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6. 우학왕 (7)
* * *
내가 처음 ‘진해솔’이 되었을 때.
그냥 주변 환경이 나를 아이돌로 활동하게 만들었기에 얼떨결에 따랐던 것 같다.
일에 치여 살았던 30대 아저씨가 아이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탓에 당시에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이리저리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했던 것 같다.
‘땀 많이 흘렸지.’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고, 여유가 생기자 욕심이 생겼다.
낯선 환경에서 ‘돈’이라는 수단이 내 손에 쥐어진다면 어딜 가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돈 좋잖아.’
더불어 내 인생의 대부분이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었으니 더욱 더 그랬다.
내 청춘을 회사에 갈아 넣었고, 그로인해 받은 대가는 ‘돈’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새롭게 얻은 삶에서도 ‘돈’에 벗어나서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나라에서 지원금을 주는 세상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걸 평생 받아먹고 살아?’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했고, 그 이후로는 돈 때문에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덜컥 데뷔를 했고, 제법 인기도 끌었다.
얼굴 덕을 많이 보긴 했지만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온 것이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사랑이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붕 뜨고 좋아서 실실 웃음이 나오더라.
더불어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애정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날 좋아해주는데 들뜨지 않을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점점 돈을 벌기 위해 아이돌 활동을 했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라기 보단, 날 좋아해주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돌 직업을 대했다면 금방 번아웃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가짐이 변하며 아이돌에 애정을 쌓고 있는 중이었던 나다.
‘무소유는 아니지만, 돈의 영향력에서 많이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나는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기쁘다.
콧노래가 나왔다.
엉덩이가 절로 씰룩씰룩 흔들린다.
내 품위를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로또에 당첨 된 거나 다름없는데 이걸 참는다고? 절대 못 참지.’
재채기는 절대 못 참는다고 했던가?
지금 나는 기쁨을 절대 못 참고 있었다.
신형과 교환했던 구형 상태창.
원래 쓰던 것과 똑같은 모양을 갖고 있어서 이 사람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쓰던 것보다 성능은 훨씬 좋았다.
“상점”
음성인식이 돼서 굳이 쿡쿡 손가락으로 누를 필요도 없었고, 자주 드나드는 페이지는 즐겨찾기가 가능해서 바로 접속이 가능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상점에 나와 있는 상품들을 또 다시 구경했다.
‘몇 페이지까지 봤더라? 1,088페이지였나?’
촤라라락!
1,088 페이지로 가서 다시 상점을 뒤진다.
검색 기능도 있지만 그걸 쓸 생각은 없었다.
이곳엔 내가 상상하기 힘든 기능을 가진 아이템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무식하게 다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어.’
아이쇼핑을 하는 과정이 즐겁지 않았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상점을 드나들며 어떤 걸 구매할지 고민을 했다.
그 과정이 내겐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가지 꼭 필요해 보이는 물건들은 구매를 망설이지 않았다.
[류비아 피어싱 (여성용)]
40세 이상 여성만이 착용할 수 있다. 착용자의 노화 속도를 느리게 한다. 운이 좋다면 오히려 젊어질 수도? 다만 수명(건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세일 기간이 끝나기 전에 800코인으로 판매 중인 피어싱을 사야 했기에 가장 먼저 쇼핑한 물건이다.
장모님이 싫다고 하신다면 다른 이에게 선물하면 될 일이었고, 후회하지 않을 만한 성능을 갖고 있었다.
‘피어싱만으로는 시시한데. 뭘 더 선물할까.’
내 여자들에게 적어도 하나 이상의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장모님을 위한 선물로 향수를 구매했다.
이 향수를 한 통 다 쓰면 본인의 체취가 향수의 향으로 바뀐다고 한다.
굳이 향수를 쓰지 않아도 말이다.
이건 나도 혹하는 기능이라서 남자용 향수를 하나 구매했다.
‘여자들한테 싹 다 돌릴까?’
돈도 많이 생겼는데 쩨쩨하게 굴 순 없지.
각자 좋아하는 향기가 있을 테니, 알아 본 뒤에 구매하기로 메모를 해뒀다.
그리고 남은 코인을 어디다가 쓸지 또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11만 코인이나 하는 인식저하 안경과 자잘한 물건들을 구매해서 갖고 있던 코인이 살짝 깎였지만 아직까진 신나게 쇼핑을 해도 안전선이다.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네. 인식저하 안경 성능 실험이나 하러 갈까?’
장모님과 약속부터 잡아야겠다.
타이밍이 제법 좋지 않은가?
코인이 생겨 인식저하 안경을 구매했는데, 때마침 장모님과 데이트를 계획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 : 데이트 하고 싶습니다.]
활동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다들 개인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스케줄은 넉넉했다.
보통 쉬는 날은 연기 연습에 매진하는데, 하루 정도는 임의로 연습을 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모님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장모님♡ : 배가 많이 나와서 밖으로 못 나가. 데이트는 나중에 하는 게 어떻겠니?]
[나 : 아…누나 때문에 하루 시간 빼는 게 불가능하군요.]
[장모님♡ : 응? 어…아무래도 그렇지? 산달이 얼마 안 남았잖아. 꾸준한 운동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바깥에 내보내기엔 너무 위험해.]
말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모님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이유를 눈치 챘다.
