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07_아현이 (1)
도플갱어 인형을 얻고 이튿날.
아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바빠?]
[아현 : 아니. 하는 게 없어서 지루해. 말단이라서 일도 잘 안 시켜.]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 아현이의 메시지였다.
다시 회사 생활을 하라고 하면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싶다.
아이돌 지망생이 되면서 몸이 힘들어지긴 했지만,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을 청산한 것 때문에라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 얼굴에다 사표 던져주고 쿨하게 나오는 걸 못해봐서 좀 아쉽긴 하네.’
[나 : 왜 말 안 했어?]
[아현 : (토끼가 고개 갸웃하는 이모티콘) 웅? 머가?]
[나 : 너 전담팀 된 거 말이야.]
[아현 :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굳이 미리 말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나 : 앞으로 쭉 우리 전담팀에서 일하는 거야?]
[아현 : 응. 그렇게 될 것 같아.]
[나 : 그럼 자주 보겠네? 잘 됐다. ㅎㅎ]
[아현 : 나자주 보는 거 좋아?]
[나 : 당연히 좋지. 전담팀에 네가 있으니까 든든해. 일 열심히 해줄 거지?]
[아현 : ㅎㅎㅎ 너가 하는 거 보고.]
아현이가 우리 그룹의 전담팀이 된 덕분에 다소 소홀해졌던 관계의 끈이 이어졌다.
그녀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데뷔 때문에 그녀와 대화를 나눌 틈이 없어서 서로 소식만 간간히메시지로 주고받는 게 전부였었다.
‘얘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한데….’
도플갱어 인형을 이용해 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나 : 혹시 지금 바빠?]
[아현 : 지금? 왜?]
[나 : 나올 수 있냐?]
[아현 : 괜찮기는 한데…너무 늦지 않았어? 11시잖아.]
아현이는 지방에서 내려 온 아이라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연습생 생활을 끝내고 취직을 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내려갔을 거다.
[나 : 잠깐 만날까? 데뷔 준비 때문에 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더라. 너랑 만나서 얘기 좀 하면 피곤이 풀릴 것 같아.]
[아현 : 어떻게 나오려고? 숙소 생활하는 중이잖아.]
[나 : 12시 되면 애들 전부 다 잘 거야. 살짝 몰래 나오면 돼.]
[아현 : 걸리면 많이 혼날 텐데….]
[나 : 혼나고 말지 뭐. 나 너희 집 가도 돼?]
[아현 : 우리 집을 온다고!?]
[나 : 시간이 늦었잖아. 다른데 가는 건 힘들 것 같고, 편하게 있고 싶어. 대신 편의점 들려서 맥주 사갈게.]
[아현 : 맥주까지 마시려고?]
[나 : 딱 한 잔씩만 하자.]
[아현 : 알았어. 기다릴게. 주소는…….]
“예쓰!”
성공적으로 아현이를 꼬시는데 성공한 나는 애들이각자의 방에서 쉬는 사이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했다.
하루 종일 연습을 하느라 피곤한 멤버들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몰래 숙소를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기우연이 씻으러 간 틈에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했기에 내 탈출은 완벽 했다.
우연이라면 방에 들어와 자고 있는 나를 방해하지 않을거다.
도플갱어 인형을 알게 된 이후로 우연이에게 여러 번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자는 스타일’이라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흔들어 깨워도 문제없다.
“해솔아!”
“안녕.”
“뭐 이렇게 많이 사왔어?”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 이외에 과자 같은 것들을 사왔다.
“설마 너도 나한테 식단 관리하라고 할 건 아니지?”
“아하핫! 아니야. 오늘은 특별히 봐줄게. 원래 운동하는 사람도 치팅데이가 있으니까.”
“오늘이 내 치팅데이야. 아무도 못 말려. 흐흐!”
꿀꺽-
절로 침이 삼켜진다.
물론 음식 때문에 생긴 침이다.
…아마도.
집이라서 편하게 옷을 입은 것 같은데, 가볍고 찰랑거리는 긴 원피스가 아현이와 참 잘 어울렸다.
‘솔직히 핫팬츠를 기대하긴 했는데….’
원피스를 입은 아현이의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슬슬 날이 더워지는 탓에 원피스가 속이 비출 만큼 얇은 소재였다.
원래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살짝 살짝 보여주는 게 더 꼴릿한 법이었다.
