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09_ 해외 리얼리티 촬영 여행 (5)
“흐아아암.”
“어제 일찍 자지 않았어? 왜 이렇게 피곤해 해?”
“시차 때문에 그런가, 자긴 했는데 피로가 풀리질 않네. 나도 늙었나봐.”
“야.”
경태형이 내 말에 발작(?)을 한다.
21살이얼마나 젊은 나이인데 벌써부터 늙었다는 말에 저렇게 발작을 한단 말인가?
쯧쯧쯧!
20대는 아직 애기가 맞다.
30대가 되어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그때부터가 진짜 늙어간다는 게 뭔지 깨닫게 되는 나이였다.
“어제 너무 짧았어. 오늘은 진짜 제대로 놀아보자!”
“우오오오!”
“피디님이 우리 되게 맛있는 음식점 데려다주신다고 들었는데.”
미슐랭 별 3개를 받은 식당의 이름은 주페노 레스토랑.
우리 멤버들이 거기가 엄청 유명하다는 걸 어디서 주워듣고는 노래를 부르니까 피디님이 그곳을 수소문해서 자리를 얻어오셨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다보면 예약을 해놓고 당일에 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노쇼(no-show)라고 한다.
제작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고, 우연히 노쇼팀이 나와 자리가 난 것이다.
그쪽에서도 노쇼 자리에 촬영팀을 넣어 레스토랑 홍보에 도움이 되는 것이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노쇼로 예약 된 시간이 3시입니다. 그때까지 관광을 하시면 됩니다.”
3시까지 완전히 자유 시간.
멤버들 인원이 많다보니 각자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따로따로였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결국 3명씩 나뉘어서 구경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3시에 만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덕분에 경호 인원도 반으로 나뉘었지만, 어제 얘기한 대로 추가 된 경호 인원이 넉넉했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기우연, 제키, 남은규를 A그룹.
강경태, 강준, 진해솔을 B그룹.
이렇게 3명의 멤버가 각자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A그룹은 빡세게 이동하고 다니면서 관광 명소를 구경 다닐 예정이었고, 내가 포함 되어 있는 B그룹은 플라디펜 박물관과 그 근처에 있는 워드팔튼 공원에서 느긋하게 마렌치노라는 나라를 구경할 예정이었다.
“플라디펜 박물관 천장이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꼭 사진 찍어 와야 해요!”
“알았어.”
“으으~! 거기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긴 한데….”
기우연이 찡찡대며 사진 많이 찍어오라는 닦달을 받은 우리는 드디어 찡찡이에게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세를 불렀다.
“제키가 우연이 잘 관리해주겠지?”
경태 형은 자기가 갔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걱정을 했다.
멤버들 중 가장 연장자이다 보니 관리하기 힘든 애들을 자기가 봤어야 했다고 생각한 거다.
“우연이가 은근히 제키한테 꼼짝도 못해. 아마 형보다 더 잘할 거야.”
“그래도 놀이공원은 힘들 것 같은데.”
강준은 놀이기구를 못 타고, 나는 놀이기구 하나 탈 바에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사색을 즐기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다. 더불어 마지막으로 경태 형은 그룹 제일의 늙은이답게 나와 취향이 비슷했다.
‘그래봤자 21살 꼬꼬마지만.’
“여유롭게 마렌치노의 따스한 햇볕을 즐겨보자고!!”
그때부터 시작 된 여행.
나와 멤버들은 평범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관광을 했다.
물론 오늘도 어제처럼 여자들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아려왔지만, 많아진 경호원들 덕분인지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관광에 정신이 팔려서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완전히 관광객에 100% 몰입해서 돌아다녔다.
박물관은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구경하는 맛이 나는 곳이었다.
신나서 구경을 하다가 뒤늦게 정신이 차렸을 때는 이미 3시가 가까워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너무 저희들끼리 신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분량으로 쓸만 한 게 나왔나요?”
끄덕끄덕-
카메라를 들고 있는 VJ 스탭이 카메라로 끄덕이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아까 열심히 풍경 찍던데, 아무래도 그걸로 화면을 꽉 채우지 않을까 싶다.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했었어야 했는데. 이대로면 싹 다 편집 될지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리얼리티가 회사 자체 제작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의외로 제작진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굉장히 좋은데?
“정말요? 분량이 나왔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고 계속 지금처럼만 해. 그림 아주 좋아.”
“…….”
찜찜하지만 제작진이 좋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애들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슬슬 배고픈데 레스토랑으로 가자.”
“응.”
박물관과 워드팔튼 공원을 구경한 뒤 레스토랑에서 멀지 않은 곳을 돌아다닌 덕분에 3시가 되기 전에 목표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쇼 난 자리를 차지한 탓에 일행을 바깥에서 기다릴 수 없어서 먼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3시 30분이 넘어도 A그룹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얘네 왜 이렇게 안 와?”
“뭐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전화 걸어볼까?”
한참 애들 걱정하고 있는데, 피디님이 난감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피디님 얼굴을 보고직감했다.
아, 뭔일 있구나.
“A그룹에 문제 있는 건 아니죠?”
내 질문에 피디님이 한숨을 푸욱 쉬며 말했다.
“A그룹에 살짝 문제가 생겼어요.”
“심각한 일이에요?”
이미 음식을 멤버들 것까지 모두 시킨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소매치기를 당한 모양이에요.”
“헐. 누가요?”
“헉!”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다친 애는 없고요? 우연이가 소매치기 당했나?”
