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12. 조안나 (4) 수정
* * *
아~! 이 부분이 살짝 아쉽네. 역시 영감에 과하게 빠지는 것도 좋지 않다니까. 이 부분은 수정해야겠어. 그나저나 자기, 몸 비율이 미쳤는데? 사람 맞아? 마네킹보다 비율이 좋은 몸은 처음 봐. 이런 몸을 가졌으면서 모델을 하지 않다니 너무 아깝잖아.
평범하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만들어진 몸이 아니라 포니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몸이다 보니 사기적인 부분이 존재했고, 디자이너인 조안나의 예리한 눈썰미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의상을 하나만 입는 게 아니라 여러 벌 입어야 했기에 모두 피팅이 끝나는데까지는 약 4시간정도가 걸렸다.
수선을 다 끝내는데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아.
좋아, 예정대로 하면 되겠네. 아, 그리고 모델들은 당분간 이 몸매에서 빼지도, 찌지도 말아야 한다는 거 알고 있겠죠?
조안나의 말을 들은 메이 린이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현재 우리 상태에 옷을 맞췄기 때문에 몸매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옷을 수선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다들 돌아가기 위해 움직일 때, 나는 실장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안나랑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전화번호도 제대로 모르거든요.”
“정말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거야?”
“마렌치노에서 개인 시간이 얼마나 있었다고 깊게 친해지고 말고 했겠어요. 오히려 절 만나겠다고 여기까지 온 조안나가 신기할 지경인 걸요.”
“스캔들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물론 네가 조심할 거라는 건 믿지만 내 입장에선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싶은 심정인 거야.”
“네, 조심할게요.”
이미 나는 글렀어요, 실장님.
숨겨둔 여자와 아이까지 있는 나에게 믿는다는 말을 한 실장님에게 속으로 사과를 드리면서.
드디어 조안나와 둘이서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조안나와 나는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해후를 했다.
츄웁 츄웁 쪼옥!
하으, 짜릿해. 내가 그리워했던 순간이야. 쫌만 더 하자.
웁!
쪽, 쪼옥, 쪼옥, 쪽!
입술이 닳아 없애트릴 기세로 달려드는 그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실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 노트에 의상 디자인을 그리던 모습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그날과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조안나의 모습이 멋있더라고.
나 너 때문에 아래가 젖어버려서 중간에 몰래 화장실 다녀온 거 알아?
와우, 그건 몰랐네요.
기껏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런 소리를 하면….
다신 진을 만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시 만났잖아. 너무 기뻐서 그날 일이 자꾸 떠오르더라고. 내 뮤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설마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조안나가 내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눈을 흘겼다.
그럼 왜 먼저 가버린 거야? 난 자고 일어나면 자기가 내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사정상 아침까지 자리를 비울 순 없었어요. 전 아이돌이잖아요. 그래도 연락처를 남겨둬서 조안나가 연락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 아는 거라곤 네 이름뿐이었다고.
연락처 적어두고 나왔는데 못 봤어요?
몰라,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 혼자였다고.
울상을 짓는 조안나를 꼭 끌어안았다.
연락처를 좀 더 눈에 띄는 곳에 뒀어야 했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생각 못했다.
아침까지 함께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엄청 그리웠어. 자기와 함께했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었거든. 자기랑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한 여자라면 아마 나처럼 됐을 거야. 시도 때도 없이 그날 일을 꿈으로 꾸면서 아랫도리를 적셨으니까.
음.
그래서 말인데, 오늘 시간 돼? 나 오늘 밤은 너랑 함께 있고 싶어.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하면 그만한 보상을 해달란 말이야.
조안나가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노골적인 섹스어필을 해왔다.
여자가 섹스를 청하는데 남자가 되어가지고 거절할 순 없었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마든지요. 오늘 밤 기대해요. 기절시켜줄게요.
호호호! 다른 남자가 그랬으면 허풍이라고 생각할 텐데, 네 말은 진짜라는 걸 아니까 설레서 가슴이 두근거려.
