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08_ 폭탄 발언 (1)
“그럼 그런 거 하지 마.”
“하지 않으면 그 여자를 떼어낼 수가 없잖아!”
“왜 떼어내려고 해?”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여자니까!”
“나도 동조했으니까 내 잘못도 있어.”
“아니야! 너는 잘못 없어. 널 충동질한 그 여자가 잘못한 거야.”
아현이는 나를 옹호하며 철저하게 복순 누나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갔다.
아무래도 내게 받은 실망감과 분노에 대한 책임을 복순 누나 쪽으로 넘긴 것 같았다.
나를 미워하기 보단 복순 누나를 미워하는 걸 선택한 아현이에게 미안함과 더불어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이러면 아현이랑 복순 누나랑 친해지게 만들면 되는 건가?’
모든 여자들이 서로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주 부딪치는 사이라면 서로 싸우지 않을 정도로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3P도 해보고!!’
원대한 꿈을 갖게 된 나는 아현이를 다정하게 꼬옥 안아주었다.
“마음 많이 상했지? 이런 방식으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사과하지 마. 넌 그냥 당한 거야.”
“선생님 미워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나쁜 놈이라 그래.”
“네가 왜 나빠! 너한테 조금도 도움 안 되는 여자가 문제지. 선생으로서도 실격이라고.”
“너도 내 여자지만, 선생님도 내 여자야. 그리고 난 네가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만나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좋을 뿐이지. 너도 그렇잖아.”
“해솔이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바람을 피워서 들켰는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정말 어메이징한 세상이다.
“복순 누나랑 얘기 다 끝냈어. 둘이서 했던 내기는 없던 일로 하기로.”
“어?”
“내가 말했잖아. 나 나쁜 놈이라고. 난 선생님도 포기할 생각 없고, 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 내기는 애초에 성사가 될 수 없는 거였어.”
혹여나 두 사람이 진짜 싸워서 승부가 난다고 해도 나는 두 사람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기를 해봤자 바뀌는 것이 없을 테니 두 사람의 내기는 성립이 되지않는 것이다.
“너 이제 아이돌 활동해야 돼. 그런 여자한테 발목 잡힐 거야?”
“발목 안 잡혀. 너도 선생님도 다 나한테 든든한 존재야.”
“든든하다고? 어떻게?”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뜻이야. 애쓰지 마. 너는 너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충분히 귀하고 값지니까.”
질투심 때문에 뾰족해졌을 아현이의 마음이 다시 둥글둥글해지도록.
아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꽈악 안아주었다.
♣ ♣ ♣
[ ◇◇◇여성 산부인과]
“진주아 환자분 들어오세요.”
“네.”
진주아는 걱정 가득한, 한 편으로는 설렘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잘 지냈어요?”
“네에.”
“먹는 건 잘 먹었나요?”
“네. 챙겨 먹으라고 했던 것들도 꼼꼼하게 다 챙겨 먹었어요.”
“잘 하셨어요. 아기 아빠한테는 연락 하셨고요? 오늘 같이 왔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아직 말을 못했어요.”
“음, 오지랖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기 아빠한테 최대한 빨리 알리는 게 좋아요. 알죠? 사전에 알리지 않고 낳은 아기는 아빠가 원하면 언제든 양육권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걸요.”
진주아는 산부인과 담당 선생님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기 아빠 나이가 어려요.”
“산모님 나이도 어려요. 그리고 아기 존재를 숨기는 건 범죄고요.”
아기가 남자이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심각해진다.
나라에서 철저하게 부모에 대한 신상을 따지고, 둘 중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아기의 양육권을 강제로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주아는 진료가 끝날 때까지 아기 아빠에 대한 얘기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진료를 끝내고 병원을 나선 주아의 표정은 진료실에서 봤던 얼굴과는 정반대가 되었다.
“여자아이면 된다는 거잖아.”
아이 아빠는 곧 데뷔를 하게 될 해솔이다.
‘곧 데뷔하게 될 해솔이한테 네 아이가 생겼다고 말을 하라고? 그걸 누가 반기겠어? 절대 싫다고 할 거야.’
그래서 주아는 숨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숨길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하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나라에서 아이를 빼앗아 갈 수 있다며 겁을 주었지만, 이미 그런 쪽으로는 주아가 다 알아 본 상태였다.
‘여자아이는 나라에서 관심이 없어.’
그렇기에 뱃속의 아이가 여아라면 얼마든지 그녀가 계획한 대로 아빠를 인증하지 않고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지.’
해솔이에게 부담감을 안기고 싶지 않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해솔이에게 부담이 되고, 큰 약점이 될 것이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얼마나 파헤쳐지기 쉬운데 이런 일을 함부로 말해서 그 아이에게 부담을 주겠나.
그녀는 해솔이의 앞날을 막기 위해서 임신을 계획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말은 해야겠지? 그래야 해솔이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때마침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해솔이♥ : 누나,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요? 걱정 되는데 가능할 때 전화 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어쩌면 좋지, 해솔아. 보고 싶은데 당분간 보기 힘들 거야.”
특히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래도 괜찮다.
그녀가 배가 불러 올 때쯤이면 해솔이는 데뷔 때문에 바쁠 테니까.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걸까?”
아기를 갖고 싶다는 욕망과해솔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합쳐져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미 저질렀기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남은 건 직진 뿐.
