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10. 데뷔 (1)
기우연이 일으킨 사건이 잘 수습 되고, 이후로 리얼리티 촬영이 계속해서 진행 됐다.
호텔에서 나와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지내며 현지인과 친분을 쌓는 것도 찍고, 쇼핑을 가서 요리를 대접하는 것도 찍는 등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든든하게 리얼리티 분량을 채운 우리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사고가 나지 않고 무난하게 촬영이 진행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회사에서도 이번 일로 우리들의 경호에 경각심을 느끼고, 자체적으로 경호 인원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멤버들한테는 좋은 소식이긴 해.’
해외에 한 번 다녀오니 데뷔일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우리들의 데뷔 날짜가 확정 되고, 무대 의상이 나왔으며, 데뷔 컨셉에 맞춰 헤어를 변경하는 등의 일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터넷에선 우리들의 얼굴이 공개되면서 허니 엔터의 새로운 신규 보이 그룹에 대한 관심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는 중인 덕도 있지만, 아이돌 갤러리에서 역대급 비주얼 멤버들이 나왔다면서 반응이 제법 좋았던 모양이다.
“이게 다 형 얼굴 덕분이래요.”
“역시 아이돌은 비주얼인가.”
“강준이도 팬 엄청 많이 생겼어.”
“부럽다!!!! 강준!!!”
“에이, 나보다는 해솔이 형이 대박난 거지.”
“회사에서 주구장창 얼굴 찍어대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다 쓸 곳이 있다면서 주구장창 찍어대던 사진들을 회사는 정말 알뜰살뜰 써먹었다.
온갖 화제란 화제는 싹 다 가져오겠다는 것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에서 사진을 쏟아냈다.
덕분에 기자들도 단조롭지 않게 여러 사진을 가져다가 사용해 기사를 쓸 수 있었다.
화장과 보정을 통해 매끈한 얼굴이 된 다른 멤버들의 사진도 굉장히 멋있게 잘 나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연습하자, 연습!!”
쇼케이스를 앞둔 지금.
회사에서 열심히 홍보를 한 만큼 멤버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대놓고 비주얼 그룹이라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건 놀랍게도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주얼 그룹이라고 호들갑 떨어놓고 실물에서 뽀록이 나면 욕을 처먹는데, 내가 있으니까 회사에서 마음 놓고 비주얼로 홍보 방향을 잡았다고.
덕분에 애들은 미모 챙기랴, 노래 연습하랴, 춤 연습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습연습연습연습.
그리고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가끔 얻는 휴식이 쳇바퀴처럼 이어졌다.
‘이제 슬슬 코인을 쓸 때가 온 건가.’
포니에게 추천을 받은 몇 가지 물건들을 노트에 적어놓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를 위해 쓸 코인과 주아 누나를 위해 쓰일 물건.
코인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한 번 물건을 살 때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리고 선택한 물건.
일단 주아 누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은 이것이다.
[건강기원부적(임산부용)]
임산부용으로 제작 된 부적으로 아기를 낳을 때까지 임산부의 몸 상태를 관리해주는 아이템이다.
임신기간 동안 생기는 여러 좋지 않은 몸의 변화들과 더불어 임신 후유증을 최소화 해주는 역할도 하고, 아이가 건강하게 병 없이 태어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이걸 본 순간 무조건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적이라고 적혀 있지만, 모양이 예쁘고 부담 되지 않을 만큼 가는 팔찌 모양이라서 착용할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24시간 착용하고 다닐 것을 염두 해두고 제작한 것 같다고나 할까?
‘건강 기원 부적(임산부용)을 구매하는데 1,500코인, 나머지 500코인으로는 반지 하나 건졌네.’
500코인짜리 반지.
아쉽지만 착용 능력이 대단한 건 아니다.
그런데 왜 500코인이나 주고 샀냐고?
‘무려 다이아몬드 반지니까.’
백금 소재의 다이아 세팅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3캐럿 다이아 반지.
