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14. 레벨업 (8)
* * *
지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젤리냥의 소속사 넥스트(NEXT) 엔터는 허니 엔터와 같이 대형기획사에 속한다.
“이걸 왜 체크 못했지?”
“하, 죄송합니다.”
“이미 홍보 들어가서 일정을 뒤로 미루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른 그룹도 아니고 젤리냥이 컴백한다.
가요계가 요동칠 것이고, 컴백을 기획한 회사에선 몸을 사리며 계획을 뒤로 미루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랬어야 했다.
“이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해올 줄은 몰랐네요. 제대로 당했습니다.”
“아무리 빈정이 상했다고 해도 젤리냥을 갖고 수작을 부린다고? 걔네 재계약 안 한데?”
“그 정도는 이용할 만큼 신뢰를 쌓은 거겠죠. 젤리냥이 워낙 의리가 좋기도 하고요.”
보통 컴백하기 전에 다른 소속사에 일정을 공유해서 컴백이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게 보통의 매너였다.
서로 컴백일이 겹쳐서 싸워봤자 제 살 깎아먹기밖에 안 된다.
대형 기획사끼리 싸워서 서로 손해를 보기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중소 기획사들의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고, 때문에 그들끼리 서로 손을 잡아 스케줄 공유를 통해 이득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넥스트 쪽에서 뒤통수를 거하게 쳐버렸다.
젤리냥의 컴백일을 감쪽같이 속였기 때문이다.
“8월 2일 컴백이면 정말 저희들을 겨냥했다고밖에 못 볼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싱글도 아니고 정규란 말이지.”
“완전히 애들을 묻어버리겠다는 뜻이에요, 이건.”
“근데 좀 이해가 안 가는데, 여돌이 남돌한테 비빌 수 있나요? 원래 남돌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잖아요.”
“젤리냥이잖아. 젤리냥은 일반적인 여돌이 아니라고. 걔들 개인팬이 얼마나 많은데? 차원이 다르다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번에 애들 실력을 중점으로 홍보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젤리냥이 옆에 떡하니 비교대상으로 있게 된 상황이에요. 이게 먹히겠어요?”
“안 먹히죠. 실력의 ㅅ자만 나가도 젤리냥 팬들한테 비웃음을 당할 거에요.”
홍보 계획이 모두 엉망이 됐다.
그렇다고 준비가 다 끝난 걸 하지 않을 순 없었다.
모든 활동에는 돈이 드는 법이고, 모든 준비를 철회를 하는데도 상당한 돈이 들 것이 분명했다.
“최고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짜보자.”
“최고의 시나리오는 욕을 좀 먹더라도 그대로 홍보를 시작해서 애들 실력을 인정받는 걸 거에요.”
“최악의 시나리오는?”
“홍보를 시작하고 젤리냥과 비교당하면서 엄청나게 까이고, 애들 멘탈 나가서 실력도 제대로 못 보여주고 그대로 활동 중단 정도면 최악일까요?”
“젤리냥 팬덤이 우릴 공격할 수도 있겠지.”
“와~ 근데 걔네들 팬덤은 여자들이 많잖아요. 여자인데 저희 애들을 욕한다고요? 우리 애들 얼굴을 보고도요?”
에어플레인의 멤버들한테는 얼굴로 깔게 없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성적 취향 특이한 애들이 많잖아요. 요즘 남자 씨가 말라서.”
“아무튼 우리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하나야. 젤리냥과 무조건 우호적이게 가는 거지.”
“적대하지 말고 친분으로 밀어 붙이자는 거군요.”
“일단 젤리냥이 출연하는 곳에 해솔이나 준이를 집어넣자. 걔네들도 여자이니 친해지고 싶지 않겠어?”
우리들은 직원 분들의 회의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서 귀만 쫑긋댔다.
뭔가 굉장히 큰일이 났다며 우리까지 다 데리고 회의를 시작하더니 이 상황이다.
멤버들은 뭐가 뭔지 모르는 눈치였는데 나는 사회에서 일한 짬밥으로 상황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붕어처럼 눈만 꿈뻑대는 기우연과 애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 탓에 보충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직원들이 회의하는 이유가 뭔지 알겠어?”
“젤리냥 선배님들이 컴백해서요.”
“대충 알기는 하네. 화제를 저쪽에서 다 끌고 가버리는 것도 문제기는 한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비가 걸릴 수 있다는 거야. 넥스트 엔터에서 컴백 날짜 공유를 하지 않았다는 건 우리를 한 번 짓눌러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거든.”
“…우리를 왜여? 아무짓도 안 했는데 우린.”
아마 나름의 배경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경태 형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 넥스트 거기도 신인 그룹 하나 낸다고 들었어.”
“헐~ 설마 그거 때문에 우릴??”
“우리가 데뷔하고 너무 잘 되긴 했으니까. 경태 형 말 들어보니까 확실하네. 그쪽은 우릴 누를 확실한 이유가 있어.”
젤리냥을 통해 우리들의 활동에 재를 뿌리고, 그 사이 새로운 그룹을 데뷔시킨다.
아마 넥스트 엔터의 계획은 이것일 것이다.
“와~ 진짜 무섭네요.”
“선동과 날조로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이런 걸까나.”
“이대로 당하기만 해야 돼? 우리 회사도 대형인데, 뭔가 해줘야 하지 않나?”
“그러려고 지금 회의 중인 거야.”
“우린 뭘 해야 해요?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거 완전 싫은데.”
“자자, 다들 조용!”
애들끼리 대화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회의를 하던 직원들 모두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나는 흥분한 애들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당연히 팀원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거지. 무대를 하라고 하면 죽어라 최선을 다 해서 무대를 해내고, 예능 촬영을 하라고 하면 거기 나가서 오늘이 끝인 것처럼 리액션 하고, 촬영을 하는 거지.”
