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6. 우학왕 (4)
* * *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엇이 나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없이 경험해본 바가 있었기에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표정을 가다듬고, 고른 숨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 많이 놀랐겠다.”
대사가 입밖으로 튀어나온다.
솔직히 외운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대사다.
쉬운 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
‘이번에는 잘 한 것 같은데.’
능력치를 올려서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효과로 먹는 위약(藥)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아까 전보다 훨씬 쉽게 혓바닥이 굴러갔던 것 같다.
제법 깔끔하게 대사를 쳤던 것 같다.
아니, 진짜 잘한 것 같은데 왜 반응이 없어?
“어때요? 저 이번엔 좀 잘 한 것 같은데.”
“…….”
“…….”
“뭔데요, 둘 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강준도, 트레이너 선생님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트레이너 선생님이 먼저 입을 뗐다.
“너 솔직히 불어. 화장실에서 뭐하다 왔어?”
“…볼 일 보고 왔는데요.”
“거짓말 하지 마. 솔직하게 대답 해. 혹시 약했니?”
“엑?! 진짜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세요? 준이 너는 거기서 왜 맞장구를 치고 앉았냐?”
약했냐고 묻는 트레이너 선생님도 황당하지만 거기다 대고 진짜냐고 묻는 강준이 괘씸해 녀석의 볼따구를 꽉 잡고 쭉 늘렸다.
“아아악 형!”
“넌 이게 이해가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지만, 이건 마음이 아니라 연기 실력이잖아! 왜 갑자기 좋아지는 건데? 나한테 욕먹고 각성이라도 한 거야?”
당연하지만 욕먹고 각성한 건 아니다.
신형 AI 상태창을 통해 30 코인으로 연기력에 투자를 했고, 결과물이 드러난 것뿐이다.
솔직히 지금은 내 연기 실력을 욕했던 트레이너 선생님의 말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신랄하게 나를 까내렸던 트레이너 선생님보다 더 열 받는 놈이 있기 때문이다.
‘개새끼들.’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더라.
개조 된 단말기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창 단말기를 쓰고 나니 내가 얼마나 다양한 부조리를 당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엿 좀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는데.’
부디 내가 제공해준 단말기를 통해 증거 수집이 원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사이다 마신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생각을 좀 달리하니까 된 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한 번 해봐. 아니, 이번엔 좀 더 긴 대사로 하자. 진짜 이해를 못하겠네. 왜 갑자기 좋아진 거지?”
나는 트레이너 선생님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사로 연기를 다시 한 번 선보였다.
“이것도 훨씬 잘하잖아!!”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지금까지 못해서 욕을 먹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다른 대사들도 제법 잘 해내는 것을 보며 사기 당한 것처럼 아연한 안색이 되었다.
“얘가 만찢남 소리를 듣더니, 진짜 만화에서 나온 주인공처럼 이상한 짓을 하네.”
“근데 선생님. 저 형은 매번 저랬어요.”
강준이 호들갑을 떠는 선생님에게 이르는 투로 말했다.
“사실 전 지금에서야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신기해요. 저 형은 원래 저렇게 불쑥불쑥 실력이 좋아졌거든요. 어제만 해도 이 정도 실력이었는데, 다음날 되니까 이만큼 잘해져서 혼자 진도를 팍팍 나가고 그랬거든요. 우리들이 사기캐라고 많이 수군거렸어요. 완전 재능충이에요.”
“아~ 얘기 들어 본 적은 있어. 근데 그건 노래랑 춤에 재능이 있어서였던 거잖아. 쟨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고.”
“아마 형이 연기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여태까지 노래랑 춤 배우는데 온 신경을 다 썼거든요.”
“연기에 관심이 없다고 있던 재능이 안 나온다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방금 화장실 가기 전에 이제부턴 연기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하고서 갔었거든요. 전 익숙해서 너무 놀랍지도 않아요.”
“너까지 자꾸 왜 그래? 이제 겨우 짧은 대사 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 뿐인데.”
