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87화 (87/849)

〈 87화 〉 #14. 레벨업 (7)

* * *

미니 앨범은 보통 4~8곡 정도가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앨범에 5곡이나 6곡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굳이 많은 곡을 집어넣을 이유가 없다며 4곡으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요즘 트렌드에 맞게 많은 노래를 발표한다고 해서 인기가 더 많아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곡을 선택했고, 이젠 그것에 집중할 때였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요즘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

“이런 남자?”

“Girlfriend에서 나오는 남자 말이야.”

컴백 날 방송국에서 타이틀곡을 부르고 ‘Girlfriend’도 팬들에게 보여줄 예정이었기에, 우리들은 타이틀곡과 더불어 Girlfriend 무대에 디테일한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 염색을 하려면 탈색을 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때문에 우리들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별별 얘기를 다 한다.

그리고 남은규도 실없는 소리를 한 것이다.

“있을 수도 있지. 여자들 로망이잖아.”

“난 제키 형이 이런 가사를 써낼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 제키 형은 확실히 로맨티스트가 맞아.”

“시끄러.”

제키는 오글거리는 가사를 쓴 사람답지 않게 시크한 표정으로 멤버들의 호들갑을 물리쳤다.

Girlfriend의 노래 가사는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여자 친구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조금 푼수같이 자랑해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노래에 해당하는 Girlfriend를 팬이라고 생각하고 부를 예정이었다.

“노래 연습하면서 원 없이 고백해본 것 같아. 이제 실전만 남았는데.”

“으아~ 연애하고 싶다!”

“헉, 형! 너무 위험한 발언이에요.”

“여기 우리밖에 없는데 뭐 어때?”

사춘기가 와서 한참 이성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상승하는 시기를 겪고 있는 멤버들이다.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넘쳐나고, 손만 뻗으면 그들은 기꺼이 그 손을 잡을 거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매니저 누나들이 철저하게 관리를 하기도 하고,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어도 참는 편이었다.

“머리에 받는 고통을 반항으로 갚는 거야?”

“초록색 머리는 하기 싫었어. 내가 잡초도 아니고, 왜 하필 초록색인 거야?”

“여름을 겨냥한 스타일이라서?”

“여름이랑 잔디랑 무슨 상관이야, 도대체? 더군다나 난 네가 아닌데 이 얼굴로 잔디머리가 소화가 될까?”

남은규는 잔디 머리를 해도 잘 생길 게 분명한 강준의 얼굴을 부럽게 바라봤다.

“네 얼굴이 어떻다고 자신없어해?”

“솔직히 잘 생긴 편인 건 아니지. 이럴 거면 차라리 무슨 머리를 해도 다 잘 어울릴 해솔이 형이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내가 잔디 머리를?

아침에 보던 거울 속 내 모습을 떠올린 뒤 머리 부분을 초록색으로 색칠해봤다.

‘나쁘지 않은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코디 누나가 너보다 네 얼굴을 더 잘 알아. 누나가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랑 잘 어울릴 거야.”

탈색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머리색이 모두 빠지고 본격적으로 염색이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알록달록한 우리들의 머리색이 완성 되었다.

강준은 은색

남은규는 초록색

해솔은 블루블랙색

제키는 갈색

강경태는 금색

기우연은 분홍색

서로의 알록달록한 머리를 보고 있자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적응 안 되는데.”

“나 진짜 잔디 아니야?”

“어…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아니, 이렇게 보니까 괜찮은데?”

엄청나게 걱정하던 남은규의 머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잔디에서 많이 벗어나진 못했지만 말이다.

“제 머리 너무 핫핑크 아니에요? 색이 튀어도 너무 튀는데.”

“머리 한 번 감으면 색이 쫙 빠질 거야. 내가 봤을 때 색 예쁘게 잘 나왔거든? 기대한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려.”

“정말요?”

복슬복슬하게 볶아져서 양털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우연의 분홍색 머리가 우연이의 얼굴과 생각보다 잘 어우러졌다.