커다란 백금 다이아몬드 주변으로 다이아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화려함의 극치인 반지였다.
‘여기 돈으로 적어도 5천만 원은 훌쩍 넘을 거라고 했지?’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내 통장에는 2천만 원이 전부.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의 변치 않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돈으로는 1코인으로도 교환이 불가능할 정도로 코인의 가치가 훨씬 뛰어난 덕분에 500코인을 들여서 지금의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대의 반지를 구매하는데 성공했다.
‘주아 누나한테 빨리 주고 싶다.’
엄청 좋아할 거다.
이 반지는 임신기간 동안 가까이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1천 코인은 앞으로 활동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물건으로 구매를 했다.
[체력주머니]
체력 주머니라는 물건은 말 그대로 내 체력을 주머니 안에 저장시켜두고 힘들다고 생각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아이템이다.
체력이 넘칠 때는 체력을 저장시켰다가 나중에 꺼내 쓸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 물건의 대단한 점은 내 체력을 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멤버들이 골골 거릴 때 조금씩 나눠주면 되겠어.’
아이돌 그룹은 나 혼자 잘 되는 것보다는 다 함께 잘 되는 게 가장 좋다.
‘나 혼자 체력에 넘쳐서 힘내는 것보단 다른 멤버한테 체력을 나눠주고 편하게 쉬는 게 훨씬 낫지.’
문제가 있다면 정작 물건을 구매했는데 저장할 체력이 없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느라 남아나는 체력이 없었다.
물론 체력 주머니가 무용지물이 된 건 아니었다.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모아뒀다.
열심히 모은 이 체력들은 나중에 데뷔 날이 되면 사용할 예정이었다.
♣ ♣ ♣
“이제 정말 데뷔하는구나.”
아현이가 감개무량하다며 내 손을 잡았다.
“전담팀에서 엄청 열심히 해줬다고 들었어. 고마워.”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한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 걸. 헤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회사에서도 데뷔 전부터 분위기가 좋은 건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고.”
“덕분에 부담감 100%야.”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잘 해낼 거야.”
“응원해줘서 고마워.”
츄웁-! 쪽, 쪼옥, 쪽!
모처럼 아현이와의 시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자 곧장 입술을 맞췄다.
“핫! 여기서는 안 돼! 회사잖아.”
아현이는 복순 누나와의 일 때문인지 회사에서 나와 조금만 과한 접촉을 해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도 없잖아.”
“누가 볼 수도 있어. 조심해야 돼. 이제 정말 코앞으로왔는데 문제 생기면 안 되잖아.”
“알았어.”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욕망은 잠시 안에 담아두기로 했다.
쿵!
“흡!”
“!!”
끼이익-
그때, 우리가 쉬고 있는 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찍찍대는 쥐새끼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네?”
“로즈 트레이너!”
“선생님?”
복순 누나와 은밀한 만남을 가졌을 때, 이곳을 쓴 적이 있었다.
아마 그걸 기억하고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여자의 직감?”
“스토커!! 여긴 왜 온 거에요!! 방해하지 말라구요!”
아현이가 아르르- 경계심을 보였다.
하지만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왈왈 짓는 것처럼 굉장히 하찮아 보였다.
실제로 복순 누나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해솔이 전세냈니? 나도 얘 만날 자격있어.”
“해솔이랑 약속 잡은 거 아니잖아요.”
“잡았는데?”
“네?!”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는 아현이를 보며 복순 누나의 어깨를 잡았다.
“아현이한테 거짓말 하시면 곤란해요. 진짜인줄 안다고요. 그만 놀리고, 정말 어떻게 알고 온 거에요?”
“칫, 재미없어. 네 멤버 강준이 보컬 때문에 찾아왔다가 걔한테 네 소식을 전해 듣고 잠깐 만나려고 했었어. 근데 연락을 받아야지. 이아현 저 아이도 자리에 없다고 하니까 바로 눈치 챌 수밖에 없었어.”
