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07_아현이 (1) (33/849)



〈 33화 〉#07_아현이 (1)

도플갱어 인형을 얻고 이튿날.
아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바빠?]
[아현 : 아니. 하는 게 없어서 지루해. 말단이라서 일도 잘 안 시켜.]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 아현이의 메시지였다.
다시 회사 생활을 하라고 하면 과연 내가  수 있을까 싶다.
아이돌 지망생이 되면서 몸이 힘들어지긴 했지만,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을 청산한 것 때문에라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 얼굴에다 사표 던져주고 쿨하게 나오는 걸 못해봐서  아쉽긴 하네.’

[나 :  말  했어?]
[아현 : (토끼가 고개 갸웃하는 이모티콘) 웅? 머가?]
[나 : 너 전담팀 된 거 말이야.]
[아현 :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굳이 미리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나 : 앞으로 쭉 우리 전담팀에서 일하는 거야?]
[아현 : 응. 그렇게  것 같아.]
[나 : 그럼 자주 보겠네? 잘 됐다. ㅎㅎ]
[아현 : 자주 보는 거 좋아?]
[나 : 당연히 좋지. 전담팀에 네가 있으니까 든든해. 일 열심히 해줄 거지?]
[아현 : ㅎㅎㅎ 너가 하는 거 보고.]

아현이가 우리 그룹의 전담팀이 된 덕분에 다소 소홀해졌던 관계의 끈이 이어졌다.
그녀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데뷔 때문에 그녀와 대화를 나눌 틈이 없어서 서로 소식만 간간히메시지로 주고받는  전부였었다.

‘얘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한데….’

도플갱어 인형을 이용해 볼 좋은 기회가   같았다.

[나 : 혹시 지금 바빠?]
[아현 : 지금? 왜?]
[나 : 나올 수 있냐?]
[아현 : 괜찮기는 한데…너무 늦지 않았어? 11시잖아.]

아현이는 지방에서 내려 온 아이라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연습생 생활을 끝내고 취직을 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내려갔을 거다.

[나 : 잠깐 만날까? 데뷔 준비 때문에 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더라. 너랑 만나서 얘기 좀 하면 피곤이 풀릴 것 같아.]
[아현 : 어떻게 나오려고? 숙소 생활하는 중이잖아.]
[나 : 12시 되면 애들 전부  잘 거야. 살짝 몰래 나오면 돼.]
[아현 : 걸리면 많이 혼날 텐데….]
[나 : 혼나고 말지 뭐.  너희 집 가도 돼?]
[아현 : 우리 집을 온다고!?]
[나 : 시간이 늦었잖아. 다른데 가는 건 힘들 것 같고, 편하게 있고 싶어. 대신 편의점 들려서 맥주 사갈게.]
[아현 : 맥주까지 마시려고?]
[나 : 딱 한 잔씩만 하자.]
[아현 : 알았어. 기다릴게. 주소는…….]
“예쓰!”

성공적으로 아현이를 꼬시는데 성공한 나는 애들이각자의 방에서 쉬는 사이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했다.
하루 종일 연습을 하느라 피곤한 멤버들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몰래 숙소를 나오는 건 식은  먹기나 다름없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기우연이 씻으러 간 틈에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했기에 내 탈출은 완벽 했다.
우연이라면 방에 들어와 자고 있는 나를 방해하지 않을거다.
도플갱어 인형을 알게 된 이후로 우연이에게 여러 번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자는 스타일’이라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흔들어 깨워도 문제없다.

“해솔아!”
“안녕.”
“뭐 이렇게 많이 사왔어?”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 이외에 과자 같은 것들을 사왔다.

“설마 너도 나한테 식단 관리하라고  건 아니지?”
“아하핫! 아니야. 오늘은 특별히 봐줄게. 원래 운동하는 사람도 치팅데이가 있으니까.”
“오늘이 내 치팅데이야. 아무도 못 말려. 흐흐!”

꿀꺽-

절로 침이 삼켜진다.
물론 음식 때문에 생긴 침이다.
…아마도.
집이라서 편하게 옷을 입은 것 같은데, 가볍고 찰랑거리는 긴 원피스가 아현이와 참 잘 어울렸다.

‘솔직히 핫팬츠를 기대하긴 했는데….’

