기우연은 깜짝 놀라는 나에게 저 정도는 심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는 더 깜짝 놀랄 말을 해주었다.
“에이, 그만 생각하자.”
욕먹은 걸 떠올려봐야 뭐하나.
데이트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마음을 오염시킬 필요는 없다.
“정말 나가실 거에요?”
데뷔조로 들어 온지 이틀째.
곧 데뷔할 연습생을 결정하는 시기이기까지 한 상황.
가장 열심히 할 때여야 할 시기에 여자랑 데이트를 하러 나간다?
기우연은 기겁을 하며 나를 만류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형은 여자를 만나는 게 연습하는 것보다 더 실력이 오른다고.
“들키면 매니저 실장님한테 엄청 혼나실 거에요.”
“점심 먹으면 4시까지 자율 연습 시간이잖아. 잠깐인데 뭐 큰일 나겠어?”
“끄응. 일단 알겠어요. 제가 최대한 커버 쳐드릴게요.”
“하하! 고맙다.”
“이번만이에요. 다음부터는 저랑 열심히 연습하셔야 해요?”
“응응.”
착한 녀석!
너는 인마, 내가 꼭 보답하마!
기우연의 든든한 서포터를 믿어보기로 결심하고 슬그머니 소속사를 나섰다.
도중에 매니저 실장이나 직원에게 걸리면 안 되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성공!’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깔끔하게 소속사에 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번 주까지 연습생 해지를 좀 더 고민해보라며 시간을 받은 진주아 씨가 나보다 먼저 약속 된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앗! 오셨어요.”
발그레한 얼굴에 설렘이 가득하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완전 방금 왔어요.”
‘쥰내 예쁘네.’
킁킁-
가까이 다가가니까 엄청나게 좋은 향기가 난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 향기를 맡았었다.
‘화장도 했네.’
어제 회사에서 봤을 땐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미모가 뚫고 나왔는데, 거기에 더해 화장까지 하니 눈이 부실 지경.
이런 여자가 어쩌다가 연습생 계약을 해지하고 나오는 상황이 된 건지 황당했다.
“점심 안 드셨죠?”
“넵.”
저녁을 사겠다고 했지만, 다시 재조정한 결과 점심시간에 잠깐 만나서 밥을 먹는 걸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주말까지 기다렸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수업이 너무 빡셌다.
“제가 맛집 알아뒀거든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이긴 한데 정말 맛있는 집이래요.”
“맛집은 못 참죠. 하하. 택시 탈까요? 4시까지 들어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차 가져왔거든요!”
차, 차를?
진주아씨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멋드러진 차가 서 있었다.
이세계는 어떤 브렌드의 차가 유명한지 모르기에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차를 본 순간 느껴진 포스로 보아 낮은 가격의 차는 아닌 것 같았다.
“와~! 자가용 있으시구나.”
“제 차는 아니고, 엄마 차에요. 아무튼 차가 있으니까 다시 돌아오는 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지금 시각은 12시 23분.
4시 정각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적어도 3시 30분에는 이곳에 다시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시간을 오래 보내봤자 2시간이 아슬아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2시간의 가치가 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간을 틈틈이 같이 보내야 각을 잡을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시간이 없다.
이렇게 짤짤이라도 쳐야 할 만큼 내 상황이 급했다.
진주아씨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로 움직이면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하니 가는 동안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보였다.
내가 먼저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진주아씨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데뷔조는 어쩌다가 캐스팅 되신 거에요?”
그건 제가 잘 모르는 일인데요.
그래도 메모장이 있어서 대답할 지식은 갖고 있었다.
“길거리 캐스팅이 됐어요.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데, 좋은 기회가 될 거라면서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실력이 부족해도 괜찮다면서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데뷔조에 넣어주겠다고 확답을 받고 들어 온 거 맞죠?”
“계약서에 적어 줄 수는 없지만, 거의 확답을 받고 들어오긴 했어요. 데뷔조에 들어가지 못하면 연습생 계약은 자동 해지 되는 걸로 계약에 적혀 있죠.”
계약을 하면서 다른 연습생들에게 이런 계약을 했다는 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연습생이 아니기에 대상에서 제외가 된다는 생각에 숨기지 않고 말했다.
“너무 일찍인 것 같긴 한데 미리 축하드려요.”
“데뷔가 끝이 아니잖아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실력이 썩 좋지 않아서 걱정 되는 면도 많고요.”
“데뷔를 하기 전까지 아마 밤이슬 맞으면서 연습하게 될 거에요. 안 되는 것도 되도록 가르쳐주시는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계셔서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했다.
“…안 되는 것도 되도록 가르친다고요?”
