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05_ 월말평가 (2)
‘존나 웃기네.’
다들 기뻐서 입꼬리가 움찔움찔하는데,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눈알만 굴리고 있다.
더욱이 매니저 실장님이 얘기를 끝내고 나간 이후 재훈이가 곧장 들어왔기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재훈아!”
“야야, 뭐야? 무슨 일이야. 너 계약 해지하고 나간다는 거 진짜야?”
“…별 거 아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재훈이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의 재훈이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연습생들을 성가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꾸벅 인사했다.
“다들 그동안 고마웠어. 감사했습니다, 형들.”
“이대로 간다고? 밥이라도 먹어야지! 이렇게 헤어지면 너무 서운하잖아.”
재훈이가 자기 짐을 챙겨 나가려고 하니 다들 안절 부절 못하며 붙잡았다.
녀석은 싫다며 고개를 젓다가 다들 포기하지 않을 듯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 다른 회사로 가는 거에요.”
“어?”
“아이돌 안 하겠다고 한 게 아니었어?”
“거기도 이번에 새로운 남돌 데뷔시킨다고 해요. 허니 엔터에서야 쩌리지, 다른 회사 들어가면 저도 제법 대우 받거든요. 용꼬리도 못 된다는 걸 알았으니 뱀 머리라도 되려고요.”
재훈이의 고백에 연습생들 사이에서 묘한 분위기가 연출 됐다.
“그동안 고생고생하면서 허니 엔터에 붙어 있었던 이유, 너도 모르는 거 아니잖아.”
“정말 다른 회사에 들어갈 거야? 너 그런 거 무섭다며!”
“연습생 계약 해지할 때 이미 각오했어요. 그래도 마냥 막장인 곳에 가는 건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천해준 소속사거든요. 거긴 그래도 좀 덜하다고 하더라고요.”
허니 엔터는 남자 아이돌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인기가 많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남자 연습생들의 1지망이 된 건 아니었다.
이세계의 남자 아이돌은 9:1이라는 극단적인 비율에서 나오는 고충이 많다.
‘첫날에 봤던 아이돌처럼 되는 건가, 재훈이가? 좀 토 나오는데.’
허니 엔터와 몇 몇의 대형 기획사에서는 남자 아이돌을 여성의 성적 해소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아이돌이긴 하지만,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음악을 만들고, 무대와 퍼포먼스를 꾸미는 것이다.
하지만 질 나쁜 회사에서는 ‘남자’라는 것을 내세워 돈을 벌기 위해 아이돌을 만들고 계획한다.
남자가 아이돌이 된다는 건 이런 쪽의 일을 어느 정도 각오해서인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짧은 핫팬츠…시발.’
상체 근육이 다 드러나는 옷은 기본이고, 망사에 스타킹을 신고 무대에 오르는 놈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재훈이를 그때 봤던 충격적인 의상과 합성해서 떠올렸다가 토할 뻔했다.
설마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더군다나 회사에서 소개를 시켜준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는지 연습생들의 표정이 일제히 구겨진다.
수군수군-
“쟤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라고 쉬운 길을 싫어서 안 갔나? 나 같으면 차라리 아이돌 안 하고 말지.”
“토 나오네. 어쩌다가 쟤가 저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진 거야?”
“노력해도 실력이 안 는다면서 울더니, 결국 저렇게 됐네.”
솔직히 여기서 데뷔 멤버로 떨어지면 대부분 다른 회사로 이적해서 아이돌이 될 애들이 반 이상일 거다.
대형 기획사에서 잘 키워준 물고기들을 다른 기획사가 순순히 방생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본인의 사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습생들은 그런 결정을 내린 재훈이를 경멸하고 있었다.
‘병신들이네.’
지 얼굴에 침 뱉기인 줄도 모르고.
큰 결심하고 떠나는 애한테 마지막 기억이 쓰레기통으로 가게 만들 순 없었기에 내가 나섰다.
“다들 반응이 왜 그래? 다른 회사로 가는 건 축하해줄 일이잖아. 적어도 재훈이는 꿈을 이루게 된 거니까. 축하한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똑똑하게 잘 행동 하면 걱정하는 일은 안 당할 거야. 돈 벌면 변호사부터 고용해. 그럼 회사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걸.”
“흐, 고마워요, 형. 솔직히 형 들어왔을 때 원망많이 했는데, 오늘 다 털어버리고 나갈게요.”
“엥? 나 원망했다고?”