우리들 모두 기우연에게 엄지를 치켜 들만큼 녀석에게 잘 어울렸다.

“흐히히힛!”

바꾼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이곳저곳에서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우연이는 헤실헤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녀석이 갑자기 깜짝 놀라더니 말했다.

“형형형형!”

“왜왜왜왜.”

“저, 저기 좀 봐요!!”

“어디?”

고개를 돌려 기우연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샵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이 왜?”

“형, 못 알아보겠어요? 젤리냥 선배님이시잖아요!”

“젤리 뭐?”

“젤리냥 선배님이시라고??”

“우왓! 진짜잖아?”

“헉!”

“대박, 인사드려야 하지 않아?”

“당연하지!”

나는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멤버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쪼르륵 서더니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멤버들의 행동을 따라했다.

““안녕하세요!!! 에어플레인 입니다!!””

“어머? 저희 말고 다른 손님이 계셨네요.”

“와~ 저희 후배에요? 머리 알록달록 한 거 보니까 맞나 보다.”

“누구지? 엄청 잘생겼는데.”

“아! 나 알아. 허니 엔터 맞죠?”

상큼한 여자 아이돌의 등장이었다.

젤리냥.

4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유명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 이름은 각각 리아, 아영, 세민, 수진이다.

‘와~ 여자 아이돌 바닥은 진짜 치열하다고 하더니. 포스가 장난 아니네.’

네 명의 여성들이 샵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주변 분위기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아 누나와 비교해도 얼굴이 꿀리지 않는 아니….

‘솔직히 관리를 받아서 더 예쁘긴 하네.’

다만 저들을 보니 확신 할 수 있었다.

주아 누나의 미모는 이대로 평범하게 묻히기엔 너무 아깝다고.

움직임에 여유가 묻어 나오고, 남다른 포스를 자랑하는 것으로 보아 젤리냥이라는 그룹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돌이 분명했다.

“넵, 리아 선배님! 맞습니다.”

“역시 허니 엔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컴백하는 거에요? 언제에요? 우리도 곧 활동하는데.”

“8월에 컴백 예정입니다.”

“아이고~ 우리랑 겹치네? 큰일 났당. 이렇게 잘 생긴 청년들이 있는데 팬들이 우릴 봐주려나.”

“그럴 리가요!! 더 힘내서 활동하라는 격려로 듣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후후훗, 그래ㅇ…엄마, 깜짝아.”

여유롭게 강경태와 대화를 나누던 리아 선배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깜짝 놀란다.

“사람이에요?”

그러더니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데, 내용이 엄청나다.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더욱이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시선도 아까 전부터 힐끔힐끔 나를 향해 있었기에 더더욱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입니다.”

“푸핫!”

“행님이 좀 사람 같지 않게 잘 생기긴 하셨죠.”

“와~ 우와~ 어쩜~!”

그녀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더니 이내 말했다.

“무대에서 만나면 제 옆으로 오지 말아주세요.”

“청탁 좀 해둬야겠는데.”

“멤버들 다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왜 아이돌 하세요? 배우 비주얼인데.”

“연기를 못합니다.”

“깔끔한 이유, 인정합니다.”

꺄르륵 웃음소리가 들린다.

뭐, 뭐지? 뭔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군대에서 열광했던 여자 아이돌의 환상적인 무대들.

존재만으로도 힘겨웠던 시간을 위로 받을 수 있었던 행복한 추억.

아무래도 끔찍한 시간 속에서 흔치 않게 얻었던 추억인지라 더 소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레 잊히고 말았다.

‘그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다니….’

이게 바로 프로 아이돌?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자 아이돌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아무래도 활동 반경이 비슷하다 보니 안 마주치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막 데뷔한 상황에서 여자한테 눈을 돌리기엔 내 주변에 이미 여자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일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옛날의 추억이 새삼스레 떠올라버린 것이다.

프로 아이돌인 ‘젤리냥’ 멤버들의 꺄르륵 웃는 웃음소리에 말이다.

‘예쁘다. 무진장 예뻐. 이게 바로 힐링이라는 걸까? 주아 누나한테 점점 더 미안해지는데. 앞으로 더 잘해야지.’