그녀는 초음파 사진을 소중하게 지갑 속에 넣고, 부모님 계신 집으로 이동했다.
아기를 낳고 키우려면 부모님의 적극적인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이 거부한다면 주아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 나 임신했어.”
“…너 미쳤니?”
“요즘 세상에 임신하면 다들 칭찬하기 바쁘다는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남자는! 책임진대?”
“아직 임신한 거 몰라.”
짜악-!
시원하게 등짝을 얻어 맞았다.
얘기를 하면 엄마에게 맞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기에 덤덤하다.
다만 생각보다 강도가 약한 게 의외였을 뿐.
“이걸로 끝이야?”
“그럼 뭐! 임신 애를 세게 때리기라도 하리?”
“엄마! 흐이잉!!”
진주아도 고작 해봐야 스물 초반이다.
조금은 각오하고 있었던 임신이기는 하지만, 막상 닥치니 겁이 나긴 했다.
“너 솔직히 말해. 계획한 거야?”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으이구! 화상아! 화상아!”
“아아악, 아파아파.”
짝짝!
시원하게 다시 한 번 등짝 스매싱을 날린 주아의 엄마가 말했다.
“어휴,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하는 짓이 똑같으니까 모를 수가 없지.”
“…엄마도 나랑 똑같은 짓을 했다고?”
“있는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흙수저 엄마가 어떻게 네 아빠랑 결혼할 수 있었겠니? 나도 너처럼 덜컥 사고부터 쳤거든. 마음에 드는 순진한 남자 하나를 찍어서 애부터 가졌지. 순진한 네 아빠는 책임지겠다고 나랑 결혼했고.”
“뭐야, 왜 난 몰랐어?”
“뭐 좋은 거라고 딸한테 그걸 알려줘! 그리고 안 알려줬는데도 네가 알아서 똑같은 짓 했잖아.”
“…….”
할 말이 없어진 진주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엄마를 닮아서 이런 거니까 도와줄 거지?”
“미친년.”
“엄마! 울 애기 들어! 욕은 하지 마.”
“지랄을 해요. 지랄을. 아직 귀도 안 생겼어, 이년아!”
괜히 한 마디 더 했다가 오지게 욕 먹은 주아가 깨갱하고 배를 깠다.
“엄마아~”
“애 아빠는 몇 살이야.”
“스무살.”
“어휴, 진짜 순진한 놈 물어온 게 맞나보네. 걔는 아니?”
“아직 몰라. 엄마한테 먼저 말한 거야.”
“잘 했어. 네가 잘 선택했겠냐만은 어린 남자들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게 보통이야.”
“근데 좀 문제가 있어. 걔가 직접적으로 아기 아빠라는 증거를 만들면 안 돼.”
“그게 개 뼉따귀 같은 소리냐.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이딴 호구 년이 내 딸이라고? 난 너 그렇게 안 키웠다.”
“아이, 쫌! 들어 봐.”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엄마에게 아기 아빠의 상황을 설명하자 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세상에 순진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곧 데뷔할 애를 건드렸다고?”
“걔 얼굴 보면 엄마도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두 모녀가 모두 얼굴을많이 밝히는 편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엄마 앞에서만은 당당할 수 있었다.
“사진 있어?”
벌써부터 이렇게 솔깃한 표정을 지어 올 것을 알았으니까 말이다.
“걔가 데뷔할 애라면 결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네. 그럼 너 혼자 키워야 한다는 건데, 그러다가 덜컥 남자애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하니?”
“설마~ 요새 남아 출생률 안 봤어? 작년보다 더 떨어졌잖아. 내가 하필이면 그 작은 확률에 걸리겠냐구. 엄마 도와줄 거지?”
“이것아, 네 인생은 생각 안 해?”
“애기 낳는 게 여자들이 제일 바라는 인생이잖아. 난 벌써 성공했으니까 최고 아닌가?”
“어휴, 내가 이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네. 먹었어.”
골 때리는 망나니 딸의 행동에 엄마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아기에 대한 기대감에 얼굴이 상기됐다.
“몇 주 됐니? 몸은 어떻대?”
“이제 3주 정도 됐어. 의사 선생님이 챙겨 먹으라는 건 다 챙겨먹을 거야.”
“곧 입덧 오면 혼자 버티기 힘들 거야. 당분간 집에서 나갈 생각하지마. 운동 다니는 것도 다 취소해.”
“응. 근데 나 아기 아빠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경력자니까 조언 좀 해줘.”
“남자들이 자기 애 낳은 조강지처는 제대로 대접해줘. 네 아빠 봐라. 그 떵떵거리는 집안 여자들이랑 결혼해도 꼬박꼬박 돌아오는 거. 그게 다 첫 애를 낳고 조강지처가 된 덕분인 거야.”
“알지.”
아빠가 얻은 자식 중에서 가장 예쁨 받는 건 자신이었다.
“애 낳았다고 마음 놓지 말어. 너 아직 조강지처 아니잖아. 연예계에서 활동하면 주변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겠니? 애 하나 낳았다고 자신만만해 하지 말라는 뜻이야. 네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때는 혼인 신고서 서류 접수하는 날이야.”
“응. 엄마가 나 임신하고 아빠한테 말했을 때, 반응이 어땠어?”
“사색이 됐지, 뭐. 세상 끝난 줄 알더라.”
진주아는 엄마의 경험이 담긴 조언을 쫑긋 귀 세우고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