[나 : 저 장모님께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다.]
[장모님♡ : 나한테? 주아가 아니라?]
[나 : 우리 데이트 해본 적 없잖아요. 정화씨랑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요.]
장모님의 이름은 남정화.
오랫동안 어머니라는 단어에 잊히고 있던 이름이었기에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내친김에 저장한 이름도 바꾸자.
[정화 : 말도 안 돼!]
[나 : 하루만 시간을 내줘요. 당신도 내 여자잖아요.]
[정화 : 주아는 어떡하고?]
[나 : 정말 방법이 없어요?]
주아 누나에겐 미안하지만, 장모 아니, 정화씨도 내 여자다.
떳떳한 관계로 시작한 사이가 아니라서 더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여자였다.
[정화 :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잖아.”
[나 : 그럼 하루만 시간 내주세요.]
[정화 : 정말 그래도 될까? 주아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싫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거다.
그녀가 나에게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주아 누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
주아 누나에게 미안한 건 맞지만, 그걸 핑계로 정화씨를 소홀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나 : 주아 누나한테는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 생각이에요. 정화씨와의 관계 때문에 주아 누나를 서운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리고 그건 정화씨한테도 마찬가지의 일이에요. 주아 누나 때문에 정화씨를 서운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조금 긴 메시지를 보내니 답장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왔다.
[정화 : 고마워. 시간 내볼게.]
짧고 간단한 답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 되어 있는 글귀였다.
???
상점에서 구매한 인식 저하 안경을 걸치고, 캐쥬얼하게 옷을 입었다.
슬슬 더워지는 여름 날씨는 얼굴을 가리기엔 부족함이 많았지만, 안경을 믿기로 하고 간단하게 모자만 착용했다.
“오, 신기해.”
바깥으로 나오고 길거리를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안경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세계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여자들에게 시선을 받는 세계이다.
그런데 길거리를 걷는 내내 어떤 여자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이런 무관심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이 아니라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성능이 죽여줄 줄 몰랐다.
이 안경만 있으면 정화씨와의 데이트가 문제없이 진행 되리라.
약속 장소에 자리를 잡고 정화씨를 기다렸다.
일찍 나왔기에 핸드폰을 부여잡고 우리 그룹의 팬 반응을 구경했다.
내 생각대로면 약속 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올 게 분명했다.
딸랑♪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낯익은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 온 여성은 바람과 동행을 하고 있었다.
샤르륵~ 하고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내 눈에 고스란히 박혀왔다.
‘미쳤네. 왜 이렇게 예뻐?’
여태까지 정화씨를 만나는 장소는 항상 집이어서 그녀가 제대로 꾸몄을 때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옷도 집에서 입는 편안한 차림새였고, 화장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었다.
솔직히 내가 정화씨였다고 해도 집에서 꾸미지 못했을 것 같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괜히 내가 왔을 때 예쁘게 꾸몄다가 주아 누나에게 괜한 의심을 받을까 겁이 났을 테니 말이다.
정화씨는 내가 먼저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내 인식 저하 안경의 효과 때문인지 적당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런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다고? 미친놈 아니야?’
아무리 잡은 물고기에 밥 안 준다지만, 저런 여자를 마누라로 삼아 놓고 버려둔 전(?)장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만약 전(?) 장인이 그녀를 방치하지 않았다면 절대 내게 넘어오지 않았을 거다.
주아 누나에게 정화씨는 롤모델 그 자체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엄마를 본받고 싶다면서 엄마는 이때 그랬고, 이땐 저랬다는 식의 말을 자주 꺼내곤 했다.
자식에게 ‘엄마’는 대단히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만, 누나에게 엄마는 좀 더 그 이상의 특별함이 있어 보였다.
‘그런 사이인데 내가 끼어들었지. 어깨가 무겁구만.’
두 사람의 사이가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새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화씨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안경을 벗으며 앉았다.
“어머! 먼저 와 있었어?”
“네. 얼굴을 숨기고 있어서 발견 못하신 것 같더라고요.”
“뭐 마실래?”
정화씨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뭘 마시겠다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당연히 돈을 자신이 내겠다는 제스처였다.
“제가 살게요.”
“에?”
나는 그녀를 만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음료와 간단한 디저트를 시켰다.
일어날 땐 착실하게 안경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게 직원은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덤덤하게 주문을 받았다.
‘와~ 진짜 좋다.’
유명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은 없을 거다.
“오늘 데이트는 제가 신청한 거니까 제 뜻대로 따라주세요.”
한 번 인식을 해서 인지 다시 안경을 썼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녀도 괜찮은 거 맞니? 얼굴이 잘 안 가려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거야.”
“아직 그 정도로 유명해지지 않았어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정화씨는 답답한 소릴 한다는 듯 말했다.
“유명한 건 둘째치고서라도 네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끌 거야. 여기 오면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지 않았어?”
평소에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뚫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내겐 안경이 있었고, 오늘은 한 번도 집요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정화씨에게 말했다.
“아뇨. 그런 적 없어요.”
“…정말?”
“진짜라니까요? 나중에 나가서 확인해보세요. 정말 안 쳐다봐요.”
정화씨는 계속 의심을 했지만, 바깥에 나가면 증명 될 일이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템빨이라는 겁니다, 정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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