맥주 한 캔 마시자고 하긴 했지만 서운하게 딱 한 캔씩만 맥주를 사오지는 않았기에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맥주가 줄어들었다.
“술 잘 마시네?”
“이 정도는 껌이지. 요즘은 술 덕분에 버티면서 살아.”
아현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속에 쌓인 게 굉장히 많아 보인다.
나도 충분히 겪어본 일이었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적응하기 많이 힘드냐?”
“아이돌 하겠다고 가출하듯이 뛰쳐나오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말이야. 나는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이었으니까.”
“지금은 후회해?”
“그래도 연습생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되더라. 나 오늘 하루 종일 뭐했는지 알아? 커피타고 복사 하고 전화 받다가 짐 나르고 복사하고 반복이야.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그동안 아등바등 산 게 아니었는데, 나 도대체 지금까지 뭐한 걸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PTSD가 올 것 같다.
아현이가 속이 답답한지 맥주를 덥석 들어 꿀꺽꿀꺽 마신다.
‘그래도 아직은 3,6,9가 아니라서 버틸 만 하지. 여기서 몇 개월만 더 지나봐라. 가슴 속에 사직서 품고 다닐 거다.’
맥주로는 도저히 가슴이 풀어지질 않아서 소주를 찾게 될 거다.
“야야, 괜찮아. 괜찮아.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 다~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거야. 잘 견뎠어! 잘했어! 멋지다, 이아현!”
아현이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내가 경험하고 지나왔던 것들이다.
이러려고 코피 터지면서 공부한 게 아닌데 하는 생각부터.
도대체 이런 걸 시키려고 날 고용한 회사가 이해 안 되기도 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도 않으면서 일을 시키는 직장 상사 때문에 멘탈이 터지게 될 거다.
아니면 설명을 들어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머저리 같은 뇌에 자괴감을 느끼거나.
‘적응하기 쉽지 않지. 그래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굳이 아현이의 답답한 상황을 해결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얘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그저 너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만 하면 됐다.
“힘내! 너도 힘내고! 나도 힘내고! 짠하자, 짠!”
“흐흐, 고마워. 짠~”
맥주캔을 부딪친 뒤 다시 꼴깍꼴깍 마셨다.
“안주 먹어.”
“응응.”
시간이 깊어지는 만큼, 분위기도 점점 깊어져갔다.
아현이는 주로 회사에 대한 얘기를, 나는 데뷔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게 쉽지가 않아. 얼떨결에 데뷔조에 들긴 했는데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더라. 시행착오가 있고 적응이 되면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지 알게 되겠지. 그 전까지는 죽었다 생각하고 바짝 몸 낮추고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아하하! 맞아. 나도 너랑 똑같아. 시키는 것만 죽어라 하고 있어. 그게 뭔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야기가 점점 깊어간다.
어느새 빈 맥주캔이 주변을 뒹굴거렸다.
아현이가 술에 취했는지 발그래진 두 볼로 흐느적거렸다.
“흐흥~ 흐흥흥흥~♬~♪”
기분이 좋았는지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키스하고 싶다.’
쩝-!
할까? 저질러버려?
이거 각 맞지?
겉모습이 바뀌면 뭐하나?
내 안에는 여전히 지구의 평범한 30대 아저씨가 존재하기에 이런 상황에서 선뜻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구에서도 이 정도 상황이면 각이 나왔다고 봐도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가까이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에 원피스가 무릎에 집혔는지 쭉 늘어나서 아현이의 도톰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오우야, 생각보다 큰데?’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가슴골에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현이가 헤헤 웃으면서 맥주 캔 하나를 더 딴다.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니야?”
“괜찮아! 집에서 마시는 건데 취하면 뭐 어때?”
“그건 맞지.”
취하면 그냥 벌렁 뒤집어져서 자면 다음날일 테니까.
확실히 집에서 마시니까 믿는 데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절로 풀어지는 모양이다.
‘얘 입장에서 남자가 자길 덮칠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일단 일보 후퇴하기로 했다.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았다.
“다른 애들은 회사 직원은 하기 싫다고 하던데 넌 왜 회사로 들어온 거야?”
“음~ 내가 꿈을 포기하긴 했는데, 훌훌 털어버린 건 아니거든. 아직 내 마음 속에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어. 근데 연습생을 그만두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지. 집으로 가지 않으려면 회사에 취직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어.”
“아쉬우면 그냥 계속 연습생을 하는 게 낫지 않았겠어?”
