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07_아현이 (3)
보드라운 살결이 피부에 닿을 때면 기분이 좋다.
사람의 체온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위로가 된다.
하지만 계속 체온을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다.
벌써 시간이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일을 하려면 숙소로 돌아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았다.
깨끗하게 몸을 씻은 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고 하자 아현이가 비몽사몽해서 말했다.
“으음, 어디가?”
“아예 외박을 할 수는 없어서 숙소로 돌아가려고.”
“히잉, 같이 자고 싶었는데….”
“매니저 형이 오기 전에 들어가 봐야 돼. 들킬 뻔한 거랑 대놓고 외박하는 거랑 좀 다르잖아.”
“피곤하지는 않아?”
“하나도 안 피곤한데? 네 덕분에 에너지 충전 제대로 하고 간다. 나올 필요 없어. 푹 자. 너도 곧 출근해야 되잖아.”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아현이를 억지로 누이고 눈을 감겼다.
새근- 새근-
피곤하긴 피곤한지 눈을 감기니 순식간에 색색 소리를 내며 잔다.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 보유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27]
확실히 도플갱어 인형은 내게 도움이 된다.
도플갱어 인형이 없었다면 오늘도 여전히 보유 코인이 18코인이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에는 주아 누나한테 써야지.’
아현이와 밤을 보냈으면서 다른 여자와 다음을 기약하는 내 모습이 쓰레기 같기는 했으나, 포니에게 코인을 대출 받은 이상 좋고 나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래서 사람은 빚지고 살면 안 되는 건데.’
빚을 갚고, 이자까지 내야 한다는 생각에 바짝 몸이 달아올랐다.
아현이의 집을 나온 뒤, 곧장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했다.
그러자 아현이의 집 현관문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가 되었다.
‘대박.’
몸이 어딘가로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시야가 흔들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숙소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더라.
내가 바깥에서 입고 있던 옷은 인형 고리가 된 도플갱어 인형이 입고 있었다.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을 벗기니 작아졌던 옷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와, 개 신기해.’
우연이는 정신없이 자고 있는 중이었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현이의 집에 나온 시간과 차이가 없어보였다.
‘이 정도면 공간이동 아니야?’
도플갱어 인형의 대단한 성능에 감탄하며 핸드폰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누웠다.
쌓아두었던 성욕을 모두 풀었기에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
청량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것에 맞춰 발놀림이 빨라진다.
연습실 천장에 달려 있는 조명이 우리들을 내리 쬔다.
청량하던 멜로디가 점점 빨라지고, 리듬이 심장을 쿵쿵 흔든다.
반주에 맞춰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춤도 점차 격렬해진다.
오랜 연습으로 서로 호흡이 딱딱 맞춰지니 거울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에서 제법 태가 난다.
안무 선생님이 만들어 준 안무는 노래와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다만 그만큼 안무 난이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어헉! 나 죽는다아~!”
“겨우 무대 한 번 한 걸 갖고 죽는다고 앓으면 어쩌냐? 그래도 이젠 제법 잘들 하네.”
“이야~ 쌤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칭찬을 하시는 거에요?”
“이제 점프 높이도 제법 잘 맞는다. 다들 수고 많았어. 체력만 좀 더 길러서 라이브까지 완벽하게 하자.”
“아아악!”
이제 춤을 실수하지는 않게 됐지만, 그렇다고 모든 준비가 끝난 건 아니었다.
남자 아이돌 대부분이 립싱크를 허용해주고 있었지만, 진짜 실력파 그룹들에게 무대의 라이브는 자존심이었다.
허니 엔터는 대형 기획사.
그곳에서 새로이 데뷔하는 소년 그룹이 립싱크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
새로이 우리 그룹을 담당하게 된 매니저 실장이 연습실을 찾아왔다.
“해솔이 나와 봐.”
“저요?”
찔리는 게 있는 탓에 실장님의 부름에 연습실을 나왔다.
실장님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따라오라며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까지 타요?”
“어. 이사님이 널 부르셨어.”
“이사님이라면 어떤 이사님이요?”
“조 이사님 말이야.”
“…….”
조이사?
조이사라면….
“혹시 개인적으로 조이사님이랑 친분이 있니?”
