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15. 서바이벌 S (3)
* * *
아무래도 인구의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보니 시장 자체가 여성 쪽 물건이 월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2층 의류 매장을 수놓은 다양한 여성 의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 엄청 많네.’
“이거 예쁘다!”
“지금 저희 예쁜 옷을 찾는 게 아니라 총알을 찾아야 하는데요?”
“너무 빡빡하게 촬영한다고 좋은 거 아니야. 체력 금방 떨어져.”
나영희씨는 열심히 하려는 나를 만류하고 느긋하게 의류 매장을 돌아다녔다.
옷을 꺼내서 거울에 대보기도 하고, 남자 의류가 있으면 내게 적극적으로 권유하기까지 한다.
“정말 이래도 돼요?”
당연하지만 이 모든 건 카메라에 담겼고, 덕분에 나는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멘붕 상태가 됐다.
“된다니까?”
“다른 팀원들은 열심히 하고 있을 텐데요?”
“아휴! 괜찮아~ 괜찮아~ 다 방법이 있어. 머리가 나쁘면 몸이 힘든 법! 반대로 머리가 좋으면 몸이 편해진다 이 말이야.”
쇼핑을 온 것처럼 느긋하게 굴던 나영희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층에서 A팀을 발견했을 때였다.
A팀은 흩어져서 찾기 보다는 모두가 함께 층을 빠르게 수색해서 올라가는 걸 선택한 것 같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A팀 모습을 여러 대의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인 것이다.
“드디어 발견했다!”
“A팀은 왜요?”
“흐흥, 딱 기다리고 있어. 숨어서 잘 따라와야 한다?”
그녀는 능숙하게 몸을 숨긴 채로 A팀을 뒤따라 다녔다.
그리고 부지런히 수색을 하던 A팀은 당연하지만 총알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찾았다!”
“오오!!! 역시, 에이스 답네!!”
총알이라고 명명 된 가짜 총알이 담긴 작은 상자를 쥔 태희경이 만세를 부른다.
다만 작은 상자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열쇠를 얻으려면 어떤 ‘가게’를 찾아야 한다고 종이에 적혀 있는 듯했다.
“2층 남성 의류 매장에서 가장 키가 큰 직원 분을 찾으라고 쓰여 있어요!”
“남성 의류 매장이 어딨지? 누구 기억나는 사람 없어요?”
“여태까지 남성 의류 매장은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럼 좀 더 가보죠!”
우르르 몰려 온 사람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몰래 숨어서 A팀을 훔쳐보고 있었던 나영희씨가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어쩐지 악당 같아 보였다면 내 눈이 잘못 된 걸까?
‘설마 이걸 노리고?’
나는 뒤늦게 왜 그녀가 수색하는 일에 여유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열심히 수색한 것과 다름없는 결과물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때?”
“어떻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아셨어요?”
“내가 짬밥이 몇 년인데. 이 정도는 껌이지.”
편하게 쉬었는데도 떡하니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마법!
정말 엄청난 성과였다.
“예전부터 자자한 명성(?)을 들어오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대단하시네요!”
“내 진가는 아직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어. 넌 오늘 파트너 제대로 고른 거야. 호호홋!! 나만 따라 와.”
“네! 스승님.”
“엉? 스, 스승님?”
“넵. 꼭 배우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주세요!”
보통 게임을 하면 규칙에 맞게 깰 생각을 하지, 이렇게 꼼수를 부릴 생각을 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배신’과 ‘음모’ ‘조작’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괜히 게스트로 나왔다가 MC가 된 게 아닌 거다.
그녀의 이런 배신 캐릭터는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번 예능에서 저 여자만 따라다녀도 1인분은 충분히 하겠어.’
예능에서 저렇게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 옆에 있으면 자연스레 묻어갈 수가 있다.
허세가 있는 캐릭터인지라 그녀에게 따박따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엉뚱한 존경심(?)을 보이는 캐릭터를 잡기로 했다.
나연희씨도 내가 어떤 포지션을 잡았는지 깨달았는지 스승님이라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 마냥 제자로 받아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쟤들이 저렇게 고생해도 결국 과실은 우리가 따먹는 거야. 이게 바로 스승님의 노하우라는 거지.”
“전 생각도 못했어요. 열심히 수색 안 해도 된다고 했을 때 살짝 불안했었거든요.”
카메라가 떡하니 돌아가는데 열심히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해서 순간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했다.
“이 스승님만 믿으라니까? 아직도 불안해?”