“네. 저는 박치, 몸치인 애도 갱생시켜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거 자주 봤거든요. 해솔씨 같은 경우는 정말 흔해요. 대신 그 과정을 견디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갈리면서 데뷔하는 사람과 데뷔하지 못하는 사람이 갈리는 거죠.”
진주아씨는 연습생 선배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식당에 도착하는 내내 침묵 없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 식당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어서오세요.”
웅성웅성-
이런 여자가 나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게 안 믿기지? 흐흐!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에 절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시발, 존나 부럽네.”
“저 정도면 나도 한 번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응, 아니야.”
“근데 얼굴 미친 거 아니냐?”
“키도 큰데?”
“하씹, 이상형인데 조졌네. 화장실 안 가려나?”
“되겠냐고, 새꺄. 여자 수준 봐라. 서로 급이 맞으니까 같이 다니는 거지. 저기에 네가 끼면 그림이 그려 지냐?”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 있는 손님들 대부분이 다 여자다.
저들이 부러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가게 안에 들어 온 진주아씨를 향한 것이었고, 그들이 감탄하는 대상은 진주아씨가 아니라 나였던 거다.
‘이게 인생이지!’
진주아씨는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상을 했던 건지 미리 예약을 해놓았던 모양이다.
주아씨가 직원과 대화를 나누더니 곧장 룸으로 안내가 됐다.
“여기 치즈 불찜닭이 정말 미쳤어요. 3인분 줘요. 계란찜도 주시고, 음료는 뭐하실래요? 시원하게 맥주? 아참, 오후에 수업 들으셔야 하니까 안 되겠네요. 아쉽다. 정말 맥주랑 잘 어울리거든요.”
“하핫, 그럼 한 잔만 할까요? 맥주 한 잔이면 취할 리도 없으니까요.”
내가 그동안 먹어 온 술이 몇 잔인데 고작 맥주 한 잔에 취할까.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맥주 한 잔 정도야 얼마든지 쌉가능이다.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맥주가 술인가요? 보리차죠.”
“술 잘 드시나 봐요.”
“네. 좀 마십니다.”
식당 안에 들어와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맥주와 음식이 들어오고.
과연 맛집으로 소문이 난 것처럼 매우 맛있었다.
“후! 하아! 마시써~!”
내가 있다는 걸 잠시 잊었는지 주아씨가 치즈 불찜닭의 소스를 볼에 묻힌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예쁜 여자가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복스러워보이던지.
나는 밥을 먹는 것보단 그녀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앗?!”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주아씨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딱딱하게 굳었다.
허공에 들려 굳어진 숟가락이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 제가 너무 허겁지겁 먹었죠? 다이어트를 오래 했더니 맛있는 음식만 보면 정신을 놔버려요.”
“복스럽게 잘 먹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아우! 창피해.”
두 손으로 작은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른다.
푸욱!
무언가가 심장에 쿡! 하고 달려와 박히는 순간이었다.
꿀꺽-
“히잉. 말 좀 걸어주시지. 그랬으면 진작 정신 차렸을 텐데.”
“귀여워서요.”
“네, 넷?! 제가요?”
“네. 저는 밥 잘 먹는 여자가 좋거든요.”
배시시- 수줍게 웃는 미소.
이게 바로 잘 생긴 남자의 삶이라는 것인가?
만약 이대로 같이 모텔로 가자고 해도 수줍게 미소를 보이며 내 손을 잡아 줄 것만 같았다.
뽕이 차오른다.
다시 식사가 시작 됐다.
밥을 다 먹어갈수록 진주아씨와의 대화가 점차 줄어들었다.
시간도 슬슬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
“너무 짧네요.”
좀 더 함께 있고 싶다.
차라리 학교였다면 땡땡이라도 칠 텐데, 내 목숨이 달려 있는 연습생 생활이다 보니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저는 포기했지만, 해솔씨는 기왕 데뷔할 기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하셨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다만 앞으로 더 바빠질 텐데, 언제 다시 주아씨랑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아쉬워서요.”
자유로워진 그녀와는 달리 나는 데뷔조라는 자물쇠를 찬 상황.
내가 바라는 걸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정작 내 쪽에서 시간이 부족했다.
“…….”
“…….”
우물쭈물-
우리 둘 다 이런 식의 만남을 가진다 해도 좋은 결과를 보긴 힘들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습생을 그만 둔 그녀도 미래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테고, 나는 두 말 할 것도 없는 상황.
‘분위기 좋았는데 어쩌다가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아무래도 이거 내가 제대로 똥을 밟은 모양이다.
병신같이 왜 저런 말을 한 거지?
찐따 병신은 이런 세상에 와도 여전히 찐따 병신일 수밖에 없는 걸까?
자괴감에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