실장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일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월말평가 때 한 번 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 그럼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는 거네?”
“네.”
내 대답에 실장님의 얼굴이 한결 편해진다.
아무래도 관리해야 할 아이돌이 회사의 윗사람과 친분이 있으면 대하기가 껄끄럽기는 할 거다.
‘흠, 그날 일 때문에 부르는 건가?’
실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당장 조이사라는 여자와 만나게 될 텐데, 이 상황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해봐야 했다.
‘조이사에 대해 좀 알아볼 걸 그랬나?’
한 번 만나고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잠을 잤을 때, 워낙 정신이 없어서 월말평가 때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월말평가 때도 아무런 언급도 없더니 이제와서 갑자기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 걸까?
“이사님, 데려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와요. 유실장은 나가봐도 되고.”
“네.”
유실장이 실수하지 말라는 듯 내 등을 살짝 두들기고 나갔다.
조이사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를 향해 손짓을 하며 말한다.
“앉아요.”
“네.”
“마실 건 뭐로 줄까요?”
“괜찮습니다.”
“연습하다가 왔나보네요. 내가 방해한 건가요?”
“마침 휴식 시간이어서요.”
“이런, 내가 잘못한 게 맞네요. 나도 아이돌 키워본 적 있어서 휴식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거든요.”
“그건 정말 괜찮으니 상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는 무슨 이유로 절 부르셨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잠까지 자본 적 있는 사이에 내외를 하는 건 웃긴 일이다.
그녀도 나도 지금 이 순간 무슨 얘기가 꺼내져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생각이 많았어요. 믿을 진 모르겠지만, 그런 청탁을 많이 받긴 했어도 수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돼요.”
“…그러셨군요.”
“어쨌든 제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해솔군에게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어른인 내가 알아서 거절을 하고 다독여줬어야 했는데, 유혹에 흔들렸어요.”
조 이사가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를 해왔다.
내 입장에선 좀 황당한 일이었다.
“절 데뷔조에 넣어주셨는데, 왜 사과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유혹에 넘어가서 해솔군의 몸을 함부로 취했으니까요. 사실 월말평가 때 불러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좀 꼬여서 지금 하게 됐네요. 마음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미안합니다.”
“…….”
원래 그런 청탁을 받아주는 여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조 이사는 내가 예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청렴한 여자에게 포니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싶어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괜찮습니다. 전 그날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날 일로 데뷔조에 들 수 있었으니까요.”
내 말에 조 이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인다.
생각을 깊게 하던 조 이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날 제안이랑 비슷한 걸 한 적 있나요?”
“…아뇨.”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계속 그래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이제 일개 연습생이 아니라 허니 엔터의 차기 소년그룹 멤버에요. 우리 회사 아이돌로서 품위를 지켜줘요.”
“제가 또 다른 여자한테 몸 로비 할까봐 걱정 되셨던 모양이네요.”
“한 번은 어려워도 두 번은 쉬울 테니까요.”
이 여자가 왜 날 불렀는지 알 것 같다.
날 단속하려는 거다.
안에서 세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셀까봐서.
“안 한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
“말로만 하는 걸 믿기에는 해솔 군에게 투자 될 돈이 너무 많아서요. 제 입장에서 어느 정도 안전장치를 만들어 둘 수밖에 없어요.”
“안전장치요?”
내가 주이사에게 로비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는 사람은 오로지 본인 뿐.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또 하려고 한다면 그 역시도 대상이 되는 사람만 알게 될 일이었다.
“강제적인 건 아니에요. 몇 번의 상담을 받는 거죠.”
“안전장치가 상담이라는 게 잘 믿어지지 않네요. 어떤 상담을 하신다는 거죠?”
여기서 상담이라는 말에 야한 걸 떠올리는 나는 비정상인 걸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알려주는 상담이라고나 할까요? 상담의 내용은 해솔 군의 태도에 따라 협박이 될 수도 있고, 설득이 될 수도 있어요.”
협박 아니면 설득?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를 보며 조 이사가 싱긋 웃는다.
“일단 협박부터 해보죠. 대형 기획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연예계는 인맥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방송 PD부터 시작해서 작가, 스태프, 그 뿐만 아니라 다른 기획사들과도 연결 되어 있죠.”