“아뇨! 안 불안합니다. 저희 열심히 구경하고 다녀서 남성 의류 매장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잖아요.”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저쪽 팀이 먼저 가기 전에 우리가 선점하자고.”
상자가 저쪽 팀에 있기는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쇠가 없으면 상자 안에 있는 총알은 쓰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근데 상자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게 있어야 총알을 얻을 수 있잖아요.”
“그건 총알을 구해 올 다른 팀원이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아~ 그렇네요. 우리는 그럼 A팀이 총알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쪽으로 활동하면 되는 거군요!?”
나연희씨가 엄청난 지략을 짰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박수를 짝짝 치며 감명 받은 척 얼굴을 들이댔다.
“어우, 가까이 오지 말아줄래? 누나 심장이 별로 안 좋아. 너 때문에 심장마비 올 것 같애.”
“앗! 죄송합니다.”
A팀보다 먼저 남성 의류 매장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매장에서 가장 키가 큰 직원을 발견하고, 그 직원으로부터 작은 미니게임을 해서 열쇠를 얻는데 성공했다.
다만 열쇠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을 무렵 A팀이 우리를 발견해서 잠깐의 도주극이 펼쳐졌다.
‘역시 어린 몸이 최고야.’
포니가 내게 준 진해솔의 몸은 30대 쓰레기 몸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연희씨가 열쇠를 내게 주고 튀라는 말에 정말 말 그대로 잽싸게 튀었다.
뒤에서 허겁지겁 VJ 스태프가 따라왔지만 결국 나를 놓쳤을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스태프 쪽에서 무전으로 내가 있는 곳을 물어 와서야 겨우 VJ와 다시 합류하게 된 나는 다른 층에 수색을 하고 있는 B팀과 합류해서 움직였다.
A팀에 인질로 잡혀버린 나연희씨의 구출 작전을 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촬영을 하다 보니 훌쩍 해가 지고, 마무리 촬영까지 끝났다.
승리한 팀은 A팀.
에이스인 태희경이 괴물 같은 활약으로 B팀을 탈락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와, 진짜 힘들다.”
“기진맥진이야.”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배가 고프네.”
활동하기 전에는 다이어트를 했지만, 활동하면서까지 다이어트식을 유지하기엔 체력이 부족했기에 우리들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서바이벌 게임을 하느라 뛰어다녀서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잠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아, 뭔가 아쉽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다시 찍자고 하면 안 되겠지?”
“흐흐흐, 미쳤냐고 할 걸?”
“우연이 넌 괜찮아? 엄청 일찍 탈락했던데.”
“으으, 무서웠어여. 태희경 선배님,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힘이 장난 아니시더라고요.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질질 끌려 다니다가 총알 맞고 죽었어요.”
이환과 우연은 의기투합해서 다람쥐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숨어 다니다가 태희경씨에게 걸려서 인질로 끌려 다니다가 총에 맞고 허무하게 탈락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 좋다며 꺄륵꺄륵 웃는 것으로 보아 분량이 아예 삭제 될 것 같진 않았다.
다람쥐처럼 숨어 다닌 게 나름 그들 입장에선 꽤나 흥미진진하고 대단스런 일이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인질로 끌려다녔던 것도 나름 분량이 나왔을 거야.’
“이환 선배한테 번호 받았어? 엄청 친해졌잖아.”
“네! 당연히 받았죠.”
“솔직히 좀 견제 받을 줄 알았어. 소문으로 이환 선배님이 아이돌을 안 좋아한다는 말이 있더라고. 싸가지 없다는 말도 있었고. 근데 직접 보니까 까칠하다기보다는 공격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고슴도치 같았지.”
얼마나 이 바닥에서 치이고 다녔으면 그런 습관이 들었던 걸까?
“일단 저 귀찮은 우연이랑 쿵짝이 잘 맞는 것부터 대단한 분인 거야. 인성이 되셨지.”
“흔치 않은 텐션이긴 해.”
“환이 형한테 왜 그래여!!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오늘 저한테 얼마나 잘 해주셨는데요!!”
18살 애기를 잘 돌봐주었으니 보호자 입장에서 감사할 따름이다.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하고 왔었어야 했을까?”
“푸하하하!!”
예능 촬영을 했더니 다들 유머가 늘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피곤해 죽겠으니까 잠 좀 자자.”
“완전 동감.”
“피곤쓰~ 피곤쓰~”
“살려면 자야 돼.”
다들 체력이 바닥을 친 덕분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 ? ?
[야!!!! 나영희!!!!!!! 네가 어떻게 아아아악!!!!]