젤리냥 선배님들은 한동안 꺄륵꺄륵 웃으면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직원이 부르자 쿨하게 머리를 하러 갔다.

남겨진 우리들만 술렁대는 심장을 부여 잡고 부산을 떨었다.

“젤리냥 선배님들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인데, 엄청 예쁘시다.”

“심장 터질 것 같아.”

“목소리가 옥구슬 굴러 가는 것 같더라.”

“스타이신데도 상냥하시네. 정말 소문대로 성격이 좋으신가봐.”

방송가는 소문이라는 것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 다양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그것에는 늘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소문을 다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없으며, 소문을 전부 믿지 않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없는.

그야 말로 모순적인 공간이었다.

“우리 같은 신인한테도 상냥하게 말 걸어주신 걸 보면 소문이 맞았나봐요. 아~! 싸인이라도 받았어야 했는데. 지금 가서 해달라고 하면 민폐일까요?”

“머리 하시는 중이라서 부탁드리기 좀 그렇지 않을까?”

여자들이 미용을 할 때 남에게 보이는 걸 꺼려하곤 한다.

아무래도 이리저리 머리를 휙휙 넘기고 이마도 까고 그러다 보니 말이다.

“나중에 방송국에서 만났을 때 부탁드려보자.”

“끄응,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지금 종이랑 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억지로 아쉬움을 털어낸 멤버들.

그러는 사이 매니저 누나가 도착해 우리들을 벤에 태웠다.

나는 핸드폰으로 뒤늦게 젤리냥에 대해 검색을 하고 있었다.

애들은 다 아는 눈치인데 나만 모르다 보니 몰래 알아 볼 속셈으로 말이다.

매니저 누나가 버젓이 있는 곳에서 여자 얘기를 할 순 없었는지 멤버들도 각자 할 일을 했다.

‘뭐야? 이렇게 유명한 그룹이었어? 노래도 들어 본 적 있는 노래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래를 듣게 되는데 젤리냥의 노래가 그런 곳에서 자주 들어 본 적 있는 노래들이었다.

나왔다 하면 1위를 찍지 않는 순간이 없었고, 개인 활동에서도 각자 매력을 뽐내며 역시나 대박 행진.

‘모른다고 말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야.’

젤리냥이라는 무슨 초등학생 간식 이름같이 생긴 아이돌 그룹이 우리나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아이돌이었다니!!

그렇게 젤리냥이라는 그룹에 대한 호기심을 시작으로 정보의 바다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들이 부른 노래, 팬덤 규모, 콘서트 직캠, 뮤비, 라이브 영상까지.

‘취한다!!!! 추억 돋네.’

입덕은 참 무서운 거다.

군대에서 경험하고, 전역하는 날 벗어났다.

사회의 차가운 현실을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그만 봐야지. 이러다가 입덕하겠어.’

평범하게 살았으면 젤리냥과 ‘동료’로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거다.

팬과 동료는 아무래도 인간관계를 쌓는데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돌, 나쁘지 않을 지도.’

주변에서 나 좋다고 해주고, 관심 가져주는데 계속 처음처럼 아이돌 하기 싫어! 라는 생각을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아이돌이라고 해서 결코 편한 직업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직장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도 많은 능력을 요구하지만, 연예계만큼 많은 능력을 요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힘든 환경은 아니지 않은가?

‘둘 다 힘들기는 한데, 두 개 중에 뭘 할래? 하면 아이돌 할 것 같긴 해.’

왜냐고?

아이돌이 더 편해서가 아니다.

‘아이돌은 내 능력만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으니까!!’

원래 사는데 가장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게 금전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돌로 바짝 돈을 벌어서 잘만 운용한다면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족도 많을 텐데, 열심히 해서 벌어야지. 내 여자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더군다나 이런 소소한(?) 특혜도 있는데.’

열심히 하자, 아이돌!!

한층 내 직업에 대한 애정을 상승시키며, 미용실에서의 해프닝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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