“걔가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니니까 그럴 확률이 높은데.”
역시 기우연을 막을 수 있는 건 제키 혼자로는 부족했던 걸까?
“일단 소매치기 당한 건 기우연이 아니에요.”
“그게 더 놀라운데요.”
내 입장에서 평소 멤버 애들을 조카처럼 생각하고 있는 탓에 절로 몸 걱정부터 들었다.
“은규군이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우연 군이 좀 다쳤다고 하네요. 크게 다친 건 아니고, 넘어져서 무릎이 살짝 까졌대요. 우연군이 소매치기를 따라가다가 넘어진 거죠.”
“헉!”
“?!”
“아니, 얘가 미쳤나.”
기우연이 사고 제대로 쳤구나 싶다.
“다행히 경호원이 빠르게 뒤따라가서 기우연군을 낚아챘나 봐요. 그 와중에 넘어져서 다친 거죠. 차라리 소지품 도둑맞는 게 낫지, 그런 거 따라갔다간 100% 납치입니다.”
“와~ 그 분이 우연이를 살렸네요. 그거 놓쳤어봐요. 나 소름 돋았어.”
“걔는 진짜 세상 무서운 걸 모르네. 어떻게 그걸 따라갈 생각을 한 거지?”
어떻게 보면 경호원이 소매치기를 사전에 막지 못한 게 잘못이긴 하다.
하지만 관광지에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는 일을 경호원이 무슨 수로 다 막아내겠나.
소매치기를 따라가려고 한 기우연을 놓치지 않아준 것만으로도 제 할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밥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일어나는 게 나을까요?”
“아뇨, 병원 갔다가 지금 이쪽으로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이제 연락을 했더라고요. 놀란 멤버 분들 맛있는 거 먹고 진정 좀 시키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고요.”
확실히 요리는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근처까지 왔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도착했다.
가게 안에 들어 올 수 있는 제작진 수는 정해져 있었기에 멤버들과 VJ 스탭만 덩그러니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들의 최대 관심사는 당연하지만 기우연의 무릎과 소매치기 당한 남은규의 상황이었다.
강준은 남은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괜찮냐?”
“응.”
“뭐뭐 털렸어? 중요한 거 들어 있었어?”
“돈 조금이랑 잔뜩 샀던 기념품 전부. 그래도 핸드폰은 지켜서 다행이었어.”
“기우연이 소매치기 쫓아갔다는 건 진짜야?”
“어. 내가 그것 때문에 식겁했잖아. 제키 형이 기우연 잡으라고 소리 안 쳤으면 진짜 큰일났었을 수도 있어.”
“…죄송함다.”
기우연은 이미 엄청나게 까이고 왔는지 비 맞은 처량한 강아지처럼 축 처져 있었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따라간 거야?”
“순간 욱했어요. 그냥 잡아야 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어휴, 무릎은?”
“괜찮아염. 피 쪼금 난 것밖에 없어여.”
기우연이 눈알을 살살 굴리는 것으로 보아 우리들이 잔소리 할 것을대비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피식 웃고 녀석의 앞에 접시를 놔주었다.
“이거나 먹어. 배고플 거 아냐?”
“…이게 끝이에요? 화 안 내요?”
“이미 잔뜩 잔소리 듣고 온 것 같은데 여기서 더 기죽일 수는 없잖아.”
잘못했어도 우리 멤버이고, 우리 애다.
“혀어엉~!”
기우연이 완전 감동받았는지 얼굴이 울망울망해진다.
‘그래도 아예 따끔하게 혼내지 않을 수는 없지.’
나는 녀석의 앞에 새 포크와 물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래도 진짜 잘못 하긴 한 거야. 너도 뒤늦게 무서웠지?”
“완전요.내가 뭔 짓을 한 거람!? 했다니깐여.”
“너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무서운 일이었다는 거 알았을 거고, 안 좋은 일 당하기 싫으면 두 번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지.”
“절대절대절대 안 할 거에요.”
“더불어 앞으로 널 혼낼 사람들은 수두룩하거든. 굳이 나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넵?”
기우연의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매니저 실장님과 로드 매니저 그리고 피디님과 제작진들 모두 기우연이 감당해야 할 어른들이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잔뜩 기 빨리고 돌아 올 기우연을 다독여줄 생각이었다.
“제키, 수고 많았어.”
“…쟤 때문에 제 수명 10년은 줄었을 거야.”
“제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너는 포상으로 먹을 자격 있다.”
“형, 저는요?”
“남은규 너는 조심 좀 하지 그랬냐! 얼마나 넋을 놓고 있으면 소매치기를 당하냐? 그 정신이면 보쌈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으으, 너무해. 나만 혼나는 거야?”
“기우연은 잔뜩 혼났고, 또 앞으로 혼날 거니까 패스하고 우리는 널 담당하려고.”
“소매치기 안 당하게 주의하는 법부터 잔소리 들어가자.”
멤버들이 눈을 번뜩이며 남은규를 응시했다.
냠냠쩝쩝 음식을 먹는 제키와 기우연 사이에서 남은규는 우리 멤버들에게 탈탈 털렸다.
“진짜 여기 너무 맛있당.”
신나게 밥을 먹었던 기우연은 숙소로 돌아온 뒤에 이어진 부모님의 전화 러쉬로 다음날 눈이 퉁퉁 붓게 되지만, 아직까지 자기의 미래를 모른 채 현재를 즐기는 기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