[크후후후후!! 자, 어서 내게 그걸 넘겨! 가라! 제자! 빼앗아 오는 거다! 남의 공을 가로채버려!!]
[스승님!!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어헛! 양심과 도덕은 버리고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수업 태도가 불량하구나!!]
나영희와 쿵짝이 맞은 진해솔의 잘 생긴 얼굴이 카메라에 한 가득 담긴다.
두근 두근!
“너무 멋있어.”
에어플레인이 서바이벌 S에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생전 잘 보지도 않던 예능을 감상하던 그녀는 화면 가득 담긴 진해솔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남자라면 내가 꿈꾸던 완벽한 남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감이 가는 남자였다.
완벽하게 태어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면 보통 수준의 남자로는 불가능했다.
해서 열심히 찾아다녔다.
자신의 옆자리에 두어도 부족함이 없는 남자를!
‘완벽한 여자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남자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머니는 37살이 되어서야 겨우 옆에 둘 남자를 찾아 결혼을 하고 자신을 낳았다.
무려 17살 차이가 나는 엄청난 나이 차의 커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
결혼 25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금술은 여전히 좋았으니까.
완벽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25년간 해온 올해 25살의 그녀는 놀랍게도 첫 번째 후보를 찾는데 성공했다.
‘25살이면 굉장히 일찍 찾은 편이라고 했던가? 역시 나는 대단해.’
물론 찾았다고 해서 바로 결혼을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주변을 맴돌며 그 남자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고, 또 여러 상황을 만들어내어 ‘시험’을 해본 뒤 결혼식을 올릴지 말지 선택을 해야 했다.
‘차는 시험의 종류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기부를 한다고 했던가?
고작 차 한 대 얼마 한다고 그게 부담스럽다며 착하게도 기부를 한다고 한다.
“귀여워.”
참 깜찍하지 않은가?
기부라니!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깜찍한 아이디어였다.
“귀여워…너무 귀여워…어떻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사람이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깨물어주고 싶어. 가둬두고 싶어. 키우고 싶어!”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눈빛이 점점 무서워지자 정비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진정하셔야 합니다.”
“아!”
“괜찮으십니까?”
“…내가 또 그랬어?”
“예.”
“이럼 안 되는데.”
“맞습니다. 그렇게 집착하는 발언은 남성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 스타일 유형 TOP10에 올라와 있기도 하죠.”
“…해솔이만 보면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이렇게 인내심이 적은 사람이었나 싶어.”
“첫사랑이 그래서 쉽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으실 겁니다. 회장님을 실망시켜선 안 되니까요.”
정비서의 말에 몽롱했던 그녀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실망? 감히 누가 나한테 실망감을 느끼지? 그건 어머니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이 몸을 뭐로 보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무리 정 비서라고 해도 그런 말은 용서 못해.”
정비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찰나의 순간 정비서의 가치를 재정립해본 것이다.
‘괘씸하다는 이유로 버리기엔 써먹을 곳이 많아.’
정비서는 유능한 인재다.
회사도, 그녀 개인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건방진 소리를 한 것을 참아줄 수 있을 만큼의 유능함이다.
“마지막 경고야.”
“감사합니다.”
결국 그녀는 정비서를 한 번 봐주기로 했다.
물론.
짜악!!
“큽!”
참아준다는 게 벌을 안 준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가 시원하게 뺨을 때려 정비서의 몸을 넘어트렸다.
그리고 정비서의 배를 거침없이 발로 찼다.
퍼억!!
“아악!!”
퍽! 퍽! 퍽! 퍽! 퍽!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따라가 몸 이곳저곳을 발로 밟았다.
고통에 정비서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폭력을 가했다.
기어코 두들겨 맞은 정 비서의 몸에 피가 흘러나왔을 때.
“후우, 후우….”
격해진 호흡을 다스리며 그녀가 발길질을 멈췄다.
“쿨럭, 쿨럭! 으으…으….”
“역시 입은 악의 근원이야. 하아~ 수련이 부족했나?”
그이 앞에 나서기 전까지 정신 놓는 버릇을 확실히 고쳐야 한다.
그녀는 발아래 꿈틀대는 ‘유능한 벌레’를 힐끗 바라 보고 말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 말해둘 테니까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치료비 받아가고.”
“으윽…네, 네. 아, 알겠습…니다…쿨럭!”
사람 하나를 피떡으로 만들어놓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그녀가 쓰러진 정 비서를 내버려두고 방을 나섰다.
또각 또각 또각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쿵!
이내 문이 닫혔다.
다친 정비서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