원피스를 입은 아현이의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슬슬 날이 더워지는 탓에 원피스가 속이 비출 만큼 얇은 소재였다.
원래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살짝 살짝 보여주는 게 더 꼴릿한 법이었다.
맥주 한 캔 마시자고 하긴 했지만 서운하게 딱 한 캔씩만 맥주를 사오지는 않았기에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맥주가 줄어들었다.

“술 잘 마시네?”
“이 정도는 껌이지. 요즘은  덕분에 버티면서 살아.”

아현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속에 쌓인 게 굉장히 많아 보인다.
나도 충분히 겪어본 일이었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적응하기 많이 힘드냐?”
“아이돌 하겠다고 가출하듯이 뛰쳐나오고, 서울로 올라왔을  말이야. 나는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이었으니까.”
“지금은 후회해?”
“그래도 연습생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되더라. 나 오늘 하루 종일 뭐했는지 알아? 커피타고 복사 하고 전화 받다가 짐 나르고 복사하고 반복이야.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그동안 아등바등  게 아니었는데, 나 도대체 지금까지 뭐한 걸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PTSD가 올 것 같다.
아현이가 속이 답답한지 맥주를 덥석 들어 꿀꺽꿀꺽 마신다.

‘그래도 아직은 3,6,9가 아니라서 버틸 만 하지. 여기서 몇 개월만 더 지나봐라. 가슴 속에 사직서 품고 다닐 거다.’

맥주로는 도저히 가슴이 풀어지질 않아서 소주를 찾게 될 거다.

“야야, 괜찮아. 괜찮아.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 다~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거야. 잘 견뎠어! 잘했어! 멋지다, 이아현!”

아현이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내가 경험하고 지나왔던 것들이다.
이러려고 코피 터지면서 공부한 게 아닌데 하는 생각부터.
도대체 이런 걸 시키려고 날 고용한 회사가 이해 안 되기도 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도 않으면서 일을 시키는 직장 상사 때문에 멘탈이 터지게 될 거다.
아니면 설명을 들어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머저리 같은 뇌에 자괴감을 느끼거나.

‘적응하기 쉽지 않지. 그래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굳이 아현이의 답답한 상황을 해결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얘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그저 너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만 하면 됐다.

“힘내! 너도 힘내고! 나도 힘내고! 짠하자, 짠!”
“흐흐, 고마워. 짠~”

맥주캔을 부딪친 뒤 다시 꼴깍꼴깍 마셨다.

“안주 먹어.”
“응응.”

시간이 깊어지는 만큼, 분위기도 점점 깊어져갔다.
아현이는 주로 회사에 대한 얘기를, 나는 데뷔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게 쉽지가 않아. 얼떨결에 데뷔조에 들긴 했는데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더라. 시행착오가 있고 적응이 되면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지 알게 되겠지.  전까지는 죽었다 생각하고 바짝 몸 낮추고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아하하! 맞아. 나도 너랑 똑같아. 시키는 것만 죽어라 하고 있어. 그게 뭔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야기가 점점 깊어간다.
어느새  맥주캔이 주변을 뒹굴거렸다.
아현이가 술에 취했는지 발그래진 두 볼로 흐느적거렸다.

“흐흥~ 흐흥흥흥~♬~♪”

기분이 좋았는지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키스하고 싶다.’

쩝-!

할까? 저질러버려?
이거  맞지?
겉모습이 바뀌면 뭐하나?
내 안에는 여전히 지구의 평범한 30대 아저씨가 존재하기에 이런 상황에서 선뜻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구에서도 이 정도 상황이면 각이 나왔다고 봐도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가까이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에 원피스가 무릎에 집혔는지  늘어나서 아현이의 도톰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오우야, 생각보다 큰데?’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가슴골에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현이가 헤헤 웃으면서 맥주  하나를 더 딴다.

“너무 빨리 먹는  아니야?”
“괜찮아! 집에서 마시는 건데 취하면  어때?”
“그건 맞지.”

취하면 그냥 벌렁 뒤집어져서 자면 다음날일 테니까.
확실히 집에서 마시니까 믿는 데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절로 풀어지는 모양이다.

‘얘 입장에서 남자가 자길 덮칠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일단 일보 후퇴하기로 했다.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았다.

“다른 애들은 회사 직원은 하기 싫다고 하던데  왜 회사로 들어온 거야?”
“음~ 내가 꿈을 포기하긴 했는데, 훌훌 털어버린  아니거든. 아직  마음 속에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어. 근데 연습생을 그만두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지. 집으로 가지 않으려면 회사에 취직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어.”
“아쉬우면 그냥 계속 연습생을 하는  낫지 않았겠어?”
“나 바보 아니야. 내가 계속 한다고 해도 답이 안 나올 것 같더라고.”