“괜한 호들갑이 아니야. 방금 형 연기 엄청 잘했어!”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 앞에서 여태까지 연기를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는 말을 태연하게 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나는 준이의 말을 수습하기 위해 과하게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제가 대배우라도 된 줄 알겠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해. 그냥 이런 식으로 해보면 될 것 같은데 하고 느낌이 온 것뿐인데….”
“변화가 너무 극적이니까 그렇지, 이 녀석아.”
“그렇다고 제 연기력이 엄청나게 잘 하는 정도가 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놀리시고 수업 진행 좀 해주세요. 얼마나 연기를 못했으면 고작 이 정도 해냈다고 저러나 해서 자괴감 든다고요.”
엉망으로 연기하다가 불과 몇 분 만에 연기를 평범한 수준으로 하게 됐으니 그 극적인 변화가 더 확실하게 느껴지긴 했을 거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현재 내 연기는 어떤 역할을 맡아서 카메라 앞에 서기엔 많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 그래. 네가 발전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의욕이 좀 생기네. 솔직히 네가 너무 못 따라오니까 내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 근데 너도 결국 성장이라는 걸 하는구나. 가르침 방향이 잘못 된 건 아닌 모양이야. 안심했다!”
“선생님은 안 믿으셨지만, 형이 정말 재능충이거든요. 이제 불쑥불쑥 실력이 나아져서 나타날 거에요.”
“그으래에? 나 기대해도 되는 거 맞지?”
“…마음대로 갖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놔주세요.”
강준이의 말에 완전 흥분한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나에게 난이도 높은 대사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이 대사는 어떤 식으로 호흡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쌤, 준이는 안 봐주세요?”
“네가 감히 준이를 걱정한다고?”
“…죄삼다.”
내 발전으로 후끈 달아오른 트레이너 선생님이 열정을 다 해 수업을 진행했다.
준이는 나만 집중적으로 가르침 받고 있는 상황이 싫지도 않은지 헤실헤실 웃고만 있다.
아오, 저 답답한 놈!
저놈은 자기보다 내가 연기를 더 잘하게 됐을 때도 호구처럼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들이 전부 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빠진 탓이다.
‘그나저나 코인빨 쥑이네. 이 맛 한 번 보면 절대 평범한 몸으로는 살 수 없지.’
AI 신형 상태창으로 130코인을 사용해서 얻은 연기력 수치는 무려 28.3%.
이렇게까지 엄청난 수치를 얻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 30코인을 써서 돌렸더니 상상한 것보다 더 높은 수치가 나와서 깜짝 놀랐고, 기왕 올린 거 100코인 정도를 더 써볼까 하는 욕심이 들어서 나온 최종 결과물이다.
별 거 아닌 척 하긴 했지만, 거의 30%에 가깝게 능력이 상승한 탓에 선생님이나 준이가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긴 했다.
빠드득
‘아놔, 또 생각하니까 이가 갈리네. 그 나쁜 새끼들.’
이렇게 쑥쑥 잘 오르는 거를 여태까지 나는 손해 보며 코인을 쓰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눈탱이를 맞았는지 알게 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형 상태창, 팔기 싫지만 팔아야겠지?’
화장실에서 극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모두 신형 AI 상태창 덕분이었다.
나는 수업에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수업 시작하기="" 20분="" 전="" 화장실="" 안.=""/>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이 번쩍번쩍 빛이 내뿜어지고 있다.
상자에서 나타난 신형 상태창에홀로그램이 떠오르며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한 탓이었다.
[접속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카드를 로딩 중입니다.]
■□□□□□ (로딩 중)
■■□□□□ (로딩 중)
■■■■□□ (로딩 중)
■■■■■■ (완료)
로딩이 완료 되었습니다. 원활한 접속을 환영합니다. ‘포니’님.
진화 된 문화의 지구에서 AI가 마냥 낯선 존재는 아니다.
다만 이곳의 AI는 지구가 개발한 AI와는 차원이 달랐다.
“…뭐가 되게 많고 깔끔해진 것 같긴 한데.”
가이드가 필요하신 가요?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님을 위해 튜토리얼이 준비 되어 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음성으로 내 혼잣말을 인식했는지 AI가 물어왔다.
