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6. 우학왕 (5)
* * *
잠깐 생각 좀 해보자.
혹시 저게 포니의 상층부가 그토록 경계하던 그것이 아니었을까?
‘상품권 코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걸 만들어서 능력에 미션으로 번 코인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
그 뿐만 아니라 단말기를 개조해서 내가 성장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이유도 내가 지금 말한 ‘특별한 힘’을 얻는 걸 경계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특별한 힘이 뭔지 몰라도 ‘인간’이 가져선 안 되는 능력인 것은 맞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럼 왜 상점은 쓸 수 있게 한 거지?’
포니의 상층부는 내가 상태창을 직접 쓴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다.
내가 알고 있는 포니라면 자신의 것을 나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리기 두려웠을 터.
‘원래 포니가 내 상태창을 관리하고 있었으면 능력이 생겨도 알려주지 않았겠네.’
대충 얘네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양한 미션이 있지만 성과 관련 된 미션의 보상이 유난히 후하게 측정 되어 있었다.
상점이라는 그림의 떡을 주고, 그것에 홀려 미션에 시간을 할애하기를 바랐을 거다.
‘상점에 있는 아이템의 유용성은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못 끊을 정도. 처음에는 다른 미션으로 코인을 벌었겠지만, 미션 내용은 저쪽에서 갱신시킬 수 있는 상태이니 얼마든지 조작 할 수 있었겠지.’
사람은 만족이라는 걸 잘 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한 가지를 하다 보면 더 좋은 것에 저절로 시선이 가고 욕망이 싹트곤 한다.
나라고 해서 그 욕망을 이겨내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상태창을 팔아먹고 물건을 살 생각이 가득하지 않은가?
“특별한 힘이 정확히 뭐야? 딱히 몸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힘이 막 세지고 그런 건가?
번개를 쏘아내고 그런 거 말이다.
갑자기 판타지물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러다가 사람도 죽이고 막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건 못할 것 같은데.’
내 설레발이었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 되었다.
얻은 신규 능력은 [쾌감증폭]입니다.
“…쾌감 증폭?”
그거 참 입으로 뱉기 머쓱한 단어의 조합이 아닌가?
“정확히 뭔 능력이야.”
내 번개는? 불은? 번쩍번쩍 이런 거 아니었어?
상층부에서 그토록 경계하던 것이라기엔 너무 소박(?)했다.
하지만 AI는 매정하게도 나를 팩트로 두들겨 팼다.
성관계를 할 때 상대방과 본인의 쾌감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숙련도가 상승할수록 더 높은 단계로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
음모는 개뿔.
역시 여긴 현실이었다.
뭐 준다니까 받긴 하겠다만 상층부가 저런 능력을 경계해서 그런 식의 수작질을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형!!! 똥 싸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불쑥 바깥에서 들린 준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도저히 똥 안 쌌다고 우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네.’
나는 후다닥 옷을 정리하고 화장실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 ? ?
요즘 내 최대의 관심사는 AI 상태창을 팔지 말지에 대한 것이었다.
성능이 너무 좋아서 욕심이 나긴 하는데 내가 이 성능 좋은 상태창을 100% 활용하진 못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이걸 팔아서 얻을 수 있는 코인으로 물건을 살 걸 생각하면 더더욱 팔아야 한다는 쪽으로 고민이 굳혀진다.
‘이걸 팔아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은 나한테 엄청 필요한 것들이잖아.’
어쩔 수 없지만 역시 신형은 팔고, 구형을 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후아, 긴장 된다.”
“물 마실래?”
“아니, 화장실 가고 싶어질 것 같아.”
강준과 나는 「우리 학교에 왕자님이 있다」의 최영지 감독과 최희민 작가님과 만나기 위해 미리 약속 장소에 도착한 상태였다.
캐스팅을 확정 짓기 전에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그쪽에서의 제안이었고, 우리들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자리에는 또 다른 주연인 왕자님 후보2 역을 맡은 강태호이라는 배우도 오기로 했고, 비공개 오디션으로 여자 주인공에 캐스팅 된 한민영 배우도 오기로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우리 학교에 왕자님이 있다」를 촬영 할 메인 주연들과 작가, 감독님까지 모두 모이는 날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강준은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형은 긴장 안 돼?”
“당연히 긴장 되지. 연기 보여달라고 할까봐.”
“형, 그 정도면 괜찮다니까? 너무 자존감 떨어지는 거 아니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코인을 탈탈 털어서 올렸기에 더 이상 연기 능력을 올릴 코인이 없었다.
덕분에 여전히 내 연기력은 28.3%다.
다만 시간차를 두고 오른 능력치가 적용이 되는 탓에 겉으로는 준이가 말했던 것처럼 연기에 재능 있는 사람 마냥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쑥쑥 늘어났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하루가 다르게 연기자다운 태가 나기 시작한 나를 보며 미스터리함에 치를 떨었다.
‘그동안 내 수업을 얼마나 대충 들었다는 거냐!!! 너!! 수업 똑바로 정신 차리고 들으란 말이야!! 라고 엄청 소리 지르셨지.’
재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면 결국 수업 태도의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억울한 오해를 낳았다.
“어? 누구 오셨다.”
드르륵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 온 남자는 한 눈에 봐도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탄탄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였다.
‘남주 후보 2번 야구부 에이스 윤대화 역을 맡은 강태호씨구나!’