“나 바보 아니야. 내가 계속 한다고 해도 답이 안 나올 것 같더라고.”
이번에 데뷔 멤버가 정해지고, 많은 연습생들이 회사를 나갔다.
헌데 가장 많이 나간 건 남자 연습생이 아니라 여자 연습생들이었다.
회사가 두 번이나 소년 그룹을 내는 걸 보면서 기대감과 멘탈이 함께 무너진 탓이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궁리를 해봤는데, 대리만족이라도 해보자 싶더라구. 다른 아이들이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돕다보면 한이 좀 풀리지 않을까?”
“대리만족으로 되겠어?”
“응! 될 것 같아!! 아니, 꼭 돼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미련만 붙잡고 있을 생각 없으니까! 그래도 네 그룹 전담팀에 들어갔으니까 내 꿈을 조금은 이룬 게 맞아.”
이미 상당히 취했는데도 아현이는 맥주캔을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아현이가 너무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훌떡훌떡 꺼내 보여 주고 있었다.
“이런 거 나한테 막 말해줘도 되는 거야? 나중에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 그만둬.”
술 먹고 진상 짓 했다가 이불 차는 짓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일.
후회할 그녀가 걱정 되어 한 소리였는데, 술 취한 아현이한테 썩 효과적인 충고는 아니었따.
“으잉? 내가 말하는 거 듣기 싫어?”
“듣기싫다는 게 아니라 내일 일어나서 흑역사 만들었다고 이불 찰 까봐 그러지.”
“우리 친구자나!! 친구는 괜찮아!”
“야야. 너무 가깝다.”
혀가 살짝씩 꼬부라지기 시작한 걸 보니 얘가 확실히 가긴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음이 정확해서 취한 줄 몰랐는데, 이미 한참 전부터 상태가 메롱이었던 것 같다.
‘저 발음이면 아나운서를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엥? 나 뭐래는 거냐. 지금 아나운서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칭구야~ 칭구야~”
“어어, 왜왜. 왜 자꾸 기어와. 그러지마.”
그녀가 바닥을 기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치마가 말려 올라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게 얼굴을 들이대며 다시 한 번 되묻는다.
“내 말 듣기 시러?”
“아까 얘기했잖아. 나 너랑 얘기 나누고 싶어서 여기까지 몰래 나온 거라고.”
쯧쯧쯧, 완전히 갔다.
아까 전에 했던 얘기를 또 묻는 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히히, 그치? 내 칭구! 그럴 줄 알아써! 우저어엉!!! 크로쓰으~!!!”
“어어- 그래. 크로쓰다. 크로쓰.”
번쩍 들어 올린 아현이의 팔에 내 팔을 가져다 대고 X자를 만들었다.
근데 이상하게 X자가 꾸불꾸불해 보인다.
‘뭐야, 나도 취한 거야? 내가 고작 맥주 몇 캔에 취할 리가 없는데?!’
부정해 보려 했지만, 알딸딸한 것이 기분이 붕~ 뜨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누가 너 취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또롱또롱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영 안 따라준다.
이게 다 내 몸이 아니라서 벌어진 일인 게 틀림없다.
하씨, 이럼 우리 아현이 못 따먹는데.
“흐허허!”
“헤헤헤.”
술에 취해 정신이 잠깐 다른 곳으로 간 사이, 아현이가 내 얼굴을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아현이와 눈이 마주친 나도 덩달아 빙구처럼 웃었다.
“귀여워.”
“끄윽- 쩝쩝. 긍데에 이짜나.”
아현이가 작게 트름을 하더니 슥슥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 뭔데. 말해.”
“너어 말야.”
“어엉~”
아현이의 말에 대답을 하며 오징어를 하나 집어 마요네즈를 쿡 찍었다.
맥주와 마른안주는 찰떡처럼 잘 어울려서 절로 손이 가는 음식 중 하나이다.
그 짭쪼름한 맛을 기대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마요네즈 묻은오징어는 끝내 나의 입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 얼굴이 어느새 아현이의 두 손바닥에 콱- 하고 잡혀버렸기 때문이다.
“???”
“히~”
아현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한 손에 어정쩡하게 마요네즈가 묻은 오징어를 들던 나는 생각했다.
‘안주 먹어야 되는데.’
툭-
오징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입으로 들어갔어야 했을 녀석이었기에 평소라면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츄룹! 츄웁- 쪽! 쪽!
오징어 대신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내 입 안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