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14. 레벨업 (6)
* * *
“썬솔~!!”
“하하, 진짜 앞으로 그렇게 부르려고?”
“응! 별로야?”
“아니, 그냥 이름이 아니라서 그런지 뭔가 새롭네.”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다가 바깥에서 나를 부르는 애칭을 만들어야겠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내 이름이 진해솔이니 해솔에서 해를 썬으로 바꾸고 부르겠다는 게 아현이의 깜찍한 생각이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별 생각 안 들었는데, 직접 듣고 나니 썩 나쁘지 않았다.
“나만 애칭으로 불릴 순 없으니까 보답으로 나도 네 애칭 만들어야줘야 할까?”
“꺅! 만들어줘! 나도 애칭으로 불리고 싶어!”
우리 둘은 만나자마자 찰싹 달라붙어서 꽁냥댐을 멈추지 않았다.
아현이는 내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왔는지 평소보다 더 발랄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의 애교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게 본인의 기분을 숨기기 위한 일이었을 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현이의 애칭을 정하자며 한동안 수선을 떨다가 슬며시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아현아, 나한테 털어놓기 힘든 일이야?”
아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한테 고민하는 게 뭔지 알려줄 수 있어?”
“정말 별 거 아닌데….”
아현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았는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사실 엄마가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어.”
“공부를?”
“내 목표를 말했는데 엄마 눈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야. 소속사 직원으로 근무해도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아직 젊으니까 더 큰 꿈을 꾸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
“음….”
아현이의 부모님으로서 충분히 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현이가 말했던 것처럼 ‘별 거 아닌 일’에는 해당 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뭐야, 되게 중요한 일이잖아. 네 앞날을 정하는 일인데 이게 어떻게 안 중요해?”
“어차피 안 하려고 했던 거라서….”
“왜? 공부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아?”
“내 꿈은 네가 스타가 될 수 있게 돕는 거야. 근데 공부한다고 그만두는 건 말이 안 되지.”
아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쩐지 그녀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사 말단 직원으로 일을 해봐야 결국 끝이 한정 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지구에서 살았던 그 생활을 아현이도 하는 건가?’
그건 좀….
직장 생활에 찌들어서 산다는 게 얼마나 거지같은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아현이를 말리고 싶었다.
아현이가 과거의 나처럼 정장을 입고 다크서클이 낀 동태 눈깔로 청춘을 하루하루 사무실에서 죽여 나가는 꼴을 볼 바에야 세상에 조금 다치고 구른다 해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으면 한다.
“내가 보기엔 어머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넌 내가 회사 그만두고 공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현이는 내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 못했는지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나야 네가 회사에서 날 도와주는 것도 좋긴 하지. 근데 네가 회사에 다니는 게 오로지 나 때문인 거면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어. 날 도와주는 게 우리 회사 직원이 되는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다른 방법?”
생각해보지 못했던 건지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아현이의 취미가 노래를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연습생을 그만두고도 유일하게 꾸준히 취미로 하고 있는 게 작사 작곡이었다.
때때로 내게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곤 했는데, 노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막귀인 탓에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
“음악 말이야. 작곡하는 거 좀 더 제대로 배워보는 거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네 적성에도 맞을 것 같고, 만약 네가 좋은 노래를 만들면 나한테 줘서 도움이 될 수 있잖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라서….”
“왜 생각을 못해봤어? 난 네가 노래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언젠가는 작곡가를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나, 나는 특별하지 않으니까. 내가 만든 노래가 특별하지도 않고. 그냥 취미로 조금 끄적인 게 전부일 뿐인 걸…?”
“그런 게 어딨어? 회사에서 알려주는 작곡은 썩 전문적이지 않잖아. 노래랑 춤 배우느라 정신없는데 작곡까지 어떻게 신경 쓰겠어. 일단 제대로 배워보고 이곳저곳에 부딪쳐보고 난 이후에 그런 말을 해도 안 늦을 것 같아.”
아현이는 아이돌로 한 번 실패하면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20살까지 아이돌을 목표로 춤과 노래를 배웠는데, 그걸 포기한 순간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막 성인이 된 아이가 홀로 견뎌내기엔 힘든 환경이다.
아현이는 회사 직원이 되기로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도전보다는 안주를 선택했고, 누군가에게는 그 선택이 최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현이가 돈에 쪼들리는 것도 아닌데, 창창한 20대부터 현실에 안주하기엔 청춘이 너무 아깝잖아.’
도전을 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직 젊음을 갖고 있는 아현이는 현실에 안주할 때가 아니라 도전을 해야 할 때였다.
만약 정말 작곡 쪽에 생각이 없었다면 아현이도 내가 말한 순간 눈을 반짝이지 않았을 거다.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망설이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
등을 떠밀어준다면 아현이는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하지만 난 이미 한 번 실패해 버렸는 걸? 그걸로 몇 년을 날렸는데 또 실패하면 다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다른 사람들이 왜 널 한심하게 생각해? 그리고 그 사람들이 뭔데 네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가늠하는데? 네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때까지 넌 실패한 게 아닌 거야. 그리고 만약 네가 작곡하는 걸 포기하고 싶어지면 나한테 말해. 네 남은 인생, 내가 책임져줄 테니까.”