“시간 없어서 그건 나중에 하고 코인을 좀 써야겠는데. 연기 능력으로 30코인 써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신체에 단말기를 부착시켜주셔야 합니다.
“널 어떻게 몸에 부착해? 그냥 네모난 건데. 이렇게 손바닥에 놓는 걸로는 안 돼?”
원하시는 부착형 물건이 있으시면 외형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지나 목걸이 귀걸이 혹은 시계와 같은 악세서리 형태를 추천 드립니다.
“오…그걸로 바꿔진다고? 그럼 반지로.”
거부할 이유가 없는 얘기다.
변경할 반지의 외형을 떠올려주십시오.
“그냥 아무거나면 되는데. 장식 없는 걸로. 눈에 띄는 건 끼고 다닐 수 없거든.”
간단하게 상상했는데, 네모난 AI 상태창 단말기가 상상했던 그대로 은색의 실반지로 바뀌었다.
‘와씨, 이거 엄청 편하네.’
그냥 상태창을 안 팔고 계속 쓸까 하는 충동이 들만큼 편하고 좋았다.
반지로 뚝딱 변한 상태창을 손가락에 끼자 홀로그램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신체 능력을 올리는 익숙한 창을 띄웠다.
연기 능력에 30코인을 사용합니다.
[연기 : 0.61%> 8.3%]
“…30개로 8퍼가 올랐다고?”
그야 말로 미친 상승률.
물론 능력치가 초반이라서 잘 오르는 것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염두해두어도 말도 안 되는 상승률이었다.
“이게 정상적인 수치가 맞아?”
예,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적용 된 것이 맞습니다.
난 도대체 무슨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지?
‘이놈들이 개조를 어떻게 해놨기에!!’
열이 안 받으면 사람이 아닌 거다.
잘 생긴 몸도 주고, 그럴듯한 직업도 갖게 해준 터라 이번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살짝 갖고 있었던 나는 깔끔하게 그 마음을 털어냈다.
아주 꼬시다. 꼬셔! 더 깨져라!
내가 이걸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계속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능력치를 올려보겠다고 낑낑댔을 것 아닌가?
“왜 이렇게 잘 올라? 원래 이런 거야?”
재능과 능력 종류에 따른 결과물입니다. 재능이 높은 능력은 상승률이 높고, 전투 계열보다 생활 계열의 능력 상승 수치가 높습니다. 더욱이 능력을 올리지 않은 초반에는 상승률이 높습니다. 0~10%, 11~20%, 21~30%, 31~40%, 41~50% 구간에 따라 상승률이 점차 하락합니다.
“구형, 신형에 따라서 상승률이 달라지거나 하는 건 없지?”
물론입니다. 구형 제품에서도 똑같은 상승률을 갖고 있습니다. 신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상승률이 바뀌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럼 연기력을 한 번 더 올려줘. 100개 사용해서. 아! 그리고 댄스도 올려줘. 댄스는 50개 코인.”
일부러 좀 복잡하게 주문을 해봤다.
100코인을 사용해 연기 능력을 올립니다. 50코인을 사용해 댄스 능력을 올립니다.
[연기 : 8.3%>28.3%]
[댄스 : 42.3% >47.33%]
순식간에 오른 능력치.
특히 40%에 달하는 댄스 능력이 42에서 47까지 쑤욱 오른 것이 고무적이다.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를 올리기 위해 100단위의 코인을 투자했어야 할 거다.
“50코인으로 정력도.”
댄스나 노래의 경우와 달리 정력을 올릴 때는 과할 정도로 많이 올랐었기에 점검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력 : 49.65%>53.05%]
“50코인으로 댄스가 5% 올랐고, 정력은 3% 인가.”
확률이 정상으로 돌아 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는 변화였다.
같은 코인을 들였는데도 오른 퍼센트가 다른 건 40%와 50% 구간의 상승률 차이 때문일 테니 이상할 거 없는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정력 능력치가 50% 이상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힘이 신체에 깃듭니다.
“특별한 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50%는 무능력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몸 안에 마력이 깃들어 특별한 힘을 각성할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