그나저나, 정장을 입고 있는 조안나의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어두운 밤에 봤던 조안나는 살짝 풀려진 표정에 나른하고 섹시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조안나는 약간 냉미녀 스타일이다.
조안나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게, 만약 나와 사전에 친분이 없었다면 웃으면서 대화하기보다는 진지한 분위기에서 피팅이 진행 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프로폐셔널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네.’
하룻밤 인연이기에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혹시 내가 찾아 온 게 부담 되는 일이었을까?
조안나의 등장이 워낙 급작스러웠기에 당황하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뇨, 엄청난 선물을 갖고 와줬는데 부담 될 리 없잖아요.
사실 내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행동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 그땐 네가 연락처를 두고 간 줄 몰라서 화가 나 있는 상태였거든. 그래? 네가 미련없이 떠났으면 나도 미련없어! 하고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했네요?
응. 어쩔 수가 없더라. 네가 없으니까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어. 난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았다니깐. 근데 이제 알겠어. 나는 뮤즈를 잃어버린 가련한 예술가였다는 걸.
조안나도 조안나만의 사정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나를 만나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영감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조금 짓궂은 질문을 했다.
나랑 한 섹스가 그렇게 기억에 남았어요?
…부정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부정할 수가 없네. 지금 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떠오르고 있어. 아무래도 난 네가 없으면 예술가로 살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렸나 봐.
장난이 아니라 심각한 말이었나?
조안나의 얼굴에 상심이 가득하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군요? 어쩌려고 그래요. 당신은 마렌치노로 돌아 가야하잖아요.
화보 촬영이 끝나면 우리는 또 다시 먼 거리를 떨어져야 한다.
나 여기 잠깐 온 거 아니야.
그럼요?
꽤 오래 있을 거야. 적어도 1년 이상? 더 오래 있을 수도 있고. 아직 구체적인 기간은 모르겠어. 그 이상은 생각 안 해봤는데 그때가 닥치면 생각해보려고.
조안나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가볍다.
하지만 저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이곳에 남겠다고 결심했을 게 보였기에 미안해졌다.
활동하느라 자주 만나지 못할 텐데요.
가끔만이라도 시간을 주면 돼. 나도 네 직업적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모르고 온 거 아니야.
남자 아이돌에게 스캔들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조안나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다 알면서도 여기에 남겠다는 거네요.
이 나라에도 프리작 지부가 있어서 거기로 출근할 거야. 낯선 나라에서 동양인들의 패션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거고.
조안나가 내 코에 자기의 코를 비비며 싱긋 웃었다.
여기에 있는 게 마냥 손해인 건 아니라는 뜻이야.
어떤 향수를 쓰는지 물어보고 싶다.
가까이 붙어 있는 그녀의 몸에서 향기가 느껴졌다.
그 향기가 무척 유혹적이라서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그녀를 덮쳐 찐한 스킨십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럼 역시 이번 화보도 조안나가 진행한 거겠네요. 나 때문에.
흥,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수석 디자이너라지만,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그럼 정말 화보는 우연인 거에요?
설마~ 당연히 내가 추천했지. 근데 의외로 다른 직원들 반응이 괜찮더라? 오로지 내 의지만으로 이뤄진 화보 촬영은 아니라는 뜻이야. 당신이랑 당신 멤버들은 프리작을 움직일 힘을 갖고 있었어. 더군다나 내 작품이 완성 되려면 당신이 필요 했는걸?
나로 인해 받은 영감으로 만든 옷이었으니 내가 직접 그 의상을 입어야만 완벽한 매력을 뽐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의상이라면 아까 입었던 옷들일 텐데, 직접 두 눈으로 본 소감이 어때요? 기대한 만큼이 나왔나요?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물론 피팅 때 워낙 반응이 좋아서 부정적인 소감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했다.
조안나는 내 물음에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어. 내가 그날 네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 솔직히 지금 다시 디자인 할 기회가 생기면 당장 그러겠다고 하고 싶을 정도야.