이번에 데뷔 멤버가 정해지고, 많은 연습생들이 회사를 나갔다.
헌데 가장 많이 나간 건 남자 연습생이 아니라 여자 연습생들이었다.
회사가 두 번이나 소년 그룹을 내는 걸 보면서 기대감과 멘탈이 함께 무너진 탓이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궁리를 해봤는데, 대리만족이라도 해보자 싶더라구. 다른 아이들이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돕다보면 한이  풀리지 않을까?”
“대리만족으로 되겠어?”
“응! 될  같아!! 아니, 꼭 돼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미련만 붙잡고 있을 생각 없으니까! 그래도 네 그룹 전담팀에 들어갔으니까 내 꿈을 조금은 이룬 게 맞아.”

이미 상당히 취했는데도 아현이는 맥주캔을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때문인지 아현이가 너무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훌떡훌떡 꺼내 보여 주고 있었다.

“이런 거 나한테 막 말해줘도 되는 거야? 나중에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 그만둬.”

술 먹고 진상 짓 했다가 이불 차는 짓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일.
후회할 그녀가 걱정 되어 한 소리였는데, 술 취한 아현이한테 썩 효과적인 충고는 아니었따.

“으잉? 내가 말하는 거 듣기 싫어?”
“듣기싫다는 게 아니라 내일 일어나서 흑역사 만들었다고 이불 찰 까봐 그러지.”
“우리 친구자나!! 친구는 괜찮아!”
“야야. 너무 가깝다.”

혀가 살짝씩 꼬부라지기 시작한  보니 얘가 확실히 가긴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음이 정확해서 취한  몰랐는데, 이미 한참 전부터 상태가 메롱이었던 것 같다.

‘저 발음이면 아나운서를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엥? 나 뭐래는 거냐. 지금 아나운서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칭구야~ 칭구야~”
“어어, 왜왜.  자꾸 기어와. 그러지마.”

그녀가 바닥을 기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치마가 말려 올라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게 얼굴을 들이대며 다시 한 번 되묻는다.

“내 말 듣기 시러?”
“아까 얘기했잖아. 나 너랑 얘기 나누고 싶어서 여기까지 몰래 나온 거라고.”

쯧쯧쯧, 완전히 갔다.
아까 전에 했던 얘기를 또 묻는 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히히, 그치? 내 칭구! 그럴 줄 알아써! 우저어엉!!! 크로쓰으~!!!”
“어어- 그래. 크로쓰다. 크로쓰.”

번쩍 들어 올린 아현이의 팔에  팔을 가져다 대고 X자를 만들었다.
근데 이상하게 X자가 꾸불꾸불해 보인다.

‘뭐야, 나도 취한 거야? 내가 고작 맥주  캔에 취할 리가 없는데?!’

부정해 보려 했지만, 알딸딸한 것이 기분이 붕~ 뜨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누가 너 취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또롱또롱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영 안 따라준다.
이게  내 몸이 아니라서 벌어진 일인  틀림없다.
하씨, 이럼 우리 아현이 못 따먹는데.

“흐허허!”
“헤헤헤.”

술에 취해 정신이 잠깐 다른 곳으로 간 사이, 아현이가 내 얼굴을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보였다.
아현이와 눈이 마주친 나도 덩달아 빙구처럼 웃었다.

“귀여워.”
“끄윽- 쩝쩝. 긍데에 이짜나.”

아현이가 작게 트름을 하더니 슥슥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 뭔데. 말해.”
“너어 말야.”
“어엉~”

아현이의 말에 대답을 하며 오징어를 하나 집어 마요네즈를 쿡 찍었다.
맥주와 마른안주는 찰떡처럼 잘 어울려서 절로 손이 가는 음식 중 하나이다.
그 짭쪼름한 맛을 기대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마요네즈 묻은오징어는 끝내 나의 입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 얼굴이 어느새 아현이의 두 손바닥에 콱- 하고 잡혀버렸기 때문이다.

“???”
“히~”

아현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한 손에 어정쩡하게 마요네즈가 묻은 오징어를 들던 나는 생각했다.

‘안주 먹어야 되는데.’

툭-

오징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입으로 들어갔어야 했을 녀석이었기에 평소라면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츄룹! 츄웁- 쪽! 쪽!

오징어 대신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내  안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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