우리 그룹의 메인 보컬인 강준이니 복순 누나에게 조언을 받으러 가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부담감 왕창 받고 있는 멤버들인지라 조금이라도 실력을 늘리기 위해 각자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강준이 교육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걔는 이미 충분히 잘 해. 이제 걔한테 필요한 건 자신감이랑 경험 뿐이야. 차라리 댄스나 더 손보라고 말하고 보냈어. 근데 멤버들 중에 제일 실력이 부족한 너는 여자 만나서 히히덕거리고 있네?”
전 여자를 만나야 실력이 늘어납니다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헛기침을 하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저도 무대 준비 도움 좀 받으려고 온 거에요.”
“이아현이 너한테 도움이 된다고?”
“당연하죠.”
“정말?!”
…네가 놀라면 어떡하니?
이아현은 금치 소문인 듯 깜짝 놀라서는 내 팔에 매달렸다.
가뜩이나 머리도 분홍색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니 토끼가 따로 없다.
‘이건 좀 심쿵인데.’
“이아현이 무슨 도움이 됐을까나? 무~척이나 궁금한 걸?”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생기거든요. 아현이는.”
“!!”
복순 누나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아현이의 얼굴에는 예쁜 홍조가 올라온다.
‘진짜 하렘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아현이와 복순 누나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중간을 지키는 게 정말 어려웠다.
아현이는 달래놨으니 이제 복순 누나를 달래야 할 차례였다.
‘복순 누나는 절대 지고 들어가면 안 돼.’
내가 조금이라도 숙이고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약점을 잡은 듯 내 목덜미를 낚아채갈 여자였다.
그러니 복순 누나에게는 조금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강도는 선을 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고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복순 누나한테도 도움을 받아볼까 하는데 괜찮아요?”
“나한테 힘을 받는다고?”
“네.”
“앗!”
“네가 말한 힘을 받는다는 게 뭔데?”
“아, 안 돼! 내가 해줄게. 나한테 받으면 되잖아!”
아현이는 도움을 받겠다는 말의 뜻을 눈치 챘는지 방해하려고 했다.
눈앞에서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을 거다.
“아현아?”
“나, 나랑 하자구. 내가 더 도와줄게. 해줄 수 있어.”
“뭐야? 뭔데? 혹시 야한 거야? 둘이 여기서 섹스했구나! 정액 냄새는 안 나서 안 한 줄 알았는데, 이래서 얌전한 고양이가 더 무섭다니까.”
“아, 아니에욧! 안 했어요!”
“정말? 그럼 둘이 이 으슥한 곳에서 소꿉놀이라도 한 거니? 호호호!”
아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러다간 둘이 또 싸우겠다.
나는 복순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요. 말을 왜 이렇게 거칠게 해요. 설마 아현이랑 싸우려는 건 아니죠? 얘기 다 끝났잖아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하고 얘기가 끝난 상황이다.
하지만 말로 얘기를 끝냈다고 해서 감정이 마냥 이성을 따라주는건 아닌 모양이었다.
“…알았어. 내가 너무 예민했네. 애한테 과했어.”
복순 누나가 생각보다 순순히 내 말에 수긍을 해주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질투심 때문에 말투가 뾰족했다는 걸 인정하는 듯했다.
덕분에 씩씩대던 아현이도 화를 터트릴 명분을 잃었다.
“아현아, 흥분 가라앉혀.”
아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토닥여주었다.
“아까 한 말 취소할래.”
“그래그래.”
“언제든지 말만 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회사에서 절대 안 된다고 했던 아현이의 마음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의도치 않게 질투심이 아현이의 잠겨졌던 도덕심을 풀어버린 모양이다.
“아니야. 네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할 생각 없어.”
“나는? 저 쪼그마한 애만 달래주는 거야?”
복순 누나의 투정에 아현이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두 여자의 몸이, 내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