오늘 입었던 옷도 충분히 훌륭했어요.
흐흥, 나 눈치 빠르거든? 패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네.
조안나는 확실히 예리했다.
옷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바로 나다.
얼굴이 안 될 때는 뭘 입어도 그저 그렇다는 걸 알아서 관심이 없었고, 얼굴이 될 때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대충 입고 다녔다.
결국 결론은 이래도 저래도 나는 패션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놈이라는 거다.
♣ ♣ ♣
스튜디오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조안나와 해후를 끝낸 나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으로 아쉬운 만남을 끝냈다.
중간에 끼어 있는 키스 타임은 모르는 척 해주기를 바란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밤 도플갱어 인형을 쓸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조안나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만날 거다.
“오늘 입은 옷들 되게 예쁘지 않아요?”
“어…난 좀 난해하던데.”
“형은 패션을 몰라도 너무 몰라. 그래 갖고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어요?”
“그냥 입고 거지같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얼굴이 아까워!! 그렇게 쓸 거면 나 줘요!”
나도 받은 거야, 인마.
우리들의 대화를 듣던 실장님이 놀라운 얘기를 해준다.
“촬영 끝나면 옷 준다던데, 잘 입고 다녀 봐.”
“우왓! 진짜요? 거기 옷이면 다 명품인 거잖아요. 되게 비쌀 텐데?”
“비싸지, 당연히. 너희들이 입고 다니면 홍보 효과가 있으니까 주는 거야.”
“에…저희가 입고 다닌다고 홍보 효과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란 말이다. 요 녀석들아.”
신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성과를 낸 ‘에어플레인’이지만, 기존에 엄청난 수의 팬을 갖고 있는 인기 그룹에는 비빌 수가 없는 상태였다.
막 새싹이 돋고 있는 상황이라서 아직 여러모로 연약하다.
비바람을 맞아도 꺾이지 않도록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보니까 작가님이 되게 까다로워 보이시더라. 너희들이 촬영 날 잘 해야 옷도 서로 웃으면서 받을 수 있는 거야. 작가님한테 호통 좀 들었다고 울면 큰일 난다. 그쪽 사람들은 남자가 울어도 안 봐주거든.”
꿀꺽
“패션계 쪽이 엄청 힘들다고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상상 그 이상이야. 연예계 바닥도 만만치 않은 곳이지만, 거긴 진짜 야생 그 자체라더라.”
동료라는 개념이 없는 곳이라서 그렇다.
저놈을 없애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단다.
그래서 그런지 그쪽 계열 사람들은 대부분 기가 셌다.
“으, 작가님 눈빛 또 생각났어.”
“꿈으로 나올지도.”
남은규와 강준이 앓는 소리를 한다.
메이 린작가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꿈에 나온다면 바로 악몽 확정이다.
“그거 완전 악몽 아니야?”
“무조건 악몽이지.”
나도 온전히 견뎌내지 못하고 쫄았는데, 애들에겐 오죽할까?
발랄하고 해맑았던 기우연의 미소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우리 숙소 가서 좀 더 연습할까요?”
“그래. 그러자.”
“근데 메이 린 작가님, 엄청 유명하신 분이겠지? 뭔가 포스가 장난 아닌 게 엄청 유명할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볼까.”
“검색하면 나올 정도면 대박일 듯.”
옹기종이 모인 애들이 핸드폰을 꺼내 메이 린 작가를 검색했다.
그리고 메이 린 작가를 검색한 순간 엉뚱하게도 우리와 연관 된 기사가 발견됐다.
“우리랑 엮인 기사 떴는데?”
실장님이 강경태가 깜짝 놀라는 걸 듣고 말했다.
“어어~ 맞아. 오늘 기사 나오기로 했어. 너희들 프리작이랑 콜라보 해서 화보 찍는 거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자랑스러운 건 널리널리 알려야 하는 법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