“…회사에 찍히면 연예계 생활은 불가능할 거란 뜻이군요.”
그녀가 하는 말의 저의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맞아요. 힘 있는 기획사에 찍히면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전 그걸 가능하게 할 권력이 있어요.”
“제가 몰래 그런 일을 하고 다니면 보복을 하겠네요.”
“회사는 해솔 군을 지켜주는 존재에요. 하지만 해솔군이 회사에 해가 될 일을 하고 다닌다면 대의를 위해 소수는 희생 되어야 하죠.”
한 때 회사원이었던 나에게 꽤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나는 위에서 해오는 압박감에 굴욕 당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협박, 제대로 먹혔습니다.”
“그럼 이제 당근을 내밀게요. 앞으로 해솔 군을 포함한 멤버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쪽을 공략 대상으로 활동하게 될 거에요. 아마 정신없을 겁니다. 이미 CF 계약 직전인 곳도 많거든요.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아이돌한테 벌써부터 CF계약이 들어온 건 해솔 군과 멤버 분들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허니 엔터의 명성 덕분이죠. 그 명성을 밟고 해솔 군의 그룹이 스타가 되는 거에요.”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아이돌한테 CF가 들어온다고?
“해솔군은 우리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스타가 되어 있을 거라는 뜻인데, 혹시 이해가 되지 않았나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요. 굳이 해솔군이 스타가 되기 위해 몸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붉은색과 검은 장미가 수놓아진 여성 정장을 입고 있는 조연주 이사가 스윽- 발을 꼬았다.
검은 스타킹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부터였다.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이.
이를 알지 못하는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걸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욕심 부릴 생각 없어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해솔 군도 알고 있잖아요. 본인이 다른 멤버들에 비해 실력이 굉장히 떨어진다는 걸.”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을 거에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으로 차별을 받을 때마다 불만이 쌓이게 되겠죠. 특히 나보다 잘 나가는 멤버가 있다면?”
한 때 지구에서도 아이돌 그룹 사이에 왕따 문제가 불거졌던 적이 있다.
잘 나가는 멤버를 그렇지 못한 멤버가 질투하고 시기해서 왕따를 시켜 논란이 된 것이다.
조이사는 내가 질투심에 멤버와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건 내가 코인을 쓸 수 없을 때 얘기고.’
나는 실력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는 ‘치트키’를 갖고 있다.
그러니 다른 멤버들을 질투하기보단 내 능력을 올리는데 신경을 더 많이 쓸 거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조 이사라면 충분히 걱정할 만도 했다.
“멤버보다 잘 나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나쁜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이쪽 세계 정말 살벌하거든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죠.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인 게 이 바닥이에요. 미리 대비해둬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설득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담은 오늘로 끝이 아니에요. 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관리 받게 될 거에요. 원래 해외지사로 다시 갔어야 했는데, 대표님이 이번에 데뷔하는 그룹이 데뷔하고 1집 활동을 성공적으로 끝낼 때까지만 보조를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적어도 1집 활동이 끝날 때까지 나를 자주 보게 될 거라는 뜻이에요.”
내 입장에서 상당히 끔찍한 소리였다.
도플갱어 인형을 사지 않았다면 코인을 모으는 게 정말 힘들어졌을 거다.
더군다나 아직 데뷔하지 않은 연습생 신분에 불과한 내가 조이사에게 반박을 할 순 없었다.
지금은 바짝 몸을 낮추어야 했다.
‘아이돌 데뷔 실패했다가 기껏 갖게 된 주도권을 포니한테 다시 뺏길 수도 있어.’
포니는 상태창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이돌을 못하게 되는 건 상관이 없었으나 이 일로인해 포니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건 곤란했다.
‘아이돌 탈락을 빌미로 봐줄 테니까 상태창을 뱉어내라고 할 확률이 99%야. 일단 지금은 숙이자.’
근데 날 어디까지 감시를 할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이사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함정을 파고 먹잇감이 걸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의 눈빛이다.
금방이라도 내 몸에 화살이 박아 넣을 것 같은.
포식자의 눈빛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