“형이 너무 잘 생겨서요. 엄청 위기감 느꼈거든요. 아, 저 형은 무조건 데뷔하겠네, 이런 생각 들었어요.그러다 보니까 괜히 제 자리를 뺏긴 느낌도 들었고요.”
이놈의 얼굴이 여자들에게 강하게 어필되는 것처럼, 남자들에게도 강하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다.
녀석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 내 얼굴을 보면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어. 이해해.”
“하핫!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애초에 뱀 머리로 살아갈 운명이었는데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었어요. 미련을 전부 내려놓으니까 정말 후련하네요. 그리고 너희들, 지금은 내가 더럽게 보이는 모양인데, 내가 얻은 이 자리도 선착순이라는 걸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질 나쁜 회사가 있다면, 허니 엔터처럼 관리를 잘 해주려고 노력하는 회사 또한 존재한다.
허니 엔터가 선택지의 전부가 될 건 없다는 뜻이다.
재훈이는 가장 먼저 포기하면서 그나마 나은 선택지 중 최고로 나은곳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애도 있겠지만 나 같은 선택을 하는 애들도 많을 거야. 내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 나중에 이쪽 정보 필요하면 연락해. 호구 같은 짓이라는 건 알지만 같은 동료였으니까 도와줄게.”
재훈이의 수척해진 얼굴에 후련함이 맴돈다.
“우, 우리가 언제 그랬어?”
“맞아. 아니야. 오해야, 재훈아.”
재훈이의 말에 찔리는 녀석들이 제법 있었는지 태도를 바꿔 녀석에게 달라붙는다.
내가 생각해도 재훈이가 말을 잘했다.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다시금 월말평가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재훈이의 말에 갈등을 하고 있을 거다.
안 될 것 같으면 아싸리 재훈이처럼 결단력 있게 차선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 말이다.
‘나야 상관없는 얘기니까.’
나는 그저 월말평가에 모든 걸 걸고 있는 애들 사이에서 조용히 꿀을 빨 거다.
이제 정말 데뷔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게 실감 된다.
♣ ♣ ♣
“곧 연습생들 월말 평가 있다고 했지?”
“네, 혹시 조이사님께서도 가시려고요?”
“대표님이 이번에 데뷔 시킬 아이돌 그룹에 대한 기대감이 크시다고 들었어.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대표님은 조이사님이 계셔서 정말 든든하시겠어요. 출장 가셨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새로 런칭 하는 신규 남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조연주이사가 담당하는 일은 해외 쪽이다.
조이사가 없었으면 허니 엔터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을 거다.
이번에 허니 엔터의 간판 아이돌 그룹 ‘레오’의 콘서트도 그녀가 직접 나서서 주관하며 문제없이 대박을 칠 수 있었다.
즉, 그녀는 신입 남돌에 관심을 가질 만큼의 급이 아니라는 거다.
이미 인기를 얻어 해외로 뻗어나가는 스타들만이 그녀와 말을 맞출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하던 일이잖아. 해외 쪽 일이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이쪽 일은 완전히 손을 놨지.”
“맞아요. 참 아쉽게 됐죠. 이번에 터진 학폭 미투도 터지고 나서야 생각이 나더라고요. 조이사님이 걔는 빼고 가자고 하셨잖아요. 다들 걱정이 많아 보이던데, 조이사님이 점검을 해주신다고 하면 A&R팀 직원 마음이 확 놓이겠네요.”
“걔는 딱 봐도 느낌이 별로였어. 대표님이 괜찮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그냥 안 넘어갔을 텐데.”
“하여튼 대표님은 비주얼을 너무 신경 쓰세요. 얼굴이아무리 잘 생겨도 그런 쪽으로 문제 있는 애는 감싸주면 안 되는데. 그쵸?”
“…….”
조연주 이사는 비서의 말에 선뜻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의 기억도 또렷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한 남자 연습생과 잠을 자버렸다.
그 아이는 대놓고 자신에게 요구를 했다.
자신을 데뷔조에 넣어달라고.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한다며 비웃었을 거다.
헌데 당시에는 미치기라도 한 건지 그 남자 연습생과 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미친년.’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오래 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이미 일을 저질렀고, 그날 밤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밤이기도 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간간히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아니, 사실 간간히 생각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생각나서 곤란해졌어.’
꼬맹이 주제에 야해 빠져가지고선!
연습생들의 월말평가를 보러 가는 것도 사심이 어느정도 담겨 있는 선택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추천을 해놓은 상황이라 그 아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시키면서 말이다.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하지?’