이 사람의 특이한 점은 실제로 야구를 하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어깨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됐고, 그 후 배우로 전향을 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배우를 해본 경험은 단역이 전부이고 신인 배우라서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다.
“어…정말 잘 생기셨습니다.”
나와 강준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강태호씨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쟤나 우리나 모두 신인인지라 긴장으로 가득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자연스레 침묵이 돈다.
“…….”
“…….”
“…….”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강태호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팬입니다. 혹시 되시면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팬이요?! 정말요? 어우, 그럼요. 당연히 되죠.”
강태호씨가 진짜 우리 팬일 리는 없다.
다만 침묵을 뚫고 무언가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우리 둘 다 적극적으로 강태호씨에게 싸인을 해주려고 했다.
그가 주섬주섬 가방에서 CD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지, 진짜 팬이셨네요.”
“예. 진심입니다.”
우리 데뷔 앨범을 떡하니 내미니 그의 말이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무뚝뚝해 보이고 키 큰 상남자 형님이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다니.
이래서 사람을 보이는 걸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나보다 싶다.
CD에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주니 강태호씨가 매우 소중하다는 듯 가방에 CD를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딱 말했지. 저 친구야! 저 친구야 말로 내가 상상하던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벌떡!
우리들은 자동으로 벌떡 일어나서 들어 온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휴~ 사무실에 웬 꽃이 피었대?”
안으로 들어 온 사람은 총 세 명으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였다.
남자는 아마도 작가님일 테고,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은 여주인공일 거란 짐작이 갔다.
“만나서 반가워요. 실물을 보니까 더 마음이 놓이네요. 최영지 감독이에요. 이쪽은 내 동생 최희민 작가. 여기 이분이 우리 웹드라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남소라씨.”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화장품 뭐 쓰세요? 어쩜 이렇게 다들 잘 생겼지? 미쳤다, 미쳤어.”
최희민 작가는 당당하게 우리가 앉아 있는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특히 내 옆에 딱 달라붙은 최희민 작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관찰해댔다.
문제는 최영지 감독도 상황이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야야 희민아 너 옆으로 나와 봐. 우리 남주들 앵글에 놓고 한 번 보자.”
“싫어! 여기 있을 거야.”
“지금 누나 일하는 중이잖아. 어서! 그리고 네가 거기 있어봤자 오징어밖에 더 되냐?”
“칫!”
최영지 감독의 말에 최희민 작가가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셋이 딱 앉아볼래요?”
“네.”
강태호씨가 옆자리에 앉자 최영지 감독이 두 손으로 네모난 모형을 만들어 우릴 그 안에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저 손이 아마도 카메라일 거다.
“와~ 미쳤다. 미쳤어. 역시 난 보는 눈이 좋다니깐. 내가 딱 원하던 그림이에요. 세 사람 다 너무 잘 어울려요. 이 앵글 어쩔 거야. 팬들 보자마자 다 뒤집어질 걸? 남소라씨, 어때요? 저렇게 잘 생긴 세 남자가 자기 건데.”
“…영광이죠.”
과할 정도로 우리들의 비주얼에 호들갑을 떠는 작가와 감독.
반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여배우 남소라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하지만 감독과 작가는 다른 일을 신경 쓰느라 남소라의 미묘한 태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예의 주시하면서 작가, 감독님과 좀 더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초지일관 매우 유쾌한 태도로 우릴 대했다.
그러다가 최영지 감독이 돌연 표정을 굳히며 우리에게 말했다.
“혹시 다들 우리 작품을 뭐라고 말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사람 있어요?”
“…….”
“…….”
감독의 말에 순간 배우들이 모두 침묵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기엔 좋은 말 들어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말 없는 거 보니 대충 다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맞아요. 뭣도 모르는 신인들이 돈지랄 하고 있다고 분명 망할 거라고 말하고 다니더라고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캐스팅 제의를 받은 건 각자 노리고 있는 게 있어서겠죠?”
아이돌이 연기를 시작한다는 건 항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망작이 될 거라고 수군대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각자의 이유로 캐스팅을 받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예상한대로 되는 인생, 무지 시시하지 않아요? 망하라고 다들 고사 지내는 중인 거 아는데, 난 망할 생각 없어요. 동생도 재능 있고, 나도 재능 있거든. 난 우리 배우 분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해줬으면 해요.”
실장님이나 매니저 누나도 업계에서 이번 작품이 망한 작품이 될 거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신인 감독에 신인 작가가 붙어서 불안한데, 거기에 캐스팅까지 신인에 아이돌로 해놨으니 사람들이 망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무슨 자신감으로 연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아이돌과 배우를 캐스팅했는지 감독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것이다.
‘투자자가 작가 아내라서망해도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오히려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마냥 가벼워 보였던 작가와 감독에 대한 첫인상을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최영지 감독은 계속 이어서 연설을 이어갔다.
결론은 한 가지다.
다들 으쌰으쌰 열심히 해서 우리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는 거다.
‘저렇게 나와 줘야 재밌지.’
주변 사람들이 망작망작 노래를 부르는 게 출연을 하기로 한 ‘배우’ 입장에서 달가운 소린 아니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못할 말이 뭐가 있을까?
지금은 잘 해보자고 으쌰으쌰 했지만, 현장에 가서는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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