아현이가 만약 작곡가로 데뷔하지 못해서 또 다시 실패했다고 운다면, 남은 그녀의 인생은 진해솔의 아내로 살아가게 할 생각이었다.
이 세계에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혼자 사는 여자들에겐 부러움의 시선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아무도 그녀에게 실패자라며 손가락질 할 수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 그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아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치 챘으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아현이의 손을 잡아당겨 품에 안고, 그녀의 귀를 앙 이빨로 살짝 깨물었다.
“흣!”
“알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
아현이가 내 옷깃을 꽉 쥐었다.
아직도 불안한지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한참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다독여주며 달래준 후, 아현이는 기운을 차린 뒤 내게 말했다.
“네 말대로 한 번 도전해볼게.”
“정말? 이렇게 갑자기 결정해도 되겠어?”
“응. 네가 내 인생 책임져준다고 했으니까 도전해볼래. 해보고 안 되면 너한테 책임지라고 매달릴 거야.”
슥슥
아현이의 고운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이 너무 귀여우면 깨물고 싶어진다는데, 지금 내 심정이 바로 그랬다.
“귀엽기는, 나중에 엄청난 작곡가가 돼서 노래 안 준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헤헷!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해.”
“암요, 누구 말씀이라고요. 하하!!”
아현이의 엉덩이로 팔을 움직여서 번쩍 들어올렸다.
쪽쪽쪽! 쪽쪽쪽!
아현이의 입술에 뽀뽀 세례를 내렸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도전을 선택한 아현이가 너무 기특했고, 사랑스러웠다.
뽀뽀 세례를 받은 아현이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내게 물었다.
“…할 거야?”
“네가 너무 예뻐서 하고 싶은데, 싫어?”
“아니. 좋아.”
배시시 웃는 아현이의 입술을 훔치고, 그녀와 함께 침대로 움직였다.
? ? ?
아현이는 마음을 제대로 먹었는지 출근하자마자 회사에 퇴직서를 냈다고 한다.
의외인 것은 그녀의 퇴사 희망에 회사가 별다른 잡음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복순 누나가 아현이의 퇴사를 듣고 한 말에 따르면, 연습생이었다가 회사 직원으로 입사해 일을 시작한 사람 중에서 끝까지 남아서 일하는 애들이 정말 드물다고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워낙 이쪽 바닥이 제대로 일할 생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적어서 그래.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미래를 생각하면 공부해서 다른 직종에 도전하는 게 훨씬 낫지. 그나저나 너 때문에 끝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제가 도전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아현이는 분명 잘 해낼 거에요.”
아현이의 앞날이 빛나기를 바란다.
정말 그녀가 대단한 작곡가가 되어서 내가 부를 노래를 만들어주고, 그 곡으로 내가 활동을 하게 될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런 앞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건 아현이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수업 시작하죠.”
“어째 요즘 수업을 더 열심히 한다?”
“아현이가 만들어주는 노래를 제대로 부르려면 저도 노력해야 하니까요.”
내 여자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아현이의 곡을 제대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가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컴백을 앞둔 나는 한층 더 높은 레벨로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나가고 있었다.
연습에 집중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삭제되었다.
6월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가서 7월 말이 되었고 시간이 지난 만큼 멤버들과 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살 많이 빠졌네. 턱선 날카로운 거 봐라.”
“닭 가슴살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
“너 피부 빤득빤득하다.”
“팩 붙이고 잤어요. 그리고 전 젊잖아요.”
“18살의 패기인가.”
멤버 애들이 각자의 얼굴을 보면서 금칠을 했다.
우리들은 컴백 이전에 머리를 하러 왔다.
컴백을 거의 코앞에 앞둔 상태였기에 우리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땡글땡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이번 활동의 염색이 끝나면 목표 했던 몸을 모두 완성시키는 것이기에 현상 유지만 잘 하면 됐다.
“이제 녹음하고, 뮤비 촬영하면 진짜 컴백이네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갔는지 모르겠어요.”
미니 앨범으로 결정 난 우리들의 노래는 데뷔곡과 비교해보면 훨씬 퀄리티가 높아졌다.
“음음~♪ 음음~♪”
“쉿! 바깥에서 우리 노래 부르면 안 돼.”
“헙, 맞다. 쏘리! 너무 많이 불러서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됐나 봐.”
이번 미니 앨범에 들어가는 곡의 수는 총 4곡이다.
타이틀곡은 화려한 비트의 댄스곡인데, 난이도가 높은 단체 안무가 많아 익히느라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
힙합이 생각날 정도로 비트가 강하긴 하지만 데뷔곡과 너무 차이가 나지 않을, 중심을 잘 잡은 곡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번 활동으로 인기의 쐐기를 박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NO 곡명 아티스트]
1. (TITLE) Remember 에어플레인
2. 여름밤의 꿈 에어플레인
3. ONE 에어플레인
4. Girlfriend 에어플레인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앨범 중에 타이틀곡 빼고 제키가 만든 Girlfriend라는 곡을 좋아 한다.
보컬 난이도가 높아서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 곡을 들으면 누구도 우리의 실력이 부족하다나 말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제키는 우리 그룹에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비주얼 소년 그룹’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엄청난 노래를 만들었다.
이 곡을 부르게 되면 팬들도 타팬들에게 할 말이 생길 거다.
실장님도 Girlfriend을 무대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실력발휘 할 수 있는 곡이라 인정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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