저도 모르게 그때의 쾌감을 떠올려 몸을 비비꼬던 조연주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짝!
“조, 조이사님?!”
‘또라이 년! 흔들리지 마. 걔랑 나랑 나이차만 해도 13살이야. 늙어서 왜 이렇게 추해졌냐, 조연주.’
갑작스러운 싸다귀에 깜짝 놀란 비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조연주 이사는 태연하게 거짓말로 변명했다.
“갑자기 너무 졸려서. 잠 깨려고 그런거니까 신경쓰지 마.”
“깜짝 놀랐어요.”
조연주의 나이 올해 33살.
그 아이는 올해 20살.
대표님과 의기투합해 허니 엔터를 만든 초심을 떠올려야 했다.
‘하늘에 있는 지윤이를 배신할 수 없어!’
과거 매니저로 일하던 그녀의 담당 연예인이 자살을 했다.
이유는 회사에서 억지로 시킨 스폰서와의 성관계였다.
그때의 충격으로 그녀는 이 바닥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허니 엔터의 대표가 그녀를 붙잡았다.
힘을 키워서 내 연예인들을 지켜주자고.
그런 엔터를 만들어보자고.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라고.
대표님의 그 말에 넘어간 그녀는 진짜 허니 엔터를 그렇게 만들었다.
스폰을 제안해오는 각종 어두운 손길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낸 것이다.
‘한심한 년! 너 왜 이렇게 타락했니?’
그런데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욕망이 싹트기 시작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어지게 할 만큼의 미인에게 홀려 그녀가 세운 허니 엔터라는 제국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데뷔하고 싶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자신의 몸을 내놓은 연습생 아이의 순수한 욕망.
‘두 번은 없어! 약해지지 말자, 조연주!’
그 아이를 만나서 사과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할 생각 못하게 따끔하게 혼낼 것이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다.
그러한 사정들이 조연주 이사가 월말평가를 보러 가겠다고 말한 이유였다.
♣ ♣ ♣
이번 월말평가에 누가 참석하는지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연습생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허니 엔터의 대표님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한 때 찍었다 하면 스타가 된다는 마이다스의 손 ‘조연주 이사’까지 참석을 한다고 한다.
‘조연주?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인데.’
이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이사’라는 단어에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내가 이세계에 와서 처음 몸을 섞었던 여자.
그 여자가 월말평가를 보기 위해 내가 있는 곳에 오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다시 마주치게 될 줄 몰랐기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대형 기획사이사라는 사람이면 되게 바쁠 텐데, 나에 대한 건 이미 다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
나 같은 놈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러니 조연주 이사가 나를 기억할 확률은 매우 적다.
해서 나는 그녀가 굳이 이번에 월말평가를 보러 오는 것도 공적인 일이 우연하게 겹친 것이라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난 이후.
나는 개인 연습시간에 틈틈이 땡땡이를 쳐서 주아 누나를 만났다.
연습을 10시간을 해도 주아 누나 한 번 만나는 것만큼 효과가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월말평가가 가까이오자 내 쪽에서 시간을 내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주변에서 빡세게 연습하고 있는데, 실력이 제일 부족한 놈이 약속 있어서 가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력을 늘리려면 주아 누나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정작 만날 시간이 없으니 조졌네. 쓰읍, 방법이 없나?”
차라리 주아 누나가 연습생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만나기가 좀 편했을 텐데.
‘음?’
그때, 번쩍! 하고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
회사를 나가기가 힘들면 회사에서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거 말이 되네?’
워낙 대형 기획사라서 사람들이 잘 안 쓰는 곳이 존재한다.
또한 기획사답게 방음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틈을 잘 노린다면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욕망이 싹 트기 시작했다.
소속사에서 일을 치른다고 치면 대상은 누구로 해야 할까?
설마 연습생?
'에비! 떽!'
여자 연습생들은 너무 어리다.
허니 엔터에 소속 된 여자 연습생들 중 20대 초반은 소수였고, 대부분 10대의 미성년자들.
꺄르륵 꾀꼬리 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거론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노릴 만한 대상은 엔터 직원 혹은 한 번 맛본 적 있는 여자, 로즈 보컬 트레이너밖에 없었다.
'그나마 쉬운 건 로즈 선생님이겠지만, 그 여자는 당분간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마냥 시간이 지나가게 기다리고 있는 건 너무 소극적인 태도인 듯 했다.
색다른 미끼를 준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