“…….”
“…….”
회의실에 정적이 흐른다.
모두들 내 말을 곱씹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실장님이 정적을 깼다.
“해솔이가 맞는 말 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바로 그거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들이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너희들이 해솔이 말처럼 열심히 해준다면, 나머지 일은 팀원들을 해줄 거다. 소속사가 왜 있는 건지, 그리고 우리들이 왜 대형 기획사인지 제대로 보여주마.”
나 또한 실장님과 같은 생각이다.
실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들과 직원들을 쭉 훑으며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실력파 이미지를 얻으려고 언론 플레이를 하면, 저쪽에선 젤리냥을 들이대면서 비교할 거다. 그러면서 너희들 실력을 깎아내리겠지. 비교는 상대적인 거니까. 그런데 만약 너희들이 무대를 잘 해내면 어떻게 되겠냐?”
“비교에 반박할 근거를 얻게 되겠죠.”
내 대답에 실장님이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아. 그리고 이번 일이 마냥 안 좋기만 한 일은 아니야.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게 왜 있겠냐? 이번 일은 너희들 실력을 제대로 사람들한테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우리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실력을 어필하는 것보다 비록 욕을 먹을지 몰라도 젤리냥과 비교되면서 실력을 어필하는 게 훨씬 임팩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젤리냥과 실력이 비교될 만큼 뛰어난 실력파 아이돌 그룹 ‘에어 플레인’이 되는 거지.”
“저, 저희들이 그 정도 실력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열심히 노력하고 있잖아. 데뷔하자마자 너무 잘 돼서 살짝 풀어질 만도 한데, 요즘에도 잘 때 빼곤 다 연습실에서 산다며. 덕분에 실력도 엄청 늘었고.”
“그건 해솔이 형이 너무 재능충이라서 초조한 마음에….”
“이유가 뭐가 됐든 너희들이 성실하게 다음 활동을 준비한 건 사실이잖아. 겸손하지 않아도 돼.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내고 있으니까.”
솔직히 6명이나 되는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다.
이들 중 1명 이상은 삐딱선을 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 한 명도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으로 보내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녀석이 없었다.
이거 정말 대단한 거다.
이 세상은 남자가 살기 참 편한 세계.
조금만 손을 뻗어도 여자가 굴러 들어오는 세상에서 혈기왕성한 놈들이 외부의 자극을 모두 차단하고 오로지 꿈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짜식들.’
문득 기특한 마음이 올라와 주변에 있던 애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내가 남자새끼 머리를 쓰다듬는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멤버들이 조카 같이 느껴져서 이런 짓을 해도 징그럽다는 생각이 안 든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팀도 파이팅 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무룩해졌던 멤버들도 슬슬 힘을 되찾았고, 걱정이 가득하던 팀원들도 힘을 받은 듯 회의장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밝아진 채로 진행이 되었다.
멤버들이 열심히 하겠다며 두 주먹 불끈 쥐는 게 제법 귀여웠던 모양이다.
“애들이 저렇게 파이팅 해주고 있는데, 우리들이 멍청하게 굴순 없지. 다들 안 그래?”
“네!!!”
“무슨 짓이든 해야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직원들이 한껏 달아올랐다.
‘의욕 만땅인가.’
앞으로 활동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 ? ?
젤리냥이 컴백했다.
우리보다 딱 일주일 앞서는 8월 2일.
나와 멤버들은 초조하게 젤리냥의 신곡을 확인했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노래 진짜 좋네요.”
“분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아.”
“뮤비도 엄청 잘 나왔네.”
“우리도 만만치 않아!! 쫄지 마!!”
“그래놓고 네가 지금 덜덜 떨고 있잖아. 멍청아.”
“아니야!!”
“맞거든?”
남은규와 강준이 투닥거리고, 기우연은 노래가 좋다며 헤실헤실 웃고.
강경태는 이대로면 완전히 묻힐 거라며 우울함에 땅을 파고 있었으며, 제키는 노래를 뜯어보려는 것인지 계속해서 노래를 반복 재생하고 있다.
각자 개성 있는 반응으로 젤리냥, 얼떨결에 말도 안 되는 최종보스를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초보존에 있어야 할 우리들한테 최종 보스를 들이대는 건 너무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윗선에서도 이번 일을 단순한 일로 치부하지 않고, 넥스트 엔터와 허니 엔터의 싸움이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푸쉬하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적극적인 푸쉬는 곧 돈인 법!
‘돈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라고 했던가? 전투력이 완전 뻥튀기 됐지.’
아무튼 그건 그거고.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차트가 변하고, 젤리냥의 앨범 곡은 10위권 안에 도배가 되었다.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젤리냥의 노래였고, 7위, 8위에도 젤리냥의 노래가 있었다.
“와…부럽다.”
“단숨에 1위 탈환…. 이거 처음부터 우리가 오해를 한 거 아닐까? 감히 비벼볼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컴백을 한다 해도 10위권에 아니, 100위권 안에 들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데뷔곡 때 반응이 정말 좋긴 했지만, 그동안 너무 자만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게 바로 팩트 폭행인가봐요.”
그리고 이번엔 나도 애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젤리냥의 기세가 그만큼 심상치가 않았다.
‘데뷔 때가 말도 안 되게 편했던 걸지도.’
회사라는 화단에 갇혀 고이 화초로 길러지다가 이제야 비로소 야생의 흙과 만난 것이다.
따가운 햇빛과 축축한 바람, 거친 흙에 적응해야만 이 바닥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해야 할 신인 아이돌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야생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게 만들기 위해선 사냥을 해서 새끼의 입에 먹여주는 게 아니라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하는 법.
우리도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 부딪쳐봐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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